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사람에게 운명이 있긴 한 걸까? 어린 시절 노래와 맺어진 인연을 외면하고 새로운 일을 찾았지만 결국은 가수로 살아가게 됐다는 가수 설빈. 그는 비록 늦은 출발을 했지만 즐겁게, 그리고 행복한 마음으로 노래인생을 살아가고 있다고 했다. ‘목소리가 크고 우렁차서 노래를 부르면 잘 부르겠다’던 초등학교 4학년 때 음악선생님은 그렇게 그를 노래와 한 줄로 묶어 놓았다. 새로운 신곡과 보컬준비로 분주한 나날을 보내고 있다는 가수 설빈을 만났다.
‘사나이 가는 길 그 누가 막으랴 불타는 대한국인/ 청년가슴 그 누가 알까 붉은 피로 남긴다 너를 사랑한다고’. 도마 안중근(安重根, 1879~1910)의사 추모곡 ‘대한국인 안중근’ 노래가사다. 트로트 가수 설빈은
특이하게도 이 노래로 2010년 9월에 가요계에 데뷔했다. 초등학교 4학년 때 목소리가 크고 우렁차서 노래를 하면 잘 하겠다며 노래를 불러보라는 음악선생님의 권유로 어린이합창단에 들어간 것이 그가 노래와의 첫 인연이다. 이후 중학교에서는 학교에 합창단이 없어 노래를 중단했다가 본격적인 활동은 고등학교에 진학하면서 시작했다.
그가 ‘안중근 대한국인’이란 추모곡으로 가요계에 발을 내딛은 건 목소리 때문이었다.2010년 ‘안중근 평화청년 아카데미재단’은 중국에서 안중근 의사 동상을 한국으로 가져와 부천에다 세우면서 ‘안중근 101주기 추모공연’을 기획했다. 그러면서 추모곡을 만들었는데 그 노래를 부를 가수를 공모했다.
"조건이 뭐였냐면, 가슴에 와 닿을 정도로 힘차고 우렁차게 추모곡을 불러야 한다는 거였어요. 초등학교 때 음악선생님께서 저보고 목소리가 크고 우렁차서 노래를 부르면 잘 부르겠다고 하셨던 그 말씀과 너무나 똑같잖아요. 목소리 때문에 제게 기회가 온 거죠.(하하)"
이 노래를 데뷔곡으로 그는 이후 ‘밥만 먹고사니(2011년 2월)’ 싱글앨범 1집을 시작으로 ‘별리(2013년 8월)’ 싱글앨범, ‘묻지마’ ‘브라보 내 인생’(2014년5월) 등 모두 7곡을 연달아 내놓는다. 그에게 자신이 부른 노래 중에서 가장 마음에 와닿는 노래가 어떤 노래냐고 묻자 "다들 좋은데 그중에서 가장 재미있고 빨리 와 닿는 노래는 지난해 발표한 ‘묻지마’라는 곡이 너무 좋습니다. 현재 발표된 노래 외에도 준비된 곡들이 많은데 모두 그분이 작사한 곡들"이라고 말했다. 신곡발표를 위해 매일 쉬지 않고 연습실을 찾고 있다는 그는 '오늘 주어진 하루에 감사하는 마음으로 최선을 다하려고 노력한다'고 힘주어 말했다.
특별한 인연...그리고 그의 노래
가수 설빈의 든든한 버팀목이 되어 주고 있는 사람은 작곡가 김현 씨다. 때로는 독소를 쏟아내고 때
로는 유별나게 친한 두 사람. 이 두 사람은 몇 년 전 우연히 만나서 지금은 형과 아우로 살아가고 있다.
"어떤 장소에서 기타치면서 노래부르고 있었는데 선생님께서 저보고 그러더라고요. 목소리가 허스키하니까 잘 다듬어 놓으면 개성 있겠다고요. 이후 카톡으로 문자도 자주 보내주시고 연락도 주시고 그러면서 점점 친해졌죠. 그런데 어느 날 ‘묻지마’라는 곡을 저한테 주시면서 히트할 곡이니 한 번 들어보라고 합디다. 그러면서 저를 좋아하는 이유가 승부 근성 때문이라면서 열심히 해보라고요. 선생님께서는 곡만 주신 게 아니라 편곡이라든가 악기다루는 부분에 대해서도 채워주려고 노력합니다. "
그는 두 사람이 가장 잘 통하는 건 음악세계인 것 같다고 말했다. 서로가 마음을 알아주다 보니까 특별히 챙겨줄 때도 있지만 때론 서운하리만큼 냉정하게 평가도 해준다고 했다. 그가 지금도 매일 노래연습을 하는 곳은 작곡가 김현 씨의 녹음실이다. 지금 당장은 장르를 넘나들 수 없는 곡들이지만 시간이 지나면 너무나 소중한 다양한 장르의 노래를 소화할 수 있도록 충분한 준비를 가지고 노력해 나간다는 계획이다.
노래교실의 인기 가수가 되기까지
신인가수들은 자신이 부른 노래를 많은 사람들에게 알리기 위해 발품을 팔아야 하는 게 가장 어렵다. 그 역시 노래를 알리는 일이 가장 중요한 만큼 각종행사장이나 노래교실을 찾아다니며 자신의 노래를 홍보한다고 말했다. 이런 자리는 자신의 노래에 대한 평가를 할 수 있는 기회인데 대중의 반응을 보면서 노래를 수정해 나갈 수 있기 때문이라고 했다.
"요즘은 거기도 방송국처럼 경쟁이 아주 치열해요. 현재 등록된 가수만 해도 2만명이 넘는데 그들이 노래를 알릴 수 있는 채널이 없잖아요. 노래교실을 한두 군데 가서 되는 게 아니라 전국을 돌아다니면서 알려야 하다 보니까 하루도 쉬는 날이 없습니다. 요즘은 금천구에 있는 노래교실 8군데 정도를 찾아 다니며 홍보를 하고 있는데 하반기에는 대구에 내려가서 홍보활동을 할 생각입니다."
가수들이 노래교실을 중요시 하는 이유는 노래교실에서 사용하는 교재에 노래를 올리기 위해서라고 한다. 노래교실 학생(주부)들이 노래를 듣고 좋다고 하면 그 노래가 교재에 올라가 전국에 있는 노래교실에서 불리어지는 만큼, 신인들에게 노래교실 교재등록은 중요한 부분이다. 그래서 그는 노래방기기 관련 회사도 찾아간다. 가수가 곡을 낸다고 무조건 노래방기계에 노래가 들어가는 게 아니기때문에 부지런히 발품 파는 게 곧 성공하는 길인 셈이다. 노래교실에서 인기 있는 오빠로 통하는 그에게도 팬클럽이 생겼다. 그는 가끔 이런 팬들과 만나 시간도 가지면서 가수로서 부족한 부분을 채우려고 노력한다고 했다.
편집 배우는 재미에 푹 빠져
그는 요즘 편집을 배우는 재미에 푹 빠져 있다고 했다. "김현 선생님께 배우고 있는 중입니다. 배우고 나면 나름대로 편집을 해서 SNS에 띄울 생각입니다. 요즘은 공중파만 공략해서 되는 게 아니라 SNS나 유
튜브 등 다양한 채널을 활용해야 하잖아요. 제가 부른 노래에 영상을 담고 자막을 넣는 작업을 직접
해보고 싶어요."
그의 닉네임은 나루(NARU)다. 최근 ‘묻지마’라는 노래에다 자막을 넣은 영상을 만들어서 올려놨더니 팬들이 괜찮다고 해서 더욱 용기나 났다는 그는, 발표하지 못한 곡들은 SNS를 통해서 팬들과 공유해 나갈 예정이라고 말했다. 그렇게 반응을 본 다음에는 콘서트도 열고 팬들과 함께 공유하면서 가슴에 와 닿는 곡들은 음반으로 낸다는 계획이다.
롤모델...그리고 가수 남진
지난 2012년 그는 미국 샌프란시스코 지역 한인회홍보대사였다. 가수 남진과의 인연은 거기서 맺어졌다. 같은 해 4월27일 미국 한미라디오 샌프란시스코 개국 콘서트 남진 디너쇼에 게스트로 초청을 받은 게 인연이다.
"남진 선배님 디너쇼다 보니까 공연장이 가득 찼어요. 저는 홍보대사라 초청을 받았던 건데, 중간에 노래를 한곡 부르기로 되어 있었죠. 그런데 110볼트 외부전압기로 전기를 끌어오다 보니까 리허설중 전기가 나간 겁니다. 본 공연에서 전기가 나갈까봐 노심초사했죠. 그렇다고 이미 계획된 행사를 취소할 수도 없었고요. 공연이 시작되고 차례가 되어 무대에 올랐는데 노래를 시작하자마자 메인무대 스피커가 나가버린 겁니다. 황당했죠. 그때 제가 마이크를 잡고 만담을 하겠다고 했어요. 그렇게 10여 분을 관중들과 웃고 있는데 전기가 들어왔어요. 우뢰와 같은 박수가 나오고 휘파람을 불고 난리가 났죠. 노래를 부르고 내려왔는데 공연이 끝난 후 남진선배님께서 그러시더라고요. 경험이 많은 사람들도 갑자기 그런 상황이 되면 당황하는데 어디서 그런 걸 배웠느냐고. 그때 뉴욕 주간지 일간지까지 뉴스에 제 기사가 크게 소개됐었죠."
그는 가수 남진의 변함없는 모습을 좋아한다고 했다. 많은 연예인이나 가수들이 인기가 올라가면 노래를 부른 후 바쁘다면서 후다닥 자리를 뜨는 경우가 많은데 가수 남진은 차를 타고 가다가도 세워놓고 나와서 인사를 하는 모습에 감동을 받아 후배로서 닮아가고 싶다고 말했다.
다양한 경험...그리고 가수
사실 그는 음악계와 멀어지기 위해 늘 다른 분야를 넘봤다. 그러나 그런 그에게 음악계로 돌아오게 하는 기회가 늘 생겼다. 방향을 바꿔보기로 하고 사업에도 손댔다가 실패도 했다. 맨 처음 한 사업은 음식물 소각사업이었다. 그러나 창업하고 4개월 만에 손을 털어야 했다. 이후 이벤트 회사를 차려서 재기를 꿈꿨다. 아침에 출근해서 모든 준비를 하고 있다가 저녁 6시가 되면 업소들을 돌아다니며 안면을 익히고 영업을 해야 하는 고된 일이었다. 하지만 다른 선택을 할 수가 없었다. 첫 번째 사업에 실패한 그에게 경제적인 여건이 녹록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런 그에게 구원의 손길을 내민 건 친구였다.
"경제적으로 어려워지다 보니 차를 살 형편이 안 됐는데 친구가 자기네 교회에서 폐차하는 차가 있으니 가져다 쓸 생각이 있냐고 묻더라고요. 감지덕지였죠. 차를 가져와서 의자를 떼어 내고 악기를 가득 싣고 다니면서 영업을 했는데 차가 얼마나 낡았는지 짐을 많이 실으면 언덕을 못 올라가 뒤에서 밀어야 했어요. 그래도 재미있었죠. 열심히 일한 덕분에 1년 만에 큰돈도 벌었고요. 그런데 무거운 악기를 메고 다니다 보니 어깨가 늘어나고 허리도 아프고 결리는 바람에 다른 사람에게 넘기고 말았죠."
어려운 길만 찾아서 가는 자신에 대해 가족들은 어떻게 생각 하냐고 묻자 그는 "대부분 좋아한다"며 웃었다. 그가 어릴 적 그의 아버지는 기타를 사주면서 적극적으로 응원을 해줬다고 한다. 그 마음은 지금도 변함없이 없이 그에게 용기를 주고 있다고 했다.
학교 내 관악밴드 <그라스밴드>에서 음악활동 시작
그는 경북 영주 보현동(영주시)에서 태어났다. 영주고등학교에 진학한 그는 학교 내 관악밴드인 그라스밴드에 들어가 음악활동을 시작했다. 학교에서의 밴드활동은 클라리넷, 트럼본, 드럼 등 많은 악기를 배울 수 있는 기회였다. 2학년부터는 아예 5인조 보컬그룹을 만들어서 봉사활동도 했다. 당시만 해도 마을청년회 같은 곳에서 주민들이 모여 노래자랑을 자주 했는데 거기서 기타도 치고 노래도 불렀다. 그러다 소문이 나면서 인근지역에서 초청이 들어와 지역을 돌면서 보컬활동을 했다.
"동네에서 노래자랑을 한다고는 하나 변변한 무대장치가 없을 때였어요. 마을공터 나무에다 흰 광목천을 묶어서 백열전구를 달아맨 게 전부였으니까요. 그래서 저희 멤버들이 아이디어를 냈죠. 흰 조명 위에다 셀로판지로 모양을 만들어 턴테이블 위에 놓고 돌리자고요. 그렇게 알록달록한 무대조명을 만들어서 사용했는데 동네 분들이 너무 좋아하셨어요."
노래하고 싶어 무작정 상경
고등학교를 졸업한 후에는 대학진학을 포기하고 무작정 서울로 올라왔다. 야간업소에 취직하면 노래를 부를 수 있다고 생각했던 것이다. 그러나 그가 취직한 곳은 지금으로 치면 룸살롱 같은 곳이었다. 거기서 그는 웨이터로 잠시 일했다. "노래를 하고 싶어서 서울에 왔는데 도통 노래를 할 수가 없는 겁니다. 그래서 새벽에 무작정 도망을 나왔습니다. 막상 나와 보니까 황당하더라고요. 통기타 달랑 하나 가지고 올라 왔는데 주머니에 돈은 하나도 없고요. 무조건 버스를 타고 동대문에 내렸어요. 고향친구가 한명 있었는데 그 친구가 동대문 근처 공장에서 일했거든요. 그런데 친구 역시 돈이 없기는 마찬가지더라고요. 그때 아버지께서 사주신 통기타를 팔았죠. 중앙시장에서 6~7천원 받고 팔았던 것 같은데 그 돈으로 일자리를 찾았죠."
노래하는 가수를 하겠다고 서울로 상경해서 안 해본 거 없이 다 해봤다는 그에게 가장 힘들었던 때가 언제였냐고 묻자 "야간업소에서 일할 때였던 것 같다"”며 웃었다. 군대에 입대한 후에는 위문공연단에서 활동했다.
"군대에서는 전투경찰로 근무했는데 중대 내에 위문공연단이 새롭게 신설됐습니다. 세 개 중대가 들어와 대대가 형성됐는데 중대가를 만들어야 했어요. 공모가 붙어서 저도 응모를 했죠. 마침 같은 내무반에 국문학과를 다니다 입대한 동기가 있었는데 그 친구가 작사를 하고 제가 곡을 붙였어요. 그런데 그게 1등을 한 겁니다. 전혀 예상하지 못했죠."
이렇게 노래와의 질긴 인연은 군대를 제대하고도 지속됐다. 당시만 해도 음악을 해서 밥 먹고 살기 힘든 때라 기술이라도 배워서 밥 먹는 걱정만큼은 하지 않고 살아야겠다고 생각하고 일할 곳을 찾아다녔다. 그런 그를 돌려 세운 건 다름 아닌 지인이었다. "야간 업소에서 일하다 만난 형이었는데 악보를 볼 줄 모르다 보니까 도와달라고 한 겁니다. 그때 강하게 뿌리쳤어야 하는데... 그러지 못한 게 지금 가수로 살게 된 거죠(하하)."
다양한 장르의 뮤지션들과 보컬활동 하고 싶어
그에게 앞으로의 계획을 묻자, 한류적인 트로트 가수로 활동해 보고 싶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다양한 장르의 뮤지션들과 보컬그룹 활동을 해 나갈거라고 했다. 현재 멤버를 구성 중이라는 그는 다양한 재능을 가진 뮤지션들이 모여 보컬그룹을 만들고 있는 중인데 내년이면 활동도 하게 될 것 같다고 말했다.
"멤버들이 각자 앨범을 가지고 있는 남녀혼성 보컬그룹인데 이름을 ‘파랑새’로 정했습니다. 다양한 장르를 넘나드는 음악세계를 펼쳐나가자는 의미가 담겨져 있죠."
시간이 날 때마다 재능기부도 해오고 있다는 그는, 자신이 가진 재능으로 누군가를 도울 수 있다는 것이 큰 행복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에 어려운 이웃들을 찾아다니며 음악봉사를 하고 있다고 했다. 지난 2013년 8월에는 제13회 광주국제영화제 레드카펫 MC로, 올 1월에는 딕훼밀리 기타리스트 객원으로 합류하기도 한 그는 왕성한 활동으로 가요계에서 실력과 인간미를 갖춘 가수로 인정받고 있다. 그가 남녀혼성 보컬그룹 파랑새와 함께 세상의 넓은 무대로 힘차게 날아오를 그날을 기대해봐야겠다.
MeCONOMY Magazine July 201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