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말레이시아 쿠알라룸푸르에서 열린 아세안(ASEAN) 외교장관회의는 이재명 정부의 외교 노선과 다자무대 전략을 가늠할 수 있는 무대였다.
장관 인사청문회 미비로 박윤주 외교부 제1차관이 대표로 나선 가운데, 북한이 말레이시아와의 외교 단절로 불참하면서 한반도 정세에 대한 메시지의 방향도 주목을 받았다.
무엇보다 눈에 띈 것은 한미일 외교장관이 모인 3자 회의였다. 주요국과 양자 대면이 여의치 않은 상황에서 미국의 제안으로 성사된 이 회의는 3국 안보협력의 중요성을 재확인하는 계기가 됐다는 평가다.
외교부 고위 관계자는 “한미일 모두 전략적 공감대가 형성돼 있었고, 이를 바탕으로 회담이 추진됐다”고 밝혔다.
박 차관은 회의에서 북한 비핵화, 역내 안보 환경, 공급망·AI 등 경제 협력을 포함한 공동 관심사 전반을 공유했다. 특히 북한을 향한 '억지력 유지'를 강조하면서도, 대화의 필요성과 한국 정부의 평화적 접근도 설명했다.
박 차관은 “우리는 비핵화에 대한 원칙을 견지하면서도, 외교적 공간을 열어두자는 입장을 갖고 있으며 미국과 일본도 이에 공감하고 있다”고 설명했다.
한편, 미일 측은 공동 발표문에서 여전히 대북 억지 및 사이버 위협 대응에 중점을 뒀고, 이는 향후 지속적인 조율이 필요함을 시사한다.
박 차관은 이어진 아세안 관련 외교회의들(한-아세안, 아세안+3, EAS, ARF)에서도 대북 도발에는 단호히 대응하되, 외교적 해법을 병행하겠다는 입장을 밝혔다.
그는 기자들과 만나 “여러 국가가 남북 대화 재개에 대한 한국의 의지에 지지를 보냈고, 아세안도 건설적 역할을 하겠다는 의사를 나타냈다”고 전했다.
올해 ARF 외교장관회의는 북한의 첫 불참으로 기록됐다. 단교 상태인 말레이시아가 초청에 소극적이었고, 북한도 러시아 등 양자 외교에 집중하고 있는 점이 작용한 것으로 보인다.
그 빈자리를 채우듯, 러시아를 향한 참가국들의 대응은 예년과 미묘하게 달랐다. 말레이 외무장관은 갈라 만찬 중 라브로프 러시아 외무장관을 언급하며 농담을 건넸고, 행사 카메라가 라브로프 장관을 수차례 포착한 점도 눈길을 끌었다.
또한 미 국무장관과 라브로프 장관이 행사 시작 전 약 30초가량 대화를 나누는 장면도 포착돼, 지난해보다 러시아의 존재감이 달라졌다는 평가도 나왔다.
다만, 한국 측 박윤주 차관은 러시아 측과의 별도 접촉은 없었던 것으로 전해졌다.
이번 회의는 한국이 ‘국익 중심 실용외교’를 강조하는 가운데, 아세안과의 협력 강화 기조를 다시 한번 확인하는 자리이기도 했다. 박 차관은 아세안 국가들과의 양자 면담에서 협력 확대 의지를 밝혔으며, 아세안이 한국의 3대 경제 파트너 중 하나라는 점에서 앞으로도 외교적 중요성이 커질 것으로 전망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