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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


조선조 말 쇄국주의가 남긴 교훈

조선 26대 국왕 고종은 12세에 왕위에 오른다. 그때가 1863년이었다. 어린 왕을 대신해 대원군이 집정을 하면서 일찍이 전례에 드문 강력한 개혁 정책을 펼치게 된다. 대원군은 안동 김씨의 세도정치를 마감하고 자신에게로 권력을 집중함으로써 해묵은 국가 개혁 과제를 추진할 동력을 마련한 점에선 출발은 좋았다.  

 

대원군은 농지와 군역, 환곡 등 백성들의 원성을 사고 있는 삼정 개혁을 단행해 백성들의 부담을 경감하는 조치를 취했다. 삼정 문란은 조선 후기 민란의 주요 원인을 제공했던 사안이었다. 하지만 대원군의 개혁 조치는 양반들의 반발로 흐지부지됐다. 대원군의 유일한 치적은 당시 1천여 개에 달하던 서원을 47개만 남기곤 없애버린 서원 철폐 조치다.  

 

 

대원군은 집권 3년차인 1865년 임진왜란 때 소실된 경복궁 중건 공사를 시작했다. 왕권의 권위를 내외에 과시하고자 하는 의도였을 터이지만, 공사 중에 불이 나 재목들이 불타버리는 사고가 생겼고 공사비 조달을 위해 당백전을 발행해 극심한 물가고를 유발했다. 갈수록 사는 형편이 어려워지고 있던 백성들은 4년 간 이어진 궁궐 노역에 원성이 자자했다.    

 

대원군의 가장 큰 실책은 뭐니 뭐니 해도 쇄국정책이었다. 그러나 쇄국정책의 탓을 모두 대원군에게 돌리기는 무리다. 당시 노론과 소론 등 지배층과 대다수의 유림들은 위정척사론을 주장하며 쇄국 정책을 강력히 주장했고 일반 백성들도 이를 따라갔다.

 

당시에 박제가, 정약용 등 실학자들이 외국과의 무역과 개방, 서구의 과학기술 도입의 주장을 펼쳤으나 그들은 조정에 참여한 정치세력이 아니었다. 그들은 운 좋게 정치인으로 출사하고 있었다고 해도 왕과 조정 대신들, 유림들의 보수적 관념을 깰 수는 없었을 것이다. 실학자들의 선각자적인 생각들이 무위한 것은 아니었다. 그들의 꾸준한 주장은 일본으로부터 개항을 강요당한 이후에 개화사상과 개화 관료들에게서 나타났다. 하지만 그때는 너무 늦었다. 일본과 서구의 제국주의 야욕이 마치 거대한 쓰나미처럼 덮쳐 왔기 때문에 개화정책을 펼쳐 보일 시간을 가지지 못했다. 

 

 

쇄국주의로 국가 개혁 기회를 놓쳐

 

‘쇄국주의’는 인간에 내재된 본질적 속성인 외부에 대한 공포와 두려움에서 비롯된 것으로 좀처럼 극복하기 어렵고 오늘날에도 엄연히 존재하고 있다. 인간은 맹수와 자연재해, 끊임없는 전쟁 속에서 생존해왔기 때문에 외부에 대한 공포심을 태생적인 DNA로 가지고 있다. 이것을 극복하려면 해박한 지식과 빠르고 정확한 정보력, 진실과 거짓을 헤아리는 이성적 힘과 지혜가 필요하다. 

 

이와 같은 지식과 정보, 이성적 힘과 지혜의 관점에서 조선 후기에 만연했던 성리학은 보면 중대한 약점을 지니고 있다. 약점을 말하기 전에 먼저 장점에 대해 언급해보자.

 

서양과 중동에 기독교와 이슬람교가 있었다고 하면 동아시아에는 유교가 있었다. 유교는 유일신을 가진 종교는 아니나, 유학을 공부한 유학자들이 관료 지배층으로 정치에 참여했다는 점에서 성직자들이 정치에 강한 영향력을 행사하며 지배층으로 군림한 중세 유럽과 이슬람 국가 체제에 비견될 만하다. 

 

공자와 맹자의 유학은 송대에 와서 주자를 비롯한 일군의 성리학자들에 의해 보다 정교해지고 종합적인 정치사회와 개인을 규율하는 학문이 된다. 이 주자성리학이 정도전에 의해 조선 개국의 통치학으로 도입됐다. 조선 성리학은 왕조 5백년간 불교를 일관되게 배척했는데, 일신교적 교리에 가까운 이데올로기적 속성을 여실히 드러낸 것이라고 평할 수 있다.  

 

중국에서 성리학은 황제의 권력이 초월적 지위에 있었기 때문에 사회 전반을 옥죄는 이데올로기가 되지는 못했고 성리학 다음으로 양명학이 유행하는 등 다소 여유로움이 있었다. 일본도 막부와 영주들의 권력이 강고한 까닭에 성리학은 어디까지나 유익한 고양의 하나에 그쳤다. 그러나 조선은 왕을 성리학의 가르침에 구속시키고 양반 지배층의 정신세계를 지배했다. 그 뿐만 아니라, 성리학은 과거급제로서 가문을 빛내고 특권 신분을 보장하고 물질적인 
것들도 노력 여하에 따라 상당 부분 보장될 수 있는 현실적 출세 도구로 작동했다. 

 

조선은 중국과 일본에 비해 상대적으로 영토와 인구 규모도 적어 성리학적 세계관을 적용하기에 용이했을는지 모른다. 

 

중세 유럽은 로마 교황권이 상당기간 왕권을 제압할 정도로 막강했으나 로마 성직자 그룹들이 타락하자 루터의 종교개혁이 일어났다. 개신교는 천주교와 동일한 하나님과 예수님을 믿지만 완전히 다른 체계와 접근법으로 개혁했다. 유교 문화권에서는 이와 같은 유교 개혁이 일어나지 못했다. 이슬람 문화권에서도 종교개혁은 없었다. 공자와 맹자의 유학에서 성리학과 양명학으로의 변신은 ‘발전’이기는 해도 개혁은 결코 아니다. 기존 유학을 이론적으로 종 
합적으로 샐 틈 없이 촘촘하게 짠 그물망 같다고 할까. 이제 엄격한 성리학적 세상에서는 어떤 외래 종교와 사상, 철학도 침투하기 어렵게 되고 말았다. 

 

이처럼 성리학 지배 체제는 정치사회적으로 너무 안정적인 시스템이었기 때문에 개혁을 받아들이고 시도하기에 매우 불리했던 것으로 보인다. 

 

조선이 쇄국주의에 매몰된 또 다른 이유는 새로운 지식과 사실, 정보를 탐구하고 조사하고 체계화하는 학문이 부재했기 때문이다. 서양은 르네상스 이후 그리스의 보편적 지식과 사실 탐구의 전통을 회복해 철학과 자연과학, 사회과학을 발전시켜왔다. 조선과 중국 등 동아시아는 이 부분이 완전히 누락돼 있었다. 

 

 

조선과 중국은 서구와 일본 제국주의 열강으로부터 강제로 개항을 당할 때까지 바다를 통한 해금 정책을 고수한 정신적 프레임은 바로 여기에 연유하고 있다. 새로운 지식과 사실, 정보에 대한 존중도 욕구도 없었기 때문에 서양의 모든 문물을 무조건 거부했다. 나중에 대포와 군함을 앞세운 군사력에 굴복하고서야 과학기술 분야에 한정해 선별적으로 받아들였다. 이마저도 조선은 한중일 3국 중에서 가장 늦게 받아들였다.  

 

동양에 과학과 사실 학문의 전통이 없었던 원인을 모두 성리학 탓으로 돌리는 것은 타당한 비판으로 보기 어렵다. 성리학은 매우 훌륭한 종합적 윤리학이다. 단지 조선과 중국에는 과학과 사실을 추구하는 학문의 갈래가 없었던 것이다. 마치 윤리학자에게 왜 과학기술을 하지 않았는가 하고 묻는 것과 같다. 그리스의 철학은 인류의 축복이었다. 알렉산더 대왕이 동방 원정을 하여 인도의 인더스 강까지 그리스 철학사상을 전해줬으나 보편적이고 객관적인 지식을 탐구하는 학문을 회복하고 발전시킨 것은 유럽뿐이었다.

 

우리가 용어 사용에서 기술과 과학을 혼재해서 사용하고 있는데, 역사 서술에서도 과학기술을 구분 없이 사용해 혼란을 주기도 한다. 조선과 중국의 기술을 과학이라고 이름 붙여주면 높아진다고 생각하는 모양인데, 그런 류의 기술은 메소포타미아와 이집트, 페르시아, 인도 등 인류 문명의 발상지는 물론이고 아메리카 잉카, 마야 문명에서 존재했다. 서양의 과학이라고 모양이 갖춰진 것은 그리 오래 되지 않았다. 17세기 전반 프랜시스 베이컨의 귀납적 방법론과 실험론이 주장되면서부터 서서히 체계적인 과학이 성립되기 시작했다. 이 당시에 조선은 임진왜란의 전란에 휩싸여 있을 무렵이다. 

 

이와 같은 종합적이고 실천적인 윤리학인 성리학과 같은 사상은 서양에서는 없었다. 서양은 접근하는 방식이 달랐다. 그리스 시대에 플라톤과 아리스토델레스가 종합적으로 윤리학과 철학과 자연학을 다루고 난 뒤에는 학문들이 테마별로 대상별로 제각각 분리되고 세분화돼 연구됐다. 성리학과 유사하게 종합적이고 체계적으로 형이상학을 다룬 사상은 칸트와 헤겔에 와서 이뤄졌다고 볼 수 있다. 칸트와 헤겔의 학문은 분명 종합적이면서 성리학보다 훨씬 정교하긴 하지만 너무 난해하여 과연 현실적 실천력을 뒷받침해줄 수 있을지는 의문이다. 성리학은 당시로서는 정치와 사회, 경제, 개인의 삶, 문화까지도 아우르는 종합적인 얼개였던 까닭에 쇄국주의의 함정에서 헤어나기 힘들었던 것이다. 

 

 

오늘날에도 쇄국 주의적 사고 가진 나라들 많아


서구와 일본 제국주의 열강 시대에 일본을 제외하고는 거의 모든 나라들이 쇄국 주의적 대응을 했다. 이런 쇄국 주의적 사고가 오늘날 사라진 것이 아니라 여전히 존속하고 있다. 가장 완고한 쇄국 주의적 태도를 고수하고 있는 대표적인 곳은 북한과 이란, 아프가니스탄이다. 

 

북한은 공산당 이데올로기와 김씨 백두혈통 숭배와 주체사상이 기묘하게 결합해 쇄국 주의적 외교를 보여주고 있다. 이란은 이슬람 시아파 신정국가체제이며, 아프가니스탄도 역시 이슬람 종파의 하나인 수니파 탈레반 정권이다. 이들 국가들은 극단적인 종교 율법으로 통치되고 있으며 이슬람 교리에 맞지 않은 외국 문물을 거부하고 있다. 

 

편협한 종교와 이데올로기에 사로잡힌 체제보다는 1인 독재자에게 의존한 체제는 역사적으로 간혹 큰 업적을 이룬 사례가 있다. 개혁을 실행하려면 본질적으로 기득권 세력을 억누르거나 제거하지 않으면 가능하지 않기 때문에 독재적 형태를 띠게 된다. 기본적으로 독재 체제인 왕조는 창업주 세대의 왕들이 이전 왕조를 힘으로 몰아낸 여세로 개혁을 추진하여 큰 성과를 낸다. 그리고 중간쯤에 한 번 정도 개혁 군주가 그 왕조를 중흥시키면 장수 왕조가 된다. 하나의 왕조에서 중흥 군주가 나오기 힘든 것은 그만큼 기득권을 갈아엎기 어렵기 때문이다. 

 

조선 시대 영조와 정조를 중흥 군주라고 평가 받는데, 대원군이 기득권을 혁파하고 더욱이 서구 열강과 일본과의 교류를 허용할 만큼 세계 정세에 밝았다는 흔적을 발견하기 어렵다. 무엇보다 고종을 대신해 섭정한 권력은 어차피 시효가 한정돼 있었기 때문에 추진 동력은 떨어질 수밖에 없었다. 

 

조선은 대원군 섭정기인 10년간 별다른 개혁성과를 거두지 못하고 갑신정변의 3일천하가 있었고 마지막으로 갑오개혁이 1894년과 1985년 두 차례 단행됐다. 늦어도 너무 늦은 때였다. 갑오개혁에서 내각제 도입과 ,관리임용의 개방, 단발령 동의 조치가 내려졌다. 갑오개혁은 근대적 제도를 도입했다는 면에서는 의의를 찾을 수 있으나 일본의 간섭을 막지 못한 것은 그만두더라도 백성들의 지지를 이끌어내는 데에 이르지는 못했다.         

 

 

개혁은 주체가 분명하고 강력해야 한다. 

 

자유민주체제는 정당한 정권 교체를 통해 개혁 정책의 실행을 제도적으로 보장하는 시스템이다. 인류가 발명한 최고의 발명품임이 분명하다. 자유민주체제는 선거를 통해 정치권력을 뽑는 시스템이기 때문에 포퓰리즘이 성행할 수 있다. 그래도 포퓰리즘이란 약점에도 불구하고 새로운 정권이 새로운 개혁 정책을 펼쳐 이전 정권의 실패를 잡아가고 운 좋으면 좋은 효과를 얻을 수 있다. 이에 비해 독재 체제는 초기에 유능한 독재자가 개혁 드라이브를 강력하
게 걸러 성과를 드물게 낸다고 해도 대체로 10년을 넘어서면 효과는 사라지고 독재 체제의 부작용만 표출하게 된다.   

 

오늘날 유럽과 일본의 의회 정치 국가를 보면 개혁의 주체가 사실상 부재한 것이나 다름없다. 의회 다수당 출신 총리는 개혁 주체로서 힘이 너무 약한데다가 자파 당내에서도 계속 흔들리는 경우가 많다. 의원 내각제의 리더십은 이렇게 안팎으로 흔들린다. 대통령제는 임기 내에서는 일관되게 개혁 정책을 펼칠 수 있다는 점에서 의원내각제보다 나은 체제라고 본다. 

 

의원내각제는 정말 되는 일이 없는 것 같다. 이런 체제는 자유민주주의와 시장자본주의 체제를 가지고 있어도 오히려 독재 국가 체제보다 강력한 개혁을 추진하지 못한다는 점에서 불리하다. 개혁 주체가 약한 민주 체제는 우유부단하여 늘 개혁 시기를 놓친다. 오늘날 의원내각제를 채택하고 있는 일본과 영국, 독일을 보면 개혁이 어렵고 정책 결정에 오랜 시간이 걸린다는 점을 볼 수 있다. 

 

개혁을 미루거나 실패하면 혁명 혹은 전쟁, 또는 혁명과 전쟁이 동시에 일어난다. 대원군의 개혁과 고종의 갑오개혁 실패는 오늘날에도 반추할 만한 소중한 역사가 아닐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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