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본주의 사회에서 은행은 독특한 지위를 가진다. 이윤을 추구하는 사적 경제주체이기도 하지만, 자금의 순환을 매개하는 중재자로서경제 전반에 영향을 주는 인프라의 역할을 하기도 한다. 그렇기 때문에 은행의 위기는 개별금융기관의 어려움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경제시스템 전반의 교란으로 이어지게된다.
2008년 글로벌 금융위기를 거치면서 은행뿐만 아니라 비은행 금융사들이 가진 중요성이 부각됐다. 80년대 이후 진행된 금융규제 완화로 인해 소위 그림자금융권(shadow banking system: 투자은행, 헤지펀드, 사모펀드등)의 규모가 오히려 전통적인 은행보다 커졌기때문이다. 리먼브라더스 파산 직후의 극심한 혼란은 금융시스템 교란을 가져오는 대마(大馬)가 전통적 은행이 아닌 투자은행이 될 수도 있다는 점을 보여줬다.
주식시장을 압박하는 악재가 단지 순환적 경기 하강이라는 실물적요인에 그칠 경우 주가가 추세적으로 크게 하락하는 약세장(bearmarket)이 출현하지 않는다. 금융시스템의 교란이 신용경색으로 이어지고, 이런 신용경색이 다시 실물경기에 악영향을 주는 부정적인 피드백이 나타날 때 주가는 큰 폭으로 하락한다.
한국증시의 추세적 약세장에서는 늘 금융기관의 위기가 함께 나타났었다. 유럽재정 위기도 이제는 은행의 위기로 화되고 있다. 이머징증시에서의 자금이탈과 이머징 통화 약세등은 유럽은행들이 겪고 있는 유동성 위기의 산물이다. 만일 08년 리먼브라더스가 그랬던 것처럼 구미권 거대금융기관이 파산한다면 글로벌 주가도 한 단계 더 레벨 다운될 수 밖에 없다. 반대로 유럽의 은행 위기가 어느 정도 해결 국면에 접어든다면 주가도 안정을 찾을 수 있을 것이다.
글로벌 증시 전반이 반등세
거대 금융기관의 파산을 방치하지 않겠다는 관료와 중앙은행의 의지가 굳건하다는 점은 다행스러운 일이다. 이는 리먼브라더스 파산 직후 극심한 혼란을 경험한 데 따른 반면교사의 대응이라고 볼 수 있다. 경제적인 관점에서는 ‘리먼파산 이전의 세상’과 ‘리먼 파산 이후의 세상’이 확연히 구분 될 정도로 큰 비용을 치렀기때문이다.
거대 금융기관의 파산은 재앙이다. 은행의 파산은 최종적으로 유동성이 고갈될 때 현실화된다. 채권자의 인출 또는 상환요구에 응하지 못할 때 은행이 파산하게 되는 것이다. 은행이 어디서든 유동성 공급을 받을 수 있으면 최소한 파산만큼은 면할 수 있다.
요즘 유럽중앙은행은 민간은행에 대한 유동성 공급을 늘리면서 은행 파산을 막고 있다. 이런 배경하에서 10월들어 글로벌증시 전반이 반등세를 나타내고 있다.그러나 중앙은행의 유동성 지원을 통한 금융기관 파산 억제는 응급처방으로서는 적절하지만, 문제의 본질적인 해결방안이 될 수는 없다.
일시적인 유동성 위험(liquidity risk)은 중앙은행의 자금지원을 통해 통제할 수 있지만, 금융기관이 겪고 있는 위기의 성격이 구조적인 지급불능위험(insolvencyrisk)이라면 중앙은행으로부터의차입만으로 문제를 풀 수 없다. 현재 유럽민간은행들이 겪고 있는 위기는 유동성위험을 넘어서는 것으로 봐야한다. PIGS 국가의 채무상환능력이 제고되지 못할 경우 유럽은행들의 부실도 구조적으로 늘어날 수 밖에 없기 때문이다.
그렇기때문에 유럽은행 위기의 해법은 일시적인 유동성지원만으로 충분하지 않다. 재할인 창구를 통한 중앙은행의 유동성지원은 금융기관입장에서는 언젠가는 갚아야 할 차입금에 다름아니다.
99%의 희생’을 먹고 사는 ‘1%의 탐욕자
은행의 자본확충이 궁극적인 해법이다. 유럽의 관료들은 은행스스로 자본확충을 도모해야 한다고 주장하고 있지만, 은행에 대한 신뢰가 크게 떨어졌기 때문에 은행이 시장에서 자금을 조달하기는 힘들다. 유럽의 각국정부들이 자국은행에 대해 개별적으로 자본을 확충해주거나, 유럽재정안정기금(EFSF)을 통해 자금지원을 해주는방안이 논의되고 있다.
전자는 독일이, 후자는 프랑스가 선호하는 방법이지만 어느쪽이든 납세자의 세금이 금융기관지원에 들어간다는 점에서는 매한가지이다. 결국납세자들의 동의를 얻어야 금융기관 지원이 가능한 상황이다. 한편 대서양 건너 미국에서는 연일 월가금융기관을 비난하는 시위가 이어지고 있다. 시위대는 금융가들을 사회 대다수 ‘99%의 희생’을 먹고 사는 ‘1%의 탐욕자’로 규정하면서 연일 비판의 강도를 높이고있다.
자본주의의 심장 미국에서 금융자본에 반대하는 시위가 벌어지고 있는 것이다. 한편에서는 금융기관 지원에 대한 불가피성이 논의되고 있지만, 한편에서는 금융기관에 대한 분노가 표출되고 있는 모습을 우리는 보고있다. 금융이 화폐가치의 증식만이 아닌 실질적인 부를 창출할 수 있는가? 이는 오래된 논쟁거리이다. 금융에서 파생되는 수익은 불로소득이라는 편견은 여전히 존재하고있다.
또한 금융영역에서 조장됐던 과도한 레버리지가 08년글로벌 위기의 골을 깊게 했다는 비판으로부터도 금융이 자유롭기는 어렵다.
금융자본에 대한 광범위한 반발
역사적으로 보더라도 금융에 대한 인식이 항상 좋았던 것은 아니었다. 1930년대 대공황직전까지 미국의 몇몇 거대 금융기관들은 일개시장 참여자 이상의 위상을 가지고 있었다. 특히 JP모건은 미국경제를 쥐고 흔들었던 절대강자였다.
20세기초 경제발전을 이끌었던 산업은 대규모자금이 필요했던 장치산업들이었는데, 돈줄을 쥐고 있던 금융가들은 산업자본위에 군림했다. JP모건은 US스틸, GE, 듀폰 등 거대산업자본을 사실상 지배했다. 심지어는 비운의 타이타닉호를 운영했던 국제해운트러스트 IMM의 대주주도 JP모건이었다. 거대한 권력을 가진 금융가들은 대중들에게 두려움의 대상이었다.
1920년JP모건에 대한 폭탄테러는 요즘 벌어지고 있는 월가시위의 또다른 버전이었다. 1930년대 전설적 은행강도 ‘존딜린저’가 대중들에게 의적 로빈후드와 같은 대접을 받았던 것도 사회 바닥에 흐르고 있었던 금융기관에 대한 반감때문이었다. 대공황기 자신의집과 농지를 은행에 차압당했던 미국인들은 은행을 터는 강도에 열광했다.
존딜린저의 이야기는 몇 해 전 마이클만 감독에 의해 영화(공공의적: Public Enemy)로 만들어지기도 했다. 최초의 금융규제법안으로 회자되는 글라스-스티걸법은 이런 시대분위기 하에서만들어졌다.
리먼브라더스 파산 이후 3년이 지났지만, 아직 서구 선진국 경제의 회복은 미진하다. 급증한 정부부채는 연금을 깎고, 공공부문 구조조정으로 실업자를 늘리는 긴축정책으로 이어지고 있다. 구미권 사회전반의 피로도는 높아지고있다.
이런 상황에서 금융기관 지원에대해 사회적 동의를 얻는 일은 쉽지 않은 일 일수있다. 결국 이를 이끌어내는 것은 정치가들의 리더십일텐데, 그리 미덥지 못하다. 금융자본에 대한 광범위한 반발이 나타나고 있다는 점은 주식시장 참여자들에게도 큰위험이 아닐 수 없다.
글/ 김학균 대우증권 리서치센터 투자전략팀장 | <손에잡히는경제> 패널
<MBC 이코노미 매거진 11월호 P.02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