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제적 부(富)가 인터넷, 로봇과 AI 휴먼 등 빅 데이터 기업으로 이동하는 가운데 산업단지와 도로를 위해 파헤쳐진 숲과 들, 과다한 육류 생산을 위해 훼손된 산지, 사람들의 배설물을 씻어 내리기 위해 오염을 감수하는 지구 담수의 1%도 안 되는 너무나도 소중한 물. 인간의 탐욕으로 한계 수명이 10년 정도밖에 안 남았다는 석유와 가스, 탄소와 미세 플라스틱까지 온갖 오염물질을 받아주다 중병에 걸린 바다 등 지금까지 우리의 현대 경제에 바친 희생양들을 열거하자면 한도 끝도 없다.
하지만 그들의 헌신으로 과거보다 우리 삶은 나아졌다지만 부익부 빈익빈은 심해지고 삶은 여전히 바쁘고 팍팍하다. 왜 그런 것일까? 어렸을 때 동무들과 산과 들로 뛰어다니면서 놀았던 시절이 가난했어도 행복했던 것일까? 재산과 지위가 평등한 원시 수렵채집사회로 돌아갈 수 없는 노릇이지만 자연과의 상생으로 디스토피아를 벗어나 모두가 백만장자가 될 수 있는 꿈을 꾸어보고자 한다.
◇오래전에 포기했든 생태농장 노동방식을 꿈꾸는 몽상가
어머니의 아파트 거실은 한쪽 벽에 기대 놓은 긴 소파가 있고 그 소파 건너편 벽에는 사람이 앉아 있을 때의 높이로 기다란 테이블장이 붙박이처럼 마주하고 있다. 그 위에 놓인 TV를 켜고 소파에 앉아 채널을 돌리다가 나는 프로그램이 재미가 없거나, 끔찍한 장면이 나올 듯싶으면 TV와 1미터쯤 위에 걸려 있는 길이 4미터, 폭 50cm 정도의 액자로 시선을 돌리곤 했다.
액자 그림은 가지를 사방으로 늘어뜨린 다 자란 나무들이 성긴 숲을 이룬 사이로 70여 마리의 말들이 풀을 뜯거나, 시냇물을 마시거나, 머리를 맞대고 힘겨루기하거나, 땅에 대고 뒹굴거나, 암수가 서로 옆을 보면서 달려가는 망중한의 평화로운 풍경을 포착하고 있었다. 그들을 방해 할까봐 목동은 무리에서 멀리 벗어나 노인인 듯한 사람과 조용히 담소를 나누고 있다.
앞을 향해 힘차게 달리거나 앞발을 들고 도약(跳躍)하는 일반적인 말 그림과는 크게 달라서 나는 그 액자를 볼 때마다 “으음~ 작가가 던지고 싶었던 메시지는 아마도 내가 꿈꿨던 생태 목장을 만들고 싶다는 것일 거야”라고 생각했다. 낙관이 없는 사진(?) 모사품이라 작가가 누군지 알 수 없었지만 말이다.
경기도 용인 처인구 백암면 용천리에 있는 98만 평의 산지(山地)와 그 산자락 일부에 지어놓은 고전 드라마 세트장인 「용인 MBC 드라미아」의 초대 개발단장이었던 나는 그 그림 속의 풍경처럼 동물이나 가축의 복지를 생각하면서 오래전에 사라져버렸거나, 포기해 버린 우리들의 노동방식을 재현하는 생태적 목장과 그 목장에서 사람이 함께 살아가는 곳을 만들고 싶었다.

하지만 그런 이야기를 내가 할라치면 위 사람이나 아랫사람들은 대개 나를 정신 나간 몽상가 취급을 하곤 했다. 하기야 당시엔 사극이 유행이었고 MBC 드라마가 한참 잘 나가던 시절이라, 일본 등 해외에서 드라마촬영지를 보러 오는 사람들이 많았다. 생태 목장 운운하는 내 말이 귀에 꽂힐 리 만무했다. 모든 사업적 대화는 “엉뚱한 생각 하지 말고 관람객들이 불편하거나 사고가 나지 않도록 조직이나 잘 관리하쇼~”로 끝나는 게 보통이었다. 하지만 나는 포기할 수 없었다.
내가 그렇게 결심하게 된 가장 큰 이유는 일반인들의 접근이 허용되지 않은 드라미아의 임도를 따라 산책할 때마다 숲에 있던 산토끼, 고라니 등이 내 인기척에 놀라 엉덩이를 빼고 죽으라고 달아나는 것을 자주 보았기 때문이었다. 더구나 직원들로부터 깊은 웅덩이에 빠진 고라니 새끼를 구출해 어미에게 돌려보냈으며 새끼를 데리고 출몰한 멧돼지와 조우했다는 말을 자주 들었다.
“그렇구나! 야생동물은 사람들이 다니지 않는 이 산을 자기들의 안식처로 삼고 있었던 거야” 나는 이들이 여기를 떠나지 않고 계속 살게 해주고 싶었다. 어떻게 해야 할까? 고민 끝에 산중에 밭을 만들어 이들이 먹을 수 있도록 작물이나 풀을 심어놓아야겠다고 생각했다.
독일 남부 도시 울름에서는 야생동물용 밭을 분양했는데 분양을 받은 사람들은 그 밭에 각종 작물을 심어 겨울철에 야생동물들이 먹이가 없어 생명을 걸고 마을까지 내려오지 않아도 될 만큼의 충분한 먹이를 공급해 주고 있었다.
아울러 세트장이 아닌 지역을 일정한 구역으로 나눠 말, 소, 염소와 산양, 흑돼지, 청둥오리, 토종닭, 토끼, 꿀벌 등의 가축(家畜 , livestock)을 방목하고 그들 스스로 새끼를 낳고 사는 가축 동물 복지농장으로 만들며, 사료 없이 생태적으로 이들을 돌보는 10여 명의 직원들을 뽑아 이들이 주민이 되어 마을을 이뤄 살아가도록 하고 싶었다. 그래서 이곳에서 일어나는 일상을 TV나 라디오로 매일 생방송을 하면서 환경오염에 찌든 우리 사회가 어떤 미래를 선택해야 하는지를 보여주고 싶었다.
그래서 나는 사극 세트장에 어울리지 않는다는 반대를 무릅쓰고 야생동물을 위한 산중 밭 후보지를 물색해 놓았으며, 관람객들의 숙소를 쓸 글램핑장을 만들었고, 용인시의 지원을 받아 산허리를 가로지르는 4km의 임도에 산 꽃을 심고 정자를 짓는 등 휴식 공간 등을 갖춘 산책로로 정비했다. 그리고 야외에 몽골 텐트를 치고 유명한 짜장면 요리사를 초빙해 주말과 휴일에 세상에서 가장 맛있는 드라미아 짜장면-코리아 블랙 누들 Korea Black-noodle을 만들어 팔도록 했다.
하지만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거기까지였다. 다른 곳으로 발령을 받았다. 후임에게 내가 하려는 일을 인계해서 될성부르지도 않았다. 그저 서운하고 아쉬웠지만 어쩌랴...나는 저녁노을이 붉을 때 마지막으로 임도를 걸으면서 만난 야생동물들과 작별 인사를 했다.
“잘 있어! 얘들아, 머지않아 누군가가 너희들의 서식지를 파괴하려 들건 데....나로썬 막을 방법이 없구나, 너희들이 그래서 조류 독감, 돼지 바이러스를 옮겨 사람을 공격하려 드는 것인지 모르지만...,그동안 너희들을 만날 때마다 내 마음은 호수 같았지. 고요해 편안했어. 길지 않은 시간, 정말 고마웠다. 그리고 좋은 추억을 만들어줘서…. 그런 생각을 하다가 나도 모르게 소파에 앉아 다리를 테이블 위에 올려놓고 깜박 잠이 들고 말았다.
세트장은 가짜, 지속 가능하지 않은 일회용 위조지폐
“세트장은 가짜입니다. 위조지폐와 같습니다. 관리해 봤자, 얼마나 오래가겠습니까. 제가 한국 민속촌을 여러 번 가서 관찰하고 연구해 보니, 결국 사람이 살지 않으면… 가짜 집이었기 때문에 찾는 사람들이 점점 사라지고 있었던 것입니다. 사장님이 동물복지 농장을 만들어도 좋다는 결심이 아니었으면 드라미아 역시 폐허가 되고 말았을 것입니다. 이제야 드라미아에서 사람 냄새 나는 경제의 생생한 전망을 찾는 생태경제 현장이 되었습니다.”
“그런가?” 사장이 나를 보며 조용히 물었다. “그렇습니다. 드라미아 동물복지 생태 목장은 ‘점점 더 좋게, 점점 더 빠르게, 점점 더 많이’라는 현대 경제의 명령이 결코 참이 아니었다는 것을 증명하는 곳이라는 보도가 뉴욕타임스 등 굴지의 세계적인 매스컴들이 하고 있고 관람객들이 복지농장을 보겠다며 매일 추천 명씩 다녀가고 있습니다.”
“대단하구먼, 촬영에 지장이 없나?” 사장이 물었다. “아뇨, 관람객들은 세트장보다 동물복지 농장에서 더 관심이 높아서 세트장 촬영장에 몰리지 않고 있습니다. 그리고 가축이 스스로 새끼를 낳고 키우는 모습 등 이곳의 일상이 매일 방송되면서 시청률이 웬만한 사극보다 더 높습니다. 이미 이곳에 취업해서 살겠다는 지원자들의 대기 명단은 500명을 넘었습니다.”

총명하게 반짝이는 눈빛을 가진 사장은 “수고했다”고 말하면서 내 두 손을 잡아주었다. 사장실에서 나온 나는 드라미아를 향해 차를 몰았다. 용인시 처인구 백암면 용천리, 석천리, 장평리를 포섭하며 들녘 한 가운데 우뚝 솟은 조비산(296m)을 지나서 왼쪽으로 돌자, 시냇물을 끼고 2차선 도로가 나온다. 이 도로를 따라 5분 정도 올라가다보면 높이 400여m의 여러 산봉우리가 코끼리 등줄기처럼 이어진 산맥 하나가 눈에 들어온다.
이른 여름에는 부드러운 초록빛이 감싸고, 가을에는 불타는 빛깔로 산비탈을 흠뻑 물들이며, 비가 오면 높은 정상에서부터 모여들어 만든 여러 계곡물이 콰르릉거리며 흐르는 곳. 입구엔 「동물복지 생태 목장 드라미아」라고 쓰여 있다.
이 목장을 책임지고 있는 김모 씨가 나를 입구에서 반갑게 맞으면서 완전히 달라진 이곳 동물복지 현황을 소개했다. 세트장이 아닌 90만 평에 이르는 산지를 일정하게 나무 울타리로 구획한 가운데 염소 3백 마리, 산양 백 마리, 흑돼지 50마리, 청둥오리 300마리, 토종닭 500마리, 토종벌 등이 방목되고 해당 방목장마다 현대식 가축사(家畜舍)가 지어져 있었다.
특히 이곳은 외부로부터 인공사료를 사들이지 않고 대부분 자체 조달되는 재료를 가지고 직접 만든 천연 발효식품을 먹이로 주고, 자체 퇴비공장에서는 가축분뇨 등을 숙성 발효시켜 만든 천연퇴비를 농작물이나 초목의 거름으로 씀으로써 농약을 쓰지 않아도 될 정도로 건강한 흙을 유지하고, 이런 흙에서 나온 건강한 작물을 사람과 가축이 먹고, 그 배설물을 다시 발효 퇴비로 만들어 흙으로 되돌려주는 순환 농법을 실천하고 있다.
◇들어오는 것이 없이 자연식품만 나가는 곳
그래서 이곳에서 나오는 고기에서부터 산나물에 이르기까지 모든 생산물은 외부로부터 완전한 자연식품 대우를 받고 있었다. 더구나 사료와 농약, 트랙터 등을 사용하지 않음으로써 이곳 제품은 가격 경쟁력도 뛰어나 시쳇말로 없어서 못 팔고 있었다.
김 씨는 토종닭이 낳는 달걀 한 개가 2천 원이 넘는데도 주문이 딸리고, 1년 자란 토종닭은 최고 20만 원까지도 받는다고 했다. 그는 토종닭의 수명이 20년이라면서 요즘 시중에서 먹는 닭은 한 달도 채 못 살고 1초에 한 마리씩 목이 잘려 나간다고 한탄했다. 보신탕 판매 금지를 앞두고 수요가 부쩍 늘어난 염소의 경우 새끼 한 마리가 60만 원 이상 올랐고 다 큰 염소는 마리당 150만 원을 호가하지만, 이곳 염소는 2백만 원 이상을 받을 수 있다.
졸졸 흐르는 몇 줄기의 개울이 모여 시냇물을 이루고 그 시냇물이 계곡물이 되어 모여드는 축구장 절반 만한 산자락 저수지에는 이미 텃새가 된 수백 마리의 청둥오리와 새끼들이 여기저기 흩어져 자맥질에 분주했다. 사람 팔뚝만한 잉어가 물보라를 일으키며 수면 위로 치솟아 오르고 있다. 김 씨는 “이렇게 자연 생태적으로 자라는 청둥오리는 보약 중의 보약이라면서 “없어서 못 판다”고 귀띔했다.
김 씨가 안내한 돼지 방목장에는 100근(60kg)의 까만 돼지들이 풀을 뜯으며 이리저리 돌아다니고 어미를 따르던 새끼들도 즐겁다는 듯이 천방지축이다. 방목장 끝에 있는 진흙 목욕탕에서 돼지 한 마리가 몸의 열을 식히고 있었다.
“돼지건 어떤 가축이건 사람의 욕심대로, 빨리 자라라고 사료를 먹여 키우면 안 된다고 저는 생각합니다. 돼지들이 자기들이 원하는 것을 먹게 해 줘야지, 너희들은 이것을 먹어야 한다고 억지로 주면 되겠습니까?”라고 김 씨가 말했다.
“사료를 먹고 비좁은 공간에서 부대끼면서 살다가 고기로 팔려가는 사육돼지를 생각하면 인간이 참으로 잔인한 생각이 든다”는 김 씨는 “애완견을 모시고 살면서 다른 가축은 불쌍한 생각을 못 하는 사람들의 심리가 이해되지 않는다”고 말하면서 어깨를 으쓱했다.
나는 이곳 돼지들의 왕성한 먹성을 보자 방목장의 풀이 남아나지 않을 것 같았다. “이런 식으로 키우다 보면 풀이 남아나겠어요? 산이 금방 황폐화될 것 같은데요” 라고 내가 김 씨에게 물었다. 김 씨가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맞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ABC 3구역으로 나눠 순환 방목을 하고 있어요. 다른 가축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리고 흙바닥에 생톱밥을 1m 이상 깔아서 돼지가 마음대로 파헤치고 뛰어놀 수 있도록 하고 이 톱밥에서 돼지의 분뇨가 자연 발효가 어느 정도 되면 다시 완전히 숙성시키는 과정을 거쳐 완숙 거름으로 다른 방목지에 뿌려 줍니다.
그러면 흙이 건강해져 영양이 풍부한 초목이 무럭무럭 건강하게 잘 자라지요. 또한, 쉬고 있는 방목지에 돼지가 좋아하는 감자나 고구마를 심은 밭을 만들어 그것을 먹도록 하고 이곳에선 잔반이 거의 없어서 인근 식당의 잔반을 가져와 불순물을 제거한 뒤 고급 죽으로 끓여 주기도 합니다.”
나라에 따라서는 공해산업으로 분류되는 게 돼지 사육이라고 생각하는 분들에게는 이곳의 생태 돼지 목장이 이제 막 개발된 원리처럼 보일지 모른다. 하지만 지속가능성을 생각하며 새롭고 파격적으로 키운다는 사고는 따지고보면 우리나라 농촌 생활의 실용적인 구현 그 자체일 뿐이다. 그러고 보면 고전적인 농촌문화도 현대 경제에서 꽤 수익을 내는 사업 모델이 될 수 있다는 가능성을 보여주고 있다 할 것이다.
◇돈을 벌어주는 가장 건강한 것들로 만든 세계적인 짜장면
김 씨는 생태 목장이 성공하는 이유의 하나를 이렇게 표현했다.
“우리에게는 다른 곳에 없는 것들이 있으니까요. 돈을 벌어주는 가장 건강한 것들은 여기 다 있거든요. 여기에서 나는 식재료만을 가지고 우리는 세상에서 가장 건강하고 맛있는 짜장면을 만드는데 그게 적중한 거예요.”
“짜장면이요?”
“예, 입구에 들어오시다 몽골 텐트 4개 동을 보셨지요? 그 곳에서 우리만의 짜장면을 만들어 팔고 있습니다. 전국에서 그 맛을 보겠다고 평일에도 수백 명씩 찾지요.”
“우리만의 짜장면이라?”
“네, 그렇습니다. 짜장면의 핵심은 짜장을 볶는 기름이 좋아야 하는데 우리는 여기에서 자란 최고급 돼지고기 비계에서 뽑은 기름을 가지고 짜장을 볶지요. 그래서 우리 짜장면은 세상에서 제일 고소하고 담백한 맛이 난답니다. 시중에서 짜장면을 먹을 때 느끼하고 먹고 나서도 속이 더부룩한데 그건 돼지기름이 아닌 식용유를 많이 쓰기 때문입니다.”
“그랬었구나, 그래서 여기 짜장면이 SNS에서 맛있다고 난리가 난 거였구나. 저기 자유롭게 돌아다니는 방목 돼지의 기름으로 볶아서…. 최고의 짜장면이 된다. 어어…. 어떻게 알았지? 저 녀석이 귀를 흔들면서 내게 다가온다.” 혼자 중얼거리는데 주둥이를 내 몸에 댄 녀석은 반갑다며 꿀꿀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