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마 전 옥스퍼드 대학교 출판부는 "분노의 미끼(rage bait)"를 2025년 올해의 단어로 선정했다. ‘짜증 나거나 도발적이거나 불쾌감을 주는 방식으로 분노나 격분을 유발하도록 의도적으로 고안된 온라인 콘텐츠’를 분노의 미끼라고 한다.
이 단어는 2002년 당시 유즈넷(Usenet) 토론 그룹에 처음 게시되었는데, 차를 추월하려고 헤드라이트를 깜박거렸을 때 추월당하는 운전자의 분노가 어떤지 묘사하기 위해 사용되었다. 그 이후로는 ‘온라인에서 주의를 끌기 위한 행동’을 지칭하는 속어로 점점 더 널리 쓰이고 있다.
그런 ‘분노의 미끼’가 미치는 사회적 파급력은 인터넷이 고도화한 우리나라에서 더 크고 직접적이다. 정치권의 하루는 ‘상대 진영의 말 한마디’를 확대 재생산하는 것으로 시작된다.
연예계의 논란은 사실 여부보다 감정 곡선이 더 빠르게 퍼진다. 우리 일상의 소통에서도 ‘잘잘못을 즉시 가려 결론 내리기’를 요구하는 분위기가 짙다.
그러니 분노하지 않으면 무책임한 사람이 되고, 반대로 분노하면 또 감정적이라는 지적을 받는다. 이러한 이중의 틈에서 우리는 피로해지고, 점점 더 냉소적으로 변해간다. 옥스퍼드 측이 ‘분노의 미끼’을 담은 콘텐츠의 급증으로 사회적 피로와 분열이 확대했다고 지적한 것은 바로 이를 두고 한 말이리라.
클릭 한 번으로 시선이 쏠리고, 자극적 제목이 감정을 흔들고, 분노한 사람들이 댓글을 달고 공유하고 클릭하는 행위들이 온라인 방문자 수(트래픽)를 끌어올린다. 플랫폼은 이런 구조를 알고 있으며, 알고리즘은 인간의 취약함을 정확히 겨냥하고 있다. 그러고 보면 분노를 자극하는 콘텐츠는 이미 디지털 생태계의 핵심 동력과 상품이 된 셈이다.
하지만 아이러니하게도 아날로그 현실에서는 분노는커녕 냉소와 무관심이 점점 더 짙어지고 있다. 2차 세계대전 당시 레지스탕스로 활동했고, 인권과 민주주의에 헌신한 스테판 에셀 (Stéphane Hessel)은 자신의 저서인 “분노하라”에서 냉소와 무관심이 팽배한 현대 사회를 비판하며 우리가 분노를 놓치는 순간, 사회적 불평등과 인권 침해, 민주주의의 퇴조 같은 더 심각한 사태가 진행된다고 경고했다.
그는 “무관심이야말로 최악의 태도”라며, 특히 젊은 세대가 분노하고 변화에 참여하라고 촉구했다. 그의 말처럼 우리는 분노의 소비에 휘둘리지 않으면서도, 마땅히 분노해야 할 일에는 눈을 부릅뜨고 대응할 준비가 필요하다.
사실 분노 자체는 죄가 아니다. 인간의 자연스러운 감정이며, 때로는 부정과 싸우기 위한 가장 강력한 동력이다. 부정의 구조에 침묵하는 생활은 결국 공동체의 퇴행을 불러온다. 부당한 권력, 비합리적 제도, 구조적 폭력 앞에서 분노는 도덕적 감각의 증거다. 우리가 완전히 분노를 금지한다면, 세상은 개선의 기회를 잃고 만다.
올해의 단어가 ‘분노의 미끼’라는 사실은 단순한 언어의 유행을 넘어, 지금 우리가 어떤 시대에 서 있는지를 보여준다. 그러나 동시에, 그 단어가 우리에게 묻는 것이 있다. 우리는 정말로 분노해야 할 대상에 분노하고 있는가? 아니면 누군가가 던져놓은 미끼에 걸려 계속 끌려다니고 있는가? 이다.
지금이야말로 분노가 우리를 갈라놓는 칼이 아니라, 부정과 싸우기 위한 방패가 되도록 관리해야 할 때가 아닌가 싶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