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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교육을 위해 우리 퇴임교원들이 힘을 보태겠습니다.”

홍승표 교육인생이모작지원센터 센터장


<M이코노미 김소영 기자> 서울시교육청이 올해 안에 퇴직교사 1,000여 명의 인재풀을 구성하겠다고 밝혔다. 퇴임교원을 활용해 학교주변을 배회하는 청소년들을 학교 안으로 끌어 들이겠다는 것이다. 지난 6월 출발한 서울시교육청 교육인생이모작지원센터(이하 센터)에는 현재 현장에서 풍부한 경험을 가진 퇴임교원들이 모여 들고 있다. 이들은 교육자로서의 사명감과 자긍심을 토대로 교육의 질을 높이는 데 기여하겠다는 각오로 사회에 신선한 기대감을 주고 있다. 홍승표 서울시교육청 교육인생이모작지원센터 센터장을 만나 평생을 교육에 몸 받쳐온 교육자로서의 우리 교육이 나아가야 할 방향과 센터의 역할에 대해 들었다.

Q. 우선 교육인생이모작지원센터는 어떤 곳인지 소개해 주십시오.

A. 우리 센터는 학교 안이나 밖을 배회하는 아이들을 잘 지도해 학교 안으로 끌어 들여서 이 아이가 자신의 미래를 잘 찾아갈 수 있도록 하자는 목표 하에 만들어졌습니다. 물론 퇴임교원 한 사람이 이 아이들을 지도하기는 어렵기 때문에 퇴임교원과 함께 일자리 창출 차원에서 젊은 청년 한 사람, 현직에 있는 교사 등 3인 일체가 되어 아이들을 지도해 가는 게 기본방향입니다. 이렇게 한 팀이 되어 일을 하면서 퇴임교원은 교육인생이모작지원센터, 청년일자리는 지자체, 학생은 교육청에서 지원하게 된다면 서로 부담도 없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현재 퇴임교원들 위주로 인력을 만들고 있는 중인데 관심이 아주 높습니다. 현재 우리사회에는 학교에서 적응을 못하는 학생들이 많습니다. 학교 안 또는 밖에 있는 우리 청소년들이 상당하지만 제대로 통계조차 내지 못하고 있으며 관리시스템은 부재한 상황입니다. 이 아이들을 학교에만 떠맡길 수는 없다고 본 겁니다. 이제 교육은 교육청에서만 할 게 아니라 지자체와 함께 손을 잡고 청소년 단체와 같은 유관기관의 연구부서 등과 함께 협업해 내가야 합니다.

공공영역과 민간영역 행위자 사이에 네트워크 방식의 수평적인 협력 구조 거버넌스가 이뤄져야 한다는 얘깁니다. 현 시대는 서로 조직을 구성해서 운영하지 않고 각자의 노력만으로 그 어떤 일도 성공하기 어렵습니다. 서로 관련된 단체들이 산발적으로 협업이 이뤄져야 하는 것이죠. 이런 것들은 이론적으로는 쉽지만 실행하기 위해서는 상당한 기술이 필요합니다.

한 기관에서 부서끼리 일하는 것도 어려운데 다른 기관들과 연계해서 일을 한다는 게 쉽지는 않겠죠. 특히 각 기관의 연구부서에 있는 분들이나 대학교수들은 독립성이 강하고 자기주장이 아주 강한 집단입니다. 자기 이론이 아니면 안 된다는 논리를 가지고 있는 분들이죠. 이들을 설득해서 협업해 나간다는 게 어렵겠지만 노력하려고 합니다. 저는 얼마 전까지 몸담았던 금천구에서 이와 같은 시스템으로 일을 해온 경험이 있습니다. 힘든 과정도 있었지만 나름대로의 성과도 있었기에 어느 정도 자신감도 있습니다.



Q. 초대 센터장이 됐는데요. 리더로서 가장 중요한 역할은 뭐라고 보십니까?

A. 리더는 어떤 일들을 잘 엮어내는 사람이라고 생각합니다. 어느 분야의 전문가가 아니라 협업과 거버넌스를 잘 엮어내는 사람이 리더가 돼야 성공할 수 있습니다. 맨 위 상층의 리더는 정확한 철학을 가지고 방향만 정해주면 됩니다. 실무리더는 이런 걸 잘 엮어 가면 되는 거고요. 제가 교육에만 몸 담아왔더라면 이런 생각을 하지 못했을 겁니다. 그러나 지금껏 제가 걸어온 길은 교육자보다는 어쩌면 이단아(異端兒)같은 행동들을 많이 해왔습니다.

또 다른 기관들과 협업하면서 새로운 것들을 만들어 내는 일에 대해 희열도 느꼈습니다. 이런 저를 보고 주변에서는 ‘당신은 도대체 교육자냐? 사업하는 사람이냐?’는 질문도 많이 받았습니다. 교육 쪽에 계시는 분들은 교육자는 교육에만 신경을 써야 한다고 생각하는 경향이 있으니까요. 물론 교육만 하는 교사라면 그래야겠죠. 그러나 경영자는 달라야 한다고 봅니다.

지금은 국민이나 학부모들의 니즈가 굉장히 강한 시대입니다. 많은 것을 요구하고 있어요. 그런데 자기들끼리만의 전통적인 방식으로는 지금같이 급격히 변하는 사회에 적응할 수 있을까요? 힘듭니다. 우리교육이 국민이나 학부모들에게 비난과 불신을 받는 이유가 거기에 있습니다. 그렇다고 노력을 하지 않냐면 그렇지 않아요. 서울교육청에 가보면 밤 열두시가 넘도록 불이 켜져 있습니다. 안타까울 정도로 밤낮으로 노력해요.

이제는 시스템을 바꿔야 합니다. 혼자서 밤을 새워가며 일할 게 아니라 서로를 인정해주고 상생하려는 노력이 필요합니다. 감사한 것은 교육의 리더이신 조희연 서울교육감께서 이런 철학을 가지고 있다는 것이죠. 그 마음을 알았기에 처음에 제안이 왔을 때 거절할 수 없었습니다. 만약에 리더가 그런 마음이 없다면 성공가능성이 없다고 판단해서 거절했을 겁니다. 그러나 교육감께서 가진 생각을 알기에 해볼만 하다고 생각한 겁니다. 물론 처음부터 100% 만족스러운 결과를 얻을 거라고 생각하지는 않습니다. 그러나 이런 시도를 해봄으로써 성공사례를 만드는 게 중요하다고 봅니다.

Q. 어떻게 해서 교육계에 몸담게 되신 건지요?

A. 속된 말로 먹고 살기 위해 교육계로 왔습니다. 어릴 적 저희 집은 굉장히 가난했습니다. 워낙에 가난해서 아주 어린 나이부터 돈을 벌어야 했습니다. 다른 사람보다 학교도 5년 늦게 진학했습니다. 저는 검정고시로 중·고등과정을 이수했는데 대학에 갈 형편이 안 돼서 보세공장에 다녔습니다. 그런데 같이 일하는 친구가 틈틈이 책을 보길래 무슨 책을 보냐니까 공무원시험을 보려고 한다는 겁니다. 당시 5급 공무원이면 지금의 9급 공무원인데 면서기가 되려고 공부를 한다는 겁니다. 그러면서 저한테 진학이라는 책을 한 권 줬습니다.

당시 대학에 가기 위한 유일한 안내서가 진학이었습니다. 전국에 있는 대학에 대한 정보가 담긴 책인데 맨 뒤에 교육대학이 소개되어 있었습니다. 그 친구가 교육대학에 가서 졸업하고 선생님이 되면 보수가 2만원 가까이 된다고 했습니다. 그래서 공부를 한 겁니다. 그때 마침 예비고사가 처음 생겼는데 공부한 지 3개월 만에 예비고사를 봐서 합격을 했습니다.
저는 광주교대를 나왔습니다. 형편이 어렵다 보니 합격을 하고도 걱정이 많이 됐습니다. 아버지께 대학등록금을 대줄 수 있겠냐고 했더니 한 번 해보라고 해서 겨우 진학을 했었죠.

대학에 다니는 동안은 초등학생 과외를 하면서 돈을 벌었습니다. 지금 생각해보면 제게 대학시절은 황금 같은 시절이었습니다. 중·고등학교를 다니지 않고 검정고시를 봤기 때문에 학교라고 해봐야 유일하게 초등학교를 졸업한 저로서는 대학에 다닌다는 게 너무나 자랑스러웠습니다. 당시 초등학교 교사에 대한 인기가 없었는데도 저는 유일하게 교복을 입고 학교에 다녔습니다. 학교에 다니는 것이 너무나 자랑스러우니까요. 69년이니까 아주 오래 전의 일입니다. 그때 제 나이가 스물다섯이었죠. 이후 교육계에 발을 들여 놓게 됐습니다.

Q. 성장배경은 어땠습니까?

A. 저는 충청남도 천안 수신면에 있는 수신초등학교를 5학년까지 다닌 후 6학년 때 서울 마포에 있는 서강초등학교로 전학 왔습니다. 그게 제가 학교에 다닌 전부입니다. 당시 저희 집은 아주 가난했습니다. 아버지께서사업을 하신답시고 모든 재산을 탕진하셨는데 이후 아주 힘들었어요. 저희 할아버지께서는 구한말에 승지(承旨)를 지내신 분입니다. 제가 어릴 때 살던 시골집은 대궐 같은 집이었습니다. 방이 30개가 넘는 집이었는데 어머니께 가려면 문 3개를 지나야 했어요. 마당에는 큰 연못이 있었는데 당시 그 지역에 저희 땅을 안 밞으면 다니지 못한다고 할 정도로 큰 부자였어요. 저희 아버지께서는 일본에 유학을 다녀오신 분이셨는데 고등학교 야구 포수였습니다. 앞서가는 인텔리였죠. 그런데 별안간 사업을 한다며 전 재산을 팔아서 사업을 시작했는데 경험이 없다보니 사기도 당하고 결국 모두 날려버린 겁니다. 가족이 서울로 오게 된 것도 이 때문입니다. 재산을 다 날렸으니 시골에서 살 수가 없으니까 서울로 온 것이죠. 그럼 서울에서는 의지할 곳이 있냐면 그것도 아니었어요. 그야말로 아무도 없는 객지에 생활력이 없으신 아버지는 집을 나가시면 보름이나 한 달 후에 들어오셨고, 어머니는 몸져 누워계셨죠. 도저히 학교에 갈 수가 없는 형편이었습니다. 저는 초등학교 졸업앨범도 없습니다. 서강초등학교 입구에 보면 큰 바위가 있는데 졸업식 날 저는 그 바위 위에서 졸업식을 지켜봐야 했던 기억이 있습니다. 제게 그 학교는 너무나 아픈 추억을 담고 있습니다.



나에겐 너무 아픈 추억

초등학교 졸업 후에는 뭐든 닥치는 대로 일을 했습니다. 나이가 어려서 공장에 갈 수 없다 보니 폐휴지도 주워다 팔았고 고물도 모아다 팔았습니다. 그때 구리철사 값이 많이 나갔는데 전봇대 아래에 가면 어른들이 공사를 하고 나서 전선을 버리고 갔어요. 그걸 주워 집에 가져와서 구리만 골라내는 작업을 한 다음에 모아서 팔면 당시에 100~200환(화폐개혁으로 10~20원)을 줬습니다. 그걸로 국수를 사다 식구들이 끼니를 때웠습니다. 당시 국수 한 다발이 120원정도 했는데 식구 다섯이 이틀을 먹었습니다. 가을이면 논으로 게도 잡으러 다녔고요.
그런 생활을 하다가 월세를 못 내서 전농동에 있는 판자촌으로 이사를 갔는데 도저히 안 되겠다 싶었는지 어머니께서 남의 집으로 들어가게 됐습니다. 누나 둘을 친척집으로 보내고 온 가족이 뿔뿔이 흩어지게 되면서 저는 야간자율학교로 갔습니다.

사실 학교라고는 하지만 숙식을 하면서 하루 한 두 시간 공부시켜주고 정부지원을 받는 곳이었던 것 같아요. 30명 정도의 아이들이 함께 생활했는데 환경이 아주 열악했습니다. 바닥이 시멘트라 야전침대에서 잠을 자야 했는데 처음에 가니까 잠잘 곳이 없는 겁니다. 당시 거기에는 선생님 겸 관리를 하는 분이 한 분 계셨는데 한 친구한테 저하고 같이 야전침대를 쓰라는 겁니다. 그때가 15살 정도 되어 갈 때인데 야전 침대 하나를 같이 쓰라고 하니 이 친구가 좋아하겠어요. 그래도 어쩔 수 없으니까 보름 정도 그랬게 지냈는데 그걸 보시고 어머니께서 참 맘 아파 하셨습니다. 하루는 해가 뉘엿뉘엿 질 때인데 하얀 옷을 입은 분이 머리에 뭔가를 이고 오시는 겁니다. 가까이 와서 보니까 제 어머님이셨어요. 체구가 작으신 어머니께서 커다란 야전침대를 사서 왕십리에서부터 이고 오신겁니다. 어머니 머리를 보니까 아주 푹 찌그러지셨어요. 지금도 그때를 생각하면 가슴이 너무나 아픕니다. (이 대목에서 홍승표 센터장은 목이 메인 듯 한참을 말을 잇지 못했다.)

가족 간의 협업

힘든 시기를 2년 정도 보내고 나니 아버지께서 어떻게 돈을 마련하셨는지 신길동에 단칸방을 얻으면서 가족이 모여살게 됐습니다. 그런데 방만 얻어 놓고는 생활비를 안 주시는 겁니다. 참 무능력하신 분이셨죠. 이대로는 도저히 안 되겠다 싶어 영등포 시장에서 번데기 장사를 시작했습니다. 고맙게도 시장에서 장사하시는 분들이 저를 참 예뻐해 주고 챙겨주셨습니다. 열다섯 살에 리어카를 끌고 다니며 장사를 하는 저를 대견스럽게 생각했던 모양입니다. 물론 온 가족이 함께 협업을 했습니다. 이른 아침에 아버지께서 용산역에 가셔서 번데기를 사오시면 어머니께서 깨끗이 씻은 다음에 솥에다 담아주면 제가 다니면서 파는 겁니다. 누님들은 그걸 쪼개서 생활을 했고요. 당시 번데기가 아주 잘 팔렸어요. 그때 당시 번데기 한 포대기에 2천 원 정도 했는데 팔면 약 4천원 어치가 됐어요. 하루에 천오백원 이상을 번거죠. 2~3년 장사를 하다가 차도 팔고 빵도 파는 다방차 장사를 시작했습니다. 3만원을 주고 인수를 받았는데 장사가 꽤나 잘 됐었죠. 그럴 즈음에 아버지께서 이래서는 안 되겠다 싶었는지 공부하라고 하더라고요. 그래서 검정고시를 보게 된 겁니다. 이후에 공장에 가서 일을 하다가 친구를 만나게 된 것이고요. 지금 생각해 보면 그 친구는 제게 생명의 은인과도 같은 사람입니다.

Q. 교사생활을 하시다가 그만 두고 다른 분야에서 일도 하셨는데 이유가 있습니까?

A. 저는 교사가 될 때부터 오래 하지 않을 거라고 맘먹었습니다. 그래서 교대를 다니면 의무적으로 받아야 하는 RNTC도 안 받았더니 학교를 졸업하니까 군대를 가게 생긴 겁니다. RNTC를 안 받았으니까요. 할 수 없이 27살에 현역을 갔습니다. 제대하고 나니까 29살이 됐었죠. 그때 교사생활을 시작했습니다. 제가 처음으로 교직생활을 한 곳은 전라도였는데 얼마 되지 않아 외삼촌께서 유정회 국회의원이 되셨습니다. 그래서 사표를 내고 외삼촌 수행비서로 국회에 들어갔습니다. 그런데 한 달도 채 못돼서 10.26사태가 나는 바람에 그만 두고 백수가 된 겁니다.

생활이 뻔한데 놀고먹을 순 없잖아요. 할 수 없이 매형이 운영하는 칫솔 공장에 들어가서 영업부장으로 전국을 돌아다니면서 칫솔을 팔았습니다. 그때 가만히 생각해 보니까 이래선 도저히 안 되겠다 싶더라고요. 다시 교사가 되기로 결심하고 서울로 상경했는데 마침 서울에서 교사를 많이 뽑을 때였습니다. 그렇게 시험을 봐서 또 다시 교육자의 길로 들어선 겁니다.

Q. 교육자가 되신 후 경력이 화려하신 것 같습니다.

A. 저는 경력이 아주 짧아서 경력으로는 도저히 교감이나 교장을 할 수가 없었는데 갑자기 장학사 선발시험제도가 생긴 겁니다. 이후 시험을 봐서 장학사가 됐고 교감과 교장을 거쳐 장학관, 교사학습센터 소장, 서울교육연구정보원장, 동작교육장까지 지냈습니다. 경력으로 치면 교장 하나 한 것만 해도 황송한데 돌 거 다 돌고, 맡을 거 다 맡아본겁니다. 저는 이런 것들이 가난한 가정에서 생활하면서 겪었던 어린 시절 덕분이었다고 생각합니다. 만약에 아버지께서 재산을 탕진하지 않으시고 부자로 사셨더라면 학교에서 아이들을 가르치는 교사가 됐다고 해도 샌님 같은 학자가 됐을 거예요. 저는 A형입니다. 두뇌유형을 보면 우측 전뇌 형이라고 해서 창의성, 상상력, 호기심 이런 게 굉장히 탁월합니다. 그러니 평범한 교사로 있을 수가 없죠. 그런 제가 각 기관의 장을 거치면서 기질을 발휘할 수 있었던 겁니다. 평범한 걸 아주 싫어하는 저는 뭔가 특별한 것을 해야 직성이 풀립니다. 오죽하면 제 아내가 “왜 그렇게 고달프게 사냐”고 하겠습니까? 그래도 평범한 게 싫은 데 어떻게 합니까? 생긴 데로 살아야죠.



Q. 교사들을 대상으로 강의도 많이 해 오신 것으로 압니다. 어떤 점을 가장 강조하시나요?

A. 프랑스의 소설가 빅토르 위고의 장편소설에 나오는 장발장은 빵 하나 훔친 것 때문에 평생을 도망자가 되어 살았습니다. 저 역시 어린 시절을 보면 정직하지 못하게 살아왔던 것 같습니다. 다행히 좋은 분들을 만나서 용서를 받을 수 있었죠. 그래서 제가 교사들을 대상으로 강의를 할 때면 꼭 잊지 않고 하는 말이 있습니다. 아이들이 뭔가를 잘못 했을 때 그 잘못만 보지 말고 왜 그렇게 됐는지를 살펴보라는 겁니다. 어쩌면 그 아이들은 가정적으로나 사회적으로 남모를 피해자들입니다. 환경이 좋은데 아이들이 그렇게 됐겠어요. 아이들 나름대로 아픔이 있는 겁니다. 우리가 그 아이들을 방치한 겁니다.

교사들이 아이들을 대할 때 자기방식으로 판단을 하면 안 된다고 강조하는 이유입니다. 사람은 각자 다른 모습과 성향을 가지고 있습니다. 교사 역시 아이와 같을 수 없어요. 서로 다른 유형이라는 얘깁니다. 저는 교사들이 이런 점을 잘 가려내야 한다고 봅니다. 우리나라에 들어와 있는 다문화인들에 대한 교육도 마찬가지입니다. 다문화인들은 어디서 왔는지에 따라 니즈와 환경이 달라요. 우리나라 다문화정책은 보다 더 섬세하게 달라져야 합니다. 다문화인들 중에 현재는 한국에 있지만 언젠가는 본국으로 가려는 사람도 있고, 영원히 한국에 남으려는 이들도 있습니다. 그런데도 이들을 위한 세부적인 교육이 이뤄지지 않고 있습니다. 걱정스러운 것은 앞으로입니다. 10년 후 이 아이들이 우리나라 국민으로서 애국심을 가지고 살 것인지 아니면 안티가 될 것인지를 생각해보면 아주 심각한 문제입니다. 이에 대해 심각하게 생각해야 하고 교육적으로 연구가 되어야 한다고 보기 때문에 저는 이 점을 늘 강조합니다.

Q. 맨 처음 발령을 받아 나갔던 곳은 어디입니까?

A. 제가 처음으로 발령을 받아 간 곳은 영광중앙초등학교입니다. 제가 교사직을 오래하지 않겠다고 생각했던 것도 어쩌면 저의 약점 때문이었는지 모르겠습니다. 당시는 초등학교도 육성회비를 냈는데 교사들이 그걸 거둬야 했습니다. 교장실에 가면 반 별로 그래프를 그려서 육성회비를 잘 받는 반과 못 받는 반을 한 눈에 알아보게 해놓고 육성회비를 못 걷는 교사는 불러다 추궁을 했습니다. 저는 다른 것은 다 하겠는데 그것만은 도저히 할 수가 없겠는 겁니다.

육성회비를 잘 받는 교사는 인센티브를 받아 가는데 저는 늘 목표에 못 미쳤어요. 왜냐면 당시는 교사들이 자기반 학생이 사는 집을 가정방문을 했는데 가서 보면 형편이 훤히 보였습니다. 그걸 보고 육성회비를 가져오라는 말을 도저히 할 수 없는 겁니다. 물론 아이를 불러다 야단을 치면 어떻게 빌려서라도 가져오겠죠. 그러나 저는 그럴 수 없었습니다. 저의 가장 큰 약점인 이 부분은 나이든 지금도 마찬가지입니다.

Q. 평생 교육자로 살아오시면서 보람도 컸을 것 같습니다.

A. 다른 게 있겠어요. 학생들을 지도할 때가 가장 보람 있는 거죠. 그 제자들을 볼 때 가장 뿌듯하고 감사합니다. 교사시절 150만원인가 200만원인가를 주고 고물차를 하나 샀는데 자꾸 고장이 나는 겁니다. 마침 서빙고에서 제자 둘이 카센터를 하길래 전화를 했더니 제 차를 직접 끌고 가서 깨끗이 수리한 다음에 갖다 놓더라고요. 저는 그런 제자가 있다는 게 너무나 자랑스럽습니다.

물론 제자들 중에는 검찰청이나 법원에서 일을 하며 고위직에 오른 친구들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런 제자보다 카센터하는 제자가 최고더라고요. 지금도 무슨 일이 있다고 하면 달려옵니다. 그 제자는 세상에서 제일로 존경하는 사람이 저라고 해요. 옛날에 제가 사인을 해준 적이 있는데 자기도 선생님처럼 될 거라고 집에 가져가서 얼마나 연습했는지 모른다고 해요. 부족한 저를 늘 우상으로 생각한다고 해서 너무나 감사해 합니다.

그 친구와는 참 인연인 것 같습니다. 제가 과거에 MBC 어린이프로그램 ‘야! 일요일이다’라는 코너에 출연한 적이 있었는데 그 방송을 보고 방송국으로 찾아왔어요. 제가 평소에 눈을 깜빡거리는 습관이 있는데 그걸 보고 이름도 맞으니까 우리 선생님이 맞다면서 찾아와 만났죠. 벌써 수십 년 전의 일입니다. 지금은 외제차 수리점을 하고 있는데 제가 타는 국산 중고차가 고장이 나면 감쪽같이 고쳐 놉니다. 얼마나 멋진 보람입니까? 위대한 인물을 만든 건 아닙니다만, 소시민으로서 은사를 존경하는 아름다운 마음을 가지고 열심히 살아가는 제자가 있다는 것이 제게는 너무나 행복한 보람입니다.



Q. 교육계에서 입지적인 인물이라는 평가를 받고 계시는데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A. 저는 교육자로 살아오면서 중간에 건너뛰기도 했지만 다양한 일을 했고 많은 과정을 거쳤습니다. 애초에 시작할 때는 6년 정도만 하겠다고 단언을 했었는데 정년까지 해온 겁니다. 제가 교사생활을 할 때만 해도 참 어려운 시대였습니다. 박봉에 대우도 받지 못했어요. 그럼에도 악조건 속에서 저는 한 번도 멈춰본 적이 없습니다. 이런 저를 보고 입지적인 인물이라고 말합니다만, 저 뿐만 아니라 많은 분들 역시 저와 마찬가지로 최선을 다해 노력했습니다. 다만 제가 타고난 기질이 한 기관의 리더역할을 하게 되면서 꿈을 피웠던것 이죠. 거기서 고마운 분들을 많이 만났고 능력 있는 분들을 만나 제가 가진 기질이 빛을 보게 된 겁니다. 덕분에 제가 꿈을 펼쳐갈 수 있었던 것이죠.

‘꿀맛닷컴’은 지금이야 너무 오래 돼서 폐쇄하니 마니 이런 얘기가 나오지만 어찌되었든 10년 넘게 운영되어 오면서 이름까지 특허를 냈습니다. 이런 일은 누구나 할 수 있는 일은 아닙니다. 왜냐면 여러 분야에 계시는 분들과의 비즈니스를 통해서 탄생되기 때문입니다. 돈이 전부가 아니라 서로가 협력하면서 이뤄내는 것이죠. 저는 어릴 적 힘든 과정을 이겨내면서 인내하는 방법, 사람들과 교류하는 방법을 배웠습니다. 그랬기에 서로 다른 분야의 사람들과 협력을 이끌어 낼 수 있었다고 생각합니다. 이 외에도 현재 활발하게 활동하고 있는 대입진학지원단도 운영하고 있습니다. 앞으로 남은 인생 역시 우리아이들 교육을 위해 봉사하며 살겁니다.

Q. 퇴임 후에도 금천구에서 일을 하셨는데 구체적으로 어떤 일을 하신건가요?

A. 그 일은 저한테도 정말로 색다른 경험이었습니다. 평생학습관소장이라는 직책을 가지고 금천구의 교육지원 활동을 어떻게 해서 시너지를 낼 것인가에 대해 고민하고 답을 찾는 역할이었습니다. 서울남부교육지원청과 서울시교육청, 그리고 금천구청이 협업을 하면서 효율적으로 결과물을 만들어 내기 위한 노력이었죠. 차성수 금천구청장님은 지금껏 제가 만난 분들 중 최고의 엘리트였습니다. 마인드에서부터 경영과 방법론까지 그렇게 많은 것을 갖춘 분이 흔치 않거든요. 그분과 함께 약 4년 간 일을 하면서 큰 성과를 내지는 못했습니다만, 나름대로 학교현장에 있는 것들을 교육청 담당자들과 접목해서 사례를 만들어 내려고 노력했습니다.

Q. 리더에게 어떤 점이 가장 중요하다고 보시는지요?

A. 저는 늘 한 사람의 능력은 아주 작은 부분에 불과하다는 점을 강조합니다. 진짜 능력은 주변 사람들과 능력을 합치는 겁니다. 내가 아는 것은 한 사람의 지식에 불과합니다. 대한민국 더 나아가 전 세계와의 네트워크를 구성하고 그걸 접목하는 사람이 최고의 리더입니다. 그런데도 교사들 중에는 밤을 새가며 수업안을 만드는 사람이 있습니다. 다른 학교의 괜찮은 방법을 찾아다 수업에 응용하면 되는데도 굳이 남이 하는 건 안 쓸려고 해요. 우리 학교만 잘 하면 된다는 아주 작은 생각 때문입니다. 연구는 조언 받을 수 있는 백 데이터를 최대한 활용해서 더 나은 것을 만들어내는 겁니다. 우리교육은 앞으로 응용하는 방법을 모르면 발전해 나갈 수 없습니다. 물론 억지로 되는 건 아니죠. 그 만큼 리더는 철학이나 방향성을 잘 제시할 줄 알아야 합니다. 강요는 성과도 낼 수 없을 뿐더러 시도조차 안 되는 경우가 많습니다. 저는 아이디어가 있을 때 ‘이거 해보자’보다는 누가 내 의견에 동조해줄 것인지를 찾았습니다. 그런 다음에는 많은 대화를 나누고 연수 기회가 생기면 받아보게도 하고요. 스스로가 ‘이거 참 좋은데 한 번 해볼까? 이런 생각을 갖게 만드는 겁니다. 그렇게만 되면 하지 말라고 해도 의욕에 불타서 적극적으로 하게 됩니다. 

리더는 자기가 직접 일을 하는 게 아니라 뒤에서 지원하는 지원자입니다. 어느 조직의 중간 간부나 이런 분들이 뭔가 일을 만들려고 하는 의욕을 갖게 하는 것이 리더가 갖춰야 할 기술이죠. 그러니 얼마나 힘들겠어요? 대신 결과는 다른 분들과 확연히 달랐죠. 당시 저와 근무했던 분들은 대부분 교감, 교장, 장학관이 다 됐습니다. 제가 동작교육청장으로 있을 때인데 같이 근무하던 사람이 “교육장님하고 일하면 낮이 너무 힘들고, 술을 좋아하는 분하고 일하면 밤이 힘들다”고 말해서 한바탕 웃었던 기억이 납니다. 저는 늘 뭔가 색다른 시도를 해야만 교육이 산다고 생각해왔습니다. 지금도 그 마음엔 변함이 없고요.

Q. 교육 관련해서 여러 연구회를 만들어 운영하신 것으로 압니다.

A. 장학사로 있을 때 컴퓨터로 자료를 제작해 수업에 적용하는 ICT연구회를 만들어 밤낮없이 연구했던 기억이 납니다. 또 잠재능력개발연구회라고 해서 교사들의 수업개선에 대한 연구도 했습니다. 제가 리더십 공부를 했는데 교사들한테도 이런 교육이 필요하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저는 전 교사의 코칭화를 주장하는 사람입니다. 일선에 있는 교사들에게 코칭 기술이 있다면 지금과 같은 상황이 안 생겼다고 봅니다. 교사들이 학생과의 대화라든지 이런 점들이 부족하니까 지금과 같은 상황이 생긴 겁니다.

현재는 순수봉사단체인 한국적성찾기 연구회를 만들어서 운영하고 있습니다. 연예인이 되고 싶어 하는 아이들에게 기회를 열어주는 겁니다. 요즘 연예인이 되고 싶다는 꿈을 가진 아이들이 너무 많습니다. 조사해보면 대부분은 헛꿈을 꾸는 애들인데 제대로 잡아주지 못하다 보니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대학에 가서도 그 꿈에서 깨어 나지 못합니다. 그런 애들은 빨리 자기 적성을 찾아가도록 코칭을 해줘야 합니다. 그러려면 체험을 시켜야 합니다. 직접 해보고 자기가 가고자하는 길이 맞는지, 아닌지를 스스로 느껴야 해요. 연구회에서는 응모를 통해 아이들을 선발한 다음 무대까지 올려줍니다. 전액 무료죠. 진로에 대한 지도차원에서 말로만 하는 게 아니라 체험을 통해 아이들이 자신의 적성에 맞는 길을 찾도록 도와주는 겁니다. 또 재능이 있는 아이들은 멘토와 엮어주면서 길을 열어주고 있습니다.



Q. 교육인생이모작지원센터가 나아가는 방향과 목표에 대해 말씀해주세요.

A. 현재 우리 교육은 국민들로부터 신뢰를 못 받고 있습니다. 그렇다보니 교육을 위해 외국으로 탈출하고 있는 아이들이 참 많습니다. 대한민국 교육이 괜찮다는 신뢰를 받기 위해서는 뭔가 새로운 패러다임을 적용해야 한다고 봅니다. 인력이라든가 예산이 늘 부족하기 때문에 어려움이 많다는 건 압니다. 그래서 퇴임교원들이 직접 발 벗고 나서서 경험을 통해 얻는 노하우를 통해 부족한 부분을 보충하고자 합니다. 이것이 퇴임한 분들에게는 자신이 하는 일에 대해 보람과 자긍심을 심어주고 현직에 있는 분들에게는 교권을 살리는 길이라고 생각합니다. 물론 이러한 노력이 얼마만큼의 결실을 얻을지는 알 수 없습니다. 그러나 서울교육청의 리더가 철학을 가지고 지원도 해준 만큼 퇴직교원들은 사회와 국가를 바꾸는 일이라는 사명을 가지고 참여하고 있습니다. 다만, 바람이라면 우리 퇴직교원들이 나와서 차도 마시고 정감을 나누며 우리 교육에 대해 토론할 수 있는 공간이 마련되었으면 합니다. 그렇게 되면 사진을 좋아하는 사람, 여행 좋아하는 사람, 컨설팅 좋아하는 사람 등 다양한 분야로 나눠서 스스로가 지원할 수 있는 것들을 만들어 갈 수 있을 거라고 봅니다. 인생교육이모작센터는 이분들에게 직접 뭔가를 해주기보다는 일을 할 수 있도록 판을 짜 줘서 자율적으로 활동할 수 있도록 하려고 합니다.

시대 흐름에 맞는 아이들을 키워내는 게 교육자들이 해야 할 역할이라고 생각하기에 책임감도 크고 어깨도 무겁습니다만, 지금은 우리 교육을 발전시키는 새로운 패러다임이 필요하다고 보기 때문에 새로운 성공사례를 만들어 가려고 합니다. 저는 개인적으로 ‘노작교육’이 필요하다고 생각하는 사람입니다. 아이들이 많은 체험을 통해 실천하도록 하는 게 진짜 교육입니다. 진로체험을 통해 아이들이 자신의 미래를 스스로 개척하도록 해야 합니다. 우리 퇴직교원들이 한마음으로 아이들에게 새로운 교육의 기회를 제공하도록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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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부 “의대 정원 확대는 불변”... 의협 차기회장 “대정부 강경투쟁”
대한의사협회가 임현택 차기 협회장을 중심으로 대정부 강경 투쟁에 나설 전망인 가운데 정부는 의대 정원 확대가 의료 정상화의 필요조건이라는 원칙을 고수하고 있다. 이상민 행정안전부 장관은 27일 ‘의사 집단행동 대응 중앙재난안전대책본부’ 회의에서 “27년 만의 의대 정원 확대는 의료 정상화를 시작하는 필요조건”이라며 “의대 정원을 늘려서 절대적으로 부족한 의사 수를 확충해야한다" 고 강조했다. 이 장관은 "의사들은 갈등을 멈추고 대화의 장으로 나와 의료 정상화 방안을 발전시키는데 함께 해달라"고 말하며 "의대 교수들은 전공의들이 하루빨리 복귀하도록 설득해주고 정부와 대화에 적극 나서달라"고 촉구했다. 전공의에 이어 의대 교수들마저 사직서 제출이 이어지면서 의료 공백이 심화할 것으로 보인데. 그런 가운데 정부는 공중보건의사(공보의)와 군의관 200명이 현장에 추가로 투입할 예정이다. 한편, 임현택 의협 차기 회장 당선인은 "전공의 등이 한 명이라도 다치면 총파업을 하겠다"며 강경대응 입장을 굽히지 않아 의정 간 갈등이 쉽게 끝나지 않을 전망이다. 26일 결선투표에서 당선된 임현택 회장의 임기는 오는 5월 1일부터지만, 의대 입학정원 증원에 반발해 꾸려진 의협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