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미국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의 고율 관세정책이 본격화되면서 글로벌 공급망 전반에 지각변동이 일고 있다. 특히 미국 에너지저장장치(ESS) 시장에서 압도적 점유율을 차지하고 있는 중국 배터리 업체들이 직격탄을 맞을 가능성이 커지면서, 한국 배터리 기업들에게는 반사이익의 기회가 열리고 있다는 분석이 나온다.
지난 3월, 미국 하원은 사실상 중국산 배터리를 겨냥한 ‘해외 적대국 배터리 의존도 감소법’을 통과시켰다. 이 법안은 오는 2028년부터 국토안보부(DHS) 자금이 투입되는 사업에 대해 CATL, BYD 등 6개 중국 배터리 기업의 제품 사용을 금지하는 내용을 담고 있다. 더 나아가 9일(현지시간), 트럼프 대통령은 중국에 최대 125%의 고율 관세를 부과하겠다고 발표하며 ‘미 보호주의’에 본격 시동을 걸었다.
SNE리서치 오익환 부사장은 10일 서울 서초구 엘타워에서 열린 ‘차세대 배터리 콘퍼런스(NGBS 2025)’에서 “트럼프 2기 행정부의 고관세 정책은 단기적으로 시장 위축이라는 리스크를 수반하지만, 장기적으로 한국 기업에게는 절호의 기회가 될 수 있다”며 “중국산 공급 차단은 곧 한국산으로의 대체 수요를 의미한다”고 말했다.
◇ 美 고관세, 中 배터리 점유↓...K-배터리 "북미 현지화·소재 내재화 시급"
북미 ESS 시장 수요는 78GWh에 달하며, 이 중 87%가 중국 업체인 CATL과 BYD 제품이다. 그러나 SNE리서치 분석에 따르면 2026년부터 중국산 배터리에 82.4%의 고율 관세가 적용될 경우, kWh당 91달러였던 ESS 배터리 가격은 149달러까지 급등할 전망이다.
반면 미국에서 생산된 한국산 배터리는 IRA(인플레이션 감축법)에 따른 생산세액공제(AMPC) 혜택을 받아 118달러로 가격 경쟁력을 확보하게 된다. 이에 따라 중국산 배터리를 대체할 공급처가 절실해진 미국 시장에서, 현지 생산 인프라를 확대해 온 한국 배터리 업체들이 수혜를 입을 가능성이 높아지고 있다.
트럼프 정부의 관세 장벽은 단순히 중국을 겨냥한 것에 그치지 않는다. 미국 내 생산 및 부품 조달 비중을 높이지 않는 해외 기업에게도 압박이 될 수 있다. 이에 따라 한국 기업들은 북미 현지 생산을 확대하는 동시에, 원재료 공급망 다변화 및 내재화 전략이 절실하다는 평가다.
오 부사장은 “2025~2026년은 북미 생산과 소재 내재화가 배터리 기업 생존의 분수령이 될 것”이라며 “기회의 창이 닫히기 전에 시설 투자와 기술 내재화를 완료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특히 음극재인 흑연, 양극재의 핵심 원료인 리튬, 전해질 원료인 LiPF₆(육불화인산리튬) 등 주요 배터리 소재의 중국 의존도가 높은 국내 소재 기업들은 리스크 분산이 절실하다. 이에 따라 LG에너지솔루션과 SK온, 에코프로, 포스코퓨처엠 등 주요 소재·배터리 기업들은 북미 합작사 설립과 원재료 자체 조달 확대에 속도를 내고 있다.
◇ 차세대 전지·폼팩터 변화, 기술 우위로 기회 잡는다

기술 차별화 역시 한국 기업들이 미국 시장에서 승부수를 띄울 수 있는 지점이다. 삼성SDI는 최근 각형 배터리 기술을 중심으로 고도화를 추진하고 있으며, ‘셀투팩(Cell-to-Pack)’ 공정을 통해 부품 단계를 생략하고 배터리팩의 공간 효율성을 극대화하는 전략을 내세우고 있다. 이 기술은 빈틈없는 구조 설계가 가능한 각형 배터리의 장점을 극대화할 수 있어 시장 니즈에 적합하다는 평가다.
LG에너지솔루션 역시 고체전해질과 리튬메탈 음극 기반의 전고체 배터리를 포함해 소듐이온, 리튬황, 바이폴라 전지 등 차세대 전지 기술에 대한 투자를 강화하고 있다. 특히 소듐이온 배터리는 향후 리튬 수급 불안정에 대응할 수 있는 대안으로, 지속가능성과 가격 경쟁력 면에서 높은 잠재력을 보이고 있다.

SNE리서치에 따르면 올해 글로벌 전기차용 배터리 탑재량 성장률은 지난해 26.8%에서 14.3%로 둔화할 것으로 보인다. 유럽의 탄소배출 규제 완화와 북미 시장의 관세 리스크 등이 그 이유다. 하지만 중장기적으로는 글로벌 이차전지 수요는 계속 확대될 전망이다.
오익환 부사장은 “2030년 글로벌 이차전지 수요는 약 4.7TWh로 확대될 것이며, 이 중 EV가 80% 이상을 차지할 것”이라며 “ESS를 포함한 비자동차 부문도 AI, 재생에너지 확대에 따라 급성장할 것”이라고 내다봤다. 실제 ESS 시장은 2023년 185GWh에서 2035년 1232GWh로 약 6.7배 성장할 것으로 예상된다.
트럼프 행정부의 고관세 정책은 단기적으로 글로벌 시장에 충격을 줄 수 있으나, 동시에 한국 배터리 기업들에게는 미국 시장에서 입지를 넓힐 수 있는 절호의 기회이기도 하다. 미국 현지화 및 소재 내재화가 성공의 관건이라고 관계자들은 보고 있다. 기술 우위와 생산 능력을 앞세운 한국 배터리 산업의 전략적 투자와 정책 대응이 ‘포스트 중국 시대’의 배터리 시장을 선도할 열쇠가 될 것이라고 전문가들은 전망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