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요타와 닛산 등 일본의 대기업들이 임금인상을 단행키로 한 것이 일본뿐만 아니라 한국의 주요 언론에도 대대적으로 보도되었다. 이러한 기업의 움직임은 아베정권의 기업들에 대한 임금인상 종용과 엔저에 힘입은 수출 중심 대기업의 호황에 따른 것으로 평가된다.
그런데 대다수 근로자가 고용되어 있는 중소기업들은 얼마나 임금인상에 동참할 수 있을지, 이에 대한 우려의 목소리 또한 크다. 특히 아베 정부가 임금인상을 종용하면서도 다른 한편으로는 고용이동을 촉진하기 위해 노동시간과 해고에 대한 규제를 완화하고자 하는 것을 감안하면 고용문제를 임금인상에만 매몰되지 않고 다방면에서 심도 있게 고찰할 필요가 있다.
일본의 고용·복지 제도가 상정해 왔던 전제의 변화
임금인상 이외의 문제에 주목해야 되는 이유는 일본의 사회 시스템이 전제하고 있던 상황이 변화하면서 고용과 복지 시스템에 대한 근본적인 개혁이 필요해졌기 때문이다. 일본의 각종 법률이나 제도는 일하는 남편과 가정을 지키는 아내 그리고 이들의 자녀로 이루어지는 가족, 즉 표준가족을 전제로 정비되어 왔다. 이에 대한 대표적인 제도가 다음의 3가지이다. 먼저, 배우자의 연간소득이 103만엔 이하이면 본인의 소득세나 주민세에서 배우자 공제를 해주는 제도이다. 다음으로, 연금의 제3호 피보험자(직장연금과 공무원연금 가입자의 배우자)에게 기초연금 보험료를 면제해주는 제도가 있다. 마지막으로, 초봉임금을 낮게 억제하는 대신 연공임금제를 적용하고 배우자 수당, 배우자 이외 가족 부양수당, 주택수당을 지급하는 사업장 임금체계를 들 수 있다.
이러한 제도로 인해 남편의 장시간 노동과 주부의 가사 전담과 아르바이트를 통한 가계 수입 보조가 보편화되어 왔고, 한국보다 남성부양자 모델이 더 강하게 나타났다. 그러나 이런 전제가 사회의 변화로 무너지고 있다. 먼저, 가족제도의 변화이다. 1980년까지만 해도 표준가족의 비율은 전세대의 42%를 차지했지만, 2010년에는 28%로까지 떨어져 단신세대 비율 31%보다 낮은 수치를 보이고 있다. 그 결과, 세대별 가족지원 제도가 대다수 세대를 포괄하지 못하는 상태가 된 것이다.
다음으로, 비정규직 노동자의 증가와 연공제 임금 체계의 쇠퇴를 들 수 있다. 1984년 15.3%에 불과했던 비정규직 노동자의 비율은 2013년에는 36.7%로 지난 30년 동안 크게 증가했다(노동력 조사). 정규직과 비정규직의 연령별 임금 커브(그림1)에서 확인 되는 것처럼, 이들 비정규직은 저임금 상태이며 호봉제가 적용되지 않는다.
앞서 언급한 세대별 지원 제도가 비정규직에게는 거의 적용되지 않는다는 점을 감안하면 비정규직 노동자는 2중의 부담을 떠안고 있는 것이다. 문제는 비정규직 노동자의 증가와 열악한 상황뿐만 아니라 정규직 노동자의 고용 조건도 나빠지고 있다는 것이다. 정규직 노동자의 임금을 살펴보면, 1980년대 이후 표준 노동자의 연령대별 임금 커브가 완만해지고 있다(그림2). 이는 연령이 높아지더라도 과거만큼 임금상승이 뒤따르지 않는다는 것을 의미하기 때문에 정규직 노동자라 하더라도 가계의 생활비 증가를 부담하는 것이 과거에 비해 힘들어졌다는 것을 보여준다.
마지막으로, 저출산과 고령화를 들 수 있다. 일본은 저출산 및 고령화로 인해 2011년부터 인구가 감소하고 있다. 전체 인구 중 65세 이상 고령자 비율이 2013년에 이미 25%를 넘어서 세계 최고의 고령 사회로 들어섰다. 이에 따라 연금 및 의료비 지출이 급증하고 있으며, 일본 정부는 연금수급 연령(현재 기초연금 65세)과 노동법상의 정년(현재 65세)을 연장했고, 연금의 소득대체율을 낮추는 개혁을 단행했다. 결국 현역 시절의 안정적인 임금이 기대되지 못하는 상황에서 노후의 연금까지도 불안정해지고 있는 것이다.
다양한 사회문제의 대두와 세대·계층 간 갈등의 부각
일본은 경제사회적 환경의 변화로 다양한 사회문제가 나타나고 있다. 근로빈곤의 증가, 한 부모 가정의 자녀 빈곤, 청년층의 실업과 비정규직의 증가, 여성의 사회 진출 확대에도 불구하고 계속되는 경력 단절, 고령자의 빈곤과 고독사 등 생활의 불안정 문제가 특정한 계층과 연령대에 국한되지 않고 광범위하게 나타나고 있는 것이다. 이런 상황에서 특정 계층이나 인구만을 주목한 정책은 의도했든 아니든 간에 세대·계층 간의 갈등을 부각시키게 된다. 아베 정부는 과보호된 노동시장이 이중노동시장과 비정규직의 열악한 상황을 고착화시키고 있다는 문제의식 속에서 규제 완화를 추진하고 있다.
이 속에 정규직과 비정규직의 ‘노동자 간 갈등론’이 부각되고 있다. 그리고 연금수급 연령 조정에 따른 정년 연장이 청년 실업을 유발하고 젊은 세대의 기대 연금 수령액이 노년층에 비해 현저히 적을 수 있다고 지적하는 ‘세대 간 갈등론’이 주요 언론에 등장하고 있다. 그리고 정규직의 장시간 노동이 만연해 있는 상황에서 여직원의 임신과 육아는 직장 내 ‘남성과 여성의 갈등’ 문제로 나타나고 있다. 하지만 이런 갈등론은 문제의 해결을 더욱 요원하게 하고 정부의 책임 회피 도구로 사용될 가능성이 높다.
먼저 비정규직과 정규직의 ‘노동자 간 갈등론’을 살펴보자. 일본에서도 비정규직이 정규직의 고용 범퍼로 사용된 측면이 있다. 하지만 비정규직과 정규직 규제 완화는 얼마간의 시간 차이는 있지만 함께 추진되어 왔고, 정규직 보호의 마지막 보루라고 할 수 있는 해고 규제까지 철폐하려는 시도가 이어지고 있다. 이 속에서 정규직과 비정규직 간의 대립을 과도하게 강조하는 것은 경영자 측의 힘의 우위를 더욱 공고히 할 가능성이 높다.
그러므로 비정규직 문제는 임금체계 등과 관련해 전체 고용시스템의 개혁 속에서 고려할 필요가 있다. ‘세대 간 갈등론’은 사회 변화에 따른 제도 변화의 정부 책임을 묵묵히 살아온 노년층에 전가하는 결과가 된다. 누구나 기존 제도에 맞춰 취업준비나 인생설계를 할 것이며, 현재의 노년층 또한 마찬가지이다.
그들의 소득과 고용을 급격히 변화시키는 개혁은 또 다른 사회문제를 양산할 수 있다. 결국 특정 세대의 박탈감만을 부추기는 ‘세대 간 갈등론’이 아니라 각 계층과 연령대가 어떻게 인생 설계를 해 나가야 하는 것인지를 제시하고, 그에 맞는 제도화를 추진할 필요가 있다. 직장 내 ‘남성과 여성의 갈등론’, 즉 양성 평등의 문제도 마찬가지이다.
일본에서도 <남녀 고용평등 기회 균등법>이 1985년 제정되어 몇 번에 걸쳐 개정되어 왔다. 이 법은 임용, 승진 등에서 남녀차별을 금지하고 있지만, 여성의 관리직 비율은 여전히 10%를 밑돌고 있다. 이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양성 평등에 대한 인식의 전환뿐만 아니라 정규직의 장시간 노동이 만연한 고용의 관행을 변화시키는 등의 환경 조성이 필요하다.
백화점식 정책 나열의 한계를 넘어 본질적 개혁 비전을 제시해야
이렇듯 일본은 경제사회적 환경의 변화로 기존의 고용과 복지 체제에 대한 전체적이고 본질적인 개혁이 요구되고 있다. 일본에서도 이런 개혁을 위한 핵심 동력은 신자유주의 이념이었다. 이에 따라 개인의 책임과 경쟁을 강조하며 규제 완화가 추진되었다. 일본의 민주당 정권은 이런 흐름을 바꾸는 것을 목표로 새로운 정책을 내세우며 정권을 잡았다. 대표적인 정책이 ‘어린이 수당’이었다. 사회가 어린이를 키운다는 이념으로 15세까지 아동 한 명당 2만6천 엔을 지급하기로 한 것은 표준가족 모델에서 다양한 가족을 포괄하는 정책으로의 전환으로 평가될 수 있는 것이었다.
그러나 민주당이 새로운 사회에 대한 비전을 제시한 가운데 ‘어린이 수당’을 정책화했던 것은 아니었다. 다양한 가족을 포괄하는 정책은 고용정책, 세금감면정책, 보육정책, 교육정책 등과 긴밀하게 연동되어야 한다. 그러나 민주당은 이를 유기적으로 연결시키는 이념을 공유하지 못했다. 이 때문에 민주당은 퍼주기라는 비판에서 부터 현금 지급보다 맞벌이 부부를 위한 보육시설 확충이 긴요하다는 비판 등에 제대로 대응하지 못 했다.
결국, ‘어린이 수당’은 공약의 반액에 해당하는 1만3천 엔 지급으로 축소되어 도입되었다. 더욱이 도중에 제도의 명칭이 바뀌었으며, 수급자격에 부모의 소득까지 포함하게 되었다. 사회가 어린이를 키운다는 이념은 꽃을 피우지 못한 채 사라져 버렸다. 이를 통해 확인할 수 있는 사실은 신자유주의 개혁에 대항하기 위해서는 백화점식의 정책 열거가 아니라 무엇보다 새로운 사회에 대한 확고한 비전을 제시하는 것이 매우 중요하다는 것이다.
다양한 정책 분야의 단순한 정책 열거는 퍼주기라는 비판과 세대·계층 간 대립과 갈등을 부각시키는 담론에 적절히 대응할 수 없다. 또한 사회 제도는 유기적으로 연결되어 있기 때문에 어떤 이상적인 제도도 다른 제도와의 상호 보완성을 고려하지 않으면 실패할 수밖에 없다.
그러나 일본의 민주당은 각 론에서 높이 평가된 정책을 제시하고도 그 각론의 토대가 될 총체적 개혁의 본질적 비전을 제시하는 데는 실패했기 때문에 복지정책의 전환이 실패로 끝나버렸던 것이다. 지금 한국 사회가 주목해야 될 것은 “일본에서 기존의 임금체계를 전제로 한 임금 인상의 효과가 어떻게 나타날 것인가?”라는 단기적인 문제가 아니라, “저출산과 고령화 등의 사회변화에 대처하는 일본사회의 실험이 본질적으로 어떻게 진행되고 있는가?”라는 지점이 아닐까 한다. 한국은 실패한 일본을 그대로 따라 해서는 안 된다. 일본의 실패를 반면교사로 삼는 지혜가 필요하다. 그래서 한국의 역동적 복지국가 운동에 거는 기대가 크다.
MeCONOMY Magazine May 201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