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칠공예 장식기법의 하나인 나전칠기는 얇게 간 전복(조개)껍데기를 여러 가지 형태로 오려내 기물(白骨, 수공예에서 뼈대를 만들어 놓고 옻칠을 하지 않은 목기(木器)나 목물(木物)의 표면에 감입(嵌入)시켜 꾸미는 기법을 통칭한다.
10대 중반부터 역경만첩의 고초를 겪으면서도, 결국 자신이 뼈를 묻어야 할 길이며 자신의 분신과도 같은 작품을 남기고자 북한산 자락 공방에서 하루 10시간 이상 강행군을 하는 오 명인을 찾았다. 이는 100세 시대, 은퇴시기에 접어든 베이비부머가 동시대인에게 길을 대신 묻는 질문일 수도 있어 싶어서다. 시시때때로 다양한 모습을 드러내는 명산 북한산이지만, 폭염을 씻어 낸 비갠 후 구름 낀 북한산 자태는 청량함 그 자체로 다가온다. 작업하기 좋은 조용한 동네 빌라 한쪽에 빗방울 머금은 앵두가 옛 추억을 말해주듯 서 있는 마당을 따라 공방에 들어서니 작업을 돕는 따님이 반갑게 맞아준다. 요즘 작품이 밀려있어 북한산 산행도 접었다는 오 명인의 손길을 잠시 멈추게 하고 공방 한켠에 자리를 잡았다.
얼마 전 5월 22일 예술문화 분야 명인이 되고, 4월에는 이태리 밀라노에서 개최된 한국공예전에 참가하는 등 여념이 없으신 듯합니다. 우선 그간 활동부터 말씀해 주십시오.
지난 4월 6일~14일까지 6일간 개최된 밀라노 한국공예전은 밀라노전시회에서도 최고로 꼽힌다는 트리엔날레 디자인 전시관에서 ‘한국공예의 법고창신(法古創新, Constancy & change in korean crafts 2013)’이란 주제로 열렸습니다. 모란당초 나전 2층장을 출품한 손대현 장인과 함께 제가 속한 나전칠기 분야를 비롯하여 도자(陶瓷), 섬유, 한지공예 그리고 왕실 궁중채화 분야 등 우리 전통공예 7개 분야, 16명 장인의 작품 50여 점이 전시되었습니다. 특히 이번 한국공예전은 정부에서 처음으로 개최하는 한국공예전이라 더 의미가 컸던 것 같습니다.
이번 밀라노 한국공예전을 준비한 손예원(58,여) 예술 감독과 인연이 깊은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좀 들려주십시오.
손 감독님께서 지난 2010년 6월 ‘한국 전통공예 미래전’을 성공적으로 기획, 주관하여 우리 전통공예를 널리 알린 점과 그해 12월에 열린 ‘한국 스타일 박람회’ 예술 감독으로 크게 활약한 점 등이 감안되어 문체부로부터 이번 밀라노 한국공예전 예술 감독으로 위촉된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현재 브랜딩 및 디자인전문회사 ‘크로스포인트’ 대표이기도 한 손 감독님은 원래 일본에서 나전칠기를 알게 되었다고 합니다. 그 후 우리 나전칠기에 심취해 여러 작품을 수집하고 있으며, 음·양으로 저에게 많은 도움을 주고 계십니다. 저에게는 은인이지요.
1970~80년대에는 웬만한 집에서는 시집 보내려면 으레 자개장을 혼수품으로 준비하기도 했는데요. 나전칠기의 세계로 접어든 사연이 궁금합니다.
말씀하신 대로 70년대 초반이 자개농이 대량으로 생산되어 호황을 누리던 시기였던 것 같습니다. 그 후 80년대에 하향 길을 걸었던 것 같구요. 제가 광주에서 중학교 다니던 시절 가정을 건사하던 어머니께서 나전칠기장이 돈을 많이 벌고 전망이 좋아 보이셨던지 제게 권하셨어요. 그래서 큰 고민 없이 이 길로 들어섰습니다. 아마 이게 인연인가 봅니다.
중학생 나이라면, 열다섯 전후 나이인데요. 꿈도 많고 보통은 집에서 부모님께 투정을 부릴 나이인데 도제식으로 진행됐을 엄혹한 수련과정을 어떻게 넘기셨는지요?
처음에는 일반 자개장롱을 만드는 공장에 들어갔습니다. 1개월쯤 지나니 공장장님이 좋게 보셨는지 쓰고 남은 자개조각을 가지고 연습을 해보라고 하시데요. 그래서 한쪽에서 자개조각 위에 연필로 그린 후 연필을 따라 톱질하며 연습을 했습니다. 눈썰미가 있어서인지 남들 한 2~3년 배워야 하는 과정을 8개월쯤 지나서 라인작업에 투입되었습니다. 제가 이 분야에 좀 소질이 있었는지, 공장장님이 가끔 작업이 제대로 진행되지 않을 때면 “너희들 뭐 하냐, 왕택이 좀 봐라” 하면서 다른 사람들을 혼내기도 하셨죠. 그렇게 광주에서 3년여를 지내다 더 큰 물에서 놀고 싶어 무작정 서울로 상경했습니다. 서울 왕십리 쪽에 자개공장들이 밀집돼 있다는 정도만 알고 말입니다. 현재 왕십리 도로교통공단 건너편 쪽에서 상왕십리 방향으로 공장과 가게들이 밀집돼 있었습니다. 소개로 공장에서 작업을 하였지만 가슴 한쪽에서는 항상 작품을 해보고 싶은 마음이 간절했습니다. 어느 날 스승님이신 김태희 선생님 공방에서 일하던 사람을 알게 되어 그날 당장 짐을 싸 선생님 문하에서 7년을 지냈습니다.
아직도 적지 않은 분들께서 나전칠기장롱 등을 사용하고 계셔서 인지 50대 이상 세대는 ‘자개롱(籠)’ 등으로 나선칠기 공예품이 낯설지는 않은데요. 그 제작 과정에 대해서는 대개가 잘 모르고 궁금할 텐데요. 작업과정에 대해 간략하게라도 설명 부탁드립니다.
나전칠기는 나전(螺鈿)과 칠기(漆器)가 합해진 말입니다. 나전은 소라 라(螺), 비녀 전, 나전 세공 전(鈿)입니다. 다시 말해 전복껍데기를 여러 형태로 오려 백골(白骨,목물) 표면에 상감(象嵌)하는 공예기법입니다. 여기에 옻칠을 입혀 작품(漆器)을 완성하기에 칠기가 더해진 것이지요. 이 나전이라는 말은 한국, 중국, 일본 등에서 공통적으로 쓰이는 한자어로 우리나라는 예로부터 ‘자개’라는 고유어를 써왔습니다. 이 나전칠기는 백골에 처음 옻칠을 먹인 다음 삼베를 입히고 마른 후 사포질을 합니다(삼베를 입히는 이유는 백골을 보호하기 위함이다). 그 다음 칠회를 입히고 2~3번 옻칠을 하고 또 사포질을 반복합니다. 그리고 자개(패각, 0.2mm정도)를 붙인 후 다시 옻칠을 여러 번 바른 후 고운 사포질을 한 후 광을 냅니다. 이렇게 공이 많이 들어가는 작업이고, 디자인부터 옻칠, 자개작업 모두를 거의 직접합니다. 그러다 보니 1년에 십 여 작품밖에 내놓지 못합니다. 3년 전부터 둘째 딸(오유미, 30)이 합류하여 그나마 힘이 되고 있습니다.
장인께서는 1982년 제6회 전승공예대전 입선 후 90년대 초반 공방을 운영하며 젊은 나이에 두각을 보여 일본에 작품을 수출하기도 하셨다는데요. 왜 촉망받던 시기에 15년가량 작업을 중단하신 건가요?
중요무형문화재(1981년) 김태희 선생님께 7년가량 사사받고, 95년 신월동에서 공방을 차렸습니다. 그때 일본에 차(茶)세트함, 생활도구를 4~5년 수출했는데, 재주는 곰이 부리고 돈은 왕서방이 번다고, 자긍심과 실속은 없었습니다. 사람들에게 당한 아픔과 가족을 부양해야한다는 책임감으로 “딱 1년만 하자”며 퀵서비스 일을 시작한 것이 그리 길어진 것입니다.
옛 말씀에 ‘사람은 그 사람이 있고, 때도 그때가 있다(人有其人 時有其時)’고 하셨듯 오 명인께서도 항상 가슴에 응어리로 남아있던 작품의 꿈이 언제 다시 타오르기 시작하셨습니까?
딸 두 애가 졸업을 하자, 제 처가 “이제 당신이 목표로 했던 일을 시작하세요. 당신의 재능을 포기하는 것은 국가적 손실입니다”라며 등을 떠밀었습니다. 그에 힘입어 1년 여 공을 들여 백수백복(百壽百福)과 당초문, 모란문(紋) 등이 망라된 ‘포도문함(葡萄紋函)’을 내놓게 되었습니다. 그 전인 2008, 2009년 원주시한국옻칠공예대전에서 연속 입선하기도 하며 어느 정도 자신감을 회복하였습니다.
그러면 이제는 자신만의 진면목을 담은 천 년에 남을 작품을 남기고 싶으실 텐데요. 어떻게 구상하고 계신지요?
이제 나전칠기 세계에 접어든 지 30여 년이 돼 갑니다. 앞으로 시간이 많이 남아있지 않다는 생각이 많이 듭니다. 작년 10월에 대만에서 ‘법고창신’ 주제로 1주일간 전시회가 있었습니다. 전시회 일정 중에 60여 만 작품이 보관되어 있다는 대만 국립고궁박물관에서 ‘취옥백채(翠玉白菜)’를 관람하였습니다. 하얀색 줄기와 초록색 배추 잎의 절묘한 조화 그 위에 앉은 메뚜기와 여치의 미묘한 대비. 장개석 총통이 국공내전으로 수세에 몰리자 배에 군인은 못 태워도 작품은 싣고 피난했다는 걸작중의 대표작이라 불리지요. 그 명성만큼이나 이 취옥백채는 연중 전시된다고 합니다. 재주가 얕은 일개 장인이 감히 취옥백채를 남긴 장인을 꿈꾸는 것은 만용일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그 작가의 얼마나 고심했는지가 대번 제게 느껴져 왔습니다. 옛 성현께서도 “정성(誠)은 하늘의 길이고 정성스러워 지려는 것은 사람의 길(誠者天地道也 誠之者人之道也)”이라 하셨다 하니 저도 그 정성스러움의 길을 걸어볼까 합니다. 그 길이 제 모든 것을 물려줄 제자와 함께 하는 길이라면, 해질녘 산길에서 만난 초동(樵童)처럼 반갑고 아름다운 동행일 것 같습니다.
최종호 편집위원 / ktchoi7@naver.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