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의 왕조가 뛰어난 창업 군주를 포함해 두세 명의 명군을 내놓는다고 치면 대략 몇 년 정도 유지되고 난 뒤에 왕조 교체가 이뤄지는 게 적당할까. 중국 왕조의 교체 기간이 적절한 기준이 되지 않을까 싶다. 중국은 이민족이 침입하기 용이한 중국 대륙의 한 가운데에 있고 내부 모순이 극에 달하면 반란이 일어나기 좋을 만큼 인구도 많고 농사 지을 땅도 넓다. 주로 북방민족인 이민족과 반란세력 중에서 뛰어난 지도자가 나오면 중국 내부의 모순으로 인한 민심 이탈과 결합해 혁명을 통한 왕조 교체가 가능했다. 중국 역대왕조의 평균 교체 주기는 넉넉하게 잡아 250년 안팎이다. 이렇게 본다면 조선 왕조는 5백 년이나 지속돼 중기부터 백성들의 삶이 힘들어졌고 말기에는 사회의 모순이 극에 달해 회복 불능 상태에 빠지지 않았나 생각된다. 혁명이라고 함은 최소한 정치세력을 바꿔야 한다. 정치 세력도 그 교체 세력의 폭과 깊이에 따라 혁명의 철저성 이 달라질 것이다. 여기에다 정치사상을 바꾸어 체제를 바꿀 정도라면 진정한 혁명이라고 할 만하다. 조선 시대에 비록 성공하지는 못했지만 동학혁명을 유일한 혁명이라고 할 수 있다. 그 이전에는 정여립의 거사 사건이 있었다. 정여립 거사는
세종은 태종의 셋째 아들이다. 역사적으로 보면 걸출한 왕의 후계자는 장남보다는 뛰어난 차남이나 셋째에게 넘어가는 사례가 많다. 태종은 아버지 이성계를 도와 조선왕조를 일으킨 창업한 일등 공신이었다. 태조를 측근에서 보좌한 유학자 출신 관료들과는 달리,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서는 형제들도 죽이고 정도전과 같은 거물 정적을 제거하고 처갓집도 멸족시켰다. 양녕대군은 외갓집에서 자라 외삼촌 민무구, 민무질 등 4형제의 사랑을 독차지하다시피 하며 자랐다. 그 외삼촌들이 세자 양녕대군을 왕위에 올려 놓으려는 반역죄로 처형되었다. 이런 무서운 집념의 소유자이자 잔인한 아버지 밑의 장남인 양녕대군은 아버지의 기대에 못 미쳤다. 양녕대군은 공부도 게을리하고 주색을 가까이해 아버지로부터 꾸지람을 자주 들었다. 어느 집안이든 아버지와 장남 간 은 묘한 긴장 관계가 있다. 아버지는 장남에게 바라는 기준이 높기 때문이다. 왕조와 명문 가문, 부를 물려줘 야 하는 아버지로서는 당연하다고 할 수 있다. 이런 아버지의 눈높이를 맞출 수 있으면 순탄한 관계가 되지만 그렇지 않으면 보통 이상으로 감정의 골이 깊어진다. 태종과 양녕대군의 관계가 점점 악화하기만 했다. 세종이 되는 충녕대군의 바
조선은 성리학적 도덕 이상주의를 엄격하게 추구한 나라다. 그 높은 도덕률은 가상하나 ‘욕망’이란 선악의 원인자이자 발전을 위한 에너지라는 사실을 몰랐다고 할 수 있다. 인간의 본성에 대한 무지라기보다는 ‘마땅히 해야 한다’는 도덕윤리 의식이 너무 강했다. 이상주의적 ‘마땅함’은 신분 차별과 경제와 기술 및 시장의 족쇄로 나타났다. 양명학이 도입됐으면 어떻게 숨통을 터 볼 수라도 있을 텐데 그러지를 못했다. 애초부터 성리학을 개선하는 정도의 실학으로는 개혁이 가능했을 것 같지도 않다. 천주교를 받아들인 조선인들은 체제에 불만을 가진 양반들, 가난과 억압, 소외로 인해 삶의 희망을 가질 수 없었던 중인과 백성들이었다. 그들은 살아서 희망이 없다면 기꺼이 죽어서 천국 가기를 원했다. 기해박해에서 숨진 이호영(1838.11.25 옥사)을 보자. 그는 한강 북쪽 문막에서 살았는데, 어느 날 붙잡혀 형조에 갇혔다. 아래 글은 「조선 순교자록」 (파리외방전교 회 아드리앙 로네·폴 데통브 신부 기록, 안응렬 옮김)에서 인용해 재구성하고, 쉬운말로 다듬었다. 재판관이 그에게 “너는 부모에게 제사를 지내지 않지? 누가 보든지 조상에게 제사를 안 지내는 자는 개나 돼지만도 못한
조선은 주자 성리학으로 나라를 다스렸다. 주자 성리학이란 추상적인 논리로 엮은 일종의 도덕윤리다. 특히 주자 성리학이 조선으로 넘어와서는 인성과 수양에 집중하여 극단적인 순수주의랄까, 이론 세우기에 기울어졌다. 조선성리학의 개념에는 경제라는 것도, 생산과 노동이란 것도 물질과 기술이란 것도 거의 관심을 받지 못했고 불필요한 것이라고 여겼다. 그들의 눈에는 장사꾼의 이익, 부가가치라는 것은 부도덕한 것으로 보였다. 따라서 조선조 내내 중국과의 조공 무역 외에는 외국과의 통상 및 교류라는 것을 상상조차 하지 않았다. 조선 시대 전체를 조망해보면 중간에 중흥 시기가 있었다고 하나 시종일관 내리막길이었던 것 같다. 광복 후 실학 연구 붐에 일어나 근래까지 이어져 오다 보니 당대 실학자들의 생각들과 주장들이 주류인 것처럼 비치는 경향이 있다. 그러나 그들은 지류였고 정치적으로 소외됐을 뿐만 아니라 설사 정치적으로 기용된다고 해도 국가의 곳간을 채우고 백성들의 삶을 기름지게 할 수는 애초부터 불가능했다고 봐야 할 것 같다. 실학자들 중에서 기독교인이 된 사람이 거의 없었다. 기독교인이 되려면 유학을 버려야 한다. 확고한 기성 이념과 종교가 있는 상황에서 새로운 종교는
【M이코노미 이상용 수석논설주간】 불교에서 경전 다음으로 ‘논(論)’을 쳐준다. 논으로 유명한 것으로는 ‘공’ 사상을 논한 용수의 ‘중론’, 대승불교의 논리를 설파한 ‘대승기신론’이 있다. 유교가 정치와 일상의 법도로 자리 잡았던 중국과 조선에서는 이 ‘대의명분론’이 위세를 떨쳤다. ‘명분’을 국어사전에 보면 첫째, ‘각각의 이름이나 신분에 따라 마땅히 지켜야 할 도리. 군신, 부자, 부부 등 구별된 사이에 서로가 지켜야 할 도덕상의 일을 이른다.’고 했다. 둘째, ‘일을 꾀할 때 내세우는 구실이나 이유 따위.’라고 했다. 첫째의 뜻은 「논어」 자로 편에 자로가 스승인 공자에게 정치를 맡기면 어떻게 하겠습니까? 하자 ‘명’을 바로 하겠다’, 즉 ‘정명(正名)’이라고 대답한 데서 유래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둘째의 뜻은 첫째의 뜻에서 파생된 것으로 요즘에도 많이 쓰인다. 첫 번째의 뜻이 예전 유교 시대에만 통한 것으로 알고 있으나 전혀 그렇지 않고 오늘날에도 고위 공직자는 물론 경제인, 연예계와 스포츠계의 스타, 소위 공적인 직업인에게 가차 없이 적용되는 말이다. 유교에서 단 하나의 교리를 들자면 ‘명분’이라고 볼 수 있다. 임금은 왕으로서의 직분을 다해야 하
【M이코노미 이상용 수석논설주간】 삼국사기를 읽어보면 왕에 관한 이야기, 외교와 전쟁 추이, 별자리의 움직임, 기이하고 신령스런 현상, 그리고 자연재해 기록이 거의 전부다. 그 가운데 자연재해 부분은 빠지지 않았다. 그만큼 왕조가 자연재해의 절대적 영향을 받았음을 확인할 수 있다. 역사학자 신형식 선생의 저서 「삼국사기 종합적 연구」(2011, 경인문화사)에 삼국사기의 천재지변을 자세히 논하고 있다. 이 책에 따르면 천재지변 가운데 농작물에 영향을 줄 수 있는 자연재해를 꼽아보면, 가뭄 108회, 홍수 42회, 대풍 32회, 지진 91회, 병충해 38회, 상해(서리 피해) 37회, 설해(폭설) 26회, 박해(우박피해) 36회 등으로 나타나고 있다. 이 숫자는 신라와 고구려의 창건 시기인 BC 57년, 백제 창업 BC 18년부터 통일신라가 멸망하는 935년 사이에 일어난 것으로 치면 그리 많은 자연재해가 있었다고는 할 수 없다. 하지만 자연재해가 있었던 해에는 어김없이 백성들이 크게 굶주렸을 것임이 틀림없다. 고구려 제9대왕 고국천왕(재위 179-197)은 고구려뿐만 아니라 삼국을 통틀어 영명한 왕으로 칭할 만하다. 그는 무엇보다도 우리나라 최초로 진대법을 실
[이상용 수석논설주간] 서기 1567년에 명종이 죽고 선조가 즉위했다. 2년 뒤인 1569년 허균이 초당 허엽의 막내아들로 태어났다. 17세에 초시에 합격하고 결혼했다. 그는 서애 유성룡과 서얼 출신인 손곡 이달을 스승으로 삼고 문장과 시를 배웠다. 26세 문과에 급제하여 관직에 첫발을 내딛는다. 1618년 그의 나이 50세에 광해군의 지시로 저잣거리에서 역모 혐의로 목이 잘려 처형된다. 허균은 16세기 후반에 태어나서 17세기 초에 죽은 인물이다. 유럽의 르네상스와 상업혁명, 산업혁명은 14세기와 16세기 사이에 살았던 예술가와 직인, 항해사, 군인 등 광의의 현장 기술자들과 상인들에 의해 시작됐다. 현장 기술자의 실험과 경험 중시가 17세기 대학의 아카데미즘과 결합하면서 과학혁명을 이끌어냈다. 유럽의 산업혁명과 경제발전을 논할 때 당시 천시 받았던 사람들의 점진적인 신분 해방과 자유로운 활동을 빼놓을 수 없다. 중국과 한국 등 아시아는 신분 속박으로 중하류 층들이 차별 받았던 것이 사회의 역동성을 근원적으로 떨어뜨렸다. 특히 조선이 중국에 비해서 훨씬 심한 신분 차별이 존재했다. 조선 시대에 신분 문제를 공개적으로 지적하고 천시 받던 계층들과 더불어 변화
[이상용 수석논설주간] 불교를 깨달음의 종교라고 한다. ‘깨달음’이 왜 중요한가 하면 깨달음이 있어야 행동이 나올 수 있기 때문이다. 지식을 아무리 머릿속에 많이 쌓아 놓고 있어도 행동과는 그리 상관이 없다. 우리 주변에 머리가 명석하고 좋은 학교 나오고 박사 학위를 받고서도 행동이 영 아닌 사람들을 많이 본다. 지식만 많이 섭취하는 건 오히려 해로울 가능성이 높다. ‘지식’을 깨달음이란 과정을 통해 자기 것으로 만들지 못하고 지식을 그대로 받아들일 경우 ‘도그마’에 빠진다. ‘도그마’에 빠지면 자신의 행동은 되돌아보지 않고 타인을 정죄하게 되고 자꾸 꾸짖는 사람으로 변한다. 정치적 도그마와 종교적 도그마, 이념적 도그마는 사회를 편 가르게 하고 민심을 사납게 만들어 결국 폭력적 사회를 조장한다. 그렇다고 ‘깨달음’이라면 다 찬양받을 만한가. 전혀 그렇지 않다. 보편적 진리와 바른 도덕윤리의 기초 위에서 깨달음이라야 한다. 간화선에서도 이 점을 매우 강조한다. 불교의 보편적 가르침을 먼저 숙지 한 바탕 위에서 참구를 강조하고 있다. 극단적 종교지도자도 나름 깨달음을 얻었다고 하면서도 폭력을 서슴지 않는 논리를 펴고 테러를 행하고 있다. 이들은 보편적 진리와
[이상용 수석논설주간] 일연 스님이 쓴 삼국유사를 보면 전생과 현생, 후생이 하나의 줄거리로 엮어진 이야기로 가득하다. 신라의 수도인 서라벌에 부처님의 전생인 전불 시대 가람 터가 7곳이나 있고 미래불인 미륵보살을 모시지 않은 절들이 없을 정도다. 이것은 불교의 근본 교리인 연기론의 세계에 연유한다. 연기론은 인간 세상은 물론이고 우주만물의 모든 현상은 어떤 원인에 의한 결과이며 그 결과는 다시 원인이 되어 타자들의 결과를 빚는다는 불교적 진리다. 부처는 보리수 아래서 파천황의 이 연기법을 깨달았다. 이전에 인류가 ‘우연’의 공포 속에 살아왔던 것을 감안하면 엄청난 통찰이었음을 알 수 있다. 기독교와 같이 초월적인 유일 절대신이 부여한 진리이자 명령이 아니라 신들도 거스를 수 없는 법칙으로서 연기법을 말한 것이다. 특히 브라만의 결정론적 연기론이 아니라 인간의 자유의지와 평등을 내포한 연기론이었다. 이런 개명된 연기론으로 불교는 세계로 퍼져나갔으나 힌두교는 인도에만 갇혀 있게 된 것 같다. ‘연기법’으로 말미암아 힘없는 백성도, 천민도 마침내 자신의 삶의 고난을 알게 되었고 길을 찾아갈 수 있게 됐다. 연기법에 따라 내가 직접 행한 원인 제공이 가장 큰 만큼
[M이코노미 이상용 수석논설주간]문명의 발생 조건은 두 가지가 필요하다고 본다. 첫째 적정한 숫자 이상의 인구가 존재해야 하고, 둘째 문자가 있어야 한다. 인구의 규모가 클수록 교역되는 물품의 시장도 커져 좋긴 하나 그만큼 풍부한 경제적 부를 탈취하기 위한 전란에 휩쓸리게 될 위험도 상승한다. 문자는 지식의 축적을 가능하게 하고 정보의 정확성을 향상시키고 이에 따라 자연히 체계적인 사유를 가능하게 해준다. 우리 민족 고유의 종교와 사상을 지니고 있었던 삼국은 불교와 유교를 한문 경전을 통하여 접하게 된다. 불교이전, 민족 고유의 종교와 사상이 무엇이었을까 하고 실로 많은 학자들이 탐색해왔다. 지금 돌이켜 보면, 거기에 너무 힘을 쏟은 것은 아닌지 생각될 정도다. 우리 민족 고유의 사상과 종교는 아직도 연무에 둘러싸인 새벽에 큰 산 그림자를 바라보는 듯하다. 국조신 단군과 산신의 신화들, 풍류도, 홍익인간사상 등의 기록이 소략하기 그지없다. 발굴되는 유물로 상상력을 메우기에는 한계가 있어 보인다. 요하 주변과 한반도에 걸쳐 오랫동안 정주하였으나 남아있는 기록들이 너무 없다. 천부경은 너무 짧은데다 상징성으로 가득해 자료로 쓰기가 어렵다. 아무튼 추측건대 삼국시
【M이코노미 이상용 수석논설주간】현대인의 가장 큰 문제는 인간의 근원적 조건인 불안을 너무 의식하고 있는데 반해 그 불안을 달래주고 미래의 희망의 끈을 놓지 않게 해주는 종교적 신앙심이 거의 퇴화해가고 있다는 데 있다. 그러는 한편 개별 인간은 자기만족과 인권의식에 대해선 지나칠 정도로 민감하고 가족과 공동체 윤리와 연대감엔 불편해하면서 자기 파멸적 허무주의와 분열의 고통을 겪고 있다. 오늘날 미국과 유럽의 정신과 정치·경제·사회의 위기는 여기에 그 원인을 두고 있음을 부인하기 어려울 것 같다. 한국도 선진국에 서서히 진입해가면서 선진국들이 고통받고 있는 실패의 경로를 그대로 추수하는 것 같아 안타깝다. 한국은 전통적으로 도덕윤리를 숭상해왔고 하늘(하느님)에 대한 신심이 깊은 가운데 자연과 인간, 인간 상호 간의 조화를 추구해왔다. 우리가 서구 선진국들의 잘못을 되풀이하지 않기 위해서는 한국의 철학과 사상의 좋은 점을 되살려 오늘에 적용하는 것이라고 믿는다. 우리나라 역사에서 종교적 믿음과 실천이 왕에서부터 귀족, 화랑, 백성에 이르기까지 고르게 일치된 시대가 있었다. 신라의 통일 전후 시기와 전성기였다. 학자들은 그 시기를 제23대 법흥왕(514-540)에
한국경제가 1953년 한국전쟁의 폐허 위에서 반세기 남짓 기간에 선진국의 문턱에 진입할 수 있게 된 원인은 어디에 있는 걸까. 여러 원인을 들고 있겠으나 조선 선비의 ‘이치 탐구 정신’을 빼놓을 수 없다고 본다. 조선 유학의 치열한 이치탐구 정신의 뿌리는 우리 민족의 ‘재세이화’의 정신에 있다고 생각한다. ‘재세이화’에 대해 여러 모호한 해석들이 있는데, ‘세상을 보살펴 이치로 화하게 한다’는 뜻으 로 보고자 한다. ‘이(理)’는 이치(理致)로도 쓰인다. ‘재(在)’는 있다는 뜻만 있는 것이 아니고 ‘보다’, ‘살피다’의 의미도 있다. 세상과 인간의 이치를 추구하고 실천하고자 하는 우리 민족 특유의 정신 전통은 조선 성리학에 와서 더욱 정밀해지고 나아가 퇴계 선생에게 와서 ‘하늘과 하나 되어 지극한 기쁨을 누리는’ 새로운 정신 및 종교적 경지를 열었다. ‘이치’는 형이상학적 진리라고 정의내릴 수 있다. 동양은 자연철학이 미발달하여 서양과학을 만나기 전까지 형이상학적 진리를 일관되게 추구해온 학문 전통을 갖고 있다. 형이상학적 진리는 우주와 자연의 관찰에 의한 가설과 선현들의 깨달음, 합리적 추론과 체험에 의한 깨달음 등을 근간으로 한 체계적인 지식이다. 이것