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나라는 유교가 들어오기 전에도 예 정신이 돈독했다. 중국으로부터 동방예의지국이라고 칭송 받았을 정도로 조선 선비들의 예절 지킴은 각별했는데, 오늘날에는 그 흔적을 찾아보기 어렵게 됐다. 자랑스런 우리 예 정신을 살릴 수 있는 방법은 없을까. 전통의 예 정신이 어떻게 사라졌는지, 회복 방안은 무엇인지 살펴본다. 조선을 ‘성리학의 나라’였다고 말한다. 성리학이란 안으로는 덕을 닦고 밖으로는 예를 실천하는 것이라고 간단히 요약할 수 있다. 덕과 예는 손바닥의 양면과 같다. 조선은 덕과 예로서 백성을 다스리려는 왕도정치를 구현하고자 했다. 덕은 수양을 중시하는 것이다, 조선의 선비들은 수양 정신은 참으로 대단했다. 예는 존비와 귀천, 장유, 친소의 차별성으로 나타났다. 이 ‘차별성’이 결국 문제가 되고 말았다. 고조선 이래 우리나라가 건강하게 간직하고 있던 예 정신이 법전화된 중국 예제가 들어오면서 흔들리게 된 것이다. 예학 연구가 김시황 선생의 저서 「한국예학연구논고1(동양 예학회 간)을 보면 조선 시대 예속의 뿌리를 이룬 「주자가 례」는 고려 말에 전래됐다. 「주자가례」는 남송의 주자가 편찬한 책이다. 이것은 고려말 안향이 성리학과 함께 들여 온 것이라 한다
우리나라 태극기와 훈민정음이 주역의 원리에 의해 만들어진 것은 널리 알려져 있다. 주역 전문가인 이선경 박사에 따르면 주역 원리를 상징하는 태극 문양은 삼국시대부터 사용되었다. 이 박사는 경주 감은사와 문무대왕 수중릉 사이에 있는 이견대(利見臺) 주역 건 괘에 나오는 이견대인(利見臺人)에서 따온 것이라고 말했다. 공자는 점서였던 주역에 통찰력 있는 「계사전」을 첨가 했다고 전한다. 주역은 성현의 반열에 오른 공자가죽 간의 가죽 끈이 끊어질 정도로 심혈을 기울여 읽었다고 해서 더욱 유명해진 경전이다. 조선의 선비치고 주역을 탐독하 지 않은 자가 있었겠는가. 뛰어난 선비일수록 주역에 일가견을 가지고 있었다고 해도 틀린 말은 아닐 것이다. 퇴계도 몸을 해칠 정도로 주역을 공부했으며 독자적인 견해를 글로 남겼다. 정다산은 중국의 주역 대가들이 펼쳐온 논지와는 다른 접근법으로 「주역사전」 「역학서언」 등의 역작을 썼다. 정다산은 ‘주역사전은 내가 하늘의 도움으로 얻은 문자들이니 결단코 인력으로 알기 힘들고, 깊이 헤아린다고 도달할 수 있는게 아니다. 이 책을 깊이 읽어 오묘한 뜻을 깨닫는 자손과 붕우들을 천재일우로 만난다면 곱절로 사랑할 것이라’고 고백했다. 다산은
<M이코노미 이상용 수석논설주간> 요즘 서구사회를 보면 거대한 바다 위에서 돛대가 꺾이고 키도 부서진 채 표류하고 있는 범선을 보는 듯하다. 서구사회를 지탱해왔던 교회가 세속적 이데올로기의 공격을 받고 신자들이 무더기로 떠나가는 모습을 지켜볼 수밖에 없다. 서구의 전통적 가치가 무너진 자리에 지금 ‘전투적인’ ‘개인 인권’ 주의가 신성불가침의 교리마냥 기세를 떨치고 있다. ‘가족애’는 시골에서나 가야 볼 수 있을 듯하다. 극단적이고 왜곡된 개인주의가 ‘절대 가치’인양 활보하고 있다. 그런 가운데 뉴질랜드 이슬람사원 학살테러에서 보듯이 이슬람의 극단주의와 화이트 내셔널리스트의 극단주의가 정면충돌하고 있다. 한 세대 전만 해도 서구적 공동체 가치가 우리의 본보기가 된 적도 있었지만 이제 그런얘기를 하는 사람들은 거의 없다. 증오와 적개심으로 폭력화되는 서구사회를 보면서 조화와 상생, 공동체와 인간관계를 중시해 온 한국의 전통적 정신과 가치가 새삼 소중하게 느껴진다. 흔히 서구대학에서 공부하고 온 학자들이 현대사회의 모순을 극복하기 위한 방안을 한국과 동양의 전통에서 찾으려고 해왔다. 그러나 그들은 찾아내지 못하고 갈수록 오리무중에 빠진 것 같다. 왜
<M이코노미 이상용 수석 논설주간> 한국의 전통 예술품 중에서 조선 선비의 초상화는 도덕적 인간의 수양정신이 잘 나타나 있다. 그중에서도 조선 선비의 다양한 표상이 나타난 것으로 강세황, 윤두서, 김시습의 초상화를 꼽는다. 모름지기 초상화란 그 사람의 외모를 잘 묘사함과 동시에 인품과 삶의 궤적이 녹아나 있어야 명품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런점에서 조선 시대 초상화는 세계 회화사에 독특한 경지를 보여주고 있다. 무엇보다 조선 선비들의 수양정신을 눈으로 확인해볼 수 있다는 점에서 소중하기 이를 데 없다. 조선 선비는 도덕 윤리적 삶을 실천하며 관직으로 나아가서는 왕과 백성을 위해 충성하고 벼슬에서 물러나서는 도(道)를 추구했다. 그들은 어릴 때부터 죽을 때까지 그와 같은 수양을 정진함으로써 절제와 탈속, 품격의 경지를 스스로 드러냈다. 강세황과 윤두서, 김시습의 초상화를 보기만 해도 그들의 수양 정신을 그대로 알 수 있다. 율곡 이이가 선조에게 「성학집요」를 지어 올리면서 붙인 글을 보면 조선 선비의 정신세계와 삶의 목표를 오롯이 알 수 있다. 아래 글은 고산이 역해한 「성학집요/격몽요결」(동서 문화사)에서 인용했다. “제왕의 학문 본말과 정치의 먼저
기독교 이전에 우리나라에 전해진 종교와 사상 가운데 가장 백성들에게 친근했던 믿음은 단연 미륵신앙이다. 그도 그럴 것이 궁핍하고 멸시받는 사람들이 선업을 쌓으면 기쁨이 가득한 도솔천으로 갈 수 있고 미륵부처가 미래에 인간 세상으로 내려와 중생들을 빠짐없이 구제해주기 때문이다. 머리 깎고 출가하여 범인으로서는 도저히 불가능할 것 같은 힘든 수행을 하지 않아도 된다. 그저 10선도를 지키면 된다는 것이다. 또 아득한 먼 미래일지라도 이 땅에 지상낙원이 이루어질 수 있다는 희망을 품게 해주는 신앙이다. 10선도란 살생, 도적질, 간음, 거짓말, 이간질, 악한 말, 아첨, 탐욕, 성냄, 나쁜 생각을 하지 않는다는 계율이다. 모두 실천하기가 쉽지 않지만 차차 나이가 들면서 과오도 뉘우쳐 가면 못 지켜질 건 없다. 이에 비해 유교는 엄격한 도덕윤리를 내세우기만 하고 ‘위안’과 같은 감성의 소통이 부재했다. 사후세계의 천국도 없었다. 유교는 실행 면에서 신분적 차별을 극복하지도 못했다. 조선 유교 시대에 불교는 미륵신앙으로 생명을 이어왔다고해도 과언이 아닌 듯하다. 삼국시대부터 조선조 말까 지, 오늘날 민족종교에도 녹아 있는 미륵신앙을 살펴보지 않고서는 한국의 정신문화를
한국사회의 정신문화가 국민소득 향상과 같이 보조를 맞추면 좋겠는데, 그렇지 못한 실정이다. 효와 예절과 같은 전통적 정신문화 유산은 희미해지고 서구에서 들여온 과학정신과 법치주의는 아직 뿌리를 내리지 못하고 있다. 사라져가는 전통 정신문화를 다시 살펴보고 현대 정신 사상을 우리의 시선으로 조명해보는 시리즈를 시작한다. 첫 번째 글은 ‘홍익인간 정신’에 대해서 알아본다. 공자가 살고 싶었던 구이 땅, 후한서 동이전에 나오는 바대로 ‘동이는 천성이 유순해 삼방족과 다르며, 공자가 구이에 가서 살고 싶다고 한 것이 그럴 듯하다’고 기술하고 있다. 산해경에는 ‘군자국 사람들은 의관을 정제하고 칼을 찼으며 사냥하기를 좋아하고 다투지를 않았다’고 한다. 모두 중국 동부의 우리 민족을 묘사하는 말이다. 공자는 기원전 6세기와 5세기에 걸쳐 살았다. 공자가 직접 전해 들었던 동이 땅은 환웅과 단군 시대였으리라. 고조선 시대는 불교와 유학이 태동하기 전이다. 우리 민족 고유의 정신문화가 고스란히 숨 쉬고 있었던 시대였다. 우리 민족의 고유 정신이란 게 ‘홍익인간 정신’이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유승국은 갑골문에 따르면 인(人)자는 본래 사람이라는 뜻이 아니라 인방족, 동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