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찍이 인류 역사에 없었던 세계 60개국 195만 7616명이 참전한 6.25 전쟁. 그 참화에서 일어나 반세기만에 경제 선진국으로 도약한 K-문화의 발상지 대한민국, 그 성공비결이 시작된 세계 유일의 DMZ 접경지역에 있는 평화 누리 길을 세계인들이 걷게 하자. 그러면 접경지역의 인구유출을 막고 지역경제를 살릴 수 있을 것이다. 미 육군 태평양지역 총사령관의 일반명령 제1호로 시작된 북위 38도선 시간을 일제강점기에서 해방된 1945년 8월 15일, 그로부터 보름이 더 지난 9월 2일로 돌려보자. 그날 미 육군 태평양지역 총사령부는 일반명령 제1호를 발령했다. 북위 38도선 이남의 일본군은 미 육군 태평양지역 총사령관 맥아더 사령관에게 항복하라. 그리고 38도선 이북의 일본군은 소련 극동군 총사령관에 항복하라는 거였다. 그 명령에 따라 군정(軍政)이 시작되고 북위 38도 선은 우리 조국을 남북으로 가른 최초의 경계선이 되었다. 북위 38도선은 한국전쟁이 터지면서 소멸했다. 그리고 1953년 7월 27일 22시를 기해 휴전에 합의한 남북은 대치하던 지점에서 무장을 해제하고 경계 팻말을 세워 군사분계선(MDL Military Demarcation Line)으로
연암 박지원을 보통 북학 사상가, 실학사상가로 평가하며 그가 남긴 글들을 단편적으로 소개하는데 그런 서술은 연암을 좁은 틀에 가두는 듯하다. 연암의 진가는 그의 작품 자체에 내재돼 있다고 본다. 「열하일기」와 「허생전」과 같은 대표 작품들을 음미하는 것이야말로 오롯이 그의 문학정신의 진수를 엿볼 수 있다고 본다. 그런 의미에서 근래에 들어서도 다양한 「열하일기」 해석본이 꾸준히 출간하는 것은 매우 바람직하다. 그런 책들이 독자들에게 잘 읽혀질 수 있도록 학계와 문학계의 노력이 멈춰져서는 안 될 것이다. 「열하일기」가 한문으로 써진 점을 아쉬워하는 이들이 있는데 그건 전혀 그렇지 않다. 연암이 살았던 18세기 지식인들은 주로 한문으로 글을 썼고, 한문으로 씌었다고 글의 가치가 떨어지는 것이 아니다. 오늘날 영문학과 불문학, 독문학의 작품들을 한글로 번역하여 읽으면 우리의 자양분이 되듯이 한문으로 쓴 작품을 한글로 해석하면 우리 것이 된다. 하물며 선조들이 쓴 한문 작품은 당연히 우리 것이다. 18세기에 한글로 쓴 작품들도 오늘날 읽으려면 전문가의 손으로 번역 수준의 글로 다듬어야 이해할 수 있다. 그것은 중세 영어를 현대영어로 바꿔야 알 수 있다는 점에서 어느
조선시대 역사를 서술한 그간 관점을 보면 당쟁은 너무 부각된 반면에 정조를 비롯한 왕들의 탕평 노력은 과소평가된 듯하다. 인류사를 보면 당파 간 갈등과 전쟁의 역사임을 뚜렷이 알 수 있다. 인간들 사는 속에 갈등과 다툼이 늘 있어왔다. 그 갈등을 피를 부르는 다툼으로 가지 않도록 하는 게 정치의 상책이라고도 할 수 있다. 인간은 크든 작든 욕망을 가진 존재들이며 욕망과 이익을 따라 끼리끼리 뭉쳐지면 당파 간 갈등으로 격화되어 음모를 꾸미고 죽이기까지 한다. 대 식민지 시기 일본인 학자들이 조선시대를 당쟁의 역사로 압축해 표현한 것은 그들의 협소한 역사 지식과 군국주의적 사관에 입각한 것이라는데 별반 이론은 없을 듯 하다. 객관이란 포장 아래 그들의 무지와 의도를 감춘 것일 터 이지만 그걸 알아채지 못한 당대와 후세의 일부 지식인들이 더욱 아쉬울 따름이다. 한반도는 신라에 의해 통일된 이후에는 하나의 통일된 왕조로서 고려, 조선으로 이어져 왔다. 이웃 중국과는 바다와 만주라는 완충지대를 두고 떨어져 있고 일본과도 바다를 사이에 두고 있다. 하여 외세와의 전쟁이 없었던 시기는 왕권에 도전 하는 세력은 없었던 편이었다. 대부분의 정치 행태는 왕 아래 제반 정치세력
2021년 4월 제93회 미국아카데미시상식에서 영화 ‘미나리’의 배우 윤여정 씨가 한국인 최초로 여우조연상을 받았다. ‘미나리’를 본 한국인들은 아마도 윤여정의 연기에 왜 심사원들이 높은 점수를 준 것일까 하고 의아했을지 모른다. 윤여정 씨의 뛰어난 연기도 있지만 그것보다는 자식과 손자들을 위해서 묵묵히 헌신하는 한국인 어머니상의 캐릭터가 심사원들의 감동을 불러일으킨 것으로 짐작된다. 어머니의 자식 사랑과 희생은 한국인 효심의 절반 모습이다. 그 나머지 절반인 자식의 부모 섬김은 오늘날 점점 빛이 바래고 있는 것 같다. 인간의 순수한 효심은 아주 옛날 고대 이전 시대부터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인간이 동물과 다른 종으로 진화하면서 남녀가 만나 사랑의 결실로 자식을 낳고 오랜 기간 양육하는 사이에 효심은 자연히 형성됐을 것이다. 부모가 나이 들어 육체적 기력이 떨어졌다고 할지언정 그들의 경험 지식과 지혜는 장성한 자식들에게 필요했을 것이다. 효도가 동아시아 유교문화권의 독특한 가치이자 사상인 양 말해지고 있으나 정확한 표현은 아닌 듯하다. 유교 문화는 가족의 효 윤리와 여기서 확장된 충 윤리가 거의 전부다. 이에 비해 서양의 문화는 효를 포함해 인간 덕성과 행
이 지구상 어느 나라든 노비와 농노, 노예가 있었다. 조선은 노비가 많았을 뿐만 아니라 노비보다 나을 게 없었거나 더 열악한 삶을 살아간 양인들도 많았다. 인류사를 보면 ‘인간 불평등론’ 혹은 ‘인간 차별론’은 문명 이전 아득한 태고부터 시작돼 오랫동안 존속했을 뿐만 아니라 현재도 그 흔적이 곳곳에 남아 있다. 우리나라에도 순장이 행해졌던 것을 보면, 노비는 고대부터 존재해왔음을 알 수 있다. 아마도 노비의 뿌리는 전쟁 포로로 잡혀 온 노예일 것이다. 포로 외에 빚을 갚지 못했거나 중대한 범죄를 저질렀을 때 노예가 됐다. 우리나라의 경우 전쟁이 늘 있었던 게 아니고, 삼국 통일 후에는 주로 침략을 받아온 터라 포로에서 유래한 노비는 차츰 사라졌을 것이다. 어떤 연유든 노비는 노예가 주인집에서 거주하고 혼인하고, 누대에 걸쳐 정착하면서 한 사회를 구성하는 계층의 ‘신분’으로 굳어진 형태라고 보면 틀림이 없을 것이다. 역대 왕조 중에서 노비가 가장 많았던 시기는 15~17세기 조선 시대로, 인구의 30~40%였을 것이라고 학자들은 입을 모으고 있다. 한양의 양반 관료들은 적게는 100명에서 많게는 천명을 오르내리는 노비를 소유하고 있었다고 전한다. 고려 시대 노
현대는 위기 연속의 시대 또는 복합 위기의 시대라고 칭할 만하다. 세계가 글로벌 네트워크로 긴밀하게 연결돼 있기도 하고 한국의 위상도 예전보다는 부쩍 높아졌기 때문에 각 부문마다 평탄한 날은 드물고 위기가 아닌 날이 없는 것 같다. 이와 같은 위기 다발 시대에 임진왜란의 역사를 되돌아보는 일은 한없이 필요하고 소중하다. 우리가 역사를 공부할 때 비겁하고 어리석고 분열했던 사건들을 낱낱이 살펴보고 오늘날 어떻게 적용해볼 수 있을 것인가를 생각하지 않으면 교훈을 얻지 못한다. 이순신 장군과 의병들의 혁혁한 공만 이야기하면 교훈은 커녕 과장된 자만심만 키우거나 수치를 덮어 또다시 같은 실패를 되풀이 할 우려가 있다. 왕조 체제의 한계 인식 필요 왕조 체제는 왕에게 절대 권력이 주어져 있다. 아무리 좋은 개혁안이라도 왕이 채택하지 않으면 무용지물이다. 조광조가 개혁안을 올려도 왕이 회피하면 그가 상소 한 개혁안은 종이 쪼가리에 지나지 않는다. 아무리 부당한 정책도 심지어 사실이 전혀 확인 안되고 소문에 불과한 주장도 왕이 사실이라고 판단하고 명령을 내리면 그것이 바로 시행되는 것이 왕조 체제다. 임진왜란을 불과 3년여 앞두고 벌어진 정여립 역모사건으로 벌어진 기축옥
고대 이래 현대까지 우리 민족 전체에게 가장 끈질기게 깊이 영향을 미친 사상을 들라고 하면 ‘풍수 사상’이라고 할 수 있다. 풍수 사상은 한국인의 사상과 종교인 유교와 불교, 무속, 도교와도 공존이나 접촉 결합 될 수 있었다. 유교와 불교는 조선조 내내 배척 관계였고 유교와 무속 간은 불편한 관계였음을 상기해 보면 풍수 사상은 타 종교와 뿌리를 공유하면서 상보 관계였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같은 뿌리라고 함은 풍수 사상은 하늘과 땅과 인간이 생기(生氣)로 상호 감응하여 인간의 운명에 영향을 끼친다는 원리에 입각하고 있기 때문이다. 소위 말하는 천인 감응설이 풍수 사상의 근간이다. 천인 감응설은 한무제의 동중서에 의해 전지 자연과 인간 사이를 음양 매개로 하여 서로 감응한다는 체계로 정리됐다. 천인 감응설이 점차 각론으로 발전하여 갔는데 그 갈래 중의 하나가 풍수 사상이다. 풍수 사상은 한 나라 청오자의 「청오경」과 위진남북조 시기의 진나라 곽박(276-324)이 지은 「금낭경(혹은 장서)」에서 비롯 됐다고 알려져 있다. 그 핵심 논리는 조상의 유골이 길 한 땅에 묻히거나 흉한 땅에 매장되는가에 따라 후손 들이 복을 받거나 화를 당한다는 동기감응론에 근거한
음양오행론은 우리나라 고대에서 조선말까지 우주 만물과 자연현상, 정치와 전쟁, 도덕 윤리적 가치, 남녀와 신분 차별의 논리, 개인의 길흉 운수를 설명하는 전가의 보도였다. 조선과 중국에서 음양오행론으로 설명 안하는 걸 찾기 힘들 정도로 너무 ‘위력적’이었다. 이 음양 오행론은 그럴싸하고 편리하고 신비로운 경이감을 느낀 나머지 지식인들이 감히 의심하지 않고 삼라만상의 크고 작은 일과 개인 길흉사를 해석하는 데에 몰두했다. 원래 음양오행론은 자연을 관찰하고 얻은 ‘통찰력’의 소산이었는데, 이것을 인간 세상사를 비유적으로 설명한 게 ‘화근’이 됐다고 할까. 그것이 춘추전국시대에 공자와 추연에 의해 비유법의 범위를 벗어났고 한나라의 동중서, 북송의 주돈이(1017~1073)를 거쳐, 남송의 주희 (1130~1200)에 와서는 절대적 진리처럼 숭앙 되었던 것이다. 천지인 삼수 사상, 태극 혹은 무극과 이기론과 음양오 행론 간의 미묘한 차이를 설명하기는 하나 모두 추상적 논리로 구성한 가설이다. 그것들 사이의 ‘차이’를 논하 는 것은 학자들에겐 유의미할지 몰라도 대체로 ‘실용적’ 이지 못할 뿐이다. 더욱이 음양오행론과 태극·이기론을 토대로 도덕 윤리적 규범을 세움으로써
하나의 왕조가 뛰어난 창업 군주를 포함해 두세 명의 명군을 내놓는다고 치면 대략 몇 년 정도 유지되고 난 뒤에 왕조 교체가 이뤄지는 게 적당할까. 중국 왕조의 교체 기간이 적절한 기준이 되지 않을까 싶다. 중국은 이민족이 침입하기 용이한 중국 대륙의 한 가운데에 있고 내부 모순이 극에 달하면 반란이 일어나기 좋을 만큼 인구도 많고 농사 지을 땅도 넓다. 주로 북방민족인 이민족과 반란세력 중에서 뛰어난 지도자가 나오면 중국 내부의 모순으로 인한 민심 이탈과 결합해 혁명을 통한 왕조 교체가 가능했다. 중국 역대왕조의 평균 교체 주기는 넉넉하게 잡아 250년 안팎이다. 이렇게 본다면 조선 왕조는 5백 년이나 지속돼 중기부터 백성들의 삶이 힘들어졌고 말기에는 사회의 모순이 극에 달해 회복 불능 상태에 빠지지 않았나 생각된다. 혁명이라고 함은 최소한 정치세력을 바꿔야 한다. 정치 세력도 그 교체 세력의 폭과 깊이에 따라 혁명의 철저성 이 달라질 것이다. 여기에다 정치사상을 바꾸어 체제를 바꿀 정도라면 진정한 혁명이라고 할 만하다. 조선 시대에 비록 성공하지는 못했지만 동학혁명을 유일한 혁명이라고 할 수 있다. 그 이전에는 정여립의 거사 사건이 있었다. 정여립 거사는
세종은 태종의 셋째 아들이다. 역사적으로 보면 걸출한 왕의 후계자는 장남보다는 뛰어난 차남이나 셋째에게 넘어가는 사례가 많다. 태종은 아버지 이성계를 도와 조선왕조를 일으킨 창업한 일등 공신이었다. 태조를 측근에서 보좌한 유학자 출신 관료들과는 달리,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서는 형제들도 죽이고 정도전과 같은 거물 정적을 제거하고 처갓집도 멸족시켰다. 양녕대군은 외갓집에서 자라 외삼촌 민무구, 민무질 등 4형제의 사랑을 독차지하다시피 하며 자랐다. 그 외삼촌들이 세자 양녕대군을 왕위에 올려 놓으려는 반역죄로 처형되었다. 이런 무서운 집념의 소유자이자 잔인한 아버지 밑의 장남인 양녕대군은 아버지의 기대에 못 미쳤다. 양녕대군은 공부도 게을리하고 주색을 가까이해 아버지로부터 꾸지람을 자주 들었다. 어느 집안이든 아버지와 장남 간 은 묘한 긴장 관계가 있다. 아버지는 장남에게 바라는 기준이 높기 때문이다. 왕조와 명문 가문, 부를 물려줘 야 하는 아버지로서는 당연하다고 할 수 있다. 이런 아버지의 눈높이를 맞출 수 있으면 순탄한 관계가 되지만 그렇지 않으면 보통 이상으로 감정의 골이 깊어진다. 태종과 양녕대군의 관계가 점점 악화하기만 했다. 세종이 되는 충녕대군의 바
조선은 성리학적 도덕 이상주의를 엄격하게 추구한 나라다. 그 높은 도덕률은 가상하나 ‘욕망’이란 선악의 원인자이자 발전을 위한 에너지라는 사실을 몰랐다고 할 수 있다. 인간의 본성에 대한 무지라기보다는 ‘마땅히 해야 한다’는 도덕윤리 의식이 너무 강했다. 이상주의적 ‘마땅함’은 신분 차별과 경제와 기술 및 시장의 족쇄로 나타났다. 양명학이 도입됐으면 어떻게 숨통을 터 볼 수라도 있을 텐데 그러지를 못했다. 애초부터 성리학을 개선하는 정도의 실학으로는 개혁이 가능했을 것 같지도 않다. 천주교를 받아들인 조선인들은 체제에 불만을 가진 양반들, 가난과 억압, 소외로 인해 삶의 희망을 가질 수 없었던 중인과 백성들이었다. 그들은 살아서 희망이 없다면 기꺼이 죽어서 천국 가기를 원했다. 기해박해에서 숨진 이호영(1838.11.25 옥사)을 보자. 그는 한강 북쪽 문막에서 살았는데, 어느 날 붙잡혀 형조에 갇혔다. 아래 글은 「조선 순교자록」 (파리외방전교 회 아드리앙 로네·폴 데통브 신부 기록, 안응렬 옮김)에서 인용해 재구성하고, 쉬운말로 다듬었다. 재판관이 그에게 “너는 부모에게 제사를 지내지 않지? 누가 보든지 조상에게 제사를 안 지내는 자는 개나 돼지만도 못한
조선은 주자 성리학으로 나라를 다스렸다. 주자 성리학이란 추상적인 논리로 엮은 일종의 도덕윤리다. 특히 주자 성리학이 조선으로 넘어와서는 인성과 수양에 집중하여 극단적인 순수주의랄까, 이론 세우기에 기울어졌다. 조선성리학의 개념에는 경제라는 것도, 생산과 노동이란 것도 물질과 기술이란 것도 거의 관심을 받지 못했고 불필요한 것이라고 여겼다. 그들의 눈에는 장사꾼의 이익, 부가가치라는 것은 부도덕한 것으로 보였다. 따라서 조선조 내내 중국과의 조공 무역 외에는 외국과의 통상 및 교류라는 것을 상상조차 하지 않았다. 조선 시대 전체를 조망해보면 중간에 중흥 시기가 있었다고 하나 시종일관 내리막길이었던 것 같다. 광복 후 실학 연구 붐에 일어나 근래까지 이어져 오다 보니 당대 실학자들의 생각들과 주장들이 주류인 것처럼 비치는 경향이 있다. 그러나 그들은 지류였고 정치적으로 소외됐을 뿐만 아니라 설사 정치적으로 기용된다고 해도 국가의 곳간을 채우고 백성들의 삶을 기름지게 할 수는 애초부터 불가능했다고 봐야 할 것 같다. 실학자들 중에서 기독교인이 된 사람이 거의 없었다. 기독교인이 되려면 유학을 버려야 한다. 확고한 기성 이념과 종교가 있는 상황에서 새로운 종교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