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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


가수 박상철과 방대한의 '비밤밥' 같은 인연

방글라데시 출신으로 영화 방가방가에 출연해 외국인노동자의 삶을 리얼하게 연기한 방대한, 그는 이제는 한국국적을 취득한 어엿한 한국인이다. 그가 자신의 곡인 비빔밥을 처음 녹음해 음반으로 내놨다. ‘비빔밥은 놀랍게도 그와 형제처럼 가깝게 지내던 가수 박상철 씨가 작곡, 작사를 하고 음반작업도 도움을 주었다. 두 사람을 만나봤다


작곡을 하게 된 사연은?

 

저는 고등학교 때부터 노래 작사작곡을 했습니다. 강원도 삼척고등학교를 다녔는데 당시 학교 밴드부에서 트럼펫을 불렀습니다. 그때부터 잘 쓰진 못했지만 곡을 썼죠. 제 음반에 있는 곡들도 제가 반 이상은 썼습니다. 그런데 본명을 안 쓰고 가명을 썼죠. 제가 부르는 곡 중에서 빵빵도 그렇고 빈깡통도 제가 만든 곡입니다. 곡을 써서 제가 생각하는 음악세 계를 노래로 표현하고 싶었습니다.


가수 박상철의 음악세계는?

 

제가 추구하고 가고자 하는 음악세계는 인생이야기라든지 사물에 대한, 그리고 토크형식의 음악입니다. 잔을 보면서 잔~손만 잡아도 잔, 깨질 것 같은 잔~, 또 부모와 자식 간에 일어나는 일이라든가 이런, 사랑이라는 주제보다는 대화형식의 주제를 가지고 노래하고 싶어요. 한 음반에다 20곡이든, 30곡이든 사람이 살아가는 이야기를 담고 싶다는 그런 생각을 늘 해왔고 준비도 나름대로 해오고 있습니다 지금 제 음반에 있는 노래 중에서도 '일백년'이라든가 이런 노래도 마찬가지고요. 동요부터 시작해 전 장르를 다 만들어 놓았습니다. 반면에 두려움도 많습니다. 자신감이 없어서 많이 만들어 놓고도 내지 못하고 있는 거죠. 그런데 인기 쪽으로 가려다 보니까 자옥아’, ‘황진이’, ‘빵빵과 같은 대중에게 사랑받는 그런 노래를 불렀죠.

 

비빔밥을 직접 쓰고 곡을 넣은 것으로 아는데..

 

제가 쓴 곡들을 알고 주변에서 달라는 분들이 많습니다. 그런데 제가 피하는 편입니다. 기존 작곡가분들이 좋아하지 않더라고요. 제가 생각해도 곡만 전문으로 쓰는 분들의 입장에서는 좋아하지는 않을 것 같다는 생각도 들고요. 그래서 곡을 써도 남을 주지 않고 제가 부르는 노래라도 될 수 있으면 가명을 사용해왔습니다(박상철은 방대한을 칸이라고 불렀다)과도 애초 곡을 주는 그런 개념은 아니었습니다. 그런데 칸이 제 노래를 굉장히 많이 부르고 다니더라고요. 아무래도 친근감이 생기죠. 그러는 와중에 저보고 자꾸 도와달라는 겁니다. 과거처럼 독립군으로 혼자서 홍보하고 다닐 적만 해도 도와 줄 수가 있는데 지금은 저도 매니저가 스케줄 잡아 놓으면 가는 상황이라 뭘 도와 주냐고 그랬죠.

 

그런데도 칸이 형님 저 한테도 곡 하나만 써주세요그러면서 계속해서 부탁 하는 겁니다. 제가 다른 사람한테 곡을 하나 써줬는데 그걸 보고 부탁한 거예요. 그렇다고 곡을 써줄 수 도 없고 해서 이리 빼고 저리 빼고 한참을 지나왔습니다. 칸이 전화를 참 자주해요. 그래서 곡을 쓰게 됐죠. 곡을 써 놓고도 이거 괜히 해줬다가 욕먹는 게 아닌가고민을 많이 했죠. 원래는 곡을 주는 것으로 끝내려고 했던 건데 칸이 어렵다며 음반 내는데도 도와 달라고 하니까 황당했죠. 곡을 부탁해서 써줬더니 이제 음반도 내달라고 하니까 이거 희한하게 엮인 거구나 그런 생각이 들고

 

비빔밥노래 가사와 곡은 어떤 의미를 담았나?

 

일단 칸에 대한 얘길 많이 들었어요. 칸이 참 솔직하거든요. 평소 칸이 자기 얘길 많이 해주다보니까 어떤 노래를 만들어야 히트를 칠 수 있을까 그런 고민을 많이 했고요. 그런 와중에 생각해 낸 것이 칸이 한국에 와서 18년이나 됐고, 방대한 이라는 한국이름을 가지고 있긴 하지만 알게 모르게 차별도 있을 것 같고 그런 생각을 고민하게 됐죠. 거기에 맞추다 보니까 가장 한국적인 것을 찾게 된 거고요.

 

한국적인 것을 찾을 때도 다양하게 생각을 많이 했습니다. 신토불이에 대한 생각도 해봤고, 콩 심는 데 콩 나고 팥 심는데 팥 난다는 생각도 해봤고요. 현대를 살아가는 입장에서 생각해 보니까 가장 대중적으로 많이 먹고 어딜 가나 있는 게 비빔밥이더라고요. 비빔밥 안에는 콩나물도 있고 시금치, 고사리, 무 등 많이 있잖습니까? 이런 야채들도 원래는 야생에서 자생하는 거였거든요. 산나물도 곤드레 나물 같은 경우 모두 재배를 하잖아요. 산나물이든 들나물이든 밥에 넣고 비비면 비빔밥이 되는 거고요.

 

이걸 사람으로 바꿔 서 들나물은 내국인, 산나물은 외국인으로 표현하게 된 거죠. ‘색깔은 달라도라는 표현은 사람의 피부색이 황색, 백색, 검은색 그렇잖습니까. 그런 걸 집어넣은 거죠. 노래는 정곡을 찌르면 거부감을 느끼게 되거든요. 다문화 쪽을 생각하면서 비빔밥을 만들었는데 칸이 들어보더니 너무 좋다고 하는 겁니다.

  

(방대한) : 제가 들어봤을 때 딱 느낌이 왔습니다. 제가 인생 살아온 과정을 표현한 느낌이 와서 정말 좋았습니다. 듣는 순간 제 노래라는 생각이 들었어요. 그래서 누구도 주면 안 된다고 했더니 형님(박상 철)그래 알았어, 생각해보자그러더라고요.

 

가수 박상철 : 사실 중간에 사연도 있었죠. 음반 만들기 전에 여러 모로 고민이 많았다고 했잖아요. 가장 신경이 쓰이는 게 기존 작곡가들과 엮이는 거였거든요. 아무리 가명을 쓴다고 해도 알게 되잖아요. 그래서 칸한테 다른 사람으로 하라고 했는데 칸이 싫어 하는 게 보이더라고요. 영 맘이 안 편했죠. 다른 데로요. 너무 착하고 정도 들고 형편도 어렵잖아요. 그러다 보니까 여기까지 오게 된 겁니다.

 

가라고 해도 오로지 이걸로 한다고 하니까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요. 난 오직 형님한테만 하겠다는데 어떻게 합니까. 음반으로 나오는 데까지 약 5년 넘게 걸린 것 같습니다.

 

입장이 곤란해서 그만두려고 했는데 칸이 강하게 주장하는 바람에 결국 이 노래가 탄생하게 된 거군요.

 

말로 하니까 짧아서 그렇지 사실은 아주 긴 시간동안 우여곡절이 많았습니다. 곡만 만들면 끝나는 줄 알았는데 만들고 나니까 다음 단계로 가야하고 그러다 보니까 답답하기도 하고요. 그런데 칸을 보면 맘이 약해지고...참 난감했죠.

 

(방대한) 99% 형이 다 해줬습니다. 처음부터 끝까지 거의 고생해서 만들어 준 작품입니다. 저는 노래만 불렀을 뿐이에요. 형도 가수인데 시간을 그만큼 내기가 쉽지 않았거든요. 돈에 대한 것도 있지만 시간 투자를 정말 많이 했어요.


음반이 나올 때까지 연습도 시키고 그랬겠네요.

 

녹음을 일단 들어가면 간단하게 노래만 부르고 끝나는 게 아니라 하나의 작업이 들어가야 합니다. 밤새도록 잠도 못자고 작업을 해야 해요. 예를 들어 트럼펫을 맞춘다고 한다면 줄을 놓고 잘못된 줄을 다 잡아줘야 합니다. 악기가 30개라고 했을 때 그걸 하나하나 듣고 맞춰야 하는데 그 작업이 굉장히 어렵죠. 대충 만들 수도 있지만 그렇게 되면 노래의 질이 떨어져요.

 

처음에는 칸이 돈을 마련(대출)해서 메들리음반회사에 가서 본인이 음반을 만들겠다는 겁니 다. 기가 막히더라고요. 자존심도 상하고요. 만들려면 제대로 만들어야 하는데 대충 만든다고 하니까요. 저는 다른 건 몰라도 음원만큼은 최고로 만들어야 한다고 생각하거든요. 그것도 제 이름이 들어가잖아요. 찍는 건 메들리회사에 가서 찍어도 똑같지만 음원만큼은 대한민국 최고의 실력을 갖춘 전문가들한테서 만들어야 한다고 생각했어요. 가수가 음악이 최고인데 대충 만들어 놓고 그 다음에 뭘 하겠다는 겁니까. 물론 메들리자체가 나쁘다는 건 아닙니다.

 

대부분의 가수들이 음반 만들 때는 투자를 안 합니다. 그러고나서 PR할 때 투자를 많이 합니다. 저는 그게 이해가 안돼요. 음원이 잘 나오고 노래가 좋으면 듣는 사람이나 노래를 틀어 주는 사람도 좋잖아요. 돈을 적게 들여서 미디만 찍어서 가는 사람들이 있는데 저는 그것은 아니라고 봅니다. 개인악기인 트럼펫, 섹스폰, 기타, 드럼, 베이스 등을 잘 넣어야 해 요. 저는 어릴 적부터 음악을 해봤기 때문에 악기부분에 대해서는 더 자신이 있어요.

 

처음에 칸은 방가방가음원을 집어넣고 싶어 했는데 나중에 안 넣는다고 하더라고요. 들어보니까 차원이 다르거든요. 가수는 음원에 따라서 노래를 하는 기분자체가 다릅니다. 이것은 가수만 압니다. 같은 노래라도 악기가 제대로 들어간 것과 그렇지 않은 것의 차이는 엄청나요세션이 제대로 안 들어가면 가수가 노래를 부를 때 혼자 공중에 떠 있는 것과 같아요. 잘못 들어가도 가수가 노래를 부를 때 생톤으로 부르는 것처럼 되어 노래를 아주 못 부르는 것처럼 느껴지고요.

 

반면에 모든 악기를 넣고 노래 사이사이에 악기를 쳐주게 되면 음악자체가 달라지죠. 그런 것들이 차이가 많이 나요. 노래를 만들다 보면 다양하게 편곡을 접하게 되는데 비빔밥도 수천 번 수만 번을 들어봤을 겁니다. 이렇게 실패와 착오를 거치면서 엑기스만 넣었다고 생각합니다.

 

가수로 활동하신지가 상당히 오래된 것 같은데요?

 

80년대 말부터 노래를 했으니까 오래됐죠. 그때는 실력이 아닌 용기가 대단했던 것 같아요. 가수를 하겠다고 무작정 서울로 올라와서 메들리테이프를 하나 만들었습니다. 물론 실패했 죠. 이후로 다른 일도 하면서 계속해서 곡을 쓰고 준비를 했습니다. 그러다 93년도 6월경(당시 반팔을 입었으니까)에 전국노래자랑에 나가서 정식으로 가수로 데뷔하는 계기가 됐습니다.

 

아휴 트로트는 ..” 하면서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 때였어요. 그때는 트로트를 뽕짝이라고 했는데 그만큼 대중들에게서 관심이 멀어져 있을 때였죠. 그런데도 저는 트로트에 대한 확신이 있었습니다. 음악이라는 게 도레미파솔라시도라는 8개 음계에서 랩이든 발라드든 트로트든 모든 노래가 다 끝나거든요. 부르는 것에서 약간의 차이가 있을 뿐이죠.

 

90년 대 초만 해도 서태지와 아이들열풍이 대단했어요. 랩이 모든 인기를 장악할 때였죠. 제가 아무리 좋은 곡을 들고 나와 봐야 트로트는 관심조차 받기 어려운 때였으니까요. 그래서 큰물이 지나갈 때는 잠시 웅크리고 있자고 생각해 오랫동안 연습만 했습니다. 그런데도 연습은 멈추지 않았어요. 당시 제가 강원도 삼척에 있을 땐데 매주 한 번씩 5시간 20분 동안 버스를 타고 작곡가실이 있는 서울에 올라와서 연습을 했습니다.

 

그때는 다른 일을 하고 있을 땐데도 늘 노래를 틀어놓고 연습을 했고요. 이런 저를 보고 친구가 늘 듀엣을 하자고 했어요. 그런데 저는 안 하겠다고 했어요. 나중에 그 친구가 발라드를 했는데 크게 히트를 쳤어요. 저는 그걸 보면서 발라드가 된다는 것은 트로트도 된다고 생각을 했어요.

 

발라드와 트로트는 꺾기 외엔 틀린 게 없어요. 트로트를 아이돌 가수가 부르면 아이돌 노래가 되는 거고 꺾으면 트르트가 되는 거거든요. 물론 과거 전통 트로트는 꺾기가 하도 많아서 60대 이상이 되어야 좋아하는 노래였죠. 그래서 중장년층들도 모두 아이돌 노래를 좋아했거든요. 그렇다면 전통 트로트를 가지고 나와선 안 되겠다 싶더라고요. 이미 사람들은 전통 트로트를 안 좋아하는데 저 혼자만 전통트로트를 고집하면 안 되는 거잖습니까.

 

그래서 생각해 낸 것이 트로트의 바이브레이션을 다 끊자. 좀 독특하게 아이들을 대상으로 해보자고 했던 노래가 부메랑인데 결국 실패했죠. 지금 같으면 괜찮았을 텐데 서태지와 아이들 노래를 생각해서 만들다 보니 오버했던 거죠. 강력한 기획사가 있어서 돈으로 밀어붙였더라면 몰라도 혼자서 독립군으로는 승산이 없었던 겁니다. 실패를 보고 난 후에 생각한 것이 트로트를 하되 오버는 하지 말자였어요.

 

앞으로 나가는 것보다는 트로트에 대중들이 젖어들고 공감을 할 때 따라가야 한다. 그래서 변화를 준 게 자옥아~’라는 노래죠. 그 노래가 히트치고 난 다음에는 '무조건'도 마찬가지고요. 사실은 부메랑은 무조건이랑 비슷합니다. 그런데도 큰 인기를 끌지 못했던 것은 시대적 흐름이 아니었나 싶어요.

 

 

무조건이라는 노래는 남의 곡인데 편곡을 하고 수정한 것은 본인이라고 들었습니다.

 

그렇죠. 제가 다 개입해서 만들었죠. 이후에 나온 모든 곡들도 제 생각을 담아서 편곡을 했고요. 노래가 나오기 전에 작곡가 선생님하고 다투기도 많이 했죠. 제가 음악적인 고집이 상당히 강해요. 작곡가 선생님은 지금까지 히트를 많이 쳤던 전통 트로트 편곡자들한테 노래를 맡겨야 한다고 생각했어요. 그런데 수도 없이 편곡을 했지만 돈은 많이 들어가는데도 제가 원하는 음악이 안 나오는 겁니다.

 

그래서 제가 다시 해야겠다고 했죠. 다른 사람들 10번 음반 낼 돈을 편곡하는데 다 쏟았으니까요. 계속해서 그러다보니까 작업을 하고 있는데 제가 녹음실에 들어가서 맘에 안 든다고 말했죠. 3~4번 그랬을 때는 참더라고요. 그러더니 나중에는 화가 많이 나서 알아서 혼 자하라며 나가버립디다. 그 담부터는 전화도 안 받고요.

 

그래서 노래를 들고 젊은 편곡자들을 찾아갔습니다. 무조건이라는 노래가 약간 아이돌 틱 하잖아요. 앞에 시작할 때 짜짜짜라~이걸 넣은 것도 교향곡 중에서 운명을 들어보면 빠바바방~~이렇게 뭔가 웅장하게 나가잖아요. 무조건도 뭔가 광 태풍을 몰고 와야 한다고 생각했던 겁니다. 약한 거에서 크게 생각한 건데 음악자체가 그렇게 잘 안 만들어 지다 보니 수차례 실패를 했던 거죠. 노력한 만큼 결과가 나왔던 것 같아요.

 

사물이나 스토리를 가지고 노래가사를 만들고 싶다고 하셨는데 어떻게 그런 생각을 하게 됐나요.

 

제가 촌놈이잖아요. 그것도 아주 강원도 산골 촌놈이죠. 사실 빵빵이라는 노래만해도 원래는 제목이 시골버스거든요. 제가 태어난 시골에는 아침저녁으로 마이크로버스라는 작은 버스 한 대가 다녔어요. 그 버스에는 사람들이 매달려서 가고 그랬는데 언덕에 올라갈 때는 버스에 탄 사람들이 모두 내려서 밀어야 했어요. 그때 우리부모들은 내 자식은 잘 자라서 성공해야 한다는 기적을 바라는 마음이 컸거든요. 그 어릴 적 환경을 노래가사로 쓰고 싶었어요.

 

그래서 덜컹덜컹 달려간다 시골버스야~빵빵빵빵 기적을 울리며~ 이런 가사를 붙였죠. 여기서 말하는 기적을 경적이라고 생각하는 분들이 많은데 그게 아닙니다. 가난한 시골버스를 탔던 부모들이 자식들이 성공하길 바랐던 기적을 표현한 거예요. 모두 잘 살았으면 좋겠다는 그런 마음을. 소설가나 시인들이 소설을 쓰거나 시를 쓸 때 줄거리를 써가듯 저도 제가 살아온 과정들을 써서 노래로 부르고 싶었습니다. 제가 하고 싶은 음악은 히트보다도 어떤 스토리를 가지고 있는 그런 노래들이고 아직도 그런 목마름은 가지고 있습니다.

 

작사는 언제부터 한 건가요

 

제가 고등학교 때 악기를 했다고 했잖아요. 그때부터 꿈을 꿔왔죠. 사실은 그걸 너무 하고 싶었기 때문에 노래를 한 거고요. 늘 제 머리 속에서는 사람들에게 내 이야기를 들려주고 싶다는 생각을 갖고 있습니다. 현실적인 음악 속에서는 그걸 들려줄 수 없잖아요. 그걸 꿈꾸는 거죠. 예전부터 그런 가사를 쭉 써왔고 그거에다 멜로디를 붙이기도 하고요. 그런 곡이 300곡이 넘을 정도로 많습니다.

 

신세대 트로트 가수의 선두주자인데요.

 

저는 트로트가 침체되어 있을 때 맨 처음 나온 가수 입니다. 제가 나오고 난 후 장윤정 씨가 나왔죠. 자옥아는 신세대 트로트의 첫 곡입니다. 여기에 대해 누구도 부정할 수 없을 겁니다. 그 전에는 4인방(현철, 송대관, 태진아, 설운도) 선배들 시대죠. 이후에는 저하고 장윤정이었고요지금도 가요무대를 보면 가수들이 나와서 가만히 서서 노래만 부르잖아요. 그 전에는 모두 그랬습니다. 제가 나오기 전까지만 해도 가만히 서서 정자세로 서서 노래를 불렀죠. 가수가 율동을 하지도 않았지만 움직이면 카메라에서 빠져나간다고 난리였어요. 저 욕 많이 먹었습니다.

 

또 가수가 노래를 부르면서 가사를 바꿔서 부른다는 생각을 못했어요. 제가 나오고 장윤정 씨가 나오면서 뒤에 안무를 세웠어요. 그러니까 그전까지는 가만히 서서 노래를 불렀다면 제가 나오면서부터는 움직이고 행동을 하면서 안무까지 들어오고 가사도 바꾸고 그러면서 그림이 풍성해 진거죠. 무조건이라는 노래는 선거송으로 처음 불러진 노래고요. 제가 데뷔할 적만 해도 얼굴이 어리게 보이다 보니까 신세대로 보이면서 젊은 사람들이 트로트에 대한 공감대가 생겼어요. 팬클럽도 트로트가수로서는 제가 처음이었고요. 제가 처음인게 여러 갭니다.

 

재연연기도 했다고 들었어요.

 

제가 처음 데뷔할 당시만 해도 나갈 프로그램이 없었어요. 대중한테 알려야 하는데 채널이 없는 거죠. 그래서 생각한 게 재연연기였어요. 사실 저는 노래보다 서프라이즈, 타임머신, 솔로몬의 선택, 이것이 인생이 다 등에서 재연연기로 유명해졌습니다.

 

음반이 나와서 PR을 해야 하는데 혼자서 하다 보니까 어려움이 많더라고요. 그때는 라디오가 인기가 엄청 좋았어요. 라디오에 제 노래는 나가는데 도통 TV에 얼굴이 나 갈 수가 없는 겁니다. 당시 전국노래자랑이라든가 이런 곳은 저처럼 신인가수가 나갈 수가 없었어요그래서 생각한 것이 어떻게든 산에만 올라가면 된다 이거였어요. 그래서 무조건 KBS 황지연 감독님을 찾아갔 습니다. 재연연기를 좀 시켜달라고 통사정을 했죠. 그래서 이것이 인생이다에 첨으로 출연을 했습니다. 조직폭력배 두목이 개과천선해가는 내용인데 거기서 똘마니로 나왔죠. 그런데 제가 강원도 사투리를 워낙에 심하다 보니까 이게 뭐야그런 대사가 있다면 저는 강원도 사투리로 이게 뭐이나이렇게 말하는 겁니다. 도대체 말이 안 되더라고요.

 

그런 와중에 MBC에서 타임머신이 생겼는데 이 프로는 연기를 못해야 대박이었습니다. 가령 '어디가 아프면 청진기를 가슴에다 대고 어디 아프냐' 그래야 하는데 저는 머리에다 청진기를 대고 어디 아프냐그러는 거죠. 그걸 보고시청자들이 웃으면서 시청률이 48%까지 올라갔어요시간이 날 때는 동대문, 남대문, 버스기사, 택시기사 다 쫒아 다녔어요. 당시만 해도 택시기사 분들이 운전을 하면서 테잎을 틀고 다녔거든요. 제 음반을 나눠주면서 틀어달라고 부탁한 겁니다. 밀리오레나 두타 같은 곳도 수도 없이 다녔고요. 하도 가니까 한 DJ 가 열 받는다고 제 CD를 집어 던지더라고요. 오지 말라고 하면서요.

 

그래서 제가 나중에 히트되면 들 고 오겠다고 하고 나서 인생대역전 촬영하면서 갔었죠. 재연 연기를 한다고 나가긴 했는데 워낙에 연기를 못하니까 사람들이 쟤는 연기도 못하면서 저길 나오냐고 야단이었죠. 담당감독님이 싫어하더라고요. 연기를 너무 못하니까요. 살아남아 보려고 정말로 노력을 많이 했죠. 옛날에 영화 찍을 때 보면 추운데 앉아서 감독님이 조그만 화면을 보면서 컷트 그러잖아요. 그걸 제가 들고 있었어요. 안 잘리려고요.

 

감독님이 보기에 연기는 못하지만 밉지는 않았던 것 같아요. 그렇게 버티고 버텨서 가는데 연기를 못하다 보니까 인터넷 게시판에 글이 올라오고 난리가 아니었죠. 그때 제 노래가 라디오에 많이 나오면서 자옥아가 막 뜨기 시작할 때였어요. 그러다 보니까 라디오에 나갈 기회가 생겼는데 제가 라디오에 나가서 아침 11시에 타임머신에 나옵니다. 그러데 연기를 너무 못해서 난리가 났습니다. 이렇게 강원도 사투리로 말했더니 사람들이 라디오를 듣고 저 가수가 자옥이 부른 가수구나. 이렇게 안 겁니다. 라디오 시청률이 상당히 높을 때다 보니까 사람들이 많이 알아보게 된 거죠.

 

이후에 텔레비전을 보는 사람들도 저를 아는 사람이 있으면 저 사람이 원래 트로트 가순데 연기도 한데 그 애가 저 애래. 이렇게 되면서 점점 알려지게 된 거죠. 제가 강원도 촌놈인데 가수를 하려고 서울에 왔다는 얘기도 하고 그러다 보니까 격려의 글도 많이 올라왔고요. 타임머신이 시청률이 올라가다 보니까 저도 자연스럽게 알려지게 되고 담당 피디님도 제가 라디오 나가서 몇 시에 타임머신을 한다는 것을 홍보하니까 엄청 좋아했죠. 그렇게 되면서 길을 가다 보면 알아보는 사람들이 많아지고요. 빅 스타가 된 것이죠. 운이 좋았다고 생각합니다.



노래교실도 많이 다녔다면서요.

 

그때 막 노래교실이 생겼는데 가수들이 노래교실을 잘 안 갔어요. 저는 제 노래를 PR할 때가 없어서 노래교실을 정말로 많이 다녔습니다. 서울에 노래교실이 몇 군데밖에 없었는데 시간만 나면 노래교실을 찾아간 겁니다. 우리가 어릴 적엔 청소년들이 갈 곳이 없었잖아요제가 데뷔할 때는 어른들이 갈 곳이 없었어요. 그래서 제 별명이 주부들 잠재우는 사나 이입니다. 엄마들이 갈 곳이 없어서 노래교실을 다니는데 제가 노래교실을 가서 한 시간동안 노래를 부르는 겁니다. 당시는 노래교실 선생님들이 가수가 가면 무명이라도 어휴 어떻게 여길 오셨냐면서 굉장히 반겼어요. 그러다 보니까 거길 가면 노래 연습 하는 한 시간을 저한데 다 주는 겁니다. 거기서 제 얘길 다 하는 거죠. 그렇게 하다 보니까 노래교실 엄마 들이 저 촌놈이 시골에서 와서 노래한다고 저러고 다니니 '우리가 밀자' 그래서 팬클럽이 생긴 겁니다.

 

한 번은 MBC 화제집중에 우리는 박사모에요하면 서 파란풍선을 흔드는 팬클럽이 나온 겁니다. 제 팬 클럽이 저보다 먼저 텔레비전에 나왔어요. 그때 저는 출연을 거의 못했으니까 자료화면이 없잖아요. 그러니까 제 사진을 인터넷에서 다운 받아서 화면에 나오는 겁니다. 팬들도 제 사진을 복사해서 들고 있고요. 이렇게 트로트가수로서는 처음으로 팬클럽이 생긴 거죠. 이후 무조건이 나오고 장윤정 씨의 어머나가 나오면서 시너지효과가 올라가게 된 겁니다.

 

트로트가수로서는 처음으로 팬클럽이 생겨서 굉장했다고 들었어요.

 

신세대 트로트가 이슈가 되면서 각 방송국에서 다양한 프로그램이 만들어졌는데 KBS만 해도 전국노래자랑, 도전주부가요스타, 쇼행운열차, 가요무대, 아침 마당, 6시 내고향 등 본방만 해도 6~7개 프로가 있었습니다SBSMBC에서 그랬고요. 거기다 노래교실을 하도 쫒아 다니다 보니까 어머니들이 제 노래를 배웠을 거 아닙니까. 다른 가수들은 안 오는데 저는 하도 다니니까 노래교실 강사님들이 맨 먼저 제 노래부터 가르친 겁니다. 그런 거 있잖아요. 그러다보니 자옥아를 통달을 했을 거 아닙니까. 마침 모 방송국에서 가요쇼라는 프로그램이 생겼는데 새로 뜨는 가수가 있다고 하니까 저를 찾았어요.

 

정말 어렵게 첫 방송을 들어갔는데 당시 방청석이 400석인데 전부 제 팬클럽이 온 겁니다. 저는 제 팬클럽인 줄도 몰랐죠. 노래교실을 하도 다니다 보니까 노래교실 회원들이 가수 박상철을 밀겠다고 팬클럽 만들어서 400명이 와서 방청석을 다 채운 거였어요. 그러다 보니까 방송에 첫 출연한 가수노래를 방청석에 있는 400명이 모두 합창을 한 겁니다. ‘자옥아라는 노래는 따라 할 후렴도 많거든요. 전혀 예상을 못했거든요. 제가 무대에서 내려오니까 담당 감독님이 인기가 엄청나네요그러더라고요. 이후 다른 방송국 큰 프로에 나가 게 된 거죠. 회원이 된 어머니들이 따라다니고요.

 

오해도 받았다고요?

 

MBC에서 어떤 일이 있었냐면, 보통 프로그램이 1, 2부 이렇게 찍잖습니까. 1부에는 가수들이 출연을 하고 2부는 현철 선배님 콘서트였어요. 방청석이 약 350석 정도 됐는데 당시만 해도 신인가수다 보니까 저는 1부 중간에 나갔죠. 그런데 보통 1부 끝나고 10분정도 쉬잖습니까. 그 사이에 350석이 다 가버린 겁니다. 그래서 방송이 아웃됐어요.

 

현철 선배님이 난리가 났어요. “박상철이가 누구냐고요. 제 입장에서는 억울하지만 변명을 하겠습니까. 아무 말도 못하고 있어야 했죠. 그 바람에 팬클럽 회장님하고 연결이 됐습 니다. 수습은 해야 하니까요. 그 바람에 욕은 먹으면서도 이슈는 제대로 됐죠. 굉장히 힘들었어요. 가슴에 상처도 많이 받고 스트레스도 많이 받고요. 반대로 전화위복이 됐죠저에 대해 관심도 없던 분들이 저에게 관심을 가졌고요. 이렇게 알려지게 되면서 타임머신도 핫한 가수가 나오니까 시청률이 대박이 났죠. 제가 라디오에 나가면 프로그램 시간까지 얘기하고 다니니까 담당 피디님도 굉장히 좋아했고요. 그러다 보니까 어느 날 제가 떠 있더라고요 

 

세계적인 가수들도 보면 자기가 곡을 쓰고 직접 부르잖습니까. 신세대 트로트도 그렇게 해야 한다고 생각 하는데요.

 

대중은 대부분 그렇게 생각할 거라고 봅니다. 가수라는 게 자기가 생각하는 음악을 펼칠 수 있는 게 제대로 된 뮤지션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이죠. 그런데 작곡가 분들은 가수가 곡을 쓰면 빨리 망한다고 하시더라고요. 가수는 곡을 쓰는 전문가가 아니라는 거죠. 저는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오히려 반대가 논리적이라고 봅니다. 물론 곡을 쓰는 것은 웬만큼 음악을 하는  사람이라야 합니다만, 곡을 쓸 때 얼마만큼 대중들에게 맞춰갈 건지가 포인트라고 봅니다.

 

저는 그런 길을 갈 겁니다. 100%가야죠. 다만 용기가 나야 합니다. 예전에 처음 시작할 때처럼 세상의 편견과 모든 것들을 돌파할 수 있는 자신감이 있어야해요. 저도 나이가 들다보니까 자신감이 약간 떨어집니다. 그런데 제가 해놓은 걸 생각하면 아깝다는 생각이 들고요. 준비를 정말 많이 해놨습니다. 새로운 장르도 만들 수 있고요.

 

사물이라든가 어떤 주제를 가지고 노래를 만들고 싶다고 하셨는데요. 보통 길이가 어느 정도 돼야 하고 싶은 걸 표현할 수 있는지요.

 

곡을 쓰는 입장에서는 모든 시간이 비슷하게 나옵니다. 작곡이라는 것은 가장 짧은 시간에 가장 함축 적으로 3분 이내에서 표현할 수 있어야 해요. 그게 곡을 쓸 줄 아느냐 모르느냐의 차이죠.

 

칸이 가수활동을 시작했는데 가수로서의 가능성과 곡을 줬을 때는 어떤 점 때문에 준 건가요.

 

우선 인성이 참 좋습니다. 어떤 일을 하는데 있어서 마음이 와 닿지 않으면 안 하잖아요. 저부터라도 마음이 움직였어요. 칸은 오랫동안 사귀었던 사람보다 정이 갑니다. 감사함도 알고요. 한국에서 태어난 게 아닌데도 정도 있고 정서에도 잘 맞아요. 음악적으로 봤을 때는 아무래도 발음이라든가 이런 부분에서 부족한 게 있죠. 그렇지만 외국에서 태어난 사람 치고는 최고로 발음을 잘 한다고 봅니다.

 

제가 곡을 주면서 걱정했던 게 쓱쓱싹싹~비벼비벼 비빔밥 이 건데 의외로 잘 하더라고요. 밥이라는 발음이 어려 울 줄 알았는데 전혀 그렇지 않고요. 오히려 제가 발음이 틀렸어요. 노래를 부르는 실력도 준수합니다. 가창력에서 치고 올라가는 면은 없지만 대중이 봤을 때 훈훈하죠. 제가 칸하고 같이 공연을 몇 번 같이 갔는데 어머니들이 정말로 좋아하더라고요.

 

청주에서 있었던 일인데 거의 어머니들이 칸한테 매달리다시피 하면서 좋아하는 겁니다. 깜짝 놀랐어요. 이 친구가 사람을 당기는 매력이 있구나 그걸 느끼겠더라고요. 사람이 그렇잖아요, 얼굴이 못생겨도 뭔가 당기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잘 생겼는데도 거부감이 오는 사람이 있거든요. 칸은 얼굴도 잘 생겼지만 사람을 당기는 마력이 있는 것 같아요.

 

가수로서 자신을 관리하는 방법이나 철학, 습관 같은 게 있다면?

 

맨 처음 시작할 때를 많이 생각합니다. 노래를 하면서 참 많이 느끼는 게 매번 똑같은 노래를 해도 매번 틀립니다. 매번 긴장도 되고요. 그러다 보니까 스트레스도 많이 받습니다. 저는 그게 발전이라고 생각 합니다. 스트레스를 받지 않고 무대에 서는 가수는 장기레이스에서 롱런하지 못한다고 봐요. 매번 스트레스를 받는 다는 것은 자기를 반성한다는 얘기거든 요. 슬럼프도 있습니다. 슬럼프를 얼마만큼 잘 견디느냐 인데요. 요즘 트로트도 슬럼프인데요. 대중은 늘 변화거든요. 그 변화를 따라가지 못하면 집에 가서 쉬는 날이라고 봐요


비빔밥이라는 노래가 최고의 악기구성이라고 들었습니다. 직접 비빔밥을 작사 작곡하면서 무얼 담으려고 했나요.

 

대한민국에서 최고로 잘 한다는 사람들이 만들었고 최고 좋은 것만 다 썼다고 보시면 됩니다. 칸이 한국에 온지 18년이 되었어요. 처음 우리나라에 와서 공장에서 일을 했잖아요. 여기까지 와서 얼마나 외롭고 힘들었겠습니까. 방글라데시에 계시는 어머니도 생각나고요. 그런데 눈앞에는 기계 한 대 밖에 없는 거죠.

 

칸은 어렸을 때부터 노래를 좋아했다고 해요. 우리 트로트음악은 부르기도 쉽고 방글라데 시 음악과 리듬이 비슷하거든요. 칸의 삶에 대한 스토리와 음율을 많이 생각하면서도 우리 모두가 하나라는 점을 넣으려고 노력했습니다. 칸이 늘 한국은 정말로 정이 많은 나라라고 했어요. 자신이 가수가 돼서 한국에 와서 살고 있는 다문화인들에게 한국의 정을 나눠주고 싶다고요. 그런 칸의 마음을 담았다고 봐야죠.

 

두 사람이 만난 인연은?

 

맨 처음 만난 건 방송국에섭니다. 지방행사 같은 데서 칸을 여러 차례 보긴 했지만 서로 대화를 나누거나 그러진 않았죠. 그러다 아침마당에 출연하기 위해 방송국에 갔다가 대기실에 있는데 칸이 와서 인사를 하더라고요. 제가 평소 한국영화를 좋아해서 영화 방가방가를 재밌게 봤는데 방송 출연하러 왔다는 겁니다. 벌써 5~6년 전 일이죠. 그게 인연이 돼서 지금은 형님, 동생으로 지내고 있어요.

 

칸이 전화를 자주 합니다. 형님~그러면서 이런저런 이야기도 하고요. 착하고 정이 아주 많아요. 처음에는 곡을 써줄 생각을 한 게 아니라 전화해서 딴 얘기를 했죠. 그러다 보니까 참 괜찮은 친구구나 이런 생각이 점점 들더라고요. 그러던 어느 날 갑자기 칸이 곡을 하나 써 달라는 겁니다. 본인 노래를 하고 싶었던 거죠

 

비빔밥이 갖는 의미는?

 

칸이 다문화 대표적인 가수다 보니까 거기에 맞춰서 생각을 많이 했죠. 그러다 비빔밥에 대한 이야기를 하게 됐고 거기에 맞춰서 비빔밥이란 노래를 만들면서 내용은 한국의 토종 음식 비빔밥이지만 미국에서 가져온 재료든 호주에서 가져 온 재료든 동남아에서 가져온 재료든 밥하고 함께 넣어서 섞어 놓으면 다 같은 비빔밥이다. 그런 생각이 들더라고요. 그래서 이런 쪽 으로 노래를 만들어 봐야겠다고 생각한 거죠.

 

칸이 한국에 오래 살아서 그런지 한국 사람과 습성이 똑같아요. 방글라데시 가면 음식을 못 먹는 답니다. 방글라데시 갈 때 고추장 가지고 가고, 더우면 못 살겠다 해요. 제가 칸이 살고 있는 음성군에 가서 일박을 하면서 공연을 했는데 같이 잠도 자고 그러면서 한국에 오게 된 사연도 듣고, 집안사연도 듣고, 자라온 환경을 들으면서 이 친구 참 괜찮구나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노래를 만드는 과정에서도 뜻이 좋았고 칸과 잘 맞는 것 같다는 생각이 들고요. 노래를 아무리 잘 만들어 보려고 해도 막상 쓰려고 하면 안 나옵니다. 잘 맞으면 좋은데 안 맞으면 아무리 미친 듯이 써도 1~2년 고민해도 안 될 때가 많아요. 그런데 비빔밥은 척척 나오는 겁니다. 그래서 참 좋은 인연이구나 생각했습니다. 물론 쓰기 전에는 늘 머릿속에서 생각을 하죠. 영감이 맞아 떨어져 금방 이야기 했듯이 줄줄 나와 줘야 되지 인위적으로 꾸미는 건 안 되니까요.

 

머릿속에서 내용을 생각하고 잠을 자면서도 칸에 대해 생각하며 어떤 그림을 만들어야 하는지 고민합니다. 이렇게 써 볼까? 멜로디는 이렇게 해볼까? 고민 하다가 , 이거다!’ 하는 순간에 쓰는 겁니다. 비빔밥은 '쓱싹쓱싹 비벼~비벼 비빔밥, 내 입맛에 꼭 맞는 비빔밥~' 제가 비빔밥을 좋아 하거든요. 어머니가 시골에서 끓여 주던 된장찌개 이런 걸 생각하면서 쓴 거죠.

 

그 다음에 다문화니까 이제 이걸 어떻게 표현할까. 사람들의 피부색깔이 황인종, 백인종, 흑인종 그러니까 이걸 들나물 산나물로 표현하자. 이렇게 해서 나온 겁니다. 작사는 순식간에 했어요. 물론 거기서 미세한 조정은 오랫동안 해나갔지만요. 써 내려가다 멈추면 이상해집니다.


MeCONOMY Magazine June 20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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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대 장애아들을 평생 뒷바라지 하다 살해한 어머니에게 ‘집행유예’
선천적 장애를 갖고 태어난 아들을 평생 뒷바라지하다 끝내 살해한 어머니에게 집행 유예가 선고 됐다. 창원지법 형사4부(김인택 부장판사)는 지난 1월 경남 김해시 주거지에게 20대 아들 B씨를 질식시켜 살해한 혐의로 기소된 50대 여성 A씨에게 징역 3년에 집행유예 5년을 선고했다, 고 밝혔다. 중증 지적장애와 뇌병변을 앓고 있던 그녀의 아들 B씨는 태어날 때부터 몸이 불편했다. 배변 조절이 불가능하고 식도가 아닌 복부에 삽입한 위루관을 통해 음식을 먹어야 했다. 종종 발작까지 일으키는 탓에 간병 없이는 일상생활을 할 수 없었다. A씨는 이런 아들을 평생 보살펴왔다. 밤낮 없이 간병에 집중하면서 밝았던 A씨는 점차 외부와 단절된 삶을 살았다. 원래 밝았던 성격이었지만 십여 년 전부터 우울증을 앓아 약을 먹어왔다. 그러다 2022년에는 만성 골수성 백혈병 진단까지 받게 됐다고 한다. 주변에서 아들 B씨를 장애인 시설에 보내라는 주변 권유도 있었지만, 아들이 괴롭힘을 당할 수도 있다는 염려에 포기했다. 그러던 중 지난해 9월부터 아래층 주민이 층간소음 민원을 제기했고, A씨는 아들로 인한 것인지를 우려하며 심한 불안 증세를 느꼈다. 범행 전날에도 관련 민원을 받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