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서울의 삭막함을 따뜻하게 느끼게 하는 곳이 북촌이다. 나지막이 앉은 작은 집들 사이사이로 난 좁다란 골목길은 코 흘리게 아이들이 금방이라도 튀어나올 것 같은 시골의 정서를 그대로 담고 있다.
외국인들이 빠뜨리지 않을 관광지로 알려진 북촌은 다양한 볼거리가 있어서 더욱 재미있다. 신영미 매듭기능전승자가 있는 ‘동림매듭공방’은 서울시가 지원하여 2004년 4월에 문을 열었다.
노리개, 허리띠, 주머니, 선추, 유소 등 우리나라에 전래되어 오는 각종 장식용 매듭에서부터 실, 끈, 장신구 등 매듭의 재료까지 총망라하여 전하고 있다는 공방에서는, 지속적인 작품 활동과 더불어 매듭 보급을 위한 초보자교육과 일일매듭체험을 비롯한 각종 공예를 위한 응용매듭, 전문가 양성교육까지 이뤄지고 있다. 3대째 가업을 이어오고 있는 신영미 매듭기능전승자의 48년 매듭인생은 하루에도 수백 번을 돌렸던 물레가 함께하기에 그 의미를 더한다.
“매듭은 우리생활에서 있어도 되고 없어도 되는 게 아니라 그 자체가 분명했습니다. 우리전통의상인 남성들의 도포는 입고 매듭으로 마무리를 하지 않으면 엉성해서 옷매무새가 서질 않았으니까요. 반면에 여성들의 한복은 노리개하나로 그 아름다움을 돋보이게 하기도 했죠. 이렇듯 사람의 옷매무새하나만 봐도 완결과 멋스러움의 종결을 의미하는 게 매듭입니다. 그래서 옛 어른들은 어떤 일이든지 매듭을 지어야 한다고 말씀하셨던 것 같아요.”
꽃다운 19살에 시작해서 48년을 한 길
신영미 전승자가 매듭을 시작한 나이는 19살이다. 당시 서울 신당동에 살았던 신 전승자는 청과상회를 운영하는 친정엄마대신 동생들의 뒷바라지며 살림살이를 도맡아 했다. 그러다 시간이 나면 인근에 있는 금호동 친구를 찾아가곤 했었다.
“그때 친구 집에는 사람들이 방으로 가득히 앉아서 매듭을 했어요. 남자는 남자대로, 여자는 여자대로 앉아서 매듭을 하고 있는 모습이 참 보기 좋았거든요. 나도 해보고 싶다는 생각은 했지만 거절당할까봐 말도 못했죠. 그러다가 용기를 내서 말했더니 그러라고 하더라고요. 집으로 가지고 와서 해봤더니 내 적성에도 너무 잘 맞고요. 그래서 밤을 새워 가면서 매듭을 해서 다음날 가져가면 어르신들이 손끝이 여물다면서 칭찬을 해주니까 더 잘 하고 싶은 마음도 생기더라고요. 그러다가 출근을 하면 어떻겠냐고 해서 출근을 하기 시작했어요. 당시에는 일을 하는 만큼 돈을 받았는데 그렇다고 자기가 하고 싶은 만큼을 하는 게 아니라 하루에 해야 하는 갯수가 있었어요. 그 개수를 다 해야 퇴근을 하는 건데 사람들은 그 개수를 빨리 채우고 퇴근하는데 나는 늘 늦게까지 남아서 했어요. 다 마무리가 안 되면 집으로 가져가서 밤에 완성해서 아침에 가져오기도 하고요. 손도 빠르지 않았지만 제가 만든 매듭이 맘에 안 들면 맘에 들 때까지 만들었거든요. 예쁘게 만든다고 돈을 더 주는 건 아니지만 맘에 안 들면 내 놓기가 싫더라고요. 당시 매듭은 대부분이 귀주머니였는데 남자들은 가죽으로 만들어서 바지위에 찼고, 여자들은 천으로 만들어서 속주머니로 차고 다녔죠. 지금은 약식으로 만들지만 당시만 해도 금박지가 들어가고 동그랗게 감는 작업(봉그리)을 해서 완성도를 높였으니까 공정이 많았어요. 꼼꼼한 성격을 알고 어르신들이 제게는 다양한 공정기술을 전수해 주더라고요. 그렇게 맺는 매듭인연이 벌써 오래됐네요.(웃음)”
매듭장인의 집안에 며느리로 3대째 가업
신영미 전승자와 매듭과의 인연은 백년가약으로도 이어져 매듭장인집안의 아들과 결혼도 했다. 중매는 시아버지가 섰다. 시댁어른들에게 잘 보인 며느리에 매듭에는 타고난 손재주가 있었기에 가업은 자연스레 이어받았다.
시부모님들이 하시던 매듭공방은 며느리가 운영하기 시작하면서 더욱 탄력을 더 받았다. 최대한 일하는 사람들의 시간누수를 없애 능률을 높이기 위해 노력한 결과 매출도 늘었다.
그럼에도 꾸준한 연구는 멈추지 않았다. 다른 공방보다 섬세하고 세련된 매듭을 만들어 내야 한다는 철학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 옆에는 항상 매듭동반자이면서 후원자인 남편이 있었기에 가능했다.
“매듭은 여자 힘으로는 어려워요. 끈 하나를 짜도 수동이다보니까 하나하나 손으로 돌려야 하거든요. 기계를 한 바퀴를 돌려야 매듭이 한 번 짜지는데 한 눈금이 올라갈 때마다 한 번씩 돌려야 하니 여자의 힘으로는 도저히 어렵죠. 염색하는 일도 마찬가지로 힘들어서 여자들은 할 수도 없고요. 원래 우리 집안은 조선 궁중에서 매듭 일을 하셨던 시왕고모와 그 기술을 전수받은 시아버님께 매듭을 전수받았죠. 남편과는 3대째 가업을 이어가는 매듭동반자고요. 저희 시어머님께서는 매듭을 전혀 못하셨어요. 식구가 많으니 살림을 사는 것만도 힘들었죠. 힘든 어머님을 도와드리기 위해 제가 빨래라도 할라치면 ‘넌 중요한 일을 해야 하는 손이지 빨래를 하는 손은 아니다. 빨래는 누구나 할 수 있으니 그 손으로는 중요한 일을 해라’하시면서 손에 물도 못 묻히게 하셨어요. 당신은 매듭을 하시진 않았지만 우리 것을 이어가야 한다는 것에 대한 열정만큼은 대단하셨어요.”
세련되고 우아한 멋을 내는 차별화를 매듭에 적용
“옛날에는 옷이 원색적이다 보니 노리개역시 원색이었죠. 하지만 지금은 가구나 옷, 문화상품까지도 현대인들의 칼라감각에 맞추면서 세련된 멋을 담아내야 합니다. 한복에 어울리는 노리개는 더더욱 그렇고요. 세련된 한복색상에는 산듯하면서도 우아한 색상의 노리개로 한층 더 멋을 더해줘야 하니까 작은 소품에도 차별화된 감각이 요구돼요. 그런데 요즘은 한복을 빌려 입다보니까 노리개도 빌려서 사용하는 경우가 많아요. 저는 이름이 많이 알려져서 어지간한 유명한 한복집은 대부분이 거래를 하고 있지만 그래도 어렵죠. 한복도 유행이 자주 타다 보니까 새로운 디자인과 칼라에 맞는 노리개를 만들어 내야 하니까 연구를 게을리 할 수도 없고 매듭보급을 위해서 강좌도 해야 하고요.”
한복 유행이 바뀔 때마다 한복집에서 옷고름과 치마, 저고리 천을 봉투에 담아서 ‘동림매듭공방’으로 보내온다. 칼라를 맞춰서 노리개를 만들어 달라는 뜻이다. 매듭의 진수를 보여줘야 알 때가 이때다.
“노리개도 유행을 상당히 많이 타요. 그래서 기본색에다가 자기만의 칼라를 섞어서 노리개를 만들어 내는 연구를 꾸준히 해야 해요. 연구를 하다보면 좀체 잘 안 쓰는 칼라도 매칭만 잘 하면 멋진 노리개가 만들어진다는 걸 알게 돼요. 매듭을 하는 사람들은 대부분 같은 실을 기본으로 사용하거든요. 그런데 색다른 방법으로 봉을 감는다든지 실을 섞는다든지 하는 방법을 통해서 나만의 멋진 칼라를 만들어 낼 수가 있어요. 이걸 보세요. 옛날어른들이 왜 노리개라고 했는지 알 것 같지 않아요? 노력하다보면 정말로 갖고 싶고, 자다가도 들여다보고 싶은 노리개를 완성돼요. 단순히 실만 섞는다고 만들어 지는 게 아니라 칼라감각과 꾸준한 노력이 있어야 가능하단 말이죠. 그래서 매듭을 하려면 적어도 10년 이상을 해야 하고 그 다음에도 자기만의 연구를 꾸준히 해나가야 해요”
매듭을 하기 위해서는 흰 실에 염색과정을 거쳐서 물레에 다시 풀고 꼬아서 다시 또 꼬는 다음 수증기를 올려 쪄내야 비로소 매듭을 할 수 있는 실이 된다. 이런 복잡한 과정을 거쳐야 하기에 매듭을 하는 사람들은 여자보다는 남자가 더 많다.
현재 우리나라에는 전통매듭 그대로를 계승하고 더 나아가 책으로 정립해서 매듭을 길이 보존하는 일을 하는 매듭중요무형문화재가 두 사람이다. 그리고 서울시 문화재가 세 사람인데 신영미 매듭기능전승자가 그 중 한 사람이다.
국새, 다회 제작, 전주 경기전 태조어진 유소 복원을 비롯한 각종 박물관 유물을 재현, 복원 제작하는 일을 하고 있는 신영미 매듭기능전승자는 실물이 없는 유물은 책을 보면서 작품을 만들고 원형에 가까운 작품은 박물관으로 옮겨서 전시하는 일도 한다. 한 작품을 만드는데 걸리는 기간은 많게는 1년이 소요되기도 한다고.
“이 작품을 만드는데 6개월이 걸렸어요. 경복궁 수장고로 들어갈 작품인데 정말 예쁘죠? 들어가면 못 보는 작품이에요. 원래의 작품이 없기 때문에 유물 책을 보면서 만들었죠. 세 사람이 만들었는데 가장 완성도가 높은 게 제가 만든 작품이라서 곧 경복궁에 보관될 예정입니다.”
인사동은 누굴 위한 차 없는 거리인가?
집안의 4대째 가업은 신영미 매듭기능전승자의 며느리가 이어갈 예정이다. 10년 이상을 배운 며느리가 후계자인 셈이다. 다른 분야의 전승자들이 후계자나 전수자를 찾지 못해 애를 태우는 것에 비해 매듭은 그나마 활동도가 많아서 배우려는 사람들도 꽤나 된단다. 되도록 많은 사람들에게 매듭을 전수해주고 싶은 마음에 매주 목요일과 주말에는 매듭강좌도 갖는데, 대부분이 자기들이 하는 일에 적용하고자 하는 사람들이다.
“액세서리공예가나 의상디자이너, 한지공예가, 한복집사장님 등이 많아요. 매듭을 배우려는 이유는 다른 사람이 하지 못하는 것에 대한 차별화죠. 의상디자인을 하는 사람이 벨트하나만 다르게 해도 차별되고요. 액세서리도 마찬가지에요. 작은 조각보 하나도 매듭을 달면 보기가 좋아지고 장식장도 매듭을 달면 느낌이 달라지잖아요. 매듭은 정말로 적용할 게 많다고 봐요. 그럼에도 매듭을 직업으로 배우고자 하는 사람들이 없는 이유는 10년 이상을 배워야 하는 긴 기간도 문제지만 수입이 가장 큰 문제죠.”
수입에 대한 얘기가 나오자 신영미 매듭기능전승자는 한숨부터 내쉰다. 정작 매듭기능전승자인 자신도 몇 년 전부터는 작품은 우리나라 매듭만 응용해서 하되, 상품은 중국과 일본의 여러 가지 소품들을 만들어 내고 있다고. 그러면서 인사동가계들이 왜 중국제품을 파는지 아냐고 묻는다. 우리고유의 제품을 팔면 좋겠지만 마진이 없어서 그럴 수 없는 게 우리의 현실인 게 너무 안타깝다고도 했다.
“하루 종일 이거 만들어 봐야 10개도 못 만드는데 금액이 15천원이거든요. 한 개를 만들어서 3천 원 정도를 남긴다고 보면 돼요. 그런데 이것을 인사동에다 줄려면 마진이 안 맞게 되는 거죠. 그래서 못줘요. 인사동은 물건을 팔아서 가계세도 내고 생활을 유지해야 하는 장사집인데 남은 게 없으니까 할 수 없이 중국제품을 갖다가 팔 수 밖에 없는 거죠. 인사동을 차 없는 거리로 만들어 놓은 것도 문제죠. 진짜 우리 국산 물건을 사기 위해 인사동에 오는 사람들은 1%정도고 나머지는 다 관광객들이에요. 그런데 차 없는 거리를 만들어 놓으니까 사람들만 밀려서 왔다 갔다 하는 차이나거리가 되고 있는 겁니다. 사람들이 많으니까 장사가 잘 될 거라고 생각하지만 정작 상인들은 죽을 지경이에요. 오죽하면 상인들이 차 없는 거리 철폐를 요구하는 데모를 한다고 하겠어요?”
매년 일본과 매듭전시회를 열어 올해로 28년
우리나라와 대만, 일본이 돌아가면서 매듭전시회를 열어 온 게 올해로 28년째다. 원래는 3국이 서로 돌아가면서 각 국에서 전시회를 열었지만 수교가 단절되면서 대만은 2004년도까지만 같이 했었고 지금은 우리나라와 일본만이 전시회를 열고 있다. 작년에는 우리나라 역사박물관에서 전시회가 열렸었고 올해는 일본에서 열릴 예정이다.
“이건 중국의 보석매듭이라는 건데요. 보석처럼 빛난다고 해서 보석매듭이라고 해요. 눈의 결정체처럼 생겼잖아요. 반면에 일본매듭은 동심(약속이라는 의미의 매듭)결 매듭이 특징이죠. 보통 결혼할 때 사주단자를 보낼 때 동심결 매듭으로 청실홍실을 보내거든요. 함을 보낼 때도 동심결매듭을 해서 보내고요. 우리나라 매듭은 기법부터가 달라요. 한 가닥으로 끈을 접어서 마무리하는데 앞뒤가 똑 같이 떨어지도록 해서 매끄럽고 마무리에는 꼭 수를 달아서 끝이 안 보이면서도 우아하게 만드는 게 우리나라 매듭이에요. 다른 나라 매듭은 우리처럼 섬세하지를 못하기 때문에 마무리를 하기 위해서 장식물을 붙여야 하고요. 벌써 모양부터가 다르잖아요.”
매듭을 하면서 아쉬운 점에 대해 한마디를 부탁했더니 매듭자체는 좋아서 하는 거니까 수입이야 그렇다 치더라도 모든 것을 중국에서 해오다보니까 원사자체도 우리게 없어지는 게 가장 아쉽단다.
매듭이 잘 돼야 그 부속품을 파는 가계들이 먹고 사는데 힘들다보니까 서서히 사라져가는 분위기라고. 게다가 북촌에 들어오기 위해서는 2년마다 서울시에 신청을 해서 계약을 맺어야 하는데 자리가 잡히기도 전에 자리를 이동해야 하다보면 어려움이 많단다.
장인들을 만나다보면 늘 듣는 얘기가 수입이 안 돼서 생활이 어렵다는 말이다. 포근해보이던 북촌 골목이 인터뷰를 끝내고 돌아서는 기자의 발길을 무겁게 한다. 장인들이 수입에 대한 걱정 없이 우리 것을 잘 보존해 갈 날이 멀기만 한 걸까?
<MBC 이코노미 매거진 3월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