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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5년 08월 02일 토요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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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기 때마다 보여준 돌파력, 대한민국의 재도약을 기대한다

 

※본 기사는 M이코노미매거진에 실린 기사입니다. 

 

한 번도 일어난 적 없었던 기적을 일으킨 소년공, 그는 왜 정치에 뜻을 뒀을까?

 

한 번도 일어난 적이 없는 일은 반드시 일어나는 것일까? 이번 대선에서 그런 일이 일어났다. 일찌감치 그의 당선 확률이 (여론조사에서) 높았음에도 그를 지지했던 사람들과 그렇지 않았던 사람들은 그의 대통령 당선에 새삼 놀라움을 금치 못하고 있을 것이다. 그것은 상상력의 실패도 아니요, 여론조사 분석의 오차에서 혹은 실패에서 기인하는 것도 아닐 것이다. 그야말로 고비마다 위기를 돌파하고 헤쳐나온 그의 파란만장한 정치 편력에 대한 경외감이다.

 

이재명 대통령은 1989년에 사법연수원을 수료하고 성남시에서 변호사 사무실을 개업했다. 성남시는 경북 안 동에서 태어난 그가 어린 시절을 보내고 소년공을 했던 어려운 시절을 보낸 그의 두 번째 고향이나 마찬가지다. 그는 1995년 변호사 사무실을 하면서 성남시민모임에서 시민 운동을 시작한다. 당시 성남시에는 여러 이슈가 있었다. 분당 백궁 아파트 용도 변경, 분당 파크뷰 특혜 분양 의혹 등 등. 당시 성남시장이 비리를 저질렀다는 것이었다. 시민 운동을 하다가 검사 사칭 사건이 이때 생긴다.

 

어쨌건 그는 성남 지역에서 시민 운동을 열심히 하면서 2003년부터 존재감이 발휘되기 시작한다. 당시 성남시에 있는 두 개의 병원이 적자로 폐업하게 된다. 되는데 지역에서는 병원이 부족하니 성남에 시립병원을 만들자는 여론이 형성된다. 이 일을 앞장서 주장하는 한 이가 바로 이재명이었다. 성남 시립병원 설립 운동을 하면서 그는 첫 번째 단식에 들어간다.

 

시립병원을 만들어 달라는 주민 조례안 을 2004년 12월에 발의했으나 성남시의회는 이를 보류했 고 시민 운동을 하던 사람들은 의회 안으로 들어갔다. 여기서 시의원들과 시민운동을 하는 사람들 간에 몸싸움이 벌어진다. 이 과정에서 31명이 연행되기도 했는데, 당시 몸싸움 충돌을 주동한 사람이 ‘이재명’이라며 수배령이 내려졌다.

 

그에 따르면, 본인이 정치를 시작한 계기였다고 한다. 수배를 피해 선배의 도움으로 교회의 지하실에 숨어 있던 그는 지하실에서 선배가 싸다 준 도시락을 먹다가 서러움에 왈칵 눈물을 쏟고 나서 “현실을 바꾸자, 내가 시장이 되어 내 손으로 바꾸자”고 결심했고, 이 결심을 계기로 정치인 이재명이 시작되었다고 나중에 회고했다.

 

◇내 손으로 현실을 바꾸자 했던 행동파 정치인

 

그는 지난 2005년 8월, 당시 노무현 대통령 시절에 만든 열린우리당에 입당한다. 그리고 다음해인 2006년, 그는 성남시장에 출마해 첫 번째 선거를 치루게 된다. “무능 부패로 잃어버린 4년 되찾는 1등 도시의 꿈”이 그의 선거 구호였다. 하지만 낙선한다. 사실 2006년에는 노무현 대통령의 임기가 후반기로 들어가면서 인기가 떨어지는 상황이었기에 열린우리당 소속의 경기도 지자체장 후보들이 구리시를 빼고는 거의 초토화되었다.

 

다음 해인 2007년 대선에서는 이명박 대통령이 당선됐다. 야당에선 열린우리당 탈당파 80명, 당시 민주당 탈당파 4 명, 손학규 전 경기도지사를 주축으로 한 한나라당의 일부 탈당 세력과 시민사회 세력을 주축으로 대통합민주신당(大統合民主新黨)이 만들어졌는데, 그해 8월 5일 열린우리당과의 합당을 통해 의석수 143석으로 원내 제1당이 되었다.

 

당시 대선후보 경선에서는 정동영, 손학규 후보가 맞붙어 정동영 후보가 43.8%로 손학규 후보(34%)를 눌렀다. 이때 그는 정동영 후보를 지지하는 모임인 「정동영과 통하는 사람들(정통)」 회장을 하면서 후보 캠프의 비서실 수석 부실장을 했다. 그가 중앙 정치 무대로 올라온 셈이다. 그러나 정동영 후보는 대선에서 이명박 후보에 패해 친노 세력은 정치적으로 큰 타격을 입었다.

 

당시 정통 사관학교 사진을 보면 정동영 후보 옆에 그가 있고, 옆에 정청래 현 의원이 있다. 여담이긴 하지만 지난 총선 때 정동영 국회 의원이 공천을 못 받다가 공천을 받아 경선의 기회를 얻은 것은 당시 대선 모임의 인연이 작용한 게 아니냐는 말이 돌았다.

 

이듬해 2008년 2월 대통합민주당은 민주당과 합당하여 통합민주당(약칭 민주당)으로 이름을 바꿔 창당하고, 손학규를 대표최고위원으로 선출했다. 그리고 이명박 정부에 대한 견제를 계속했다. 이명박 대통령 취임 이후 집권 2개월 차인 4월 9일, 제18대 국회의원 선거가 치러졌다. 선거 결과 여당인 한나라당이 과반을 차지했으며 제1야당 통합민주당은 참패했다. 그는 당시 성남시 중원구에 출마 했다가 경선에서 지고 민주당의 험지로 불리는 성남 분당 구에서 공천을 받아 출마했으나 또다시 쓴잔을 마셔야 했다.

 

그는 비록 낙선했지만 중앙 정치 무대로 올라서 성남 지역위원장을 하면서 민주당 부대변인을 맡았다. 그에게 부대 변인 자리를 준 사람은 당시 정세균 대표였다. 지난 대선때 정세균 후보가 대선에 출마했다가 그만두겠다고 하자 “저를 만든건 정세균 대표”라고 한 것은 정 대표 시절 부 대변인을 했다는 의미가 담겨 있다.

 

성남시장과 국회의원 선거에서 떨어지고 중앙정치 무대에 올라오긴 했지만 뭔가 길이 잘 안 보이는 상황은 아니었다. 그로서는 첫 번째 고비였다. 그는 승부수를 던져 성남시장에 출마를 결심했다. 당시에는 다들 지방의 시장보다 국회의원을 하고 싶어 하는 분위기였다. 하지만 그는 이 점에서 달랐다. 한 번 떨어졌던 시장에 재출마를 결심했으니까.

 

◇지방정치 무대에서 중앙 정치 무대로, 승부수를 거꾸로 던진 실용주의자

 

지역 활동을 오래 해서 그렇다고 할 수 있겠지만 뭔가 승부수를 던진 느낌을 준다. 왜냐하면 그때까지만 해도 대통령이 되고자 밑바닥에서부터 올라가는 경우가 거의 없었다. 대개 중앙 정치 무대에서 활동하다 되는 게 통상적인 일이었고 풀뿌리 정치에서 올라가는 경우 거의 없었다. 지금은 정치 문화가 많이 바뀌어서 풀뿌리 정치인도 중앙 정치 무대에 많이 진출하지만 당시만 해도 중앙정치, 큰물에서 놀아야 하는 상황이었다. 그런데 그는 반대 밑바닥으 로 내려갔다.

 

2010년 그는 성남시장 선거에 재도전해 처음으로 당선된다. 이때부터가 지금의 그를 만든 기초가 되었다고 봐야 한다. 그는 성남시에서 좋은 평가를 받으면서 승승장구했다. 별난 사람이기도 했다. 성남시장에 당선되자마자 성남시 모라토리움, 즉 파산선언을 했다. 전임 이대엽 시장이 보수 쪽 시장이었는데, 전임시장이 돈을 많이 써서 성남시는 돈이 없다고 선언해 버린 것이다.

 

2010년 7월 그는 “판교신도시 조성 사업비 정산(定算)이 예정대로 이달 중 완료되면 판교특별회계에서 LH공사와 국토해양부 등에 5천200억 원을 내야 하지만 현재 성남시 재정으로는 이를 단기간에 갚을 능력이 안돼 지급유예 (支給猶豫)를 선언한다”고 밝혔다.

 

‘판교특별회계’란 판교 지역을 개발하기 위해 회계를 따로 운영하는 것이다. 개발이익 등은 향후 국토부, LH 등과 협의해서 정산하게 되고 그 이후에 일반회계로 편입하게 된다. 민선 4기 이대엽 시장은 공원로 확장공사, 은행동 주거 환경 개선 공사 등을 목적으로 1조 원 정도의 사업을 추진했는데 돈이 부족해 판교특별회계에서 5천200억원 가량을 갖다 썼다. 그는 전임시장이 전용한 돈을 원래대로 돌려놓아야 하는데 돈이 부족하다며 지급유예를 선언한 것 이다.

 

부자 도시로 알려진 성남시의 갑작스러운 모라토리엄 선언에 성남시는 전국적인 관심을 받게 되었다. 특히 2014년 1월 그가 3년 6개월 만에 모라토리엄을 극복했다며, 시장 연임을 위해 모라토리엄 극복을 적극 홍보하면서 성남시와 시의회의 대립은 격화됐다. 시의회는 이 시장의 모라토 리엄 졸업 선언에 대해 “정치적 쇼에 불과하다”는 입장을 폈다.

 

국토부에서 5천200억 원의 정산을 요구한 적이 없었으며, 오히려 빚이 늘었다고 주장했다. 반대편은 “이재명 시장은 허리띠를 졸라매서 빚을 갚았다고 주장했는데 사실은 정반대”라며 “민선 5기(이재명 시장)에 성남시의 부채와 채무가 눈덩이처럼 늘어나, 채무는 2010년 90억에서 1천193억 원으로 13배 증가했고 부채는 825억 원에서 2천 100억 원으로 2.5배 증가했다”고 주장했다.


어쨌거나 그는 시장이 되자마자 전임시장과 각을 세우고 ‘내가 3년 6개월 동안 성남시를 잘 이끌어서 바닥난 재정의 곳간을 많이 채웠다’면서 정치적 큰 반향을 일으켰다. 그는 이어 “성남시장실에 돈 봉투를 들고 오는 사람이 왜 많은가? 시장실을 투명하게 하겠다”면서 CCTV 설치를 지시했다. 또 무상 교복 정책이 호응을 받아 2014년에 55.1%의 득표로 재선에 성공했다.

 

그의 당시 선거 포스터에는 “빚 갚았습니다. 부채 4천572 억 원 청산 모라토리움 졸업, 빚을 갚았다”는 성과를 내세워 “성남은 합니다”라고 썼다. 대선에서도 이와 비슷한 캐치프레이즈였다. “이재명은 합니다”라고 했다.

 

◇중앙정부의 정책에 맞선 그의 두 번째 단식

 

그는 성남시 3대 무상복지 사업을 내 걸었다. 성남에서 3 년 이상 거주한 24살 이상에게 분기별로 50만 원을 배당해 주고, 성남에서 아기를 낳으면 산후조리 무상으로 해주며, 중학교에 입학하면 교복을 무상으로 지급한다고 해서 많은 인기를 얻었다. 성남시에 땅이 많이 있지만 다 규제에 묶여 있어서 기업들이 못 들어오는 상황이었다. 그는 규제를 풀어 용도 변경 등을 해주고 기업들을 유치하여 그 돈으로 무상복지를 했다. 이 돈을 푸는 과정에서 특혜 시비나 부정부패가 있었다는 게 검찰의 주장이었고 재판을 받아왔다.

 

2016년 6월, 그는 서울 종로구 KT 광화문지사 앞에 천막을 치고 또 한 번 단식에 들어간다. 중앙정부에서 지방에 주는 교부금 지급 방식이 바뀌어 세금이 많이 걷히는 지방자치 단체들은 교부금에서 손해를 보도록 했다는 이유 때문이었다. 성남시는 부자 동네가 섞여 있다. 그렇지 않은 지역도 있지만 교부금에서 불이익을 받게 된 것이다. 그는 실험적 정책을 실시해 오고 있는 지방 단체에 대한 보복이라고 주장했다.

 

단식 8일째 더불어민주당 소속 추미애, 표창원, 손혜원 의원이 방문했고, 이전에 잠재적 대선 주자인 문재인 전 대표도 방문했다. 정찬민 용인시장, 이재정 경기교육감, 정세균 국회의장, 양기대 광명시장, 조순덕 민주화실천가족운 동협의회 상임의장, 소설가 이외수 씨, 함세웅 신부, 박원순 서울시장 등 150여 명의 인사가 방문하는 등 농성장은 문전성시였다.

 

고양·과천·수원·용인·화성시 등 경기 지역 5곳의 시장이 지지했다. 그러나 행정자치부는 “재정 여건이 좋은 지자체의 재원을 나누면 형편이 어려운 지자체에 효과가 있다”면서 “경기도가 성남 등 6개 시에 조정교부금 2조 6천억 원 중 52.6%(약 1조 4천억 원)를 몰아주는 건 특혜”라며 물러서지 않았다.

 

그의 단식은 성남시 이익을 대변하는 것처럼 보이고, 그의 실용주의를 엿볼 수 있는 것이긴 하지만 역으로 생각하면 나라 전체보다 성남시만 생각하는 행보라는 비판이 일기도 했다. 그럴수록 그는 성남에서 인기가 올라가고 있었다. 그가 가진 정치적 효능감이라고 할까. 성남 시민들은 자신의 호주머니에 돈이 들어오고 기업들이 들어오니까 좋아 했다. 사실 기초단체장이 그처럼 부각된 경우는 흔치 않았다.

 

◇“내 굽은 팔을 만든 굽은 세상을 바르게 펴고 싶다” 대선 후보 경선

 

2016년 7월, 그는 민주당 당대표를 뽑는 전당대회를 앞두고 SNS에 찬반 투표를 붙인다. ‘더불어민주당 당대표 후보 출마 여부 고민 중, 출마할까요, 말까요? (시장직 사퇴는 하지 않아도 됩니다)’ 이에 대해 찬성이 많았다. 이때 민주당의 강성 지지층 쪽에서 그에게 관심을 가지기 시작했다. ‘제2의 노무현’이라는 얘기가 나왔다. 하지만 그는 당대표에 출마하지 않았다. 그러다가 2016년 말 박근혜 대통령 탄핵 촛불 집회에 나와 “박근혜는 이미 대통령이 아니다” 라고 발언함으로써 주목을 받고 인기를 얻어 대선 출마로까지 이어졌다.

 

2017년 문재인 전 대통령이 당선됐던 대선의 민주당 경선에 출마한다. 문재인·안희정·이재명·최성 등 4파전으로 경선이 진행됐다. 당시 그의 표어는 “진짜 교체! 이재명은 합니다!”였다. 성남시장 출마 때의 캐치프레이즈와 비슷한 뉘앙스다. 대선 출마 선언 후 그는 ‘병역면제’ 부분이 공격 포인트가 되자 정면 돌파했다. 소년공 시절에 용접 기계에 다치면서 병역면제를 받은 건데 “나의 굽은 팔을 만든 굽은 세상을 바르게 펴고 싶다”면서 자신의 굽은 팔을 보여 준 것이다.

 

대선 경선 과정에서 지지율 1위인 문재인 후보에 날을 많이 세운 그는 당시 강성이었기 때문에 ‘재벌 해체’를 주장했다. “문재인 자문 그룹에 재벌 기득권이 모였다”면서 문후보를 비판했고, “자꾸 말을 바꾼다”거나 문재인 지지자 들의 문자 폭탄을 비판하며 각을 세웠다. 결과적으로는 그는 3등에 그치긴 했지만 대선 경선은 성남시에 머물렀던 그를 완전히 중앙 정치 무대로 끌어올렸다. 이때부터 그는 전 국민에게 특히 민주당 당원과 지지층에게 자신의 존재 감을 드러내 보였다.

 

◇경기도지사의 당선, 그에게 닥친 두 번째 고비

 

민주당 대선 경선에서 중앙 정치인이 된 그는 배우자 김혜경 여사와 함께 예능 프로그램에 출연해 대중에게 친근감을 심었다. 그리고 2018년 6월, 경기도 도지사 당내 경선에서 친문 후보인 전해철을 물리치고 민주당 경기도지사 후보가 되어 당선된다. 그가 당선되기 전 경기도 도지사는 손학규 · 김문수 · 남경필 등 주로 보수성향 도지사가 자리를 차지해 왔다. 그런데 민주당 후보인 그가 당선됨으로써 그는 완전히 중앙 정치 무대에서 주요 대선 후보군으로 떠오르기 시작했다. 경기도 지사에 오른 뒤 두 번째 정치적 고비를 맞았지만 기사회생 했다.

 

경기도지사 시절의 성과도 그가 대선후보가 되는 데 많은 영향을 미쳤다. 이를테면 이재명 경기도지사 하면 떠오르는 ‘경기도 계곡 불법시설 철거’다. 계곡에 평상을 설치해 놓고 자릿값을 받던 걸 다 철거해 버리면서 좋은 평가를 받았다. 이를 두고 누구도 잘못했다고 하지 않았다.

 

특히 코로나19 유행 초기인 2020년 2월, 경기도 과천시 신천지 총회 본부에 직접 가서 신도 명단을 요구하고, 강제 역학조사를 실시하게 한 부분도 큰 관심을 받았다. 공개적 이고 강압적으로 밀어붙이면 다 숨어버리는 것 아니냐, 물 밑에서 코로나19가 더 퍼지는 것 아니냐는 논란도 있었지 만 결국은 좋은 평가를 받았다. 경기도민들에게 코로나에 따른 재난기본소득을 나눠준 부분도 전국적인 관심을 받았다. 기본소득은 그의 트레이드 마크가 되어 당시에는 좋은 평가를 받고 두 번째 대선 출마로 나갈 수 있었다.

 

◇역대 대선 최소 득표율 차 0.73%p의 패배를 극복한 정치력

 

그의 두 번째 대선 출마 당시 가장 강력한 경쟁자는 문재인 정부 초대 총리를 지낸 이낙연 전 민주당 대표였다. 이낙연 전 대표가 지지율 1등을 달리다가, ‘박근혜 사면’ 얘기를 꺼내면서 지지층으로부터 비판을 받고 지지율이 꺼지기 시작하자 그가 치고 올라왔다.

 

그러나 대장동 의혹을 둘러싸고 민주당 대선 경선에서 치열한 ‘명낙 대전’이 벌어졌다. 총선에서 친문(친문재인계) 측이 많이 당선됐던 시기이다 보니, 민주당 의원 수만 보면 이낙연 후보가 더 강세였다. 일각에서는 대장동 의혹이 불 거지고 경선이 조금만 길었으면 어떤 결과가 나왔을지 모르겠다는 이야기도 한다. 결국 대중적인 인기를 타고 올라 온 그가 대장동 의혹의 장벽을 넘어 민주당의 대선후보가 되지만 국민의힘 윤석열 후보와 맞대결에서 0.73%p 차이의 역대 최소 득표율 차이로 패배하게 된다.

 

대선에서 지면 대개 대선 패배의 책임을 지고 정계를 떠나 있는 경우가 많은데 그는 달랐다. 국회의원 선거에 도전하게 된다. 2022년 3월 9일 대선에 이어 6월에 지방선거가 있었는데, 당시 송영길 민주당 대표가 서울시장에 출마하면서 의원직을 내려놓자 그 지역구에 전략공천을 받아 재보궐 선거에서 국회의원 배지를 달게 됐다. 선거에서 그는 당선됐지만 당은 지방선거에서 참패했다.

 

당시 비명계에서는 “지방선거 참패의 가장 큰 원인은 이재명과 송영길의 출마”라는 비판이 터져 나왔지만,, 그는 이런 비판 속에서도 2022년 8월에 77.77%의 득표율로 당대표가 된다.

 

◇대통령을 비판한 세 번째 단식, ‘이재명 체포동의안’ 가결과 기각

 

그의 사법 리스크 때문이었다. 검찰의 수사와 기소가 계속 반복됐고, 2023년 2월 27일 처음으로 ‘이재명 체포동 의안’이 국회 본회의에 올라왔다. 대장동 · 위례 · 성남FC 사건 체포동의안은 부결되었다. 검찰은 더 세게 몰아쳤다. 대장동 · 위례 · 성남FC 사건을 불구속 기소한 직후, 검찰은 쌍 방울 대북 송금 관련해서 소환 조사를 예고한다. 이때 그는 또 한 번 승부수를 던졌다. 윤석열 대통령을 비판하면 서 단식농성을 시작한 것이다. 당시 한동훈 법무부 장관은 “개인 비리 수사에 단식으로 맞서겠다는 것이 워낙 맥락 없는 일이라서 국민이 과연 공감할지 모르겠다”고 비판했다.

 

이러한 상황에서 2023년 9월 21일, 두 번째 ‘이재명 체포동 의안’이 국회 본회의에 올라왔다. 이번에는 백현동 · 쌍방울 · 대북 송금 건이었다. 결과는 찬성 149표, 반대 136표로 가결. 비명계 의원들이 승부수를 던진 결과였다. 국회에서 체포동의안을 가결한 만큼 그가 구속이 될 거라는 분석이 당시는 많았다. 하지만 영장 전담 판사는 “다툼의 여지가 있고 방어권 보장이 필요하다”며 영장을 기각시켰다. 이때 부터 비명계는 엄청난 비난의 대상이 된다.

 

그는 지난 3월 한 유튜브 방송에 출연해 체포동의안 가결을 두고 “당시 당내 일부와 검찰이 다 짜고 한 짓이다”라고 했다. 그러면서 “민주당 유력인사가 내게 사법처리가 될 거 니까 당대표를 사퇴하라며 시점까지 정해줬다. 나중에 보니, 영장 청구 시점과 거의 맞아 떨어졌다”고 밝히기도 했다.

 

구속영장이 기각되면서 세 번째 고비를 넘긴 그는 2024년 4월 총선 전 비명계가 줄줄이 당을 떠난 뒤, 총선에서 민주당은 175석, 범야권 192석으로 압승을 거뒀다. 민주당은 명실상부한 ‘이재명당’이 되었다. 윤석열 정부에서 이재명 대표는 ‘범야권 192석’이라는 압도적인 의석수로 존재감을 과시했다. 윤석열 대통령은 계엄을 한 뒤 탄핵이 되었고, 4월 27일에 민주당 대선후보로 선출이 됐다.

 

대선후보가 되고서도 고비를 맞았다. 공직선거법 위반 사건 때문이었다. 1심에서 다음 대선에 나올 수 없는 징역형을 받았지만, 2심에서 무죄가 나오면서 사법 리스크 끝난 거 아닌가 했었는데, 대선을 약 한 달 앞두고 대법원에서 이 사건에 대해 유죄 취지로 파기환송을 결정한 것이다. 유죄 확정자가 대선후보로 출마한다는 비판을 받았지만, 파기환송심은 대선 이후로 미뤄짐으로써 그는 마지막 위 기마저 극복할 수 있었다.

 

◇진짜 대한민국의 재도약을 위한 선봉에 서서

 

2024년 12월 5일 미 CNN은 “화요일 밤, 윤 대통령이 계엄령을 발표한 지 한 시간도 채 되지 않아, 이재명 대표와 국회의원들이 계엄령을 해제 투표를 하기 위해 분주하게 울타리를 넘어 건물 안으로 들어가면서 생중계로 국회로 달려갔다. 이후 동영상은 소셜 플랫폼 X에서 수천만 회 조회 되며 입소문을 탔다”고 그의 활약을 다뤘다.

 

그는 이미 미 트럼프 2기 행정부에 대한 국가적 대비와 AI 정당 인프라 구축으로 대한민국의 미래를 준비했다. 김현종 당대표 외교 안보 특별보좌관 등 전문 인사들을 영입하고, 국제통상 환경 변화 대응 방안 마련을 위해 외교, 안보, 경제 관련 당내 특위들을 설치했다. 주한미국상공회의소, 삼성, SK, 현대 등 핵심 수출기업들과 직접 만나 현안을 듣고 비상 경제에 대한 정치권의 대응 방안을 모색했다.

 

또한 당내 AI 특위를 설치하고, 직접 위원장을 역임하여 유발 하라리와 같은 세계적 석학과 대담하는 등 대한민 국이 세계적으로 국가 미래 먹거리 사업을 선도할 수 있는 정책적 대비에 앞장섰다.

 

우리나라는 1960년~1980년대 중화학공업 중심의 수출 주도 전략으로 1차 S 커브를 그렸고, 1990년대 이후 반도체, 자동차, 전자 등 첨단 제조업을 중심으로 2차 성장곡선을 탔다. 이제 3차 S 커브를 준비해야 하는 시점에서 국민들은 그를 대통령으로 뽑았다. 그는 이제 정당을 넘어서 대한민국이란 거함의 키를 잡고 각 선실에 차단시설을 내려 물이 들어오지 못하도록 하듯이 과거를 차단하고 세대 간, 지역 간, 이념 간의 공존과 소통을 이루게 함으로써 국민을 통합하고 국민의 삶을 회복시키는 선봉에 서야 한다.

 

정치는 국민을 설득해 변화와 고통 분담을 함께 하게 하는 능력이자 역할이다. 그 중심에 대통령이 있다. 그의 손에 대한민국이 도약하느냐, 거꾸로 쇠퇴하느냐가 달렸다. 위기 때마다 돌파력을 보여줬던 그의 기적을 믿는다. 민주 공화국 대한민국이 그의 영도로 재도약을 이루기 기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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