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AI, SNS 시대, 자기표현의 벽을 넘어서는 방법
최근 필자가 접하는 몇 가지 질문 중 하나는 이런 것이다. “어떻게 하면 자기 생각을 말과 글로 제대로 표현할 수 있죠?” 필자는 방송기자 40년 경력에다 (사)한국신문방송인협회의 회장이라는 명함을 돌리다 보니 주변 사람들로부터 그런 질문을 받게 마련이다. 그러나 필자라고 뾰족한 수가 없어 그런 질문 앞에선 언제나 머뭇거리게 마련이다.
왜냐하면 내 생각을 말과 글로 표현하는 데 어려움을 겪는 건 마찬가지이기 때문이다. 내 생각은 분명히 있는데 말로 꺼내려 하면 입안에서 엉키고, 글로 쓰려면 첫 문장부터 막히곤 한다.
협회의 시상식 인사말을 준비하는 데도 몇 번을 고쳐 쓰는지 모른다. 만약 오후 2시 행사라면 오전에 초안을 잡았다가 점심을 먹으면서 ‘아무래도 이건 아닌 것 같은데’ 하는 느낌이 들어 행사 시간이 임박해서 부랴부랴 두 번째 생각을 메모지에 정리해 보지만 역시 잘 써지지 않는 건 첫 번째 생각 때와 별로 다르지 않다. 원고가 준비되었다손 치더라도 단상에 올라가 마이크 앞에 서 있노라면 고친 곳이 많아 헷갈리고 내가 무슨 이야기를 하려고 한 거지? 하면서 정신이 아뜩해질 때가 많다.
인사말을 준비할 때만 그런 건 아니다. 무슨 글이건 글을 쓸 때는 더하다. “아. 그 생각을 쓰면 되겠어”하고 한참 고민 끝에 떠올린 문장을 쓰려고 책상 앞에 앉으면 거짓말처럼 그 문장이 사라지고 엉뚱하게 다른 생각이나 문장이 턱하고 그 자리를 대신 차지하고 있었다.
결국 글은 두세 문장 이상 가지 못하고 “어라? 이게 아닌데” 하면서 두 손으로 머리를 쥐어짜면서 고민에 빠진다. 그런 상태를 ‘백지 공포’라고 한다면 나야말로 늘 그런 공포에 압도당하며 산다고 해도 지나친 말이 아닐 것이다.
‘쓰지 않고 말하지 않으면 되지 않느냐?’고 할지 모른다. 물론 맞는 말이다. 그렇지만 말 안 하고 글 안 쓰고 살아갈 수 있는 사람은 이 세상에 아무도 없다. 지금 우리가 스마트 폰 등에서 전례 없는 표현의 홍수 시대에 살고 있는 것만 봐도 자기 생각의 표현 능력은 곧 자기 존재의 증거인 것 같다.
다만 온갖 종류의 무수한 표현이 범람하면 할수록 오히려 자기 생각을 정확히 표현하는 사람들의 숫자가 줄어드는 듯하다. 언제나 말 잘하고 글 잘 쓰는 이들 혹은 가짜뉴스의 교묘한 언어를 조작하는 사람들이 말과 글에 서툴거나 의도적으로 참여하지 않는 사람들의 말과 글의 공간을 대신 차지하기 때문이다.
이런 점에서 자기 생각을 말이나 글로 잘 표현하는 것은 ‘말로 먹고 산다’는 정치인들은 물론이고 일반 민주시민들이 갖춰야 할 필수적인 자질이 되었다. 그러니까 다채널 소통의 SNS 시대는 우리 모두 ‘작은 미디어의 운영자’로서 행동해야 한다. 자기 생각을 말과 글, 곧 언어로 표현함으로써 세상과 관계를 맺어야만 타인의 언어에 끌려가지 않게 되고 자신의 존재를 세상에 드러낼 수 있으니까 말이다.
특히 쳇 GPT 등 인공지능이 글을 써주고 심지어 말까지 흉내 내는 세상이라지만 마지막 순간에 ‘이게 내 생각’이라 결정하고 책임지는 주체는 여전히 인간일 수밖에 없다. 그러니 인공지능을 글쓰기와 말하기에 활용하든 아니든, 내 생각을 정확하게 말과 글로 표현할 수 있는 능력을 키워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주권자로서 권리도 민주주의도 지킬 수 없게 되었다.
◇왜 자기표현은 어려울까?
자기표현의 어려움은 단순히 말솜씨, 부족이나 글재주가 부족해서만은 아니다. 그 뿌리는 깊다. 불교의 근본 사상인 제행무상(諸行無常)은 우주의 모든 것에 영원한 게 없고, 모두 변화한다는 뜻이다. 생각 역시 그렇다. 지금 떠오른 생각조차 순간순간 계속 바뀌고 있다. 그래서 지금 떠오른 생각을 붙잡아 글이나 말로 표현하기가 어렵다. 지금 생각은 이미 흘러간 것이 된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할까?
첫째, 떠올랐던 생각을 정리하자. 머릿속에는 수많은 단상이 흘러가는데 이를 구조(그림이나 도표)적으로 만들지 않으면 말이나 문장으로 꺼낼 때 산만하다. 필자가 생애 첫 50분짜리 다큐 원고를 쓰다가 밤새 한 문장도 쓰지 못하고 새벽에 펑펑 울었던 적이 있다. 무엇을 쓰고 말할지 정리하지 않으면 필자처럼 된다.
둘째, 완벽주의의 덫에서 벗어나자. 말하기 전에 더 좋은 표현은 없을까? 고민하다 아예 입을 뻥긋 못하거나 글을 쓰다 지워버리기를 반복하다가 원고를 끝내지 못하는 경우가 많다. 표현은 다듬어야 빛나지만 다듬기 이전에 말이라면 우선 내뱉어 보고, 글이라면 끝까지 쓰는 용기가 필요하다. 다듬는 건 다음으로 미뤄도 된다.
셋째, 두려움과 비교 심리를 버리자. ‘내가 이런 말 해도 괜찮을까?’ ‘저 사람처럼 유창하지 못한데’ 하는 생각이 스스로 입을 막고 글을 못 쓰게 한다. 그러나 자기표현은 경연대회가 아니다. 자기 목소리는 세상과 연결하는 통로임을 잊지 말라.
◇자기표현, 어떻게 훈련할 것인가?
첫째, 쓰기를 습관화한다. 매일 짧게라도 적는 연습이 필요하다. 길게 쓰려하지 말고 하루에 한 문장만이라도 오늘 느낀 것을 문장으로 기록해 보자. 이를테면, ‘오늘은 가을 햇빛이 유난히 따뜻했다. 내 마음도 그만큼 가벼워졌다’고 써라. 이런 문장은 쌓여가면 자기를 표현하는 언어의 씨앗이 된다.
둘째, 말하기의 생활화. 중요한 발표가 아니더라도 소소한 일상에서 자기 생각을 말로 표현하는 습관을 들여라. 가족과 대화할 때 친구와 토론할 때 ‘나는 이렇게 생각한다’는 문장을 의도적으로 꺼내라. 처음엔 어색해도 점차 자기 어법이 생긴다.
셋째, 좋은 글과 말을 흡수하기. 표현 능력은 결국 언어의 자산(資産)에서 나온다. 고전문학, 명연설, 훌륭한 칼럼을 자주 읽어야 한다. 필자는 셰익스피어의 4대 비극과 검은색 스키마스크가 더 유명한 멕시코 사파티스타 반란군 부사령관 마르코스의 말과 글을 모은 『우리의 말이 우리의 무기입니다』를 매일 몇 페이지 읽는다. 마르코스는 총이 아닌 언어를 무기로 선택한 사이버 시대의 혁명가이자, 탁월한 문학적 재능으로 세계인의 관심을 받고 있는 베일에 싸인 인물이다.
그런 종류의 책이 싫다면, 여러분에게 파타고니아 창업자 이븐 쉬나드의 자서전 『파타고니아, 파도가 칠 때 서핑을』,과 이 시대 최고의 여행작가, 빌 브라이슨의 『나를 부르는 숲』을 추천한다. 전자는 문장 표현이 수사적이고 후자는 사소한 사건을 유머러스하게 표현하는 방법이 뭔지를 보여준다.
자기표현은 단지 개인의 능력 문제가 아니다. 그것은 사회적 의미가 있다. SNS 시대 자기표현을 못하는 다수는 말 잘하고 글 잘 쓰는 소수에게 여론을 내주는 것이다. 그 결과 왜곡된 정보가 힘을 얻고 민주주의의 건강은 훼손된다.
특히 공정한 선택을 가로막으며 사회적 갈등을 증폭시켜 개인과 집단에 심각한 피해를 주고 시민의 사고력과 자유를 갈아먹어 사회 전체를 혼란에 빠뜨리는 가짜뉴스, 그것을 퇴치할 수 있는-진짜와 가짜뉴스를 가려내기가 쉽지 않겠지만-방법의 하나가 자기 목소리를 갖춘 건전한 시민들이 적극적으로 발언하고 글을 남기는 것이다.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자기 생각을 말과 글로 표현하는 일은 누구에게나 어렵다. 그러나 그 어려움에 우리의 성장과 자유가 들어있다. 자기표현은 단순한 기술이 아니다. 자기의 존재를 세상에 각인하는 작업이다.
필자는 여전히 글을 쓸 때 막막함을 느끼며 많은 사람이 필자를 주목하는 단상에 오르면 늘 긴장하고 떨린다. 하지만 수십 년 경험이 필자에게 가르쳐준 한 가지가 있다. 자기표현은 훈련으로 조금씩 나아지고 그 과정 자체가 삶을 깊게 한다는 사실이다.
인공지능, SNS 시대가 깊어질수록 말과 글, 즉 언어의 중요성은 오히려 더 커진다. 자기 생각을 말과 글로 진솔하게 표현할 수 있을 때 우리는 타인의 언어에 휘둘리지 않고 스스로 선택하는 주제가 되며 그것이야말로 진정한 자유인이 되게 하는 길이다.
속담에 ‘가는 말이 고와야 오는 말이 곱다’고 했다. 예나 지금이나 자기표현이 곧 인간관계를 결정한다. 오늘부터 일기를 쓰던가-필자는 25년째 노트에 손으로 쓴다-하루 세 문장씩 짧은 글을 만들어 보자. 그것이 자기표현을 잘할 수 있느냐? 는 질문에 대한 필자의 답변이다. 자~ 너와 나의 멋진 자기표현을 위해 건투! 가짜뉴스에서 민주주의를 지키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