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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육


<김상규 편집주간> "비범한 교육현장을 기대하며"


교육은 한 사람의 인생을 결정짓는 가장 중요한 사회제도

 

교육제도는 사회제도의 하나이지만, 교육처럼 국민이 많은 관심을 가진 제도는 많지 않을 것이다. 우리나라도 이미 고령화 사회에 접어들었지만 고령화와 관련된 복지제도보다도 교육제도는 국민이나 정치권이나 교육계 모두의 큰 관심 사항이다. 그런 데에는 이유가 있을 것이다. 먼저 교육제도는 다른 사회제도에 비하여 그 소속하는 기간이 가장 길다유치원에서 초등학교, 중학교, 고등학교를 거쳐 대학까지는 18년 정도가 걸린다. 인생의 4분의 3을 살기 위하여 4분의 1을 교육에 투자하는 셈이다. 대학원에 진학을 한다면 교육제도에 소속된 기간은 인생의 3분의 1 이상이 걸릴 수도 있다. 미국의 교육철학자인 존 듀이(John Dewey, 1859-1952)가 교육의 과정에서 아동이 중심이 되어야 된다고 강조한 것을 어느 정도 알 수 있을 것 같다.

 

물론 듀이가 교육기간이 길다고 그런 논리를 세운 것은 아니지만 이미 교육제도를 수료한 한 사람으로서 기간만 생각하여도 지칠 것 같다. 물론 미국의 경우 공교육제도를 신뢰하지 않거나 종교적인 이유로 홈스쿨링을 선택한 학생도 200만명이나 되고, 또 우리나라도 대학진학률이 80%를 넘지만 고등학교 이하 단계에서 중도 퇴학하는 예외적인 경우도 적지 않다다음의 이유로는 교육제도에 소속된 기간에 인생의 대부분이 결정된다는 점이다. 유치원에서 대학에 이르기까지 자녀가 가장 성공할 수 있는 트랙에 놓여 있는 학교를 선택한다. 그 학교를 선택하기 위하여 시간과 물질을 아낌없이 투자한다. 예전에 한국에서 자율형 사립고 정책을 부정적으로 보는 사람이 자기 자녀는 자율형 사립고에 보냈다는 일화가 회자된 적이 있었다.

 

우리는 남들이 하는 행동양식을 객관적으로 평가하지만 자기가 속해 있을 때에는 쉽게 객관성을 잃고 만다. 그런데 교육에 투자하는 시간과 물량은 보상되어 진다는 점을 생각하면 이상할 것은 없다. 주변에서 보아 왔지만 자기 자녀에게 아낌없이 투자한 사람들은 대부분 원하는 대학에 보내는 것을 보았다. 즉 우리나라 교육제도는 투자원금 이상을 회수할 수 있는 수익구조를 가지고 있다고 볼 수 있다.

 


감독을 중시하는 교육행정은 교육문제를 바로 볼 수 없어

 

우리나라는 2000년대 후반부터 학교다양화 정책이 노골화되어 현재 전체 고교 중 특목고와 자율고에 다니는 학생이 약 7만명으로 늘었다. 이러한 숫자는 1980년의 1만명정도(그 당시에 특목고는 체육고와 예술고뿐이었다)에 비하면 20여년 사이에 7배가 증가하였으므로 매우 큰 폭이다그러나 영국이나 미국, 일본을 비롯한 많은 나라에서 의무교육기관인 초등학교와 중학교를 중심으로 학교선택제를 도입하고 확대해 가고 있는 것과는 달리, 우리나라는 고등학교에서 제한적으로 선택제 학교를 늘려가고 있으므로 교육평등의 관점에서 본다면 그리 비판할 것은 못된다


그런데 이 7만명이 교육의 중요한 부분을 독점해 간다는 점이 문제이다. 최근 한국개발원의 연구에서도 나타났지만 이러한 현상은 갈수록 심각하게 될지도 모른다. 다양화 정책이 화제가 되었으니 각국의 학교 선택제를 간단히 소개하고자 한다영국은 잉글랜드와 웨일즈, 스코틀랜드, 북아일랜드 등 4개의 나라로 구성되어 있으며 네 개 나라의 교육제도가 비슷한 점이 많기는 하지만 다른 점도 있다. 대처 수상 재임시절인 1988년의 교육개혁법(the Education Reform Act 1988)에서 학교 선택제를 도입하였는데, 부모는 자녀가 입학할 학교를 어느 지역이나 선택을 할 수 있다학생들을 많이 모은 학교는 많은 예산이 보장되므로 더 발전하고 학생들에게 외면당한 학교는 학생 수가 감소하며 폐쇄되게 된다


그야말로 학교간의 무한 경쟁이 이루어지고 있다. 그러나 미국의 경우에는 원칙적으로 통학구역의 학교에 입학한다. 선택제 학교로는 차터 스쿨(Charter School)이 있으며, 영국에는 없는 교육 바우처 제도가 도입되어 있다현재 13개주 정도가 도입하고 있는 교육 바우처를 받기 위해서는 두 가지 조건이 충족되어야 한다. 한 가지 조건은 현재 다니는 학교가 일정 등급 이하의 평가를 받아야 한다. 그러므로 좋은 평가를 받고 있는 공립학교에 다니는 학생은 원칙적으로 교육 바우처를 받을 수 없다. 또 하나는 바우처를 신청하는 학생의 가계소득이 일정금액 이하이어야 한다. 미국의 경우 '연방 빈곤 가이드라인'(the federal poverty guidelines)이 있는데 교육 바우처를 도입하는 주는 이 가이드라인을 기준으로 하여 바우처 대상 학생을 정하고 있다.

 

예를 들면 루이지아나주(Louisiana)의 경우에는 첫 번째 기준으로 공립학교가 일정 기준 이하 등급을 받아야 하고, 두 번째 기준으로 가계소득이 연방 빈곤 가이드라인의 250%를 넘지 않아야 한다. 2012~2013학년도의 경우 루이지아나주의 경우 교육 바우처 대상은 9831명이었는데 실제 사립학교에 진학하는 학생은 약 반수인 4954명이었다고 한다. 물론 주변에 선택할 사립학교가 없어 지원율이 낮은 것도 있겠지만 소득이 낮은 가정에서 공립학교보다 비싼 사립학교에 자녀를 보내는 것은 쉽게 결정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니므로 주저할 수도 있을 것이다.

 

미국이나 영국 등 서구 각국의 경우에 사립학교가 비싸고 공립학교보다 좋다고 알려져 있는데 미국은 보딩 스쿨이라는 지도자 자녀들이 보내는 사립학교를 제외하면 공립학교와 큰 차이가 없고 오히려 가톨릭 계통의 학교의 경우 자선적인 교육을 하는 경우가 많다고 한다우리나라야 중학교 무시험 정책이나 고등학교 평준화 정책을 국가가 추진하려고 하였을 때 사립학교의 비율이 공립학교보다 높았으므로 사립학교의 참여 없이는 목적에 맞는 결과를 얻을 수 없어 반강제적으로 공교육의 틀에 사립학교를 넣어 마치 공립학교처럼 다루었다. 중학교 무시험 정책이 시작된 1960년대 후반에는 사립 중학교의 비율이 50%를 넘었고 고교평준화 정책이 시작된 1970년대 중반에도 사립 고등학교의 비율이 60% 전후였다.

 

사립학교의 협력 없이는 국가가 원하는 정책이 추진될 수 없었던 배경을 고려한다면 지금부터라도 사학의 자주성을 어떻게 보장할 것인가? 교육의 공공성이 사립학교에서 잘 확립될 수 있도록 하기 위해서는 사립학교의 어떠한 특성을 보장하고 무슨 문제점을 시정해 갈 것인가에 대하여 행정권자의 시야가 아니라 교육적 관점에서 검토하여야 한다.

 

정치권을 중심으로 기회가 있으면 사립학교 정책을 이념에 따라 바꾸고 몇 개 학교법인의 문제가 마치 모든 사학의 문제처럼 과장 홍보하여 행정권을 행사하는 구시대적인 방법은 이제 변할 때가 되지 않았는가. 감독을 중시하는 교육행정으로는 교육을 바꿀 수도 없고 교육의 문제를 정확히 볼 수도 없다. 신제도경제학을 교육학에 접목하는 데에 역할을 한 정치, 시장 및 미국의 학교(Politics, Markets America"s Schools)의 저자 Chubb(John E. Chubb) Moe(Terry M. Moe)가 그렇게 주장하지 않았는가. “현존 제도는 그 자체의 문제이므로 문제를 해결할 수 없다.

 

국가와 지방의 역할분담

 

일본은 2002년에 공립초등학교와 중학교 선택제를 도입하였다. 당시 선택제의 대상으로 한 학교가 의무교육을 하는 학교이므로 전국 누구나 평등한 교육을 받아야 하는 의무교육을 선택하도록 하면 가진 자는 좋은 교육을 받고, 가지지 않는 자는 나쁜 교육을 받으므로 교육의 격차가 더 확대 된다는 것이 비판론자들의 논리였다. 이러한 논리는 우리나라의 비판론자는 물론 영국의 학교 선택제 비판론자도 마찬가지이다.  정책의 내용은 아주 다른데 교육학자들의 비판론의 내용은 일치한다는 게 조금 이상하지만 학교선택제의 전제가 되는 이데올로기가 신자유주의이므로 동일한 비판론이 성립되었다고 보는 것이 혼란스럽지 않을는지도 모른다.

 

그런데 일본에서 학교 선택제를 도입하였지만 참가하는 지방자체단체는 그리 많지 않으며 최근에는 주민들의 주장에 밀려 선택제를 유보하는 지자체도 두세 곳이 있다. 그러나 국가의 주도에 의하여 제도화는 되었지만 정책 선택재량은 지방교육행정이 가지고 있으므로 당연히 주민의 선거를 통하여 선출되는 지자체의 장은 주민의 의견을 존중할 수밖에 없다. 일본의 교육행정이 수직계열 행정이라는 비판이 있기도 하지만 우리나라의 경우 때로는 국가가 너무한다고 생각될 때가 많다.

 

고등학교 이하 각급학교의 설치 및 운영은 시도교육청의 권한사항임에도 너무 관여가 심하다. 지방교육재정도 시도교육청이 자율성을 가지는 일반재원의 비율이 크지 않다. 일본의 경우 의무교육비 국고부담금 제도가 있어 국가가 의무교육기관에 종사하는 교직원의 급여 중 3분의 1을 의무부담하지만(2005년까지는 2분의 1이었지만 지방분권의 영향으로 비율이 축소되었다), 우리나라는 국가가 교육에 대하여 지는 의무규정은 없다. 국가와 지방의 적절한 역할분담이 필요한 때이다.

 

현장중심의 교육행정 중시

 

현장론의 전문가인 와세다대학 엔도(遠藤功) 교수는 저서 현장론 비범한 현장을 만드는 논리와 실천(201411월 출판)에서, 자신이 약 4년간 100여 곳의 현장(교육현장이 아니라 산업현장이다)을 방문하였는데 비범한 현장은 10% 정도밖에 없었다고 한다. 그리고 나머지 90% 80%는 평범한 현장이고 나머지 10% 이하는 평범 이하의 현장이었다고 소개하고 있다.

 

그런데 비범한 현장은 어떤 현장인가? 엔도 교수는 비범한 현장이란 자율신경이 잘 펼쳐져 있으며 현장의 지각센서가 최대한 기능하고 현장으로부터 새로운 가치가 계속적으로 생겨나는 곳이라고 정의하고 있다. 즉 비범한 현장이란 구성원들이 수동적이고 자기 방어적인 곳이 아니라 새로운 것을 창출하고자 약간의 위험부담이 있더라도 노력하는 활성화된 조직이라고 할 수 있다  

 

우리는 교육 현장이라는 용어를 자주 사용하고 있다. 우리 아이들이 공부하는 학교를 사람들은 교육현장으로 총칭한다. 교육현장은 학교만 있는 것이 아니라 공원도 교육현장이고 체육관도 교육현장이 될 수 있고, 길거리도 교육현장이 될 수는 있다. 그런데 우리가 왜 학교를 교육현장으로 총칭하는 것일까? 그건 교육이 이루어지는 가장 중요한 공간적 가치가 학교 안에 있기 때문일 것이다. 현장은 학생과 교직원과 학부모와 지역사회로 구성되는 집합적 공간이다.

 

교육을 정의할 때 개인의 완성과 사회와 국가의 유지발전 등으로 대체적으로 정의한다. 이러한 정의는 서구에서도 별로 다르지 않는 것 같다. 학교라는 현장에서 개인이 완성되고 사회와 국가의 유지발전에 필요한 인격체가 만들어 진다는 점이다. 그래서 우리에게 현장은 매우 중요하다. 그런데 교육행정은 현장을 무시하기 쉽다. 민주주의가 잘 기능하는 정치구조에서는 가장 말단 조직의 행동이 매우 중요한 기능을 한다.

 

그런데 우리나라의 교육행정 관료성은 현장을 종종 무시한다. 학교 내에 문제가 생기면 그건 학교의 문제가 아니라 학생과 학교와 부모와 지역사회와 교육행정이 해결해야 하는 공동의 문제이다. 그런데 현장과 본사()는 아주 거리가 멀다. 누구나 휴대폰을 가지고 있고 다른 나라보다 인터넷 환경도 좋은 나라에서 무척 거리가 멀다는 점이다. 왜 거리가 먼가? 그것은 관리주의 행정이기 때문이다. 학교에 문제가 생기면 공동해결을 모색하는 것이 아니라 사고발생에 대한 책임을 묻는다. 학교는 일단 알려지지 않도록 하여야 한다.

 

문제를 공동사고로 해결해 가는 것이 아니라 덮어 버린다. 프랑스 사회학자 듀르켐(Emile Durkeim, 1858-1917)이 말하지 않았던가. “개인은 사회를 필요로 하고 사회는 개인을 필요로 한다. 사회가 개인을 억압하거나 축소하거나 왜곡하지 않고 반대로 개인을 성장시켜 진정한 인간으로서 존재할 수 있도록 하는 것이 목적이다고 교육의 사회적 기능을 역설한 것을. 교육문제는 학교현장에서 일어나는 것이 일반적이다.

 

학교폭력, 따돌림, 학교 내 흡연, 등교하지 않는 학생, 장기결석 등 학교현장은 늘 문제들로 가득하다. 청소년이 자라는 데에 왜 문제가 없겠는가? 한 사람의 인간으로서 성장하는데 왜 갈등이 없고 다툼이 없겠는가? 그런데 우리 교육정책은 언젠가부터 학교 현장에서 일어나는 문제들을 나쁘게 간주하는 습관이 생겼다.

 

시스템의 문제를 점검하기도 전에 학교에 책임을 묻는 교육적이 아니라 비교육적으로 대우한다. 그래서 학교는 언젠가부터 사고를 덮어버리는 자율신경계가 생성되어 있다. 문제는 노출하여야 하고 해결하면서 우리 아이들은 어떤 청춘의 시련을 겪고 있는지의 답을 구하여야 하는데 불이익이 무서워 그냥 덮어버린다면 문제는 더 확대되어 갈 것은 불 보듯 뻔하다. 교육현장이 열린 공간이 아니라 닫힌 공간으로 변해가게 되는 것이다.

 


교육개혁은 교육현장의 문제에 대한 처방전

    

교육개혁은 권력의 이념 달성이 아니라 교육현장의 문제에 대한 처방전이 되어야 한다. 제도학에서 말하는 것처럼 제도는 인간의 행동을 제약하기도 하고 통제하기도 한다. 그러므로 사회제도로서 교육제도도 인간의 행동을 제약하는 본질이 있다. 그런데 교육개혁이 학교현장의 교육문제를 얼마나 고민하고 만들어지는가에 대하여 정책주체는 냉정하게 반성할 때이다.

 

세계는 글로벌화되어 국경의 담장이 낮아지고 국가 간 경제적 거래행위는 이미 많은 제약이 풀렸다. 교육정책에 관여하는 관계자들은 이 시기의 교육의 문제에 대하여 어떤 현상인식을 하고 있는 것일까 궁금하다. 개인적인 견해를 얘기하자면 지금 교육은 국가의 교육에 대한 관여를 서서히 줄여갈 때이다. 지방에서 이루어지는 교육은 교육청의 손에 넘겨주어야 한다. 세계에서도 유래 없는 교육감 직선제를 하는 나라에서 어떤 학교를 지정취소하느니 안하느니 하면서 국가와 지방이 서로 행정력을 낭비하는 사례가 있겠는가. 지방의 교육문제를 국가기관이 간섭하는 것이 과연 올바른 것인지를 생각하여야 한다. 지금부터 국가기관이 할 역할은 크게 두 가지라고 본다.

 

한 가지는 글로벌 시대에 국제경쟁력을 가지기 위한 교육은 무엇인지를 걱정하여야 한다. 실증된 것은 아니지만 미국이 1983년에 학생들의 학력저하 문제에 깜짝 놀라 유능한 학자들이 참여하여 발표하였던 위기에 선 국가(A Nation at Risk)가 현재와 같이 미국을 강하게 만들었는지도 모른다. 또 한 가지는 학생들이 전국 어디서도 차별 없이 동등한 교육을 받을 수 있는 조건을 만들어 주는 것이다.


전국의 동일한 교육조건을 만들어주는 것은 국가만이 할 수 있는 역할이기 때문이다학교 내에 교육문제는 사회문제화되는 경향이 매우 강하다. 즉 균등하지 못한 교육은 균등하지 못한 사회를 만들게 된다. 균등하지 못하여 생기는 사회적인 비용을 우리 후손들이 부담해야 하는 사회적 비용이라는 점을 생각한다면 좋지 않는 유산이 대물림되지 않도록 하는 것도 우리가 져야 할 사회적 책임이다. 비범한 현장을 만들기 위한 교육개혁이 필요한 때이다.


MeCONOMY Magazine June 20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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