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3월 13일) 자 뉴욕타임스에 흥미로운 기사가 실렸다. 「더블린 펍 투어, 하지만 술은 마시지 않아요, A Dublin pub crawl, but hold the booze」라는 제목부터가 눈길을 끈다.
더블린은 아일랜드의 정치, 경제, 문화의 중심지다. 많은 문학가가 배출된 도시로 유명한 데다 활기찬 펍 문화와 전통 음악으로도 잘 알려져 맥주잔 부딪히는 소리와 취기가 떠오른다. 그런데 이제는 술을 마시지 않는 사람들이 늘고 있다 하니 무슨 까닭일까?
기사를 읽고서 알겠다. 그들이 술을 마시지 않는 것은 단순한 유행이 아니라 건강과 음주 습관을 둘러싼 문화적 변화를 반영하고 있었다. 다시 말해 술을 덜 마시지만 사람들은 여전히 바에 가서 친구를 만나고, 음악을 듣고, 분위기를 즐긴다. 결국 술이 중심이던 공간이 이제는 사람과 분위기 중심의 공간으로 바뀌고 있다.
생각해 보면 우리 사회도 크게 다르지 않다. 한때 술은 “마실 줄 아는 사람”의 상징처럼 여겨졌다. 소주병이 줄지어 서야 친분이 쌓였고, 끝까지 버티는 사람이 강한 사람으로 통했다. 필자 역시 젊은 시절에는 그런 분위기 속에서 술을 꽤 마시던 축에 속했다.
그러나 요즘은 그런 풍경을 보기 어려워졌다. 회식 자리에서도 예전 같은 폭음 문화는 점점 사라지고 있다. “적당히 마시고 집에 가자”는 말이 어색하지 않다. 말하자면 술의 권위가 내려온 시대라고 할까.
더 흥미로운 변화도 나타나고 있다. 요즘 일부 도시에서는 40세 이하만 출입할 수 있는 ‘혼술집’이 뜨고 있다고 한다-들리는 소문에는 제주도에서부터 시작되었다.
혼술집은 보통 주방을 운영하지 않는다. 일반 술집이나 식당에서처럼 손님이 식사 하느라 한 자리를 오래 차지하지 않도록 하기 위해서다. 대신 기다란 바 테이블이나 작은 좌석이 있고, 낯선 사람들이 자연스럽게 말을 걸고 대화를 나누는 공간을 조성한다. 처음 만난 사람과 한두 잔의 가벼운 술을 나누며 이야기를 나누는 곳. 말하자면 술집이면서도 일종의 사회적 살롱이다.
이 현상을 어떻게 바라봐야 할까? 첫째, 술의 기능이 바뀌고 있다고 봐야 한다. 예전에는 술 자체가 목적이었다면 이제는 술이 대화를 돕는 도구로 자리 잡고 있다. 술의 양보다 공간과 분위기가 더 중요해졌다. 그래서 무알코올 칵테일이나 저도주가 인기를 끄는 것도 같은 흐름이다.
둘째, 고립의 시대가 만들어낸 새로운 사교 방식일 수도 있다. 사람들은 하루에도 수십 번 메시지를 주고받지만 정작 새로운 사람을 만날 기회는 줄어들었다. 혼술집이나 작은 바 문화는 이런 고립감을 완화하는 역할을 한다. 낯선 사람과 가볍게 대화를 나누는 공간이 다시 필요해진 것이다.
하지만 이런 문화가 바람직하게 발전하려면 술보다 사람이 중심이라는 원칙이 지켜져야 한다. 술이 적당한 윤활유가 될 수는 있지만 여전히 과도한 음주로 흐른다면 새로운 문화는 금세 옛 풍토로 돌아갈 수 있다. 그리고 배제의 문화가 되지 않도록 해야 한다. 특정 연령층만 출입할 수 있는 공간은 신선한 시도일 수 있지만, 그것이 또 다른 장벽이 되지 않도록 균형을 잡을 필요도 있다.
천자문의 “접배거상(接杯擧觴, 술잔을 받들어 올려 예를 갖춘다)”이란 구절처럼 술자리에서는 예의가 먼저다. 공자는 “술의 양은 정해져 있지 않지만, 어지러울 정도로 취하지는 않는다(酒無量 不及亂)”라고 했다. 사람마다 주량은 다르니 몇 잔이라는 규칙은 없지만, 술로 인해 이성을 잃거나 체면을 잃어서는 안 된다는 말일 것이다.
술은 예나 지금이나 사람을 흐트러뜨리는 것이 아니라 사람 사이의 분위기를 부드럽게 만드는 도구다. 그것이 펍이나 우리네 술자리가 가지는 본래의 기능일 것이다. 술이 줄어든다고 해서 충분히 이야기를 나누고 웃을 수 없는 것이 아니다. 술의 양보다는 사람 사이의 품격이 좋아야 좋은 술자리가 만들어지니까 말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