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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


여자정신대의 일상과 노동(하편)

【박광준 일본 붓쿄대 교수】여자정신대의 기억과 진실(7편)

배고픔의 고통

 

배고픔은 대원들이 큰 고통이었고, 특히 후지코시의 경우가 그러하다. 1944년 후지코시 직원의 하루 식비는 여자 30전(아침 8전, 점심 12전, 저녁 10전)이었는데, 음식이 매우 빈약했다고 한다. 그러나 [삼시 세끼 주는데 왜 배가 고파?] 라고 배고픈 줄은 몰랐다고 명확히 말하는 대원도 다수 있다. 상대적으로 부유했던 학교동원자에 비해 지역동원자는 식사에 대한 불만을 덜 가졌을 수도 있다.

 

같은 시기 같은 공장에서 일했던 일본정신대의 문집에도 배고픔의 언급이 많다. 배급량이 너무 적어 아사와 병사가 속출했으며, 1942년부터는 학교운동장과 테니스장을 텃밭과 고구마밭으로 만들어 학생들이 키운 파나 당근으로 된장국을 만들어 먹었다. 배고픔과 영양결핍으로 노동현장에서도 노동할 수 없는 대원이 속출했다고 한다.

 

 

조선정신대의 배고픔 증언을 요약한 그것이 다음이다. [항상 배가 고팠다. 식사는 약간의 밥과 된장국에 단무지 한두 조각, 혹은 작은 주먹밥(솔방울만 한 것 두 개), 아니면 작은 삼각 빵이었다. 배가 고파 밖에 나가서 가지고 있던 옷을 콩이나 밥으로 바꾸어 먹었다. 공장노동자에게 빨랫비누를 주고 대신 음식을 받아 배를 채우기도 했다. 집이 가난해서 혹은 집에서 걱정할까 봐 음식 부탁을 하지 않았다는 대원도 있지만, 많은 대원이 집에서 고구마나 미숫가루 등을 부쳐 받았다.

 

소녀들에게 배고픔은 큰 리스크였다. 외부인과의 만남이 잦아졌고 그것이 공장을 탈출하게 하는 요인이 되기도 했다. 또한, 그 때문에 일본인과의 갈등도 생기고 멸시받기도 했다. 식당에 남겨진 음식이나 버려진 음식을 뒤지는 행위를 일본인들은 극도로 멸시하는 경향이 있었다. 공장 주변의 미나리를 베어와서 먹거나 밭에서 무 등을 캐어 먹기도 했다. 그 때문에 외출 금지가 행해지기도 했다.

 

그런데, 밭작물 훔치기에 대해서는 내부의 비판적 지적도 있었다. 한 대원은, 일본은 훔치기를 큰일로 취급하므로, 보통은 엄두도 못 내는 일이었고 일부 대원만의 짓이었다고 말한다. 일본인에 대한 인상은, [법만 알고 국가만 아는 사람, 정직하지만 너무 독한 사람]이다. 일본 식량 배급제는 1940년부터 시행되었는데 농수산물도 철저히 공출했고, 생산자에게 가서 직접 식료를 사는 행위는 암시장거래자(식량 관리법)로 강력히 처벌되었다.

 

당시 토야마 주식배급량은 성인 1일 2.1홉(300그램. 감자 등 대용식 포함)이었는데, 필자가 재판기록을 살펴보니 1945년 6월 감자 약 770g(1엔 50전 상당)을 훔친 70세 노인이 기소되어 징역 1년 판결을 받은 사례가 있다. 정말 독한 사회였다.

 

재일조선인들과의 접촉은 후지코시의 경우 두드러지게 많았다. 토야마에는 조선인이 많이 살았다. 징용온 조선인들과 어울리는 기회도 있었다. 정신 대원이 노래를 불러 주면 좋아하다가도 [저 어린것들을 여기까지 데려오다니, 에이 나쁜 놈들] 하면서 분개했다고 한다. 토야마는 매춘산업 규모가 큰 곳이었다. 해방 직전 토야마 유곽에서 결성된 애국부인회 단체가 9개나 있을 정도였다.

 

대원중에는 공장을 탈출한 후 조선인 거주지역에서 일시적으로 매춘하다가 공장으로 돌아온 예도 있고, 탈출하여 함바(飯場. 노동자 간이숙식소)에서 일하다 붙잡혀 돌아온 예도 있다. 조선인들과의 접촉은 대원들 외출 시에도 있었고 기숙사 담을 사이에 두고 음식과 옷가지 등을 거래하기도 했다. 논우렁이를 잡아 조선인에게 삶아 달라고 부탁하기도 했다. 옷가지 하나에 밥은 딱 한 덩이만 주더라고 하면서, 조선사람같이 지독한 사람은 없다고 회고하기도 한다. 스웨터가 11개 있었는데, 그런 방법으로 모조리 식량과 바꾸어 먹은 대원도 있다.

 

노동내용과 노동시간

 

대원들은 생활지도, 초기작업훈련, 현장에서의 기계 조작 등으로 순차적인 예비훈련을 받고 노동현장에 투입되었다. 공습대피 훈련도 있었다. 노동시간 정부지침은 '하루 10시간 원칙, 12시간을 넘지 않을 것'이었다. 일본 공장법은 여자노동자에 대해 1927년부터 심야 노동 금지, 하루 10시간 노동을 규정했다.

 

그러나 전쟁이 확대되자 규정을 완화하여 1943년부터는 여자노동시간 상한을 12시간(잔업 포함)으로 늘리고, 여자노동자가 일하는 군수공장은 공장법 적용대상에서 제외했다. 그러므로 조선정신대는 야간노동이 허용되어 있었고, 하루 12시간까지 노동이 가능한 환경하에서 일했다. 조선정신대는 최저연령이 12세였지만 14세 이상도 적지 않았고, 또 체격도 다양했으므로 각 사업장은 나이나 체격 등을 고려하여 작업내용을 정했던 것 같다.

 

 

토쿄마사는 방적 노동이었으므로 기초훈련 기간도 짧았다. 작업에는 크게 정련(精練)과 정방(精紡)이 있었는데, 정련이 더욱 힘든 작업이었다고 한다. 조선정신대 중에는 힘든 노동인 정련은 조선정신대가 했다는 증언이 있고, 일본정신대 기록에는 반대로 정련은 일본인이 하고 조선정신대는 정방 작업을 했다는 증언도 있다. 방적 공장은 야간노동이 상대적으로 많았다. 공장은 3교대로 가동되었는데, 가장 이른 반은 [오전 4시 반부터 12시-1시]였다고 한다.

 

야간이나 근로시간 중에도 공습대피가 잦았다는 것은 모든 작업장에서 공통적이었다. 공습으로 인한 사망과 부상, 피난 도중의 부상도 있었다. 전쟁 말기에는 공습 때문에 근로가 거의 불가능했다고 말하기도 한다. 토쿄마사는 기숙사가 불타 대원들 소지품이 소실되기도 했다. 작업 중에는 헌병 같은 감독자가 있고 그들이 매우 무서웠다는 증언은 조선정신대나 일본정신대에 공통으로 많다.

 

일본학도대의 기록에는 조선정신대가 감독에게 매 맞는 것을 보았다는 사례가 있다. 한편 조선정신대 진상조사위의 구술에는 다음과 같은 증언도 있다. [공장 내에서는 헌병이 감시하면서 다녔는데, 일본인들은 쉬다가도 헌병이 오면 다시 일했으나, 우리는 일하다가도 헌병이 오면 매달려서 이야기해달라고 조르기도 했다.(어리기 때문에) 우리를 잘 봐주었다.]

 

일본의 노동강도는 매우 강했다. 하루하루 자신의 노동량(흔히 노르마라고 불림)이 정해져 있었다는 것은 대원의 일관된 증언이다. 비교적 숙달된 대원은 작업속도가 늦은 대원을 돕기도 했다. 임금은 기본급 위에 실적에 따른 수당이 지급되는 체제였다. 쉬는 시간이 거의 없고 계속 서서 일하는 등 노동이 매우 힘들었다는 증언이 많다. 하지만 그런 어려움에도 불구하고 노동 그 자체는 비교적 잘 수행했던 것으로 보인다.

 

물론 선전의 일환이겠으나 회사가 조선정신대원 노동에 만족한다는 일본 신문기사도 더러 보인다. 후지코시는 다음과 같이 기록했다. [정신 대원은 우수한 인재가 발탁되어 왔기 때문이기도 하겠지만, 작업능력은 일본인보다 조금도 떨어지지 않았다. 6개월을 필요로 하는 밀링작업의 숙련을 단 3개월에 수료하는 대원도 많았다.]

 

병원 이용

 

정부지침에 의하면 대원의 건강관리를 위하여 공장에 공장 의사, 그리고 될 수 있는 대로 산부인과 의사를 맡기어 보건지도 등을 행할 것을 규정하고 있다. 후지코시는 공장 안에 큰 병원을 가지고 있었다. 미츠비시 역시 공장 내 병원이 있었다. .

 

공습 공포와 강도 높은 노동, 질병 등으로 일상생활이 불가능한 대원이 발생했다. 미츠비시의 경우, 질병에 걸린 10여 명을 인솔교사 손상옥이 데리고 귀국했다. 불면증도 있었다. 미츠비시소송 원고는 작업 중에 다치기도 하고 불면증도 있어서 자신을 포함한 3명의 대원이 한동안 위생실에서 잠을 잤다고 한다. 후지코시로 동원된 경기도대원 중에는 장티푸스로 사망한 경우가 1명 있었던 것 같다.

 

장티푸스 원인은 공장 밖의 생미나리를 먹었기 때문이라고 다수 대원이 말한다. 장티푸스에 걸린 사람은 상당수 있었다. 어느 대원은 정신을 차리니 자신이 병원에 누워 있었고, 정신을 잃었기 때문에 입원시켰다는 말을 들었다. 아파도 쉴 수 없었다는 증언이 많다. 그 점이 큰 고통이었다. 아프다고 말하면 꾀병 부리지 말라는 폭언을 듣기도 했다. 폭언을 듣고 서럽게 우는 정신 대원을 보았다는 일본인 증언도 있다.

 

반면, 생각보다는 긴 시간을 병원에 입원한 때도 있다. 축농증 수술을 받고 2주간 입원한 후지코시 대원도 있고, 미츠비시 동원자 중에는 페인트 독으로 인하여 눈 수술을 받고 장기간 입원한 사례가 있다. 그녀는 입원 중 한복을 입고 있어서 간호사나 환자들 사이의 인기인이었다고 말한다. 작업 중에 병원 가기 위하여 외출하는 때도 있었던 것 같다. 한 대원은 자신이 신용이 높았기 때문에 병원 간다고 하면 쉽게 허락해 주었는데, 진료가 목적이 아니라, 병원 오가며 중간에 밭에서 감자나 무를 빼 먹기 위해서였다고 말한다.

 

꾀병으로 병원 신세를 진 예도 있다. 진상규명위 구술에 의하면, [배고파 죽을 판이니 데모라도 하자]고 5명이 이불속에 겹쳐 누워 오래 있었다. 체온이 40도가 되었다. 구급차가 와서 모두 병원으로 실려 갔는데, 의사는 [이렇게 열이 나는데 왜 인제야 데려왔느냐, 조선인들에게 안 좋은 일이 생기면 일본사람 얼굴이 뭣이 되느냐]고 손으로 바닥을 치면서 공장 선생들을 나무라더라고 한다.

 

입원하니 병원 밥이 공장 밥보다 좋아서 퇴원하지 말자고 서로 약속하여 몸이 아프다고 계속 말했지만, 사흘 후 퇴원하라고 해서 기숙사로 돌아왔다.(친구들은 저희는 호강하고 우리는 대신 일 하느라 힘들었다고 불평했다고 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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