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불법다단계, 사회초년생 경제적 수탈
지난해 공정거래위원회가 공개한 ‘2010년 다단계 판매 매출액 및 후원수당 등 주요정보’에 따르면 총매출액 규모는 2조5334억 원으로 이중 상위 10개 업체가 1조9905억 원으로 전체 매출액의 78.6%를 차지하고 있다. 법의 테두리 안에서 운영되는 다단계 판매가 문제를 일으키는 사례는 적다. 하지만 불법 다단계판매조직들이 판매물품보다는 인적네트워크 구성과 이를 활용한 신규자금유치에 집중하기 때문에 각종 문제를 양산하고 있다.
각종 언론매체에 끊이지 않고 회자되며 경제범죄의 대명사 격이 되어버린 ‘다단계판매(multi-level marketing)’ 방식은 1940년대 미국에서 처음 등장한 것으로 알려졌다. 1996년 유통시장 전면개방과 함께 합법화된 다단계판매는 일본에서는 ‘네트워크 마케팅’ ‘커뮤니케이션 비즈니스’ ‘소개판매’ ‘조직판매’ ‘소비참가형 비즈니스’ 등으로 불리며 유망 비즈니스 모델로 주목받는 동시에 국내와 유사한 피해사례를 낳기도 했다.
다단계판매는 고객을 판매원으로 해서 판매유통망을 확대해 나가는 무점포 판매기법을 정의한다. 제품을 구매한 고객을 새로운 판매원으로 끌어들인 뒤, 이들이 소비자에게 제품을 판매하는 형태로 유통망을 확대하는 것이다. 회사 측에서는 판매원의 퇴직금이나 의료보험을 신경 쓰지 않아도 된다는 점이, 판매원 측에서는 여가활동으로 하여 능력에 따라 보수를 받을 수 있다는 점이 이론상 장점으로 꼽힌다.
다단계는 소비자가 판매원으로 바뀌어 꼬리를 무는 방식으로 짧은 순간에 대규모 네트워크를 형성하기 때문에 파급력이 크다. 불법 다단계 판매방식은 제품구성이나 유통망의 유지에는 관심이 없고 신규 유통망 형성과 그 과정에서 수반되는 초기투자금이나 가입비 등 돈에 초점을 맞추기 피해로 이어질 수밖에 없는 구조다.
문제를 일으키는 불법 다단계 조직들은 대부분 경제적 취약층을 목표로 한다. 최근 이슈가 된 대학생부터 노후자금을 굴리려는 노년층, 가계여유자금 운용처를 찾는 주부 등이 대표적이 예다. 특히 대학생과 취업준비생을 대상으로 하는 불법 다단계가 문제가 되는 이유는 사회 초년생들의 경제기반을 황폐화하는 수탈행위이기 때문이다. 경제적 피해가 사금융과 연관되면서 학자금문제와 더불어 이중고를 안기고, 정상적인 경제구성원으로 참여하는 과정을 방해한다.
젊은 층을 대상으로 하는 불법 다단계는 그들이 관심을 가지는 경제·사회적 이슈에 민감하게 반응하면서 항상 새로운 방법을 모색하고 있다. 최근에는 SNS를 활용해 약점을 파고드는 사례가 늘고 있는데 불법 다단계가 피해자를 물색하는 가장 첫 단계가 신상과 관심사를 파악하는 일이다. SNS에는 개인의 관심사와 신상명세가 제법 소상하게 드러나기 때문으로, 무심코 올린 취업에 대한 하소연이나 근황이 사기수법에 구체적으로 이용된다. 합숙과 물품구매를 강요하거나 분위기를 조성하는 과거의 방식은 많이 알려졌기 때문에 피해사례가 줄어들고 있다. 하지만 신종수법들은 비합숙으로 형태를 바꿔 학원, 부동산 파이낸싱, 이동통신 신규사업자 등 새로운 고소득 직종을 내세우고 그 과정에 교모하게 다단계방식을 섞고 있다. 합숙이 이뤄지지 않지만, 초기에 들인 돈을 건지기 위해서 피해자도 손쉽게 SNS를 활용하기 때문에 피해가 빠르게 확산될 우려가 있다. 더구나 얼굴을 직접 맞대고 설득을 벌이는 과거의 방식에 비해, 온라인에서 이뤄지는 권유는 범죄사실을 인식하기도 어렵고 설사 사실을 알더라도 죄의식이 덜하다. 신종수법은 3자의 시선으로 바라보면 사기성과 맹점이 쉽게 드러나지만, 좋은 일자리와 경제적 안정이 시급한 청년층은 의외로 판단력이 흐려진다. 최근 공정거래위원회에 접수된 사기유형은 다음과 같다.
어학원 조교자리에 지원한 구직자에게 수강생 모집업무의 일환인 것처럼 속여 주위 사람들을 끌어들이게 하는 방법이다. 먼저 페이스북이나 카카오톡 등 젊은 층이 많이 활용하는 SNS를 통해 구직희망자의 사정을 파악하고 자연스럽게 접근해 어학원 조교라는 번듯한 직업을 제시한다. 면접을 보러 온 구직자에게는 ‘수강생을 모집하는 영업직에서 근무하면 고수익은 물론 정규직도 가능하다’고 권유한 뒤, 직급을 올리기 위한 투자금 명목이나 수강료 명목으로 200여 만 원을 요구한 사례가 있다. 투자금을 내고 수강생 모집업무에 나선 피해자는 한 달 동안 4~5명을 모집하고 8만원의 수당을 받는 등 수익이 기대에 못 미쳐 학원 측에 투자금 환불을 요구했지만 거절당했다.
인맥을 기반으로 전화나 일대일 면담을 통해 이뤄지는 대학생 다단계 유인방식이 진화한 사례로, ‘직급상향’ ‘자격유지’ 등을 이유로 금전을 요구하는 불법 다단계업체의 전형적인 수법에 해당한다.
방문판매법 제23조는 판매원 가입 또는 자격유지 조건으로 연간 5만 원 이상의 부담을 지우는 행위를 금지하고 있으며, 위반 시 5년 이하 징역 또는 1억5000만 원 이하 벌금 등의 처벌을 규정하고 있다.
유명 취업포털사이트에 부동산투자회사의 사무보조원 채용광고를 통해 면접을 보러온 구직자에게 취업조건으로 일정금액을 투자하도록 유인한 사례다. 회사가 부동산투자 등을 통해 막대한 수익을 올리고 있으며 축구선수, 연예인 등을 들먹이며 이미 유명인사들도 참여하는 것처럼 꾸몄다. 투자하면 3개월 이내에 원금상환을 약속하며, 투자여력이 없는 구직자에게는 제2금융권을 통해 1800만원을 대출받아 이를 투자토록 유도했다. 이 과정에서 대출시 이자를 대신 내주겠다며 학자금 명목 등 허위사실을 내세우도록 했으며, 신용보증금 명목으로 대부업체의 자금까지 끌어들인 사례도 있었다.
나중에 구직(투자)자가 이자대납과 약정수익 등이 이뤄지지 않아 투자금 반환을 요구하면, 회사 측은 다른 투자자를 유인하면 수당을 지급하겠다면서 본색을 드러냈다. 하지만 부동산투자회사 등 일반적인 구인광고를 위장해 업무의 연장선상에서 투자가 이뤄지는 것처럼 꾸며 구직자들의 의심을 피했다. 더구나 투자금을 회수하기 위해 다른 투자자를 모집하는 행위는 불법 투자사기에 동참해 자신도 모르는 사이 다수의 피해를 초래하는 공법으로 전락할 수 있기 때문에 각별히 조심해야 한다. 대부분의 다단계 업체들이 다른 사람의 투자금을 받아 그 일부를 최초 투자자에게 보상하는 식으로 운영되고 있어 피해가 급속히 확산되는 전형적인 다단계 사기유형에 속한다.
법률전문가들은 “재화 등의 거래가 수반되지 않아 방문판매법상 금지되는 사실상 금전거래(시행령 제32조의2)에는 해당하지 않으나, 인·허가를 받지 않고 불법적으로 투자금을 조달하는 유사수신행위에 해당될 소지가 있다”고 조언한다.
한동안 이슈를 모았던 제4이동통신사업자나 이동통신재판매(MVNO) 등을 들먹이며 고소득이 보장되는 휴대폰 판매 사업권을 준다며 물류회사 가입을 유도하는 사례도 드러났다. 13만원 상당의 물품을 구입하고 판매원이 되면 쿠폰을 발급하고, 사업을 시작하면 쿠폰을 휴대폰과 교환해 준다는 조건을 제시한다. 나중에 판매원 자격을 유지하기 위해서는 매달 4만원 이상의 물품 구매가 필요하며 구매액이 부족하면 판매원자격이 박탈된다며 추가구매를 유도한다.
이동통신관련 서비스가 주목을 받으면서 화려한 사업계획이나 신뢰할 수 있는 듯 포장한 전문가 강의 등을 내세워 구직자가 사업기회를 얻을 수 있는 것처럼 현혹하는 수법이다. 이런 유형의 투자사기는 최근 증가추세로 방문판매법이 규정하는 다단계에 해당하지 않는 경우가 많아서, 청약철회나 공제조합 보상 등 법적보호가 어려워 각별히 주의해야 한다. 방문판매법에서는 판매원단계(3단계이상), 소비자요건(제품을 구매해 본 소비자가 판매원 가입), 소매이익요건(구입·재판매에 따른 차익 발생 필요) 등을 다단계 해당요건으로 규정하고 있다.
최근에는 청년층을 목표로 하는 불법다단계들의 양상이 바뀌고 있다. 지난해 말부터 경찰이 특수전담반을 구성해 무허가 합숙시설을 위주로 운영되는 다단계 업체들을 단속하면서, 비합숙을 기본으로 하면서 온라인상의 인적네트워크를 활용하는 방식에 집중하게 된 것이다. 서울 송파구의 거여·마천동에 집중됐던 합숙시설들도 강남이나 성남 등 인근지역으로 자리를 옮기고 있으며, 일부 업체들은 단속을 피해 아예 부산·경남지역으로 이전하는 등 풍선효과가 나타나고 있다.
지난해 말에는 후원방문판매 조항 신설과 불법 다단계 영업 규제를 담은 ‘방문판매 등에 관한 법률 전부개정법률안(방문판매법 개정안)’이 국회 본회를 통과해 오는 7월 시행을 앞두고 있다. 하지만 불법다단계업체들은 벌써부터 법 조항을 해석하고 빠져나갈 구멍을 찾고 있기 때문에 신종 사기수법은 계속해서 등장할 전망이다. 마치 컴퓨터바이러스와 백신프로그램이 벌이는 싸움의 양상과 비슷하다.
청년층이 불법다단계에 취약한 원인은 먼저 경제적으로 ‘성인’이 되는 시기가 너무 늦다는 점을 들 수 있다. 부모로부터 독립하는 경우가 드문 국내실정에다 최근의 경기악화로 경제적 독립연령은 더욱 늦춰지고 있다. 특별히 생활경제에 대한 교육을 받지 못한 청년층이 사회경제주최로서 첫 발을 내딛는 취업의 관문이 사기수단으로 악용될 가능성이 높아지는 것이다. 저축이나 채무에 대한 개념을 숫자로 이해할 뿐, 생활에 적용시키는 것이 서툴기 때문에 상대방이 다단계에 참여시킬 목적으로 제시한 마스터플랜을 쉽게 받아들이게 된다. 경제적인 자신만의 포트폴리오나 원칙을 세워놓지 않으면 남이 제시한 플랜을 비교할 기준이 마땅치 않으므로 판단력이 흐려지게 된다. 따라서 불법다단계에 대비해 조심성을 키우고 피해사례를 숙지해두는 것도 중요하지만, 먼저 자신의 환경을 고려해서 대략적인 경제적 마스터플랜을 세워놓는 것이 좋다. 외부에 솔깃한 유혹도 본인의 계획에 어긋난다면 거절하기가 더 쉬워지기 때문이다.
학자금대출과 부모님, 지인들에게 자금을 융통해 총 1300여만 원을 부동산관련 불법다단계 사업에 투자했다는 취업준비생 J씨(28)는 현재 업체로부터 돈을 돌려받기 위해 힘겨운 싸움을 벌이고 있다. 안티피라미드 카페에서 만난 그는 공정거래위원회, 금융감독원 등에 상담을 의뢰하고 조언을 모으고 있지만 구체적인 대처방안에 대해서는 막막한 실정이다. 업체 측에서는 궤변과 배짱으로 일관하고 있는데다가 경찰에 신고하고 싶어도 어디서부터 어떤 식으로 접근해야 할지 막막하다며 “솔깃한 제안을 받는다면 그 기준에 맞춰 자신을 냉정하게 돌아보라고 말하고 싶다. 솔직히 내가 준비해 놓은 것보다 훨씬 많은 것을 제안 받았을 때 이성을 잃은 것이 실수였다.”라고 털어놓는다.
하지만 이들은 욕심을 부리거나 남에게 피해를 주기 위해 불법다단계를 선택한 것이 아니기 때문에 절대로 매도당하거나 범죄자나 가해자로 취급당해서는 안 된다. 다단계 피해자들의 회복을 돕는 상담전문가와 심리학자들은 불법다단계 유인책이 철저하게 평범한 사람들의 유형과 심리적 맹점을 분석해서 만들어진데다, 아는 사람에게 받는 안정감을 이용했기 때문이라고 설명한다. 실제로 불법다단계 유인책은 단순해보이지만 △상황적압박 △면역효과 △반복학습 △칭찬과 후속조치 △인지부조화이론 △성격유형분석 △고객리스트 모듈화 등 수많은 심리분석사례들이 참고된 것이기 때문에 특정상황에서 큰 효과를 발휘한다.
따라서 불법다단계 피해자들을 일상으로 회복시키기 위해서는 경제적인 대안과 함께 주위의 배려가 필요하다. ‘왜 바보같이 다단계에 빠졌나’ 하는 식의 시선을 보내지 말고, 불법다단계의 치밀한 수법에 대해 같이 분노하고 대책을 논의하는 식으로 공감을 형성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조언한다.
다단계 피해사례 가운데 가장 유명한 것은 20세기 초 미국 서부를 초토화시킨 ‘폰지게임’과 1990년대 초 내전을 불러온 ‘알바니아 피라미드 사태’가 꼽힌다. 경제적으로 비교적 선진화된 오늘날의 우리나라에서 이런 피해가 발생할 가능성은 극히 드물지만, 다단계라는 마케팅방식은 그만큼 악용될 소지가 많기 때문에 예방과 피해구제에 대한 연구도 계속돼야 할 것이다. 강력한 규제가 지나가고 나자 다시 불법다단계가 새로운 방식을 연구해 고개를 들고 있다. 정기적으로 피해유형을 밝혀내고, 법과 제도의 약점을 발견해 고치고, 상습적인 불법다단계 사업자들을 가중 처벌하는 등의 일을 결코 끝나지 않는 현대사회의 일상으로 이해하고 받아들일 때이기도 하다.
<MBC 이코노미 매거진 5월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