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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


한국의 과학적 사고는 실학자 홍대용에서 시작

-한국의 정신문화를 찾아서(24)

 

음양오행론은 우리나라 고대에서 조선말까지 우주 만물과 자연현상, 정치와 전쟁, 도덕 윤리적 가치, 남녀와 신분 차별의 논리, 개인의 길흉 운수를 설명하는 전가의 보도였다. 조선과 중국에서 음양오행론으로 설명 안하는 걸 찾기 힘들 정도로 너무 ‘위력적’이었다. 이 음양 오행론은 그럴싸하고 편리하고 신비로운 경이감을 느낀 나머지 지식인들이 감히 의심하지 않고 삼라만상의 크고 작은 일과 개인 길흉사를 해석하는 데에 몰두했다.

 

 

원래 음양오행론은 자연을 관찰하고 얻은 ‘통찰력’의 소산이었는데, 이것을 인간 세상사를 비유적으로 설명한 게 ‘화근’이 됐다고 할까. 그것이 춘추전국시대에 공자와 추연에 의해 비유법의 범위를 벗어났고 한나라의 동중서, 북송의 주돈이(1017~1073)를 거쳐, 남송의 주희 (1130~1200)에 와서는 절대적 진리처럼 숭앙 되었던 것이다. 

 

천지인 삼수 사상, 태극 혹은 무극과 이기론과 음양오 행론 간의 미묘한 차이를 설명하기는 하나 모두 추상적 논리로 구성한 가설이다. 그것들 사이의 ‘차이’를 논하 는 것은 학자들에겐 유의미할지 몰라도 대체로 ‘실용적’ 이지 못할 뿐이다. 더욱이 음양오행론과 태극·이기론을 토대로 도덕 윤리적 규범을 세움으로써 복잡하게 변화하는 정치·사회·경제·문화적 문제를 객관적 사고와 논리로 분석해보고 해결책을 제시해보려는 이성적 생각을 차단시켜버렸다.

 

무엇보다 음양·오행론으로 자연현상과 물질세계를 설명하는 도구가 되는 바람에 ‘과학’을 스스로 발견해내지 못하고 말았다. 그뿐만 아니라 그와 같은 관념적 가설을 가지고 오직 한 가지 방향, 윤리적 당위론에다가 초점을 맞추어 모든 사람에게 강요했다. 유학은 연역적 논리에 근거한 도덕 윤리학인데, 동양은 서양을 만나기 전까지 연역적 사고에만 갇혀 있었다. 동양에서는 윤리 문제 외에 사실과 물질을 대상으로 탐구하는 지식론이 없었는데, 그것은 연역적 사고만이 존재했던 이유가 가장 컸다고 이해된다.

 

불변의 진리처럼 존숭 돼왔던 음양오행론에 대해 최초로 그 허구성을 만천하에 노출하고 과학적 세계관을 도입한 인물이 홍대용이다. 홍대용은 「담헌서」에서 “천지 사이에 별도로 음양 두 기가 있어서 때에 따라 나타나기도 하고 숨기도 하여 조화를 주장한다는 것은 후세 사람들의 말이다”라고 말했다. 또 조선과 중국은 성선설에 깊이 사로잡혀 좌우 상하를 살피지 못한 점이 크나큰 병폐였다. 홍대용은 성선설을 뒤흔들었다는 면에서도 실로 개혁사상가라고 하지 않을 수 없다.

 

 

“오행의 수는 원래 정론이 아니다. 그런데 술가에서 이를 조종으로 삼아 하도와 낙수로써 억지로 맞추고, 역의 상수로 파고 들어가, 생극이니 비복이니 하여 지리하게 얽어매고 여러 술수를 장황하게 이야기하나, 끝내 그런 이치는 없다.”(김인규 저술 「북학사상연구」에서 재인용

 

 

홍대용은 1731년에서 태어나 1783년에 생을 마감했다. 홍대용은 젊은 시절부터 당대의 성리학에 대해 회의를 품고 있었던 것으로 보이며 자연과학에 대해서는 일가견을 지니고 있었다. 30대 초반에 나주의 과학자인 나경적과 안처인의 도움을 받아 혼천의를 제작했다. 그리고 몇 년 후 36세에 청나라에 사신의 일행으로 가면서 더욱 서양 과학에 매료됐다. 북경에서 청나라의 지식인과 교유하고, 서양 선교사들을 만나 서양 천문학에 관해 직접 문답을 나눴다. 홍대용은 「주해수용」이라는 수학서를 저술하기도 했다.

 

동양은 과학은 없었고 기술만 있었다

 

조선 시대 이전의 뛰어난 기술을 과학과 연관 짓는 책들이 가끔씩 나온다. 기술과 과학을 혼동하면 곤란하다. 기술은 기초 기능과 노하우를 익히고 숙달하는 가운데 품질 향상되거나 기술 수준이 유지된다. 기술이 축적되어 한 차원을 뛰어넘는 기술로 발전하기도 한다. 청동기에서 철기로 간 것이 그런 예다. 그러나 기술은 직업과 경제행위에 연결되기 때문에 기득권화 되어 새로운 기술 발전을 저해할 기제로 작용하기도 쉽다.

 

기술은 개인과 일군의 장인들, 특정 장소에 내재되는 성질을 띠고 있기 때문에 이성적이고 객관적 ‘지식’과는 다른 차원이다. ‘과학’은 통념적 관행적 믿음을 무조건적으로 따르지 않고 기존의 지식과 기술 등 무엇이든 의심하고 새로운 진리를 찾는 것이다. 비슷한 듯 보여도 출발도 다르고 방법론도 다르고 결과와 지향점도 다르다. 우리 정신 문화사에서 홍대용의 가치를 알려고 하면서 양과학의 역사를 좀 알 필요가 있다. 그리스 도시국가인 밀레토스의 철학자 아낙시만드로스와 영국의 프랜시스 베이컨의 주장을 이해하면 조선 시대까지도 얼마나 과학과는 먼 사고를 하고 있었다는 것을 알게 된다. 동시에 홍대용이 화강석처럼 굳어진 믿음에 해머를 내리치고 과학적 사고를 용감하게 열어젖힌 선구자임을 알게 된다.

 

아낙시만드로스는 기원전 6세기의 사람이었음을 재차 강조하면서 그의 주장을 들어보자.

 

- 대기 현상은 자연적인 원인으로 발생한다. 빗물은 태양열 때문에 증발한 바닷물과 강물이다. 이러한 물은 바람에 실려서 결국 땅에 떨어진다. 천둥과 번개는 구름 끼리 격렬하게 부딪쳐서 일어난다. 지진이나 땅이 갈라지는 이유는 너무 강한 열이나 폭우 때문이다.

 

- 지구는 크기가 정해져 있고 우주에 떠 있는 천체다.

 

- 태양과 달, 별들은 완벽한 원을 그리며 지구 주위를 돈다.

 

- 자연을 이루는 다양한 사물의 기원, 혹은 유일한 근원은 양적으로나 질적으로 제한이 없는 ‘아페이론’이다. 아페이론이 뜨거운 것과 차가운 것으로 갈라지면서 세상이 생겨났다. 세상의 질서도 여기서부터 생겨났다.

 

- 과거에는 물이 지구를 뒤덮어서 동물은 원래 모두 바다에 살았다. 최초의 동물은 물고기, 아니면 물고기 비슷한 종류였을 것이다. 물이 말라 육지가 드러나자 이들은 육지에 올라와서 새로운 환경에 적응했다. 사람은 다른 동물에서 파생되었을 것이며, 그 동물은 물고기의 모습을 하고 있었을 것이다.

(「첫 번째 과학자, 아낙시만드로스」, 카를로 로벨리 저, 이희정 역에서 인용)

 

아낙시만드로스의 위대한 점은 우주와 자연현상을 신의 의지나 초월적이고 추상적 가설로 해석하지 않고 자연적인 즉 물리·화학·생물학적인 작용으로 설명하려고 한 것이다. 서양에서도 물론 동양과 유사하게 그리스 신화, 유일신의 전지전능한 능력 등으로 자연현상과 인간사회를 해석했다. 그러나 서양에서는 아낙시만드로스의 과학적 사고가 씨앗을 뿌리고 피타고라스,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가 줄기를 뻗쳐서 마침내 갈릴레이, 프랜시스 베이컨, 뉴턴, 아인슈타인으로 이어져 오늘날 과학의 시대를 활짝 열었다.

 

 

아낙시만드로스의 아페이론(apeiron)은 “무한정(infinite) 또는 무규정(indefinite)한 어떤 것”이라고 해석된다. 이 말은 그의 스승 탈레스가 만물의 근원을 물이라고 한 데에 대해 부정하고 아울러 불, 흙, 공기도 아니므로 그들 외의 것을 아페이론이라고 주장한 것이다. 이탈리아의 이론물리학자 카를로 로벨리는 아페이론은 후대 과학자들에 의해 미지의 현상에 대해 기존의 것 외에 어떤 요인들을 찾아볼 때 쭉 사용돼온 개념이라고 말했다. 아낙시만드로스는 또 자연현상의 필연성을 언급했다.

 

“그곳에서부터 존재하는 사물이 생성되고, 또한 그 속으로 생성물이 사라져버리는 것은 필연적이다.”

 

아낙시만 드로스의 자연주의적 해석, 미지의 탐구 대상으로서 아페이론 설정, 자연과 물질 현상의 필연성에 대한 믿음이 결합되자, 자연의 비밀이 차츰 드러나게 됐다. 미지의 현상을 인간의 이성으로서 상상이 가능한 경계 내로 한정 했던 점이 아낙시만드로스의 위대함이다. 동양의 범신론적 사고와 자연을 영적 또는 생명을 가진 유기체로 보는 사고는 자연과 인간의 여러 현상을 통일적으로 이해하고 도덕 윤리적 규범을 정립하는 데는 효과적이다.

 

그러나 그런 자연우주관과 인간관은 추상적 논리성이 너무 ‘완벽’하다고 할까, 눈앞에 일어나는 사소한 자연과 물질 현상과 사실조차 그 원인을 밝혀내는 데는 실패했음을 자인하지 않을 수 없다. 신의 뜻과 영적 우주관으로 가버리면 ‘인간의 이성’은 불필요하게 되고 신과 우주와 자연에 전적으로 의존하는 것밖에 남지 않게 되는 셈이다. 동양이 귀납적 사고를 발견하지 못한 것도 연역적 사고가 팽배하게 지배한 때문으로 보인다.

 

과학의 역사에서 프랜시스 베이컨의 귀납적 방법론의 제시는 아무리 강조해도 모자라지 않다. 개별 사례들에서 공리를 발견하고 그 공리를 준거로 삼아 또 다른 개별사례들에서 상위의 공리를 발견하는 방식으로 일반적인 진리를 발견해 간다는 방법론이다. 

 

옛날 동양의 학자들, 오늘날 보통 인간들도 무의식적으로 귀납적 사고를 생각했을 것이다. 그러나 베이컨처럼 방법론으로 정립하고 실제 적용할 것을 강력히 촉구하는 것과는 완전히 다르다. 우리는 연역적 사고가 만들어주는 논리성에 안주하고 의문 풀기를 멈추기 쉽다. 개별사례의 수집과 상호 비교, 관계성 사유는 사실 굉장히 힘들기도 하고 까다롭다. 그러나 과학이란 이런 귀찮은 과정을 거치고 동굴에 갇힌 듯 앞에 안 보이는 상황에서 극적으로 잡히는 것 아닌가.

 

조선은 문명의 중심지에서 너무 외떨어져 있었다

 

서양은 계속 지식 교류와 무역 교류를 하며 상호 경쟁하며 발전해왔다. 중국 문명권은 중원에서 전쟁이 벌어지면 혼란 중이어서 외부와의 교류는 꿈 꿀 틈이 없고, 통일되어 안정되면 현상 유지에 만족하여 교류에 소극적이거나 폐쇄적이 됐다. 문명의 발전은 이질적 문명과 문화와의 교류에 의해 발전 하는데 히말라야산맥과 고비 사막이라는 자연적 장벽에 가로막혀 있기도 하고, 거대한 내수 시장을 가지고 있는 중국은 굳이 외부로 진출할 필요성을 느끼지 못했다.

 

이에 비해 고대부터 이집트와 메소포타미아 문명, 페니키아-유대 문명, 그리스와 로마 문명, 인도 문명까지 서양은 전쟁과 정복, 이주, 무역으로 계속 교류했다. 조선 시대에 들어와 거의 중국하고만 교류했던 까닭에 한반도는 은둔의 섬처럼 되고 말았다. 조선이 과학에 눈을 뜨지 못한 요인으로 유학을 꼽지 않을 수 없다.

 

유학은 도덕 윤리적 질서를 부여하고 자기 수양을 강조한 훌륭한 학문이자 규범이지만, 유학 공부가 관리 등용의 수단이 되고, 신분 차별의 자격조건이 되면서 엄청난 정치 사회적 ‘병통’이 되고 말았다. 이는 유학이란 학문이 종교의 교리처럼 이데올로기가 돼 권력과 부를 가지게 됨을 의미한다. 또 유학의 성선론적 사고는 욕망의 분출이 염려된다는 이유로 시장과 무역을 억제하는 쪽으로 기울게 된다. 그런 유학의 안 좋은 모습이 갇힌 사회인 조선에서 극명하게 나타나게 됐던 것이다.

 

과학과 경제는 종교와 이념에서 자유로운 토론과 창조에서 발전

 

카를로 로벨리는 최초의 과학이 그리스 도시국가인 밀레토스에 시작된 건 두 가지 환경 요인 때문이라고 말했다. 자유와 비판이 허용된 민주주의 체제와 다양한 문명과 지식 교류가 가능한 무역 거점이었던 점을 꼽았다. 유학은 정치 권력과 결합하면서 도그마처럼 군림하며 조금이라도 다른 생각이라면 이단으로 몰아갔다. 타인에 대한 ‘비판’이라고 해도 스스로 생각해낸 사상도 문제점 지적도 아니었다. 비판의 근거는 오로지 과거 공자와 주자의 주장으로 돌아갔다. 그것은 발전은 커녕 언제나 과거로 되돌아갔다. 이런 사고는 단 한 발자국도 역사를 앞으로 전진하지 못하게 했다. 

 

우리가 믿고 있는 이념과 사상, 관념, 확신, 관행들, 모든 이들이 존중하며 힘을 쏟고 있는 학문과 기술도 과학적 사고로 의심해볼 필요가 있다. 학문과 과학은 별개의 것이 아니고 과학 안에 학문이 내재돼 있다고도 할 수 있다. 이와 같은 과학적 사고가 활발해질 때 우리 경제의 아킬레스건이라고 할 수 있는 원천적 과학기술도 발견해 내고 선도해 나갈 수 있다고 본다.

 

MeCONOMY magazine July 20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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