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금융회사가 자율적으로 금융소비자 보호를 위해 노력하지 않을 경우 정부는 규제를 강화할 수밖에 없다. 하지만 정부의 이러한 규제강화는 금융 산업의 경쟁력을 약화시키는 요인이 될 수 있다. 이에 OECD와 World Bank에서는 ‘금융소비자 보호 10대 원칙’ 및 ‘금융소비자 보호 모범규준’을 마련해 권고하고 있다. 소비자에 대한 행위규범, 판매와 자문행위, 사후보호 등의 강화가 주요 이슈다. 우리나라 금융 산업은 어떤 상황인지 그 내면을 들여다봤다.
윤대길(가명, 34)씨는 지난 3월 카드대금 청구서에 ‘**카드 채무면제유예상품’이라는 항목으로 9천667원이 청구된 내용을 확인하고 해당 카드사에 청구 건에 대해 문의했다. 그리고 카드사로 부터 자신이 2011년 6월 전화 권유로 채무면제유예 상품 서비스에 가입했다는 답변을 들었다. 가입사실 확인을 위해 녹취록을 요구한 윤씨는 당시 모집인과 통화에서 설명이 너무 빨라 어떤 서비스인지 제대로 이해하지 못한 상황에서 카드회원에게 혜택을 주는 것으로 오해하고 가입에 동의한 것을 확인했다. 윤씨는 “소비자가 그런 상품서비스에 가입해서 수수료가 나간 줄 알았다면 누가 가입했겠냐”며 분통을 터뜨렸다.
지난 3월 개최된 금융위원회 금융소비자 보호를 위한 현장간담회 자리에서 한 참석자는 “금융상품 가입 과정에서 금융회사로부터 계약서, 상품 설명서 등 8~15개에 달하는 다양한 서류를 받고 통상 20~30회에 달하는 서명을 하게 된다”며 “결국 소비자와 금융회사 모두에게 불편을 초래하고 정작 소비자에게 중요한 정보는 전달되지 못하는 등 소비자 보호는 현재 형식화 돼 있는 상황”이라고 지적했다.
이날 현장간담회 자리에서는 금융소비자 보호 강화라는 말은 반복되는데 정작 소비자는 보호받고 있다는 생각이 들지 않는다며, 금융회사에 대해서는 상품 가입한 이후에도 지속적으로 소비자에 대해 책임감 있는 모습을 보고 싶다는 불만이 제기됐다. 최근 우리나라뿐 아니라 전 세계적으로 저금리 기조가 지속되고 있다. 이런 저금리 추세는 금융회사에게는 다양하고 복잡한 금융상품 개발의 유인이 될 수 있으나, 금융소비자들은 금융상품을 이해하기가 더욱 어려워져 새로운 위험에 노출될 수 있는 것이 사실이다.
또 노년층이나 서민 등 취약계층은 보이스피싱 등 금융사기나 불법행위로 인한 피해가 계속 늘고 있다. 2014년 세계경제포럼(WEF) 국가경쟁력 평가에 의하면 조사대상 144개국 가운데 우리나라의 금융시장 성숙도는 80위, 금융서비스의 이용 가능성은 100위로 우리나라의 경제수준에 비해 금융산업 경쟁력은 매우 낮은 수준이다.
금융소비자보호 강화 추세
금융소비자란 차입, 저축, 투자 등을 위해 금융회사가 제공하는 금융상품이나 금융서비스를 이용하는 소비자를 말한다. 이 금융소비자 보호에 대한 제도는 판매 후 불만이 발생하는 사건을 기점으로 사전적 규제와 사후적 규제로 구분한다. 사전적 보호제도는 약관 및 공시 관련 규제, 불건전·불공정·영업행위를 규제하는 영업행위 준칙, 판매업자 등록 및 자격규제 등을 들 수 있다.
사후적 보호제도는 소비자의 불만 제기에 따른 분쟁조정, 소송, 금융회사제재, 예금자 보호 제도 등을 들 수 있다. 글로벌 금융위기 이후 금융소비자보호를 강화하기 위한 제도 개선 노력이 활발히 이뤄지고 있다. 우리나라도 고령화·저성장·저금리 시대로 접어들면서 금융상품이나 서비스의 질에 대한 관심이 확대
되고 불완전 판매 등 금융소비자 보호 이슈에 보다 민감해졌다. 아울러 상품개발 및 판매 전과정에서 불완전판매 방지를 위한 제도 개선이 이뤄지고 있으며 금융약자 등을 보호하기 위한 대출 관련 규제가 강화되고 있다.
고객보다 회사이익이 우선인 대한민국
6월8일 국회 헌정기념관에서는 ‘금융소비자와 금융회사가 함께 나가야 할 방향’을 주제로 정책세미나가 열렸다. 이규복 한국금융연구원 연구위원은 금융소비자보호의 추세에 대해 “해외에서도 상대적으로 공시 강화가 소비자보호의 주된 정책이었지만 글로벌 금융위기 이후 사후제재, 사전적인 직접 개입 등이 강화되고 있다”고 전했다.
기존 영국 FSA(Financial Services Authority)는 소비자들은 충분한 정보가 있으면 합리적으로 선택할 것이고, 시장은 자기조정기능이 있으며, 판매채널을 관리감독 한다면 금융상품은 적합한 사람에게 판매될 것이라는 전제로 규제를 해왔다. 하지만 이런 규제 모델은 실패한 것으로 평가받았다. 상당히 많은 정보가 공시됐음에도 소비자들의 합리적인 선택을 이끌기 부족했고 금융회사의 관심은 회사의 수익 극대화에 목적을 두다 보니 시장의 자기조정기능은 작동하지 않았다.
또 지급보증보험, 금리스왑 등으로 수백만 파운드의 배상이 이뤄지고 소비자 민원이 급증해 강하게 관리감독이 이뤄짐에도 금융회사는 계속 적극적으로 판매를 시도했다. 이규복 연구위원은 “우리나라는 약관심사, 수수료 및 금리체계 개입 등의 사전 규제와 판매과정에서의 설명의무 강화 등 위주로 강화돼 온 측면이 있다”고 설명했다.
이 연구위원은 “이제는 약관심사의 한계를 감안해 보다 포괄적으로 개발 단계의 문제에 대해 개입할 수 있는 방법을 제도화하고 영국의 상품개입제도와 유사한 사후개입제도도 고려해 볼 필요가 있다”며 “우선적으로 관련법 정비 외에 시장에 존재하는 금융상품에 대한 모든 정보를 확보하고 분석할 수 있는 감독당국의 역량 강화가 중요하다”고 강조했다.
이어 “우리나라는 판매과정에서 설명의무 등이 준수돼야 하는 가운데 설명에 대한 형식적인 확인이 강조돼 왔고 국내 판매인은 고객의 이익을 위해 최선을 다하는 것이 아니라 회사의 이익을 위해 최선을 다하도록 제도화돼 있는 점이 해외와의 근본적 차이”라고 말했다. 덧붙여 “소매자문업의 개념을 정립하고 소매자문업자가 고객 이익에 최선을 다해 일하도록 유인해야 한다”면서도 “직원에 변화가 필요하므로 장기간에 걸쳐 준비할 필요가 있으므로 보상에 대한 공시강화, 권유과정의 기록 등부터 시행할 필요가 있다”고 강조했다.
불완전판매 방지, 상품개발에서 판매 후 까지
이규복 연구위원은 “이제는 상품개발에서 판매까지 전 과정에서 불완전판매 방지를 위한 제도개선이 이뤄지고 있는 추세”라고 전했다. 불완전 판매는 금융기관이 고객에게 상품의 운용, 리스크, 손실가능성 등을 제대로 알리지 않고 판매하는 것을 말한다. 펀드의 경우에는 명확하지 않은 판단자료, 출처없는 예측자료를 투자자에게 제시하거나, 펀드에 부정적 영향을 미치는 사실을 알고도 투자자에게 알리지 않고 판매하는 행위 등이 이에 해당한다.
따라서 판매 후에도 불완전판매에 대한 제재를 강화해야 한다는 의견을 피력했다. 이 연구위원은 “우리나라 민원 및 분쟁조정 관련 인력 보강이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영국은 2010/11년 사업계획 기준으로 스탭수가 1천170명 정도다. 이에 반해 우리는 한국소비자원 조정위원회 산하 분쟁 조정 사무국 직원이 36명, 피해구제국 및 서울 부산 지원 피해구제팀 직원이 56명 등 민원 처리에 인력이 턱없이 부족한 상황이다.금융감독원에 따르면 분쟁신청건수가 급증하며 평균처리기간이 증가했고 분쟁처리 만족도도 하락했다.
이 연구위원은 “대출과 관련해서도 상환능력 평가를 강화하고 정책적 서민금융과 민간서민금융간 보완성을 강화해야 하고, 고금리 대출 사용자들에 대한 실태조사도 강화해 이들의 니즈를 파악하고 그에 맞는 정책적 노력이 필요하다. 대출성 상품에 대한 숙려기간으로 청약철회권 제도를 도입할 것”을 추천했다.
청약철회권 논란
하지만 금융소비자의 피해를 최소화하기 위해 제기한 이 ‘청약철회권’에 대해서는 금융권내에도 논란이 있다. 청약철회권이란 소비자에게 계약체결 후 일정기간 이내에 특정한 이유를 제시하지 않고 계약을 철회할 수 있는 소비자의 권리를 말한다. 상품이나 서비스 구매 후 숙려기간을 제공하는 방법의 하나다.
소비자의 합리적 선택을 위해 G20, World Bank 등 국제기구도 대출성 상품에 대한 청약철회권 도입을 권고했고 선진국들은 청약철회권을 도입하는 추세로 알려져 있다. 우리나라는 현재 국회에 계류 중인 금융소비자보호법안에 청약철회권이 포함돼 있다. 앞선 5월29일 한국금융연구원세미나에서 서정호 한국금융연구원 선임연구위원은 주제발표를 통해 “청약철회권은 금융소비자의 신중한 금융의사 결정을 유도하고 약탈적 대출로부터 금융소비자를 보호하며 가계부채 증가를 억제하는 등의 긍정적 효과가 있을 것으로 예상한다”면서 “우리나라의 경우 가계의 부채부담이 큰 편이고, 고금리 가계대출로 인한 피해도 적지 않아 청약철회권을 도입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하지만 금융계 일각에서는 대출상품 청약철회권은 취약계층으로 대상을 한정하고, 제도 도입에 따른 부작용으로 다른 금융소비자에게 비용이 전가될 우려도 있어 단계별로 적용해 부작용을 최소화해야 한다는 의견도 있다. 이에 대해 서정호 연구위원은 “취약계층을 명확하게 구분하기 어려울 뿐 아니라 세계적으로 특정계층에 한정해 적용한 사례가 없다”면서 적용대상을 한정할 이유가 없다는 점을 강조했다.
금융소비자 보호와 금융회사의 경쟁력
최근에는 국내외를 막론하고 금융소비자의 보호를 강화하는 방향으로 금융 패러다임이 변화하고 있다. 선진국들도 별도의 금융소비자 보호 기구를 설치하는 등 관련 조직과 금융소비자 보호 규제 강화에 힘쓰고 있다. 우리나라도 마찬가지다. 2012년부터 금융소비자보호에 관한 법률(이하 금소법) 제정을 추진하고 있다.
기본법적 성격을 가지고 있는 금소법은 3년째 국회정무위원회에 관련 10여 개의 법률안들과 함께 계류 중이다. 2015년 4월 정무위원회 공청회에서 학계, 소비자단체 등의 다양한 의견이 제기되는 등 최근 관심이 높아지고 있다. 세미나의 세 번째 발표를 맡은 주소현 이화여자대학교 교수는 “금융회사의 서비스 품질과 소비자 만족은 매우 밀접한 관계에 있다”며 “금융상품의 특징을 고려할 때 소비자 요구를 충족시키는 것이 소비자 만족도 제고와 기업이윤 극대화에 기여함을 인식할 필요가 있다”고 강조했다.
주 교수는 “금융소비자는 은행의 예금자, 금융투자회사의 투자자, 보험회사의 보험계약자, 신용카드사의 신용카드 이용자 등 금융회사와 거래하고 있는 당사자뿐만 아니라 잠재적으로 금융회사의 상품이나 서비스를 이용하고자 하는 자를 포함한다고 할 수 있다”면서 “금융산업의 발전은 금융업자의 보호·육성 정책만으로는 불충분하고, 금융소비자를 보호해 시장 참여자의 층을 두텁게 하는 등의 방식으로 금융업자의 수익구조를 개선해 경쟁력을 강화해야 한다”고 설명했다. 이어 “미국의 2009년 금융위기가 소비자 보호에 소홀히 한 것이 중요한 원인이라고 지적한 보고서도 있다”며 “금융소비자 보호와 금융산업의 발전은 서로 양립하는 것”이라고 강조했다. 정부는 현재 금소법 등 법령 제·개정 과제를 올해 안에 입법 완료를 목표로 추진 중이다.
금융소비자와 관련된 위험요인이 증가하면서 금융소비자 보호의 필요성이 더욱 강조되고 있지만 아직 금융소비자 보호환경에 대한 금융소비자의 만족도는 부끄러운 수준에 머물고 있다. 금융소비자와 금융회사가 동반자적 관계로 인식되어 실질적인 금융소비자 보호가 우리사회에 정착되는 건 어렵기만 한 걸까?
MeCONOMY Magazine July 201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