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5년 민선 지방자치 시대가 본격적으로 열린 지 어느덧 30년이다. 강산이 세 번 변하는 동안 지역 행정은 몰라보게 친절해졌고, 주민들의 권리 의식도 높아졌다. 그러나 화려한 외형적 성장 뒤에 가려진 민낯은 여전히 차갑다. 시민은 정책의 '대상'이자 행정 서비스의 '수혜자'일 뿐, 정책을 직접 결정하고 책임지는 '주권자'로서의 체감도는 낮기 때문이다.
◇ 지방자치 30년, 화려한 외형과 초라한 내실
지난 30년의 자치는 엄밀히 말해 형식적 ‘시민참여’ 남발의 시대였다. 각종 위원회와 공청회는 늘어났지만, 시민들은 정책의 핵심 결정 과정에서는 배제된 채 들러리를 서는 ‘구경꾼 시민’으로 남겨졌다. 선거라는 간헐적 이벤트 외에 시민이 일상적으로 주권을 행사할 통로는 좁았고, 그 결과 시민참여는 ‘양적 팽창’에도 불구하고 ‘질적 답보’ 상태를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우리나라 민·관협치의 상징적 모델이었던 광주광역시와 서울특별시의 사례는 이러한 한계를 고스란히 투영하고 있다. 두 도시는 각기 다른 방식으로 협치를 주도해 왔으나, 현재는 기대했던 성과를 내지 못한 채 정체기에 머물러 있다.
◇광주 ‘민·관협치협의회’ 형식화와 이행의 단절
광주광역시는 일찍이 1990년대 중·후반, 민·관이 함께 정책을 고민하는 민·관합동워크숍을 시작했던 긴 협치의 역사를 가지고 있다. 광주광역시와 시민사회가 지역의 주요 현안과 시민 수요를 반영한 정책을 생산하는 과정을 제도화하기 시작했고, 마침내 2020년 광주광역시 민·관협치활성화 기본조례가 제정되었다.
광주는 민주화 운동의 성지로서 강력한 시민사회 역량을 바탕으로 '광주광역시 민·관협치협의회'라는 선구적인 거버넌스 모델을 구축한 것이다.
광주광역시 민·관협치협의회는 시민사회 활동가와 행정 관료가 머리를 맞대는 '거버넌스' 형성에 주력했고, '시민사회 협치'를 낳았다. 그 결과 민·관협치협의회 위원 구성이 시민단체나 전문가 그룹에 편중되면서, 평범한 시민들이 일상에서 겪는 생생한 문제들은 협치의 테이블에 오르기 어려운 구조다. 즉, 시민사회 활동가와 행정관료, 전문가들끼리의 정책 담론 형성 되면서 일반 시민들에게는 또 다른 '그들만의 리그'로 비칠 수 있다.
문제의 핵심은 따로 있다. 광주 모델이 가진 결정적 한계는 '논의와 이행의 분리'다. 협치협의회에서 열심히 치열하게 의제를 발굴하고 정책을 제안해도, 실제 행정 현장에서 집행되지 않거나 예산반영 단계에서 무산되는 일이 반복되었다. 반면에 행정측에서는 논의 내용이 정책적 반영 수준에 미치지 못한다고 탓을 한다.
결과적으로 행정은 민·관협치협의회를 형식적 ‘의견수렴’ 과정으로 활용한 것이고, 시민사회는 정책 반영이 되지 않는 회의에 피로감을 느껴야 했다. 이렇게 시민참여가 겉도는 현상이 고착화되면서 협치는 주권자의 명령이 아닌 ‘행정의 선택’으로 전락한다는 사실을 떠올리기도 한다.
◇‘서울협치모델’, 정치적 취약성과 행정 종속
서울은 대규모 자원과 전담 조직을 투입해 마을공동체와 협치를 행정의 주류로 끌어올렸다. 서울시는 2019년 5월 시민 민주주의 가치 실현에 필요한 사항을 규정하고 시민 민주주의 관련 정책 추진을 위한 합의제 행정기관 설치 근거를 마련하고자 「서울특별시시민민주주의기본조례」를 제정하였다.
시민민주주의는 참여적 거버넌스, 숙의적 거버넌스, 결사체 거버넌스 등 3차원의 구성요소로 개념적 구성을 가지고 있을 정도로 혁신적인 출발을 하였다.
서울시의 ‘서울협치모델’ 역시 협치 조례를 기반으로 시민참여예산과 연계하며 외연을 확장했으나, 정치적 환경 변화에 따라 제도의 존립 자체가 흔들리는 취약성을 보였다. 특히 기존 협치 기구들이 가진 권한이 ‘자문’에 머물러 있다 보니, 공들여 만든 정책 제안이 행정의 캐비닛 속으로 사라지는 경우가 허다했다.
서울 협치의 문제 핵심은 이렇게 조례에 의한 권리가 아닌, 단체장의 정치적 선의에 전적으로 의존했다. 현행 협치 조례가 부여한 권한은 대부분 ‘자문’에 그쳐, 정책 결정의 실질적 효력이 없었다. 단체장의 지향점이 바뀌자마자 협치 예산과 조직은 한순간에 해체되었다. 이는 제도적 강제성이 없는 협치가 얼마나 쉽게 무너질 수 있는지를 보여주는 뼈아픈 사례다.
결국, 광주와 서울의 사례가 우리에게 주는 교훈은 명확하다. “제도적 구속력이 없는 참여는 시혜적인 행정 서비스에 불과하며, 무작위성을 결여한 참여는 대표성의 한계를 갖는다”는 점이다.
◇조례 전면 개정으로 시민의회의 실질적 권한이 필요하다
디지털 시대의 시민참여는 6단계로 진화한다. 1단계 공공데이터 공개(정보제공)부터 3단계 온라인 옴부즈맨(감시)까지는 기초 단계다. 4단계 시민소싱과 5단계 시빅해킹을 거쳐 도달해야 할 최종 목적지는 바로 6단계 ‘시민행정’이다.
이 단계에서 시민은 단순 참여자가 아니라 정책 생산과 집행의 ‘주체’가 된다. 대의제 하에서 시민의 직접참여가 관건이 되는 이유는, 숙의(Deliberation)를 통한 합의 형성이 대의제의 한계를 보완하고 정책의 정당성을 부여하기 때문이다. 광주의 ‘이행 단절’을 극복하기 위해선 권고안에 대한 ‘답변 의무’와 ‘예산 반영권’이 필요하며, 서울의 ‘대표성 논란’을 넘기 위해선 ‘무작위 추출(추첨제)’ 방식의 시민의회가 필수적이다.
이제 법적 근거 미비를 탓하며 상위법 개정만 기다릴 때가 아니다. 조례는 그 자체로 ‘지역의 헌법’이다. 광주와 서울의 기존 협치 조례를 전면 개정하여 시민의회에 날개를 달아주어야 한다. 개정 조례안은 다음과 같은 강력한 '결정력'을 담아야 한다.
- 소집 권한의 다각화(Bottom-up)-
시장과 시의회뿐만 아니라, 주민자치회가 시민주권위원회를 거쳐 상향식으로 의제를 제안하여 시민의회를 소집할 수 있도록 경로를 열어야 한다.
-무작위 추출(Representativeness)-
특정 전문가 그룹이 아닌, 성별·연령·지역별 비례에 맞게 추첨된 시민들이 참여함으로써 '그들만의 협치'가 아닌 '만인의 협치'를 구현해야 한다.
-예산편성권의 실질적 부여(Power)-
시민의회의 권고안이 본예산에 우선 반영되도록 강제해야 한다. 돈이 없는 정책은 구호에 불과하며, 예산권 없는 시민은 구경꾼일 뿐이다.
-시장 및 시의장의 답변 의무(Accountability)-
권고안에 대해 30일 이내에 실행 계획을 공식 답변하도록 조례에 명시해야 한다. 수용 불가 시 주권자 앞에 그 사유를 직접 보고하도록 하여 행정의 무책임을 원천 차단해야 한다.
◇‘시민주권위원회’와 ‘실행체계’로 만드는 새로운 30년
이 모든 혁신은 ‘시민주권위원회’와 ‘지원사무국’이라는 든든한 상설 지원 체계가 있을 때 비로소 완성된다. 시민의회가 숙의에만 집중할 수 있도록 정책 자료를 제공하고 회의록을 작성하며, 결과가 행정에 반영되는지 끝까지 추적하는 전문 조직이 필요하다.
시민의회는 대의제를 부정하는 기구가 아니다. 오히려 대의제가 놓친 민심의 세세한 결을 채우고, 행정의 외로운 결단에 주권자의 힘을 실어주는 가장 강력한 아군이다. 지방자치 30년의 성찰은 이제 조례 개정이라는 구체적 행동으로 옮겨져야 한다.
광주와 서울이 선제적으로 '결정하는 시민'의 시대를 연다면, 이는 대한민국 민주주의의 새로운 이정표가 될 것이다. 이제 구경꾼 시민의 시대는 끝났다. 결정하는 시민의 시대가 시작되어야 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