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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획


여자정신대(挺身隊)의 기억과 진실 [Ⅰ]

[박광준 일본 붓쿄대학 교수] 이 글의 주제는 남북한(이하 조선)이 일제 식민지하에 있던 1944년 봄부터 해방 때까지 약 1년 반 동안 일본 군수공장으로 노무 동원되었던 조선 여자근로정신대(女子勤勞挺身隊. 이하 여자정신대로 칭함)이다. 정신대란 당시 여러 용법으로 사용되던 일반 용어였지만, 여기서 말하는 여자정신대는 일제의 정부방침과 관련 법령에 의해 규정된 법적 용어다. 당시 초등학교를 막 졸업한 만 12세에서 10대 전반의 소녀들이 다수 포함된 근로협력단체였다. 여자정신대는 조선 안에 있는 병기창 등에 단기간 동원되기도 했지만, 상당수는 일본으로 1년 이상 장기간 체재하는 것을 전제로 동원되었다.

 

당시 일본에서는 이들을 반도(半島)여자정신대라고 칭했다. 그 규모는 2,500명에서 4,000명 정도로 추정된다. 일본 내에서도 고등여학교 등을 단위로 한 여자정신대가 군수공장에 동원되었는데 일본인 정신대 수는 47만여 명이었다. 전시체제하의 일본은 기업을 직접 국유화하지는 않았으나, 노무관리 전반은 완전히 국영체제로
운영했다.

 

기업은 노동자를 자유롭게 채용하거나 퇴직시킬 수 없었고, 필요한 노동력을 국가에 신청하고 국가가 노동자를 선발하여 해당 기업이나 사업체에 배분했다. 노동자의 임금은 기업이 지불했다. 하지만 임금수준은 통제되었고, 노동자는 국가가 지정한 기업이나 사업체에서 일해야 했다. 이것을 노무동원이라고 한다. 노무동원은 중일전쟁이 일어난 1937년 이후 징병의 급증으로 인한 노동력 부족을 메우기 위하여 본격적으로 시행되었고, 조선에서는 1939년경부터 시행되었다. 여자정신대는 이 노무동원의 일환으로 시행된 제도였다.

 

노무동원은 노무통제를 전제로 하는데, 개인의 직장선택의 자유를 제약하고 일하지 않을 자유를 박탈하는 조치였다. 노무동원의 방식은 노동자의 근로 협력을 요구하는 방식도 있었고, 징용처럼 근로를 명령하는 경우도 있었다.

 

이 글의 의도는 정신대의 결성과 동원과정, 일본군수공장에서의 생활과 노동, 귀국과정에 관한 전반적인 역사적 사실들을 명확히 하고, 그에 관련된 의문들을 설명하는 것이다.

 

한국사회에서 정신대문제가 논의되기 시작하는 것은 1990년대 초부터인데 이후 지금까지 두 가지의 상반된 논의가 있었다. 하나는 역사적 사실에 관한 과학적 논의였는데 안타깝게도 확산되지 못했다. 다른 하나는 정신대에 관련하여 해방 이후 간간히 제기되어 오던 근거 없는 정보들을 매스컴과 사회단체, 그리고 학계조차도 무분별하게 답습하고 재생산한 논의인데, 그것은 정신대에 관한 오해를 급격히 확산시켰다. 거기에 감정적 민족주의를 부추기는 일부 상업화된 문화 예술과 문학 등이 가담했다.

 

그러한 영향으로 오늘날 많은 한국인들 사이에 공유되고 있는 정신대에 관한 집단적 기억은 그 역사적 사실과 매우 동떨어진 것이 되고 말았다.

 

 

정신대는 군위안부가 아니다
 

정신대의 본질을 밝히는 것은 곧 ‘정신대는 군위안부가 아니다’는 것을 밝히는 것과 다름없을 정도가 된 것이 한국 현실이다. 그만큼 정신대를 군위안부와 동일시해 왔다. 이 문제는 사실 군위안부 문제에 관한 오해, 특히 그 동원 규모에 관한 오해와 깊이 관련되어 있다. 즉 군위안부에 관한 오해가 컸기 때문에 정신대에 대한 오해도 그만큼 커졌다고 할 수 있다. 군위안부 문제는 여자정신대와 서로 관련되는 부분이 있으므로, 이 글에서도 필요한 경우에 한정하여 언급하기로 한다.

 

2000년을 전후한 시기까지 한국 방송매체나 관련운동단체, 심지어는 관련학자들 조차도 정신대와 군위안부를 혼동했다. 매우 우려스럽게도 학교 교과서에서도 그렇게 기술된 적이 있었다. 대중 사이에는 지금도 오히려 오해에 사로잡힌 사람들이 대부분이라는 느낌마저 있다. 그러한 사실은 무엇보다 어린 시절 여자정신대로 일본에 갔다가 돌아온 적어도 2천여 명의 여성들에게 말할 수 없는 고통을 주어 왔다. 그들은 자신들이 곧 군위안부였다고 오해받을까 두려워하며 과거를 숨기고 조마조마하게 살아왔다.


당사자 증언들에 의하면 결혼 후 실제적인 피해를 입은 경우도 있다. 혹은 어린 나이지만 정신대에 지원했다는 사실로 인하여 친일파로 매도될까 두려워하며 살았다. 더구나 한국의 정신대 논의는, 일본을 비난하는 말이라면 거짓말이라도 용인되는 그릇된 사회풍토를 만들었다. 그 결과 [사실을 말한다]는 사회가치는 더 이상 한국사회에서 존중받지 못하는 듯한 분위기마저 현저해졌다. 그러한 분위기는 학계에서도 감지된다. 일본 내에서 자국의 진정한 과거사 반성을 촉구해 온 일본 인사들이나 언론매체조차도, 한국 측 관련자들(단체들)이나 한국학계의 말을 쉽게 믿지 않으려는 경향이 강해졌다고 필자는 느끼고 있다.

 

 

집합적 기업이 곧 역사는 아니다
 

역사적 사실은 그 시대를 체험했던 한 사람 한 사람의 기억과 다를 수 있으며, 널리 공유된 집합적 기억(collective memory)도 진실이 아닐 수 있다. 즉 집합적 기억이 곧 역사는 아니다. 프랑스의 초기 사회학자(철학자) 알벡스(Maurice Halbwachs)는 집합적 기억이 두 가지 점에서 역사와 다르다고 지적했다.

 

첫째, 집합적 기억은 그 집단 고유의 경험이나 인식에만 착목하지만 역사는 사회 전반을 객관적으로 관찰하고 각 집단의 경험과 인식들을 전체로서 종합화해가는 과정이라는 점에서 다르다고 말한다. 두 번째 상이점은 이 글의 주제에 보다 중요한 시사를 주는 것인데, 역사는 그 고찰 대상인 집단이 없어진 이후에도 존속하지만, 집합적 기억은 구성원 상호간에 공통의 가치관이나 관념이 있을 때만 존속할 뿐, 그 공통적 가치관이 없어지면 집합적 기억은 사라지고 만다고 하는 점이다.

 

정신대에 관한 오늘날의 집합적 기억이라는 현상도 바로 이러한 지적과 마찬가지라고 필자는 생각한다. 특기할 점은 오늘날 정신대문제에 관한 집합적 기억은 자연발생적이라기보다는 일부의 매스컴, 문학과 예술, 사회운동계, 학계 등의 잘못된 사실인식으로 인하여 인위적으로 만들어져 확산된 경향을 보인다는 점이다. 따라서 역사적 사실이 확인됨으로써 사회성원들 간의 관념에 공통성이 약해지고 다양한 가치관이나 역사관이 나타나면, 정신대에 관한 오늘날의 집합적 기억도 오래가지 않아 소실되거나 크게 달라질 가능성이 있다.

 

과거 독일이 유태인에게 심각한 박해를 가했던 것에 대하여 진지하고도 철저한 반성을 행동으로써 보여 주었다는 사실은 한국에도 잘 알려져 있다. 그리고 그것은 반성을 주저하는 일본을 공격하는 전형적 논거로 사용되어 왔다. 그런데 지금 상황에서 우리가 보다 관심을 가져야 할 대상은 독일의 태도는 물론이지만, 오히려 그 피해자인 유태인사회가 자신들의 피해사실을 공표하는 방식이라고 생각한다.

 

세계에서 유태인의 공표된 피해사례들을 의심하는 사람은 거의 없다. 왜냐하면, 유태인 사회가 피해사실 하나하나에 대해 자체적으로 철저한 검증을 거친 후 명확히 사실로 판명된 사례만을 공표해 왔기 때문이다. 자신들이 공표한 피해사례에서 사소한 것이라도 사실 아닌 것이 포함되어 있으면, 유태인의 피해 사실 전체가 의심받게 된다는 현실을 냉철히 직시하고 있는 것이다.

 

 

당사자들의 증언은 소중한 사료(史料)
 

일제의 식민지배에 의해 직접적 피해를 입은 당사자들의 증언은 소중한 사료(史料)임에 틀림없다. 다만 사료들은 철저한 과학적 검증과정을 거쳐야만 비로소 ‘역사적 사실’로서 인정받을 수 있다. 한 조각의 사료를 역사에 등장시키기 위해서는 역사가의 각고의 노력이 필요하다. 거기에는 피해자의 고통에 공감하는 과학자로서의 정열이 우선적으로 요구된다. 그러나 과학자에게 정열 이상으로 요구되는 것은 사실만을 추구하는 냉철한 이성이다.

 

정열과 이성의 동반적 관계는 여러 역사적 인물들이 추구했던 ‘촛불과 같은 삶’의 의미를 떠올리게 한다. 촛불은 심지 가까운 곳에 푸른 불꽃이 있고 그것을 붉은 불꽃이 감싸고 타오른다. 붉은 불꽃과 푸른 불꽃은 각각 감정과 이성, 예술과 과학 등으로 비유할 수 있을 것이다. 촛불이 제구실을 다 하기 위해서는 두 가지 불꽃의 어울림이 필요하다. 정신대문제에 대해서도 피해자에 공감하는 뜨거운 정열만으로 역사적 사실을 분명히 할 수는 없다.

 

식민지배에 공분하고 피해자 고통에 공감하게 하는 감정적 붉은 불꽃은, 그 깊은 곳에 진리와 사실을 냉철하게 추구하는 푸른 불꽃심과 어우러질 때 비로소 밝은 빛이 만들어진다. 그중에서도 푸른 불꽃심을 지키는 것, 그것이 역사가의 역할이요, 사회과학자의 역할이다. 학식자들이 조각조각의 수많은 사료들 중에서 냉철한 판단력으로 중요하고 진실된 것만을 가려 뽑아 역사에 등장시키는 것, 그것이 과학자가 보여주어야 할 피해당사자에 대한 공감 방식이다. 그리고 그러한 작업이 가해자에게 당당하게 맞설 수 있게 하는 힘과 정당성을 만들어 주는 원천이다.

 

한국사회가 거짓을 사실인 것처럼 말한다는 평판을 얻게되면, 장차 그로 인한 폐해는 ‘헤아릴 수 없이 큰 것’이다. 또한 그 피해는 다른 누구에게가 아니라 바로 ‘한국사회와 한국인들’에게 돌아온다. 언론이 오보를 예사로 여기고 학계가 스스로 확인하는 최소한의 절차도 거치지 않고 다른 이의 논의나 주장을 그대로 인용하고 퍼뜨리기에 바쁜 듯이 보이는 오늘날의 우려할 만한 현상은, 남이 아닌 바로 ‘우리사회’의 건전성을 파괴하고 있으며, 한국과 한국민에 대한 호감도를 떨어뜨리고 있다.

 

오늘날 세계 나라들은 너나 할 것 없이 자국의 호감도를 높이려고 무던히도 힘쓴다. 그 이유는 국가호감도가 그 나라 국민 개개인과 사회단체, 기업들의 다양한 활동에 더없이 귀중한 사회자본이기 때문이다. 결국 거짓의 유포는 우리 스스로의 사회자본을 갉아 없애는 자해행위이다. 필자는 이 글 시리즈가 여자정신대에 대한 올바른 역사적 사실 이해에 도움이 되기를 바라고, 나아가 사실만을 말하는 사회, 사실 아닌 말의 해악을 두려워하는 사회 풍토가 만들어지는 데에 보탬이 되기를 바라고 있다.

 

 정신대에 관한 용어 사용은 당시 용례에 따른다. 당시에 정신대는 지역별로 조직화되었기 때문에 [경기도대], [경상북도대] 등 주로 도 단위로 불렸는데, 이 글에서도 그렇게 표기하며, 정신대였던 사람은 [대원]으로 표기한다. 식민지 조선은 [조선]으로 한인은 [조선인]으로 표기하며 당시 [내지](內地)라고 불렸던 일본 본토를 일본으로, 내지인을 일본인으로 표기한다. 통화단위 圓은 엔으로 표기한다.

  

 

여자정신대 문제, 어떻게 접근해야 하는가

 

정신대란 무엇인가

 

정신(挺身)이란 낱말은 한자로 된 우리말이다. ‘자진해서 나옴. 무슨 일에 앞장섬’(이희승 국어대사전 1982년 수정판)이라는 뜻이다. 이미『조선왕조실록』에도 ‘몸을 돌보지 않고 나서는 행위’를 의미하는 용어로서 ‘정신’이란 말이 흔히 사용되었다. 일본어에서도 정신이란 ‘스스로 앞장 서는 것, 자신의 몸을 던져 어떤 일을 하는 것(『広辞苑』)’을 뜻한다. 대(隊)란 군대 편제이다. 그러므로 정신대를 풀이하자면 ‘남보다 앞장서는 부대(단체)’가 된다. 군국주의가 만연했던 1940년대에 일본은 국가총동원체제를 갖추고 초중고 학생이든 주부든 모든 조직에 대(隊)를 붙여서 군대와 같이 조직하고 동원했으며 군대의 행동양식을 강요했다.

 

미혼여성으로 구성된 근로협력단체
 

정신대라는 용어는 일제시대에 여러 성격의 단체에 붙여서 사용되었다. 농촌정신대, 보도정신대, 구호정신대, 인술정신대 등의 용법이다. 그러나 여자정신대는 법적인 근거를 가진 단체였다는 점에서 그 이전의 명칭들과는 구분된다. 정신대의 ‘법적’ 근거는 일제 말기 1944년 8월 23일 시행된 칙령 여자정신근로령(女子挺身勤勞令. 이하 정신대령이라고 칭함)이다. 그런데 이 법령은 1944년 3월 각의(閣議)결정된 ‘여자정신대제도 강화방책요강’을 입법화한 것이므로 강제성이 전제된 공식적 정신대 결성의 근거는 이 요강이라고 할 수 있다. 즉 각의결정에 근거하여 정신대가 동원되었고, 그 몇 달 후에 근거법령이 만들어진 것이다.

 

정신대는 미혼여성으로 구성된 근로협력단체였다. 정신대령은 제1조에서 이 법이 ‘근로협력에 관한 명령’이며 정신대원은 ‘근로협력을 행해야 하는 자’라고 규정했다. 일본정부와 조선총독부는 정신대령이 만들어지기 전부터 정신대는 징용과 다르다는 점을 계속 강조했다. 즉 징용은 근로명령이었다. 정신대는 조선에서는 만 12세 이상이 그 대상자였다. 일본 공장에서 일하기 위해서는 일본어를 알아야 했기 때문에, 당시 일본어를 상용했던 국민학교를 갓 졸업한 여자(12세 이상인 재학생 포함)가 다수 동원되었는데, 그것은 조혼이 유행하여 10대 후반의 미혼여자가 드물었다는 현실과도 관련된다. 일본으로 동원된 조선정신대의 규모는 2천5백 명에서 4천 명 정도일 것으로 추정되는데, 일본인 정신대원은 47만 명을 넘는 규모였다.

 

정신대 노동은 ‘근로협력’라는 이름을 달고 있었지만, 임금이 지불되고 공장법(1916년 시행. 노동자 보호법령)이 적용되었으므로 그 처우는 일반노동자와 크게 다르지 않았다. 다만 일본 동원은 조선 내의 동원과는 큰 차이가 있었다. 1년 이상의 장기간 동원이었으며, 조선과 일본 사이에는 언어를 비롯한 문화차이가 있었고, 강한 차별문화를 가진 일본사회에서 식민지 사람이라는 민족적 마이너리티로서 일하는 것이었기 때문이다.

 

‘근로협력을 행해야 하는 자’라고 하는 정신대원의 규정은 ‘협력’과 ‘강제성’이라는 두 가지 모순적인 개념을 동시에 담고 있다. 정신대는 형식적으로는 본인과 보호자의 동의를 전제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강제성이 전제되었다고 말하는 의미는, 정신대 동원에 동의하여 일단 대원으로 편성된 후에는 동원을 거부할 수 없었다는 뜻이다. 그 경우에는 국가동원법에 의한 처벌(1년 이하의 징역 혹은 1천엔 이하의 벌금) 대상이 되었다.


 

 

동원에서 차별적 성격 있어
 

여자정신대 동원에서 민족차별적 성격이 있었음은 분명하다. 당시 조선에서는 국민학교 졸업자 혹은 상급학교(高等女學校=高女. 국민학교 졸업자 대상, 5년 혹은 4년제, 지역에 따라 3년제도 가능) 재학생 중 일본인이 다수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일본인 학생을 정신대로 편성하여 일본으로 동원한 기록은 보이지 않는다. 즉 조선정신대는 식민지조선에 있던 사람들 중 조선인만을 동원했다는 점에서 차별적이었다.

 

일본 정신대는 국민학교를 졸업한 후 2년 이상 상급학교에 다닌 경우(대개 14세 이상)가 최저 연령이었던 것으로 보이지만, 조선정신대는 당시 일본공장법이 규정한 최저노동연령인 12세 이상으로 편성되었다. 조선정신대가 동원된 일본군수공장에는 일본인 정신대 역시 동원되어있었는데, 한 일본인 대원은 12살의 조선정신대가 공장에 온 것을 보고, 일본에서는 소개(疏開. 공습 등에 대비하여 안전한 지역으로 분산 피신시키는 일) 대상인 12살이 왜 공장에 오는지 의아하게 생각했다고 증언한다. 만 12세는 국민학교를 갓 졸업하는 나이인데, 당시는 늦은 나이에 국민학교에 입학하는 경우가 적지 않았으므로, 5학년 재학생이라도 12세 이상인 경우가 있었다. 12세 이상 여자 중에서 일본에서 일하는 데에 필요한 일본어 이해력을 가진 사람, 즉 당시 국민학교를 졸업하거나 국민학교 취학경험이 있는 여자가 그 대상이 되었다.


1944년 4월 일본 도착
 

공식적 정신대가 일본에 도착하는 것은 1944년 4월부터 (토쿄마사방적)인데, 후지코시 공장의 경우 경상북도대가 처음 도착한 것은 1944년 5월 9일의 일이다.(이 공식적정신대 이전에 아마 근로협력대라는 신분으로 소녀노동자 수십 명이 이 공장에 와 있었던 것이 확인되어 있다.) 이들이 만약 해방될 때까지 일했다면 최장 15개월 정도 일본에서 노동한 셈이다. 또한 마지막 집단 동원은 1945년 3월이었으므로, 이 경우는 최장 5개월 정도 노동했다.

 

최장기간이라고 해도 한 공장에서만이 아니라 일본에 있었던 전체 기간을 말한다. 당시는 공습으로 공장이 파괴되는 경우가 있었고 공습이 비교적 적은 지역 공장으로 이동하는 경우도 있었다. 1945년 4월부터는 미군의 공격이 빈번하여 조선-일본 간의 연락선 운행이 불가능했기 때문에 징용 역시 시행되지 않았다. 정신대는 소속 학교교사, 조선총독부 노무관계 직원, 일하게 될 회사 직원 등에 인솔되어 부산 혹은 여수에서 배로 출국했다.

 

해방 이전에도 개인사정이나 공장사정으로 귀국한 대원들도 상당수 있었다. 조선에 새로 건설될 공장으로 전속되어 많은 정신대원들이 조기 귀국한 경우, 또 건강상 문제로 돌아온 경우이다. 귀국 시에는 주로 회사직원에 의해 조선까지 인솔되었다. 해방 후 귀국하는 경우에는 당시 조선행 연락선이 출발하는 일본항구(하카타=博多, 시모노세키=下関, 니가타=新潟 등)까지 회사직원이 인솔하여 귀국했다. 조선 공무원이 정신대를 인솔해 오기 위하여 일본 공장까지 나가는 경우도 있었다. 안타깝게도 살아서 귀국하지 못한 대원들도 있었다. 일제말기가 되면 일본본토가 미군의 잦은 공습을 받았는데, 정신대가 일하던 군수공장은 미군의 공격 목표였다. 그 공습으로 인한 사상자가 있었으며, 나가사키(長崎) 원자폭탄 투하에 의한 집단적 희생(평양대의 경우)도 있었다고 판단된다. 지진발생으로 인한 사망자도 있었다. 타고 있던 배가 격침되어 사상자가 발생했다는 증언도 있다.

 

필자는 이번호부터 ▲여자정신대 문제에 대해 어떻게 접근하는가, ▲정신대에 관한 오해와 그 배경, ▲식민지 조선의 상황과 노무동원, ▲여자정신대의 편성과 동원, 출귀국과 인솔자, ▲기대와 현실의 괴리: 여자정신대의 현지생활, ▲사회계층과 귀국하지 못한 대원들 등에 대해 객관적 자료들을 기초로 사회 전반에 관한 거시적 시각을 가지면서, 다른 한편에서는 정신대에 관련된 소송에서 밝혀진 증언 등 미시적 자료들을 활용하여 정신대의 실체를 가능한 한 입체적으로 규명하려고 한다.


참고자료

 

활용하고자 하는 1차 문헌 중 기본적인 것은 여자정신대와 관련된 법령과 각의결정, 정부지침, 조선총독부의 책자나 발간물, 조선총독부가 일본 제국의회에 제출한 회의자료, 조선총독부 지도급 인사(총독, 총감, 광공국장鑛工局長 등)들의 훈시나 대담 등이다.

 

당시 보도기사의 자료원은 조선총독부 기관지인 매일신보(每日新報. 국한문 혼용), [경성신문](京城新聞. 일본어)과 황민신문(皇民新聞. 경성신문의 자매지로서, 전시에 한시적으로 발행되었음), 그리고 지역신문인 [부산일보](釜山日報. 일제시대 일본인이 발간한 부산지역 신문. 국한문 혼용. 부산이 일본 관문이었기 때문에 일본도항과 관련된 기사를 적지 않게 실었음. 현존하는 부산일보와는 무관함), 조선시보(朝鮮時報. 부산의 지역신문. 일어 및 한글. 1941년 앞의 釜山日報에 통합) 등이다. 이들 신문들은 기본적으로 일제통치에 협력하는 신문들이었다는 점은 늘 염두에 두어야 한다. 또한 당시 일본에서 발행되었던 일본신문도 참고한다.

 

3.1운동 후 창간된 민족신문인 조선일보와 동아일보는 1940년에 강제로 폐간되었기 때문에(또 하나의 민족신문 조선중앙일보는 1937년 폐간) 여자정신대에 대한 직접적인 기사를 제공하고 있지는 않지만, 1940년 이전의 조선상황에 관한 중요한 정보를 제공하므로 활용한다. 민족신문 기사들 중에는 특히 빈곤, 노동쟁의와 소송, 여자 인신매매 등에 관한 기사가 매우 많다. 당시 조선 전반의 사회상황이나 인구, 교육, 노무자원 등에 관해서는 [조선총독부 통계연보](각연도), [조선연감](각연도), [인구조사보고서](조선편. 신뢰할만한 첫번째 인구조사가 이루어진 1925년 이후) 등을 기초자료로 활용하고, 아울러 선행연구들을 참고한다. 또한 [구례류씨 일기]와 같은 지식층 농민의 일기도 참고한다.


둘째는, 정신대에 관련된 증언이다. 무엇보다 중요한 증언은 정신대 당사자들의 증언인데, 이 글에서는 특히 일본에서 진행된 정신대소송 원고들의 법정 진술에 기술된 증언내용을 우선적으로 활용한다. 그 소송은 적어도 4건이 있다. [후지코시(不二越)소송](1차 및 2차 원고 9명), [미츠비시명공(三菱名航) 소송](원고7명), [토쿄마사(東京麻糸) 소송](원고2명), [칸푸(關釜)재판](원고 중 정신대원 6명-1차3명, 이후 3명) 등 이다.


정신대 관련자의 증언으로서는 당시 국민학교 교사의 증언이 있다. 정신대를 인솔했던 조선인 교사 1명, 그리고 일본인 교사 두세 명의 증언이다. 당시 국민학교 교사의 절반 이상이 조선인이었지만, 안타깝게도 인솔 교사 한사람을 제외하고 정신대와 관련된 조선인 교사의 증언은 현재까지 보이지 않는다. 그리고 정신대를 받아들인 기업(기숙사) 관계자의 증언도 있다. 증언집과 선행연구도 활용한다.

 

정신대원 31명에 대한 면담조사에 근거한 여순주의 논문([일제말기 조선인 여자정신근로대의 실태 연구] 1994)은 정신대문제에 과학적으로 접근하고자 한 중요한 선행연구이며, 증언사례가 다수 실려 있다. 한국정신대문제 대책협의회가 발간한 [증언집](1.2.3)에는 정신대로 일본에 간 뒤 위안부가 되었다는 4명의 증언이 있다. 기타 정신대원에 대한 면담조사연구에 인용된 사례도 참고한다. 조선정신대원을 대상으로 하여 일본에서 발간된 증언집은 모두 검토하여 증언자료로 활용한다. 또한 조선정신대의 문맥을 파악하기 위한 비교자료로서 일본인 정신대원들의 수기나 문집, 구술 자료들을 참고한다.

 

 

MeCONOMY magazine February 20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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