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87년 6월 항쟁 이후 최대 인파가 서울 도심을 가득 채웠다. 이날 집회는 주최측 추산 100만명, 경찰추산 20만명으로 2000년대 들어 최대 규모를 기록했다. 100만명이 모여든 이번 집회의 행렬은 율곡로를 따라 길게 이어져 국민들이 청와대를 둘러싸는 모양새를 이뤘다.
서울시민 뿐만 아니라 지방에서도 전세버스, 열차로 수많은 사람이 집회에 참석했고, 노동계 뿐만 아니라 종교계, 시민단체, 대학생 단체들 속에 어린 중고등학생들도 곳곳에 눈에 띄었다. 유모차를 끌고온 젊은 부모부터 중고교 자녀와 함께 나온 가족 단위의 참석자들도 많았다.
오후 2시께부터 서울시청광장과 광화문광장, 청계광장을 비롯한 서울 도심은 거리로 나온 시민들로 가득했다. 대학로에서 종각을 지나 광화문광장으로 이어지는 길목은 대학생과 청소년들이 채웠다. 서울 서초구에서 왔다는 한 고등학생(18)은 “세월호 사건에도 잘못된 위안부 협상에도 침묵했지만 마음속 어딘가에 어마어마한 분노가 있었다”면서 “하지만 10월29일 처음으로 청계천 광장에 나가서 우리가 외치면 바뀔 수 있다라는 것을 깨달았고, 오늘처럼 우리가 이만큼 모여 외치면 달라질 수 있다고 믿는다”고 말했다.
구로구에서 온 한 학생(20)도 “지난 2주간 인터넷 생중계만 보다 이번에는 꼭 와봐야 겠다는 생각이 들어 나왔다”면서 “이번 집회는 민주주의를 똑바로 세우고 국민주권의 정당성을 재정립하는 역사적인 날로 기억될 것 같다”고 말했다. 학생들의 이야기에 함께 행진하던 어른들은 기특한 듯 쳐다보면서도 씁쓸한 표정을 감추지 못했다.
해가 지기 시작한 서울 도심은 100만 촛불이 타올랐고, 시민들은 “박근혜는 퇴진하라”는 구호를 목청껏 외치며 도심을 누볐다. 하지만 시민들의 행진은 경복궁역 앞에서 경찰 차벽에 가로막혔다.
시민들은 청와대로 가는 길목을 막아선 경찰 차벽을 향해 “우리가 가는 길을 막지말라”고 고함쳤다. 대답없는 외침에 시민들은 그들을 막아선 경찰 차벽에 박 대통령의 퇴진을 촉구하는 스티커와 자신이 들고 있는 피켓을 붙이는 것으로 분풀이를 했다.
행진 참가자들은 다양한 모습으로 행렬에 임했다. 가면을 쓰고 있는 사람부터 북과 장구 등 악기를 연주하는 사람들까지 개성 넘치는 아이디어로 행진에 참여했다. 차벽으로 막힌 효자로 앞에서는 몇몇 시민들이 줄을 지어 “이 길이 청와대로 가는 길입니다”라고 외치기도 했다.
경복궁역 앞은 인도까지 경찰 차벽으로 막혀 시민들이 불편을 겪기도 했다. 구리시에서 올라온 시민은 “결혼식 때문에 왔다가 경찰 차벽에 가로 막혀 오도가도 못 하는 상태”라며 “왜 인도까지 막으며 시민들에 불편을 주는지 모르겠다”고 토로했다.
또한 경복궁역 몇 개 출구는 경찰 병력에 의해 원천봉쇄 됐다. 지하철 역 출입구를 통제하는 경찰병력에 시민들은 “집에가야 하는데 왜 못 가게 막느냐”고 목소리를 높였다. 하지만 출입구를 지키고 선 경찰 간부는 “다른 출구를 이용해주십시오”라고만 답했다. 이에 화가난 시민들은 “그러면 멀리 돌아서 가게 택시비를 달라”고 비판했다.
경복궁역까지 행진한 사람들은 차벽에 막히자 광화문광장으로 되돌아갔다. 한편 광화문광장에서는 1천500여개 시민사회단체가 연대한 ‘모이자! 분노하자! #내려와라 박근혜 3차 범국민행동’ 문화제가 열렸고, 발길을 돌리던 시민들은 광화문광장에 다시 모였다.
세종문화회관 옆 계단은 수 백명의 시민들이 자리를 잡고 박 대통령의 퇴진을 외치고 있었고, 광장 곳곳에서도 삼삼오오 모인 시민들이 현 정국을 논하며 열띤 토론을 이어갔다. 자유발언대에 올라서서 발언을 이어가는 사람들 중에는 “저는 개돼지 시민입니다”라며 자신을 소개하는 이들도 있었고, “오늘은 하야하기 딱 좋은 날입니다”라고 외치는 사람들도 있었다.
경기도 오산에서 3시쯤 올라왔다는 김성준(43세)씨는 (아들,김선율9세)과 함께 피켓을 들고 광화문 거리를 걸었다. 김성준 씨는 “수요일은 중앙지검에서 1인 시위도 했다”며 “오늘은 청와대 까지 행진 하겠다. 아들이 길을 뚫어 주겠다고 말했다”면서 웃어보였다. 이날 아빠를 따라온 김선율 군은 “1인 시위도 하고 나가서 소리도 지르는 아빠를 보니 멋있다”며 “박근혜 할머니가 빨리 내려왔으면 좋겠다”라고 말했다.
한편 문화재 이후에는 다음날까지 텐트 농성, 자유발언대 등으로 ‘난장’ 행사가 이어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