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국 제조업의 심각한 구조적 위기 징후가 곳곳에서 감지되고 있다. 대한상공회의소가 4일 발표한 전국 2,186개 제조기업 대상 ‘신사업 추진현황 및 애로사항’ 조사 결과에 따르면 우리 제조업은 주력제품의 수명이 끝나가고 경쟁우위도 약화되고 있으며, 이를 대체할 신사업 추진도 부진한 상황으로 나타났다.
대한상의는 보고서에서 제조기업 10곳 중 8곳이 현재의 주력제품 시장을 ‘레드오션’으로 진단했다. ‘성숙기(시장 포화)’라고 응답한 기업이 54.5%, ‘쇠퇴기(시장 축소)’로 본 곳도 27.8%에 달했다. 반면, 수요가 증가 중인 ‘성장기’에 있다고 응답한 기업은 16.1%에 그쳤다.
업종별로는 비금속광물, 정유·석유화학, 철강, 기계, 섬유, 자동차, 전자, 식품 등 대부분의 주력 제조업군에서 80% 이상이 ‘성숙기 또는 쇠퇴기’로 응답했다. 공급과잉이 극심한 철강 산업의 경우, OECD는 2024년 글로벌 과잉 생산능력이 6억3천만 톤에 달하며, 2027년엔 7억 톤을 넘어설 것이라 내다봤다. 이는 한국 연간 조강생산량의 10배가 넘는 수준이다.
석유화학도 상황은 다르지 않다. BCG에 따르면 향후 2~3년간 1,500만 톤 수준의 범용 폴리머·에틸렌 신규 설비가 중국을 중심으로 가동되며, 글로벌 다운턴이 최소 2030년까지 이어질 것으로 분석됐다.
◇ ‘경쟁우위 지속’ 기업은 10곳 중 1.6곳뿐…기술 격차 사라진 시장
시장 포화가 심화되며 경쟁 강도 역시 치열해지고 있다. 자사 주력제품 시장에서 ‘경쟁우위를 유지 중’이라 응답한 기업은 16.1%에 불과했다. 반면, ‘기술격차가 사라져 경쟁이 치열하다’(61.3%), ‘경쟁업체가 턱밑까지 추격했다’(17.1%), ‘이미 추월당했다’(5.5%)는 응답이 83.9%에 달했다.
즉, 과거 높은 기술격차로 시장지배력을 유지해온 한국 제조업이, 중국 등 후발 주자들의 빠른 추격 속에 더 이상 ‘우위’를 확보하지 못하는 구조로 바뀌고 있다는 것이다.
경쟁우위를 잃고 있음에도 ‘새로운 돌파구’ 마련은 더딘 상황이다. 기존 주력제품을 대체할 신사업을 ‘추진 중이거나 검토 중’이라 응답한 기업은 42.4%에 불과했다. 절반이 넘는 57.6%는 신사업이 전무하다고 밝혔다.
신사업을 추진하지 못하는 이유로는 ▲자금난(25.8%) ▲시장 불확실성(25.4%) ▲아이템 부재(23.7%) 등 복합적인 애로사항이 꼽혔다. ‘인력·제반여건 부족’(14.9%), ‘보수적인 경영기조’(7.3%) 등도 비중 있게 나타났다.
특히 신사업 방식으로는 62.9%가 ‘자체 R&D’를 택하고 있었으며, ‘외부 협력’은 27.7%, ‘M&A’는 4.1%에 불과했다. 이는 위험 분산을 위한 개방형 혁신이 여전히 미진함을 보여주는 대목이다.
◇ 대기업은 ‘불확실성’에, 중소기업은 ‘돈’에 막혔다
신사업 추진 과정에서도 기업의 규모별로 애로사항은 갈렸다. 대기업은 ‘시장 전망 불확실성’(73.6%)이 가장 큰 장애였던 반면, 중소기업은 ‘자금 조달 애로’(41.8%)와 ‘판로 개척’(36.2%)이 큰 비중을 차지했다.
또한 ‘기술·제품 완성도 부족’(30.1%), ‘전문인력 부족’(20.9%), ‘인허가 규제’(10.0%) 등 제도적·인적 장벽도 두루 지적됐다.

한 중견기업 관계자는 “AI 기반 스마트팜 설비를 개발했지만, 시장 성장에 대한 확신이 부족해 투자와 양산체제 전환을 주저하고 있다”고 밝혔다. 배터리 소재를 생산하는 한 중소 화학업체 관계자는 “400억 원 설비 투자가 계획됐지만 자금조달이 막혀 벤처 조합 투자를 받는 상황”이라고 토로했다.
◇ “지금 필요한 건 규제가 아닌 신사업 마중물”
대한상의는 이번 조사에서 “현재 제조업 전반의 활력을 되살리기 위해선 기업에 부담을 주는 규제 법안보다 신사업 마중물 투자가 절실하다”고 강조했다.
특히 첨단산업 분야의 경우, 법인세 납부 전이라도 R&D 세액공제를 현금으로 직접 환급해주는 ‘투자 직접환급제’ 도입이 필요하다고 주장했다. 동시에 주요국처럼 대규모 보조금과 같은 공격적 투자 유인을 확대해 기업의 글로벌 경쟁력 기반을 마련해야 한다는 입장이다.
또한 제조업 밀집 지역에 ‘AI 특구’를 지정해, AI 기술 도입을 위한 데이터 인프라를 구축하고 규제를 완화하며, ‘인내자본’ 조성을 통해 고비용·장기투자 구조의 제조 AI 확산을 촉진할 필요도 제시했다.
특히 철강·석유화학 등 공급과잉 업종에는 ▲과잉설비 폐기 시 세액공제 특례 재도입 ▲전력요금 감면 △신사업 투자 세제 지원 ▲고용유지지원금 확대 등 위기산업 맞춤형 지원도 병행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김현수 대한상의 경제정책팀장은 “레드오션에 빠진 국내 제조업이 미래 먹거리를 발굴하려면 정부가 불확실성에 따른 실패 위험을 일부 분담해야 한다”며 “보수적 경영에 고착되기 전에 신사업 투자 여건과 인센티브 구조부터 확 바꿔야 한다”고 밝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