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우중 대우 창업자의 세계 경영 정신과 전략이 트럼프가 몰고 온 보호무역주의의 거센 바람 속에서 새로운 무역 해법으로 주목을 받고 있다.
미-중 간 경쟁이 격화되고 있긴 하나 이미 세계는 너무나 깊이 얽혀 있는 까닭에 무역이 완전히 단절되지 않을 것이다. 다만 제한적인 무역은 계속하면서도 무역 상대국에게 도움을 주는 상생적 무역과 현지화 전략이 떠오르고 있다. 이와 같은 해법은 일찍이 김우중 창업자가 대우 창업 때부터 그룹 해체라는 비운을 당하는 그 이후에도 베트남 등 개도국들에 대한 자문 활동을 통해 일생 동안 실천해 온 전략이자 정신이었다. 트럼프의 광풍이 몰아치고 있는 이 때, 그의 세계 경영 전략과 정신을 되돌아보는 것은 충분 한 가치가 있다.
신장섭 싱기폴국립대 교수가 고 김우중 회장의 말년에 그 와의 심층 인터뷰를 해 책으로 엮은 「김우중과의 대화」 를 참고하고 필자의 생각을 덧붙였다.
김우중의 세계 경영은 현지화와 현지 국가 공동체와의 공 존공영의 모델이라고 요약할 수 있다. 김우중은 1980년대 부터 세계 경제는 본질적으로 철저한 자국 또는 지역 이기 주의가 지배하는 체제로 파악했다. 당시는 경제 블럭이 존 재했지만 오늘날 트럼프 정부는 그와 같은 지역 경제권은 물론이고 FTA, 동맹, 우방 등을 다 무시하고 철저한 자국 우선주의에 근거해 무역 정책을 결정하는 모양새다.
세계 경영에서 중요한 요소는 선점하는 것이라고 김우중은 말했다. 현지에 진출해 사업을 할 때 그 나라를 발전시 키는 일을 많이 해야 한다고 말하면서 대우는 현지에서 번 돈의 절반을 그 나라를 위해서 사용하는 원칙을 지키고자 했다고 그는 말했다.
아프리카의 수단이 우리나라와 미수교이던 1976년 4월 김 우중 회장은 여러번 노크한 끝에 누메이리 대통령을 만났다. 누메이리 대통령은 대우가 영빈관을 건설해 주기를 원했다. 김우중 회장은 흔쾌히 승낙하고 수단산 원면을 수입해 주겠다고 했고 타이어 공장도 짓겠다고 제안했다. 공 장의 불모지였던 수단은 2년 뒤 타이어 공장이 완성되는 그날을 ‘한국의 날’로 선포하고 김 회장에게 외국인에게 주는 최고의 훈장인 ‘투나일스’를 수여했다.
수단의 타이어는 자국 공급뿐만 아니라 다른 나라에 수출까지 하게 돼 수단 정부와 국민들이 큰 긍지를 느꼈다고 전했다. 대우의 수단 사업 성공을 계기로 우리나라와 수교를 맺게 됐고, 나아가 수단과의 외교 수립이 전례가 돼서 북아프리카 나라들인 알제리아, 나이지리아, 모리타니, 리비아 등 4개국과도 수교가 성사됐다.
대우는 수단에서 신뢰를 얻은 결과 타이어 공장에 이어 방적공장, 피혁공장, 의약품 제조회사를 잇달아 건설했으며, 팔래스호텔, 건설회사, 중장비 리스회사 등을 설립해 운영했다. 김우중 회장은 수단에서 번 돈을 전부 수단에 재투자했다. 대우가 수단에 세운 법인은 당시 수단 내 최대의 비즈니스 그룹이 됐고 수단 전체 수출액의 15%를 담당했다.
◇현지국과의 상생 전략
대우의 다음 타깃은 리비아였다. 당시 리비아는 석유 자원 부국으로 돈이 많았다. 김우중 회장은 리비아에서도 현지에서 번 돈의 절반을 리비아에 투자하는 원칙을 실천했다. 그러자 리비아로부터 사업거리를 더 많이 얻게 됐다고 김 회장은 밝혔다. 대우가 리비아 우조 비행장을 건설할 때였 다. 리비아의 6월과 7월은 너무 더워서 현지인들은 일을 하지 않았다.
대우 직원들은 공사를 조기에 끝내기 위해 낮에는 자고 밤에 불을 대낮처럼 밝게 켜놓은 채 야간작업을 했다. 공사 진행을 보고 받은 카다피가 현장에 와서 불을 켜놓고 일하는 모습을 보고 큰 감동을 받았다고 한다. 국가원수의 신뢰를 얻자, 해마다 10억 달러씩의 수주고를 올리게 된다. 그것도 공개입찰 없이 전부 수의계약이었다.
김우중 회장의 세계 경영 정신은 현지국과의 상생이었다. 대우는 폴란드의 자동차공장인 FSO 인수를 놓고 미국 GM과 경쟁을 할 때 현지 종업원을 해고하지 않겠다는 약속을 했다. GM은 FSO의 인수 조건에 종업원 80% 삭감을 제시했다. 김우중 회장은 고용 유지뿐만 아니라 고용을 더 늘리겠다는 약속을 제시하자 폴란드 정부는 대우를 인수자로 선택했다.
김우중 회장은 현지국에 진출할 때 그들이 원하는 것을 먼저 찾아내서 해줬다고 한다. 주로 신흥국에서는 병원과 학교 등 인프라를 해주기를 원하는데, 그들이 말하기 전에 해줘서 신뢰를 얻었다고 한다. 이렇게 초기에 그들에게 좋은 것을 해주면 그 다음부턴 쉽게 사업이 풀리기 시작했다고 말했다. 큰 사업을 하려면 초기 인프라 제공을 아깝다고 생각해서는 안된다고 그는 말했다.
김우중 회장은 신흥국에서 사업을 할 때 정치자금과 뇌물은 매우 위험하다고 조언했다. 그는 돈 받은 사람이 당장 잘 해줄지 모르지만 정권이 바뀌고 새로운 사람들이 들어 오면 정치자금과 뇌물은 커다란 리스크로 돌아온다고 말했다. 그런 뒷거래는 당장 정적을 만들고 정권이 바뀌면 비리 조사를 받을 위험이 있다는 조언이다. 무엇보다 뇌물로 하는 일은 기껏해야 한 번으로 끝나고 나중에 사업 전체를 위험에 빠트릴 수 있다는 점을 강조했다.
김우중 회장은 세계 경영을 하려면 국제 네트워크의 구축과 관리가 중요하다고 말했다. 그는 키신저 전 미국무 장관과 헤이그 전 국무장관의 도움을 많이 받았다고 했다. 예를 들면 1980년대에 이라크와 이란 중 한 나라를 선택 해야 할 고민에 빠졌을 때 키신저에게 어느 나라에서 사업 을 계속하는게 좋으냐고 자문했는데, 키신저는 이란에서 사업을 하라고 말했다고 한다.
당시 대부분의 한국 기업들은 이라크가 더 안전할 거라고 생각했다. 대우는 이라크에서 철수하고 이란에 남아 있었고 그 결과 이란 사업에서 큰 성공을 거뒀다고 한다. 당시 이라크에 남아 있었던 국내외 기업들은 공사 대금을 제대로 못 받는 어려움을 겪었다. 헤이그 전 국무장관은 대우 조선이 서독으로부터 잠수함 사업 협력을 이끌어내는 데에 큰 도움을 주었다고 김우중 회장은 밝혔다.
김우중 회장의 천재적인 세계 경영은 국내의 부실기업을 인수해서 해외 시장과 연결해서 해법을 찾아낸 방식에서 엿볼 수 있다.
당시 은행이 부실기업을 대우에게 맡긴 경우가 많았다. 김우중 회장은 이들 부실기업을 인수해서 그 기업들의 제품 수요처를 해외 시장에서 찾아냈다. 대우는 국내 어떤 기업 보다 일찍 해외에 진출한 덕에 해외 시장에 밝았다. 세계 경영의 눈으로 보면 국내 부실기업의 문제는 쉽게 풀릴 수 있었다. 기업이란 결국 생산된 제품을 판매해서 캐시 플로우만 확보하면 공장을 굴리고 종업원들의 고용을 유지할 수 있다. 이렇게 숨통이 트인 다음에는 시장성 있는 기술 개발, 적절한 마케팅에 주력하면 성장을 충분히 할 수 있 다는게 김우중 회장의 세계경영이었다.
김우중 회장은 세계 경영은 나 혼자 하는 것이 아니고 직 원들이 도전 의식과 책임감을 가지고 행동하는 기업 문화가 필요하다고 말했다. 다시 말해 직원들도 세계 경영의 주역이 돼야 한다는 점을 강조했다. 그러기 위해서는 직원들이 윗사람의 지시를 받기 전에 스스로 해보겠다는 각오를 가지는 게 중요하다고 말했다.
“일단은 (직원들에게) 맡겨야 해요. 조그만 것부터 맡겨보는 거지요. 맡기고 언제까지 해내라고 하면 스스로 방법을 찾습니다. 바로 거기서 알파가 생깁니다. 모든게 한 번에 되는 건 아니에요. 조금씩 하다 보면 요령을 알게 돼요. 거기에 일하는 즐거움과 환희가 있어요.”
김우중 회장은 이처럼 직원들에게 재량권을 많이 부여함으로써 세계 경영을 직원들과 함께 개척해 갔다. 당시 대우의 실무자들은 다른 회사에서 간부들이나 할 수 있는 재량권을 가지고 있었다고 전한다.
◇트럼프 시대 대미 투자, 김우중의 세계 경영에서 힌트
김우중 대우창업자는 2019년 돌아가셨다. 그가 살아 있었다면 트럼프의 관세 전쟁에서 어떻게 대처해 갔을까 궁금 하다. 아마도 그는 틀림없이 트럼프 대통령이 원하는 것보다 더 적극적으로 대미 투자를 하고 미국의 제조업과 나아가 미국경제를 살리기 위해 노력을 다했을 것으로 보인다.
김우중 세계 경영은 기본적으로 공존공영, 상생 정신이 바탕에 깔려 있다. 트럼프 대통령이 압박하니까 마지 못해 하는 것이 아니라 트럼프 대통령이 원하는 것보다 더 성의를 보일 뿐만 아니라 트럼프와 미국 기업인들도 생각하지 못하는 창조적 해법을 그들에게 제시했을 것으로 추정된다.
김우중 회장은 일찍 미국 제조업의 문제점을 파악하고 있었다. 미국 전문경영인들이 주주자본주의라고 해서 월가의 투자자 수익성 제고에 너무 매몰돼 있다는 점, 지나치게 높은 경영인의 연봉, 종업원들과의 이질감, 전반적으로 팽 배해 있던 안이한 근무 자세, 장기적 경영 플랜 부족 등이다.
현재 미국에 투자하고 있는 삼성전자의 파운드리 공장, 대만 TSMC의 반도체 공장 등이 뻔히 예상되는 적자에 고심이 깊다고 전한다. 자국보다 높은 임금과 운영비용 등 코스트 상승 때문이다. 다른 외국의 미국 공장들도 같은 고민을 하고 있을 것이다. 트럼프의 압박에 따라 미국 시장에 어쩔 수 없이 투자해야만 하는 선택에 빠져 있다. 김우중 회장이라면 이를 슬기롭게 헤쳐 나갈 방안을 찾아냈을 것으로 생각된다.
김우중의 세계 경영은 ‘철저한 현지화’다. 그의 세계 경영 론에 비춰 해법을 찾아본다면, 우리나라의 대기업만 미국에 진출할 게 아니라 한국 내 중소협력사들과 함께 진출 했을 것으로 보인다. 그는 트럼프 대통령에게 한국 기업의 경쟁력은 한국 기업 생태계에서 나온다는 점을 설명하고 패키지 딜로 미국 연방정부와 주 정부의 협력을 이끌어 냈 을 것으로 짐작된다. 삼성 또는 현대차만 가서는 적자가 불가피할지 모른다. 대기업에게 제공한 지원만큼, 우리의 중소 협력사들에게도 지원을 베풀어달라고 요구하는 조건을 제시하는 것이다. 대기업만 지원하면 결국 미국 공장은 조립공장에 지나지 않게 된다는 점을 지적하며 미국 측을 설득하는 것이다.
또 김우중의 세계 경영론은 복합경영을 강조한 바 있다. 한 미 양국의 기업뿐만 아니라 다른 우방국 기업들과의 협력, 미국 금융기관과 투자회사들과도 엮어서 복합적인 해법을 제시하지 않았을까 추측해 볼 수 있다.
김우중 회장은 현지 국가의 정치지도자와 국민, 종업원들로부터 신뢰를 얻는 것이 가장 중요하다고 말한 바 있다. 어쩌면 그것이 그의 세계 경영론의 핵심 사상일지 모른다. 정의선 현대-기아그룹 회장의 미국 선제 투자를 놓고 ‘얻은 것 없이 너무 내준 게 아니냐’ 하는 시선이 있는데, 김우중의 세계 경영론에 따르면 전혀 그렇게 보이지 않는다.
한국에 미국만큼 크고 매력적인 시장은 없다. 트럼프의 관세 정책은 어찌 보면 우리나라에는 악재라기보다는 오히려 절호의 기회라고 볼 수 있다. 미국 기업과 경제는 현재 많은 약점을 노출시키고 있지만 과학적 경영 등 여전히 미국의 강점이 있는 부분이 존재한다. 한국과 미국의 강점을 서로 살리고 약점을 보완하면 난국을 돌파할 수 있을 것이다.
중국과의 제조업 경쟁에서 점점 밀리고 있는 한국은 이번 기회를 잘 살려서 성장과 재도약의 모멘텀을 찾았으 면 하는 바람이다. 그 해법은 김우중의 세계 경영에서 힌트를 찾아보면 어떨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