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때 전 세계를 호령했던 소니, 도시바, 파나소닉, 샤프 등 일본 가전회사들은 왜 그리도 급격하게 몰락의 길을 걸었을까? 가성비 좋은 우리나라 가전산업과 경쟁에서 이기지 못한 탓도 있으리라. 그런데 상황이 바뀌어 이제 우리나라가 과거 일본과 같은 처지가 됐다. 거의 모든 산업이 중국에 잡아먹힐 절박한 상황이 되었으니 말이다.
제21대 대선을 앞두고 각 당이 선관위에 제출한 대선후보들의 10대 공약은 관세 전쟁까지 겹친 데다 성장 동력이 떨어져 어려움을 겪는 우리나라 경제를 의식한 듯하다. 더불어민주당 이재명 후보는 ’경제 강국‘, 국민의 힘 김문수 후보는 “기업 하기 좋은 나라”, 개혁신당 이준석 후보는 “일 잘하는 정부”를 각각 1호 공약으로 제시했다.

민주당은 인공지능(AI) 100조 원 투자, 전략산업 국민 펀드 조성 등을 통해 신산업을 육성하겠다는 계획이다. 국민의 힘 역시 인공지능(AI) 100조 원 투자, 20만 명 전문 인력 양성을 내세웠다. 개혁신당은 일 잘하는 정부에서 인공지능(AI)에 대한 언급은 보이지 않는다.
인공지능이든 뭐든 국가적 산업 프로젝트를 추진하려면 막대한 국민의 세금이 들어가야 한다. 그런 재원이 마련될지 공약에 그칠지 모르지만 설령 재원을 확보해 각 당이 공약한 대로 돈을 투자한다고 치자.
과연 우리나라의 AI 기술이 곧바로 첨단기술 선진국을 따라잡고 우리나라 경제가 새로운 활력으로 넘쳐날 수 있을까? 그랬으면 좋겠지만 현실은 녹록치 않다.
우리나라의 2023년 연구개발 투자비(정부+민간)는 총 119조 원으로 국내총생산(GDP)에서 차지하는 비중은 4.96%다. 우리나라보다 높은 나라는 이스라엘(6,3%)뿐이다. 미국, 일본, 독일 등은 3%대다. 그러니까 우리나라는 이미 연구개발에 전력을 다하고 있다고 봐야 한다. 그래서 '밑 빠진 독에 물을 붓는 격'처럼 단순한 양적 확장이 추가 효과를 낼 수 있다고 기대하는 것은 '김칫국부터 마시는 격'이다.
정부와 민간에 돈이 없어 AI 경쟁력이 떨어진 건 아닐 터. 그래서 GDP 대비 연구 투자 비중이 2.4%였던 2004년에나 통했을 100조 원 공약은 시대착오적일 수 있다. 게다가 연구개발 투자의 78.6%는 민간 기업이 담당하고 있다. 정부가 투자해 AI 대기업을 만들지 못하고 좋은 인재를 확보하지 못해서 AI 기술이 뒤처진 건 아닐 것이다. 초중등 교육을 인공지능 시대에 맞게 완전히 뜯어고치지 못했던 일을 반성하는 게 합리적 추론이다.
그래서 지금은 정부 주도의 생산요소 투입량보다는 어떻게 제대로 AI 산업에 투자할 것인가? 이를테면, 어떤 전략으로 AI 슈퍼 기업을 만들고, 산업과 연구개발의 구조를 어떻게 바꾸고, AI 시대에 우리나라가 경쟁력을 갖춘 분야가 무엇이고, 기존 기업들이 AI 시대에 적응하고 변화하는 것을 어떻게 돕고, 변화에 뒤처질 중소기업과 저소득층을 어떻게 배려할지 고민하는 것이 우선일 듯하다.
1990년대 초, 중반, 폴 크루그만 등의 경제학자들은 동아시아의 경제 기적이 생산성 향상 없이 자본이나 노동을 집중적으로 투입한 결과여서 지속 가능하지 않다고 경고했다. 그들의 지적은 IIMF 외환위기로 현실이 되었다.
마치 그들의 경고처럼 최근 대한상공회의소, 한국경영자총협회, 한국경제인협회, 한국무역협회, 한국중견기업연합회 등 경제5단체가 정책 제안 형식으로 「미래 성장을 위한 제안」인 100대 정책 과제를 발표했다.
대선을 앞두고 경제단체가 정책 제언을 내놓은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경제5단체는 “새 정부 임기인 향후 3~4년이 AI 강국 도약의 골든타임(적기)이 될 것”으로 예상했다. 이들 단체는 “에너지, 데이터, 인재 등 3대 투입 요소와 인프라 모델, AI 전환 등 3대 밸류체인(Value Chain, 기업이 제품이나 서비스가 최종 소비자에게 전달되기까지 엮여 있는 모든 단계)에 대한 전략을 수립해 달라”고 요청했다.
그러면서 “이제 우리나라 경제는 과거의 성장 공식이 통하지 않게 돼 새 전략이 절실하다” 고 호소했다.
대선후보와 각 정당은 경제 분야에서만큼 현장을 가장 잘 아는 경제5단체의 절박한 건의를 경청하여 비현실적인 양적 투입에만 골몰하지 말고 유권자들이 다가올 미래 경제를 이끌어 갈 지도자 선택의 기준이 될 AI 전략을 마련해 유세 도중에 들을 수 있게 해 주시라. 지도자가 당연히 해야 할 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