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마, 악어도 가방을 들어?” 아이의 뜬금없는 질문에 황당하다. “엄마가 산 가방이 악어가방이라며? 악어한테 산거야?” 천진난만한 아이의 질문에 참 당혹하다. 악어가죽으로 만든 가방이 딸아이에게는 악어가 드는 가방으로 인식된다. 산수를 가르치다가도 황당하기는 마찬가지다. “사과 10개 중에 3개를 먹었네. 몇 개가 남았을까?” 대뜸 ‘3개’한다. 너무나 황당해 말을 잃고 있는데 애교 섞인 딸아이의 농담이 일품이다. “엄마가 먹는 게 남는 거랬잖아~”
커뮤니케이션은 참 어렵다. ‘나누다’는 어원을 갖고 있는 커뮤니케이션은 혼자 하는 것이 아니라 상대와 함께 한다. 내가 혼자 잘한다고 해서 해결될 문제가 아니다. 함께 나누는 상대가 나와 다르다 보니 뜻하지 않은 결과가 초래된다. 경험과 가치관이 다르고 인식과 해석이 다르다. 때로는 논지에서 벗어난 논의가 계속되기도 하고 논리의 골격을 잃고 감정만 엉키기도 한다. 그래서 나이가 들고 자리가 높아질수록 점점 말수가 적어지나 보다.
생각이 많아지니 말이 없어지고, 생각 없이 한 말이 일파만파 영향을 미칠까 두렵다. 직원의 실수는 혼자 감당하면 되지만 리더의 실수는 조직 전체를 뒤흔들다 보니 점점 과묵해지고 진지해진다. 일각에서는 웬만해서는 말을 안 하는 게 상책이라고 할 정도다. 이루시루 말해봐야 오해만 쌓이니 덮어두는 것이 낫단다. 사실 열 마디 말보다 한 번의 솔선수범이 더 호소력이 있기도 하다. 말만 성대하고 실행이 없으면 실망만 더 클 뿐이다. 게다가 뜻하지 않게 오해하고 와전되어 악용되는 말들에 치이다 보면 일만 싫은 게 아니라 사람도 싫어진다. 이럴 때는 입을 닫아버리게 된다. 광고 카피처럼 ‘말하지 않아도 알아~’하는 세상을 기다리게 된다.
말이 무서워지는 만큼 입이 무거워진다. 하지만 서로의 말수가 줄어든 만큼 조직은 공상에 빠질 확률이 높아진다. 속을 모르면 추측하게 되고 낭설이 많아지면 소설처럼 각색한다. 안 할 수도 없고 안 해서도 안 된다. 침묵은 금이라는 최영 장군의 격언은 혼자 자기 성찰할 때 얘기다. 요즘처럼 다양성의 세상에서 상대와의 갭을 좁히는 커뮤니케이션은 필수다.
특히 각양각색의 역사와 가치관을 갖고 있는 사회에서 만나는 사람 간의 커뮤니케이션은 매우 중요하다. 커뮤니케이션이 모든 것을 해결하지는 않지만 커뮤니케이션 없이는 그 무엇도 안 된다. 우는 아가도 속이 있어 운다고 속을 표현하지 않고는 알아주기 어렵다.
소통하지 않으면 욕조 구멍을 막은 머리카락처럼 미미한 것 같아도 쌓일수록 걷잡을 수 없다. 시간 없어 차일피일 미루었던 친구들과 오랜만에 만나면 막상 시간이 있어도 할 말이 없다. 말을 안 하다 보면 할 말이 없어진다. 해야 할 말을 참으면 할 시간이 되어도 말할게 없다. 입만 닫았건만 마음마저 닫힌다. 소통은 결과만이 아니라 과정이다. 잘 해도 본전이고 못하면 난리난다고 피하지 말자. 피하면 쌓이고 쌓이면 막힌다. 그렇다면 사회에서 만나는 소통을 효과적으로 하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 여기 그 몇 가지 유의사항을 제안한다.
첫째, 어렵다고 각오하자!
어렵다고 각오하면 준비하게 된다. 유치원 때 이후로는 누구나 듣고 말할 수 있다는 상식 선에서 커뮤니케이션을 이해하면 큰 코 다친다. 커뮤니케이션은 아이를 낳아 키우는 것과 같다. 아이들을 키우다 보면 내 속으로 낳았지만 뜻대로 마음대로 안 된다. 같은 부모에게서 태어났어도 성격도 다르고 크는 모습도 다르고 가는 길도 천양지차다. 커뮤니케이션도 내 뜻과는 상관없이 와전되고 확대된다. 제 갈 길을 가는 자녀 같다. 커뮤니케이션은 이런 불확실성에서 시작한다. 내가 말한 뜻이 상대에게서 어떻게 편집될지, 또 상대의 뜻이 내게서 어떻게 재편될지 모른다. 콘라트 로렌츠는 의사소통의 어려움을 멀고도 험난한 길이라고 토로했다. 말을 했다고 해서 상대가 아직 들은 것이 아니고, 들었다고 하더라도 아직 이해한 것은 아니다. 이해했다고 하더라도 아직 동의한 것은 아닐 뿐더러, 동의했다고 하더라도 아직 기억한 것은 아니다. 기억했다고 하더라도 실생활에 적용하여 행동까지 변하려면 멀고도 지난한 과정이 필요하단다. 어찌 보면 세상에서 가장 먼 길은 지구를 열두 바퀴 도는 것보다 상대의 머리에서 나의 손까지 오는 길인지 모른다. 이 가능성을 각오하고 준비하는 것이 커뮤니케이션의 시작이다.
둘째, 코드를 맞추자!
강아지와 고양이가 사이가 안 좋은 이유는 서로 소통하는 언어가 달라서다. 강아지는 반가우면 꼬리를 흔드는데 고양이는 공격할 때 꼬리를 흔든다. 서로 오해하면 본의 아니게 적이 된다. 오해하지 않고 소통한다는 것은 정확하게 잘 말한다고 되는 것만도 아니다. 한국말을 모르는 외국인이 길을 물었는데 시골 할머니가 아무리 또박또박 크게 말한다 해도 외국인에게는 답답하다. 사용하는 언어가 다르면 서로 소통이 어렵다. 사투리 하는 친구와 친해지려면 함께 사투리를 쓰는 것 이상 없다는 말처럼 상대의 언어를 이해하는 것은 소통의 중요한 시작이다. 코드를 맞추자고 했더니 코드 맞는 사람만 곁에 두는 사람이 있다. 그것은 공명하는 길이다. 원래 다른 사람이 모여 다른 소리를 내면서 화음은 만들어지고 웅장한 협연은 일어난다. 두 사람이 같은 소리를 낸다면 둘 중 하나는 필요 없다. 하나만 있으면 된다. 오히려 같은 소리를 내는 한 사람을 버리고 다른 소리를 내는 사람을 모셔 와야 한다.
커뮤니케이션은 다름에서 출발한다. 다르기 때문에 의미 있는 활동이다. 커뮤니케이션은 코드가 다른 두 사람이 상대의 코드를 가져다가 내 플러그에 꽂는 일이다. 내 코드를 상대 플러그에 꽂아 상대 전류를 내게 옮겨 오는 것이다. 오해가 이해가 되고 소통이 대통이 되려면 그의 속으로 내가 걸어 들어가 그의 사고 안에 나를 심는 것이다. 이런 유체이탈과 감정이입이 소통을 이룩한다.
셋째, 테크닉이 아니라 태도다!
내용은 같을지 모르지만 “잠시만 일어나 주시겠습니까?”와 “일동기립”은 확연히 다른 커뮤니케이션이다. 커뮤니케이션은 내용만 담는 것이 아니라 관계도 담는다. ‘주민 민원’과 ‘고객 고충’은 엄연히 다른 패러다임이고 ‘하청업체’와 ‘협력업체’의 어감도 극과 극이다.
커뮤니케이션 할 때 메시지만 있는 게 아니라 상대에 대한 내 생각과 태도가 담겨진다. 커뮤니케이션은 순간적 테크닉이 아니라 상대에 대한 태도를 투영한다. 순간적 말 빨과 일시적 기지는 오래가지 못한다. 열사람을 잠깐 속일 수 있고 한 사람을 오래 속일 수는 있어도 열사람을 오래 속이기는 쉽지 않다. 얄팍한 변명 뒤에 숨겨있는 진실은 언젠가 드러나기 마련이다. 효과적인 커뮤니케이션을 하려면 테크닉을 키우기 이전에 삶에 대한 태도부터 점검해야 한다. 상황에 대해 바라보는 자세부터 겸허해야 한다. ‘못 합니다’보다 ‘하기 힘들겠습니다’가 낫고 ‘안 됩니다’보다 ‘곤란합니다’가 부드럽다.
‘커피 좀 가져와’보다 ‘김주임, 미안하지만 커피 좀 부탁해도 될까?’라고 했을 때 더 맛있는 커피가 나올 확률이 높다. ‘이 대리님 자리가 어딘가요?’라는 질문에 ‘따라 오세요’보다는 ‘안내해 드리겠습니다. 이쪽으로 오시겠어요?’가 훨씬 기분 좋다.
회의시간에도 ‘이게 다인데요’보다는 ‘제 의견은 여기까지입니다’가 정중해 보이고 고객에게도 ‘주민번호 부르세요’보다는 ‘주민번호를 말씀해주실 수 있을까요?’가 조심스럽다.
‘그 말이 아니거든요’보다는 ‘다시 한 번 말씀 드리겠습니다’가 완곡하고 ‘요즘, 박 부장님 이상해’보다 ‘박 부장님이 오늘 페이스를 잃었어’가 조금은 낫다. 똑 같은 메시지이지만 어떤 태도를 담아내느냐에 따라 느낌이 확연히 다르다. ‘키도 커?’라고 물었는데 ‘키만 커’라는 대답이 돌아오면 실망스럽다.
‘언니는 예쁘니?’와 ‘언니도 예쁘니?’는 사뭇 다른 어감이다. 데이트 할 때 ‘밥이나 먹자’보다 ‘밥도 먹자’가 훨씬 기분 좋다. 이것은 테크닉이 아니라 태도를 담아내기 때문이다. 좁은 입으로 말했을 뿐인데 넓은 치맛자락으로도 못 막는다고 했다. 웃느라 한 말에 초상날 수도 있다. 이는 말이 음성의 울림만이 아니라 태도와 생각을 담아내기 때문이다.
‘축 승진’이 아니라 ‘축 생존’이라는 화환을 받을 만큼 직장생활도 치열하고 고단하다. 호통 치는 상사, 뒤통수치는 동료, 땡땡이치는 후배, 매일 때려 치고 싶은 나, 다음 달 카드빚이 유일하게 나를 버티게 하는 힘이고 6개월 뒤 여름휴가가 유일하게 나의 비전이다.
군대살이 보다 더 끝이 안 보이고 감옥살이보다 더 불규칙한 직장 살이, 잔혹하고 혹독한 직장생활에서 오늘도 살아남으려고 발버둥친다. 후배는 ‘한 살이라도 많은 선배님이 참으세요’라고 하고, 선배는 ‘당장 잘라버리라’고 하고, 친구는 ‘상황에 따라 다를 테니 알아서 잘해’라고 한다.
충고하는 사람마다 자기 경험을 등에 업고 자기 안경을 눈에 썼다. 시험 보고 정답 맞추는 교과서처럼, 직장도 정답을 알려주는 교과서가 있었으면 좋겠다. 남자와 여자, 달라도 너무 달라 ‘남녀 탐구생활’이 필요하듯 상사가 하는 말과 부하가 듣는 말, 달라도 너무 달라 ‘사회어 탐구생활’이 필요하다.
학교에선 방학숙제로 과학도 탐구하고 지리도 탐구하고 심지어 곤충까지 탐구했는데 정작 사회에서 필요한 것들은 제대로 탐구하지 못했다. 우랄산맥이 몇 미터이고 미적분 공식이 어떤지는 달달 외웠건만 실상 사회생활에서 필요한 커뮤니케이션을 탐구하는 데는 우리 모두 초보다.
요리책을 본다고 배가 부르지 않고 의학개론서를 본다고 두통이 가라앉지 않는 것처럼 커뮤니케이션도 책만 읽는다고 되는 것은 아니다.
언변만 키운다고 되는 것이 아니다. 매일 하고 있지만 매번 공부하는 마음으로 임해야 한다. 한국말은 이제 잘하니 영어만 배우면 된다고 덮어둘 일이 아니다. 유치원생이 자음 모음 배우듯이 신기하게 깨닫고 성찰해야 한다. 이게 다가 아니고 이보다 더 좋을 순 없는가를 생각하며 듣고 말해야 한다. 이 코너가 결론은 안 나지만 서로를 이해할 수 있었으면 좋겠다. 해결은 안 되지만 쟁점으로 부각될 수 있었으면 좋겠다. 답보다 답에 이르는 과정이 중요한 수학문제처럼 이 코너를 통해 해답을 찾는 여정을 모색할 수 있었으면 좋겠다. ‘원래 그래, 별 수 없어, 대화해봐야 소용없어, 말을 말아야지. 내가 다시는 너랑 말을 섞나봐라’라는 자조 섞인 다 포기가 아니라 ‘그랬구나, 이해되네, 조심하자’라며 서로에게 좀 더 다가갈 수 있었으면 좋겠다.
2013년 [사회어 탐구생활]은 이런 소망으로 출발한다. 앞으로 이 코너를 통해 뾰족한 묘수는 아니지만 뭉뚝한 실마리라도 찾을 수 있기를 소망해본다.
지윤정
(주)월토피아 대표/월토피아 평생교육원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