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우리나라의 패션업계를 세계무대로 이끌어 냈던 작은 거인 이신우 씨가 다시 돌아왔다. 그녀의 컴백무대에는 각 언론과 연예계가 큰 관심을 보였다. 열악한 국내시장보다는 해외시장에서 가능성을 열고자 했던 그녀에게 97년은 기억하고 싶지 않은 아픈 추억으로 자리잡았다.
우리 국민 모두가 한데 마음을 모았던 IMF. 당시 국내시장에서 패션업을 확장시켜 가던 그녀에게도 어려움이 닥친 것. 사업을 살려보고자 가진 것은 모두 은행에 담보로 제공했다. 그러나 대출을 거부당해야 했다. 몸 안에 동맥이 막히면 소생이 힘들 듯 사업도 자금융통의 어려움을 겪으면서 눈앞에서 다른 사람들의 손으로 돌아갔다. 분신 같은 이름 ‘이신우’라는 브랜드가 이리 저리 분해되는 것을 보는 것은 감당하기 힘든 고통이었다. 돈이 없으니 외국을 나갈 수도 없었다. 엎친데 겹친 격으로 출마해서 당선이 됐던 남편이 선거자금 문제로 구속됐다. 하루하루를 견디는 것이 삶의 목표였고 시간이 약이었다. 그렇게 힘든 과정을 겪어 내고 ‘2006서울컬렉션’을 준비할 때 남편은 병원 중환자실에 있었다. 아무런 말도 못하고 누워만 있는 남편은 그녀가 다시 일어서는 걸 누구보다 원했다.
“중환자실에 누워서 아무런 말도 못하는데 제가 병원에 가서 곁에 가만히 앉아서 보고 있으면 그래요. 얼른 가서 디자인 하라고. 제가 섭섭해 할까봐 허공에다 ‘일’이라고 쓰면 맞다고 하면서 빨리 가라고 했어요. 남편이 병원에 있을 때 ‘2006서울컬렉션’을 했는데 끝나고 가니까 눈빛으로 묻더라고요. 잘 했냐고? 너무 잘 했다고 하니까 서투른 글씨로 ‘불 같이 일어날 거야’라고 쓰는 거예요. 제가 일어난 것을 보지도 못하고 얼마 지나지 않아 영영 가셨죠.”
남편의 빈자리는 너무나 컸다. 수도 없이 한강다리를 오가고 매일 밤 한강에 나가 하늘을 보면서 걸었다. 잊는 거 외엔 다른 방법이 없었다. 밤에는 밤하늘을 보고, 낮에는 낮 하늘을 보면서 그렇게 하루하루를 보냈다. 그렇게 1년을 걷고 난 후에는 자전거를 탔다. 자전거를 타고 돌아다니면서 정신도 맑아지고 일에 대한 욕심도 생기기 시작했다.
그녀가 선보인 이번 컬렉션은 ‘소년의 국가’다. 영감(inspiration)은 일본 드라마 ‘언덕 위의 구름’에서 얻었다. 2009년에 방영했던 일본의 대하드라마로 3년 동안이나 방영됐던 대작이다. 일본 메이지 시대의 세 청년이 폐허가 되어 아무 것도 없는 시점에서 일화가 시작되는데 아무 데도 기댈 곳이 없는 힘든 상황에서 오직 앞만 보고 달려 언덕을 올라간다. 그때 파란하늘에 하얀 구름이 한 점 떠 있는 것을 보고 무작정 걷는다. ‘그것만 보고 걸었다’는 내레이션과 아름다운 영상과 함께 펼쳐지는데 매우 감동적이었다.
“박윤정 디자이너가 추천을 해줬어요. 심심할 때 보라고 하면서. 그런데 그 내용에 너무나 제 처지랑 비슷한 거예요. 왜 보라고 했는지를 알겠더라고요. 쉬는 동안 딸을 도와준답시고 기술고문을 맡았었는데 시간이 날 때마다 작품을 하나씩 만들었어요. 그걸 이번에 선 보인건데 나중에 딸이 그러더라고요. 제가 자꾸만 뭔가를 만들어서 걸어두더래요. 다른 것은 전혀 못하는데 디자인을 시키면 너무나 잘하고요. 그래서 컴백무대에 다시 서게 해드려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데요.”
그녀는 옷 하나를 만들어도 그냥 만드는 법이 없다. 순간적으로 떠오른 영감이 아무리 좋다고 해도 다시 생각하고 정리한다. 그렇게 오래 생각하다보면 이것을 작품으로 만들어야겠다는 생각이 떠오른다. 그때 옷을 만든다. 그래서 후배들에게 해주고 싶은 말이 있다. ‘항상 겸손하라’는 말이다. 그 말의 의미는 세월이 흐르면 자연히 알게 된단다. 무언가를 만들 때 쉽게 생각하고 즉흥적으로 떠올랐다고 해서 기발한 아이디어가 있다며 신나서 하는 것은 취기라고 생각한다는 그녀는 감동이 없는 작품은 죽은 제품이라고 말한다. 즉흥적으로 떠올라 만들어낸 작품은 한 번의 눈길은 줄지 몰라도 감동을 주진 않는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떠오른 영감을 되씹어 보고 오랫동안 뜸을 들여 수십 번, 수백 번을 생각하다 보면 정말로 괜찮은 영감이 오고 그렇게 만들어지는 게 진정한 디자인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저는 일생을 그렇게 옷을 만들어 온 사람입니다. 나이 먹고 오래되었다고 신선하지 않은 디자이너처럼 취급당하는 우리 사회를 바라볼 때 우려스러운 부분이 많아요. 오래된 것을 본보기로 해서 새로운 시도를 하고 잘못되고 불편한 것은 요즘 시대에 맞게 변화시켜 나가는 노력이 필요하다고 보기 때문이죠. 우리는 그런 부분에서 너무 인색해요. 음식도 숙성되어야 깊은 맛이 나듯 모든 분야의 기술도 마찬가지거든요.”
1970년대 초, 파리에서 기성복 전시회가 있었다. 세계적인 의류 박람회였는데 국내 디자이너로는 최초로 그녀가 출전했다. 30여 개 나라가 출전해서 부스를 설치하고 자국의 국기를 걸었다. 처음에 한국관을 설치한다고 하니까 한국이 무슨 디자인을 하냐고 거절할 정도로 우리나라는 디자인의 황무지였다. 박람회에 출전한 작품은 품질이 우수한 실크를 가지고 기획한 샘플이었다. 운이 좋았던지 그녀는 기획과 디자인을 하게 됐고 다섯 군데의 견직회사가 함께 박람회에 동행했다.
“너무 오래 돼서 잘 생각이 나진 않지만 아마도 그때 우리가 부스를 설치한 층이 4층인가 5층인가 그랬어요. 썩 좋지 않은 자리였는데도 그곳에 부스를 설치하고 나니까 정말로 가슴이 뛰고 설레더라고요. 그 순간은 ‘아무리 파리라고 해도 우리만큼 잘 만들겠어’ 그런 생각을 했어요. 우리나라 사람들의 성격이 다혈질이면서 감정이 풍부하니까 디자인이라는 분야가 잘 맞을 거라고 생각했고요. 거기에 제가 대표적인 적임자라고 생각했죠. 의류 박람회에 우리나라 태극기가 걸렸다는 것이 얼마나 감격스러운지 표현할 수 없었죠. 다 설치해놓고 우리가 얼마나 잘하는 나라인지 확인시켜 주고 싶었어요. 그런데 점점 ‘그게 아니구나’ 이런 생각이 들었어요. 수십 개의 참가 부스들을 돌아보면서 내려가다 보니까 밑으로 내려갈수록 선진국이 있다는 걸 알겠더라고요. 일층에는 파리에 있는 회사들이 부스를 설치하고 있었는데 보는 순간 가슴이 뛰기 시작하고 우리는 여태까지 뭐했나? 도대체 나는 뭔가? 수준이 형편없구나, 이런 생각이 들면서 걸을 수가 없더라고요. 계단에 주저앉아서 한참을 울었던 기억이 나요. 그게 제가 첫 번째 외국에서 부딪힌 벽이에요.”
처음 해외무대에서 부딪친 경험을 살려 정말로 열심히 노력했다. 어떻게든 열심히 해서 다시 도전하고 싶다는 생각도 했다. 해내고 말겠다는 오기도 생겼다. 그렇게 노력한 결과 세 번째 해외무대인 미국컬렉션에 출전했다.
“당시 우리나라 실크는 상당히 경쟁력이 있었어요. 그래서 실크원단에 마후라(머플러)로 쓰는 프린트를 해서 옷을 만들었어요. 원피스를 만들었는데 정말로 예뻤죠. 그 샘플을 가져가서 부스에 걸었죠. 이번에 만큼은 절대로 좌절하지 않으리라는 다짐도 하고요. 내로라하는 세계의 디자이너들이 참가하는 컬렉션이라 유명한 바이어들도 다 참가했죠. 그들은 부스마다 돌아다니며 작품을 보는데 제가 만든 원피를 보더니 아무 말도 안 하더라고요. 감흥이 없나 보다 했죠. 그런데 아주 유명한 바이어였던 여자 분이 들어와서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지퍼백에다 원피스를 넣어서 가버리더라고요. 그러더니 한참 있다가 빈손으로 와서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한참을 앉아 있는 거예요. 그러더니 갑자기 와! 하고 만세를 부르면서 소리를 지르는 거예요. 다음날 어떻게 소문을 들었는지 백화점 바이어들이 한꺼번에 몰려와서 디자인을 계약하자고 하면서 리무진에 저를 태우고 다니면서 식사대접을 했어요. 너무 어떨떨해서 바보처럼 얼굴만 빨개져 아무 말도 못했죠. 지금도 그 감동을 잊을 수가 없어요.”
그녀가 패션업계에서 성장해 오기까지는 참 힘든 과정의 연속이었다. 신진디자이너들이 너무 신선한 것만 찾는 것에 대한 우려감이 많은 이유다. 디자인은 두 가지 요소를 가지고 뿌리를 내려야 한다는 게 그녀의 생각이다. 이태리나 파리의 명품들이 몇 대에 걸쳐 내려오는 것처럼 장인정신이 오래 쌓여 그것이 토대가 되어야 좋은 물건이 만들어진다고 본다.
“명품들은 그냥 만들어지는 게 아니죠. 정신적이고 육체적인 노동과 뿌리가 합쳐져서 만들어진 것들이죠. 그것이 명품이거든요. 우리는 뿌리를 너무 쉽게 생각하는 경향이 있어요. 지금부터라도 그들처럼 장인정신이 스며들어 오래된 것을 찾아가려는 노력이 필요하다고 봐요. 그것이 인정되고 평가 받았을 때 제대로 된 선진국이 되는 거죠.”
생산이 기반이 되어 돈을 벌었던 70년대 이후 우리나라의 생산기반이 통째로 흔들렸다. 국내보다는 인권비가 저렴한 중국시장에서 생산하고 수출에 의존했다. 그 시대에 밀려 제대로 된 기술 인력은 이제 극소수만 남았다. 신사동에는 지금도 고급 인력이 남아 있지만 비싼 공장세 때문에 점점 구석으로, 지하로 밀려나고 있는 게 우리의 현실이다. 장인으로 인정받아야 할 그들이 오히려 갈 곳을 못 찾고 있는 것이다.
“그들은 혼이 묻어나는 작업을 해요. 무언가를 하나를 주문해도 보물을 들여다보듯 귀하게 생각해요. 재촉을 하면 ‘한가할 때 정신통일하고 만들어 주겠다’고 그래요. 그런 태도를 가진 분들이 정말 장인이죠.”

그녀는 7남매 중 장녀로 태어났다. 어머니는 요즘 시대로 말하면 컴퓨터 같은 사람이었다. 반면에 아버지는 예술가 같은 분이셨다. 원단을 사다가 재단을 해서 옷을 만들 줄도 알았던 아버지는 그녀의 든든한 지지자였다. 그림을 잘 그리고 예술적인 끼가 많았던 아버지의 끼를 그녀는 그대로 닮았다. 학생인데도 공부는 싫었다. 대신 엉뚱한 끼는 멈출 줄을 몰랐다. 미대에 진학을 했지만 공부보다는 멋 부리는 게 재밌었다. 머리스타일을 멋지게 꾸미고 밤에 조명을 한쪽에 켠 체 거울 앞에 앉아서 담배를 피우는 등 남들이 하지 않은 행동은 다했다. 세상 모든 멋의 기준이 되고 싶었다. 그런 딸을 엄마는 늘 못 마땅해했다.
“한 번은 얼굴을 까맣게 하고 싶어서 도구를 찾는 데 없더라고요. 그래서 조금 남아 있는 어머니의 립스틱을 가루분과 섞어서 바르고 햇빛에 나갔는데 그 모양이 오죽했겠어요. 지지자였던 아버지까지 제 모습을 보시고는 실망해서 엄청 속상해하시더라고요. 요즘 말로 사차원이었죠. 당연히 친구도 없었고요. 정신세계가 이상하니 친구해줄 사람이 어디 있겠어요.”
철딱서니라고는 없는 그녀가 남편을 만난 건 대학시절이었다. 남편은 대학에서 편집위원을 할 정도로 글을 잘 썼다. 남편을 만나고 나서 처음으로 아는 게 없다는 것에 대해 자존심이 상했다. 늘 책을 보고 공부를 하는 그와 달리 그녀는 멋이나 부리고 기타 치며 배짱이처럼 살았다. 패션에 관심을 가지면서 복장학원을 다녔지만 그녀의 관심은 늘 엉뚱한데 있었다. 집안에서는 이런 딸에게 남자친구가 생겼다는 걸 좋아했다. 넉넉한 집안이라 어려운 환경의 사윗감을 싫어할 법도 하건만 그 누구하나 반대하는 이가 없었다. 그렇게 둘은 결혼했다. 그리고 그녀가 옷을 만들기 시작한 건 생활수단의 한 방법이었다. 자신이 추구하는 멋이 순수예술이냐 패션디자인이냐를 놓고 잠시 고민했지만 느낌과 생각을 빨리 표현할 수 있는 게 패션이라고 생각한 것이다.
“저는 옷을 잘 만드는 재주 밖에 없습니다. 장인정신으로 기술력과 새로운 발상이 담긴 진짜 패션을 하고 싶어요. 대형화된 조직이 아니라 장인정신을 가진 순도 100%의 소프트웨어를 만들어 내는 사람이 되고 싶은 거죠. 우리 집은 현재 4대가 디자인을 하고 있습니다. 저와 박윤정 디자이너는 미술을 전공하고 디자인을 하고 있고, 박윤정의 딸은 이번에 SK네트웍스에 공채로 합격해서 오브제 디자인팀에서 막내로 일하고 있어요. 친정아버지까지 합하면 4대가 되는 거죠. 제가 40년, 박윤정이 30년, 그리고 손녀딸이 30년을 하면 100년이 되겠죠. 그렇게 이어가면서 뿌리를 내리고 싶어요. 우리나라는 구조적으로 내재된 벽 같은 게 있어요. 후진성을 극복하지 못 하는 현실적인 벽이죠. 디자인 작업을 하는 사람들이 정말로 힘들어요. 그런 것들이 조금씩 나아졌으면 해요. 소비자가 한쪽으로만 몰리는 현상도 우려스럽고요. 좋은 소비자들이 많이 늘어났으면 좋겠습니다. 변화된 소비문화가 제대로 정착되었으면 하는 바람도 있고요.”
<MBC 이코노미 매거진 5월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