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나라는 참으로 집단의식이 강한 나라다. 뭐든지 몰려다니며 같이 하는 걸 좋아한다. 밥도 같이 먹고 술도 같이 먹고 여행도 같이 간다. 하루가 멀다하고 광화문에서 치러내는 ‘집단적 시위’는 어느 의미에서는 존경심마저 불러 일으킨다.
이러한 집단의식은 원시시대에서는 생존의 수단이었고 조선시대에는 사람된 도리였다. 그러나 현대사회에서는 매우 비생산적인 행태이다. 더군다나 집단의 목적이 획일화에 있는 경우에는 더욱 그렇다. ‘다름’을 곧 ‘열등’으로 간주하는 전체의식은 획일성을 강조하고 생산성을 저하시킨다.
이러한 한국의 집단지향적 성격이 긍정적 효과를 가져오는 경우도 있다. 대기업과 같은 고소득 직종군에 합류하기 위해 발현된 엄청난 교육열을 미대통령 오바마가 극찬했고, 미인 집단에서 밀려나지 않고자 하는 욕망은 한국을 성형강국으로 급부상시켜 성형관광산업만으로도 엄청난 경제적 효과를 창출했다.
하지만 현실에서 문제는 급변하는 시대에 집단의식은 득보다는 실이 많고, 주류집단에 속할 수 있는 사람들보다 그렇지 못한 사람들의 수가 월등히 많다는 것이다. 비주류 집단은 어떻게 되었나. 대기업에 가지 못하고 미인반열에 합류하지 못한 이들은 머지않아 모든 ‘사회적’인 것들을 쌍수 들고 환영하기에 이르렀다.
상대적 박탈감은 정부와 기득권에 대한 불만으로 이어지기 쉽고, 이런 상황에서는 모두가 잘 살 수 있다는 사회주의 체제가 성스러운 유토피아라는 착각에 빠지기 쉽다. 좌파들이 이 상대적 박탈감이라는 씨앗에 물을 주고 거름을 줘가며 정성껏 키우는 이유가 바로 그 때문이다.
이 씨앗이 무럭무럭 자란다는 것은 곧 사회주의 세력의 확장을 의미하는 것일 테니 말이다. 이 거름의 종류도 다양하기가 매우 다양하다. 사회적 제도. 사회적 권리. 사회적 책임, 사회적 기업. 사회적 경제. 사회적 일자리. 사회적 약자 등등.
개중에서도 눈 크게 뜨고 다시 봐야 할 것은 사회적 경제이다. 사회적이란 용어가 실질적으로 의미하는 것은 ‘분배적 정의’이다. 분배란 곧 시장경제가 아닌 계획경제이며 계획경제의 방식은 국가가 경제를 통제하고 기업의 경쟁력을 소멸시킨다.
자본주의 국가 한국에서 사회적 경제를 하자함은 자본주의 하지말고 ‘평등하게’ 나눠먹기 하자는 말과 같다. 평등하길 원하는 국가에서 살아남을 뛰어난 능력의 개인과 뛰어난 경쟁력의 기업은 없다. 그리고 경제도 없다.
종국에는 2014년 4월 30일 새누리당 유승민 원내대표가 이 사회적경제기본법이라는 것을 발의했고 올해 5월에는 세종시의회가 사회적경제기본법 제정 촉구 결의안을 채택했다. 사회적경제기본법의 주요 내용이라는 것이, 빈곤을 해소하는 복지, 따뜻한 일자리 등의 사회적 가치를 추구하는 사회적경제조직들은 자생력이 없기 때문에 정부차원에서 지원하고 육성해야한다는 것이다.
무상복지 시리즈에 이어 또 다시 사회적이란 용어의 거머리가 나타난 것이다. 사회적경제기본법의 요지는 사회적 일자리와 사회적 가치를 창출하는 기업을 특별히 육성하겠다는 건데 매우 근시안적이자 일부 정치인들 배불리기에 좋은 정책이다. 이런 사회적 기업은 표면적으로는 기업이윤과 사회가치창출이라는 두 마리 토끼를 다 잡는 듯 보이나 실상은 그렇지 않다.
마땅히 기업의 이윤이 없어도 정부지원이라는 믿을 구석이 있기 때문에 경쟁에 뛰어들 이유가 없다. 경쟁하지 않는 기업은 실패하기 마련이고, 결국 사회적 기업에 대한 보조금은 국민의 부담으로 돌아오게 된다. 또 한가지 말하고 싶은 것은 이렇듯 ‘안전빵’인데다가 정부의 지원이 필수적인 사회적 기업이 우후죽순으로 생겨났을 때 정경유착고리의 매듭이 더 단단해질 가능성이 있다는 것이다. 사회적 기업형태의 ‘아름다운 가게’가 고 성완종 회장과 ‘아름다운 인연’을 이어왔듯이.
재주는 곰이 부리고 표는 정치인이 번다고 했다. 대부분의 사회적 제도들이 그래보인다. 스웨덴같이 탄탄한 복지를 하려면 복지비용을 충당할 재정책임인구가 뒷받침되어 고부담-고복지가 가능하거나 가진 자원이 풍부한 부유국이거나 해야하는데 지금 한국의 경제는 디플레이션 위기에다 출산율은 OECD국가 중 최하위이다.
재정을 충당할 방법이 없고, 충당하려 하지도 않으면서 고복지를 원하는 것이다. 먹고살기 팍팍한데 복지혜택 늘려주고 일자리 만들어 준다니 찬성하는 게 당연하다. 사회적인 차원에서 돌봐주고 사회적인 차원으로 공짜밥 먹여준다하니 그저 믿고 표 주고 호주머니 털어 세금도 더 많이 냈는데 나중가서 정치인들은 나몰라라 하면 그만이고, 뒷일은 결국 국민들이 책임져야 할 뿐이다.
어려운 살림 조금 더 넉넉해지길 바랄뿐인 사람들은 당장의 이익에 현혹되어 터무니없이 규모가 큰 복지의 증대와 정부역할의 비대화가 후일에 어떤 결과를 가져오는지 알지 못한다. 보이지 않는 것들에 대해서는 아무도 말해주지 않기 때문이다.
마르크스주의 신봉자들이나 기득권 비판을 통해 사회정의를 실현한다고 믿는 비판중독자들, 세금으로 자선사업하는 정치인들은 시장경제나 사익추구를 비도덕적이고 탐욕스러운 것으로 죄악시하고 사회주의의 밝은면에 대해서만 떠들어 댈 뿐이지, 개인이 책임져야 할 일을 대신 정부가 책임지게 함으로써 무책임한 개인이 양산되고 국가의 존립까지 위기로 몰아넣었던 영국병이나 무분별한 복지정책으로 빚더미에 올라앉은 그리스와 같은 사회주의의 그림자에 관한 이야기는 해주지 않는다.
어느 사회에나 워킹푸어는 존재하고 홈리스도 존재한다. 이론적으로 모두가 잘 먹고 잘 살 수 있는 경제시스템은 공산주의 배급시스템이지 시장경제가 아니다. 현실과는 다르다. 현실에서는 인위적인 질서가 존립하지 못하고, 경쟁과 격차가 존재하는 시장경제 질서가 자연스럽다. 그렇지만 앞서 말한 좌파 무리들은 그들의 유토피아 - 사회주의가 역사 속에서 어떻게 섬멸되었는지는 망각하기 일쑤인데다가 한술더떠 국민들에게까지도 공짜 밥 잘 먹여서 사회주의자로 키울 심산으로 보인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그것을 이해하기까지 적지 않은 시간과 에너지를 할애해야 하는 실증적인 지식이나 이론보다는 직관적인 것을 선호한다. 특히나 한국 사람들은 타인의 시선을 비정상적일만큼 의식하기 때문에 온정과 선행 등의 감정적인 행위들과 감성적인 컨텐츠에 쉽게 동조한다.
좌파나 정치인들의 논리나 선동이 잘 받아들여지는 것은 이러한 이유 때문이다. 정작 자신이 슬픈 것인지 아닌지도 헛갈려하면서 모두가 눈물 흘릴 때에 같이 눈물 흘리지 않으면 비도덕적인 인간, 냉혈한으로 보일 것을 두려워한다. 남들이 그렇다 하면 그런 것이다. 우리는 사회적인 것에 대해 전통적으로 학습되어진 본능적인 호감을 표한다.
좌파들이나 좌파의 이름을 빌려 권력을 얻고자 하는 정치인들은 이러한 지적인 게으름과 문화적 특성을 무척이나 교활하게 이용한다. 희망, 공동체, 연대, 사회 등의 단어를 남발함으로서 사회적이라는 용어를 더럽히고 그 개념을 변질시킨다. 쉽게 자신들의 이데올로기에 동참시키거나 충성스러운 유권자, 자원봉사자까지 얻을 수 있기 때문이다.
이런식으로 선전선동에 의해 이리저리 쓸려다니는 ‘파도형 좌파’들은 자발적인 지식에의 욕구나 이념에 의한 것이 아니기 때문에 의무는 없고 권리만 있다. 착각하기 힘든 것임에도 많은 사람들이 착각하고 있는 것은 정부나 정치인들이 자선사업가가 아니라는 사실이며, 더욱 불가사의 한 것은 아무리 평등한 조건에 놓아두어도 곧 차등을 만들어내는 존재가 인간임에도 불구하고 그 사실을 인지하지 못한 채 끊임없이 평등과 분배에 현혹된다는 사실이다.
사회는 금지하거나 통제할 수 있는 계획적인 성격의 것이 아닌 개인들의 문화적, 경제적 관계가 역동적으로 이루어지고 변화하는 자생적이고 자유로운 성질의 것이다. 또한 이렇게 유기적인 사회속에서 내가 무엇을 먹을지 어느 브랜드의 옷을 구입할지 등을 선택할 수 있다는 것은 그것들이 경쟁에서 살아남은 것들이기 때문이다. 경쟁이 없는 사회에는 선택지도 자유도 없다.
지금 우리는 또 다시 집단적이고 정체되어 있다. 경쟁을 천시하고 격차를 비난하는 뿌리 깊은 양반 컴플렉스를 버려야 할 때이고 ‘사회적인 것에 대한 중독’에서 벗어나야만 할 때이다. 희망이라는 그럴듯한 타이틀을 내걸고 개인의 자유와 각자의 책임까지도 정부에 양도할 것을 종용하는 사회적인 것들로부터 탈출해야만다. 사회는 무상급식소도 아니고 희망을 만들어줄 수 있는 곳도 아니다.
자유경제원 유가연 연구원
-참고자료(서적) : ‘사회적’이란 용어의 미신 / 현진권 편, ‘경쟁은 아름답다’ / 신중섭 편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