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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럼


여자정신대(挺身隊)의 기억과 진실 [iv]

여자정신대의 조직과 동원(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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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국과 귀국 그리고 인솔자

 

정신대 동원은 총독부의 독점적 책임하에서 행해졌다. 국내 집결지는 서울이나 대구, 광주, 군산 등 지역의 주요 도시였다. 평양 등 중북부지방은 사리원(沙里院. 황해도)에 집결해 이동한 것으로 보인다. 농촌 지역에서는 관이 제공하는 트럭 등을 이용해 집결 장소까지 데리고 가는 경우도 있었다. 서울에서 동원된 대원은 혼자 전차를 타고 집결지 광화문까지 갔다고 말한다.

 

일본으로 가는 배편이 부산(부산-下關=시모노세키. 釜 關연락선)과 여수(여수-下關. 麗關연락선)에 있었기 때문에 국내 출국장소는 주로 그 두 곳이었다. 제주도-오 사카 연락선도 있었지만 제주도의 정신대 동원은 없었다. 대체로 전라도의 경우 여관연락선으로 출국했고, 경기도대 등은 부관연락선으로 출국했다. 출발에서 도착까지 4-5일 내외의 여정이었다. 시모노세키 도착 후 각 공장으로는 기차로 이동했다.

 

각도에서는 장행회(壯行會)라고 하는 환송식을 열었다. 줄지어 신사나 신궁(神宮. 황실에 관련된 신사를 말함)을 참배하고 출발하는 모습을 총독부는 선전했다. 1944년 7월2일 출발한 경기도대를 보자. 오후 3시 도청(현.역사박물관 부근)에서 장행회가 열렸다. 도지사 훈시, 대원 대표(平田政子. 조선명 불명) 선서, 기념품 증정, 황국신민의 서사 제창 등이 행해졌다. 그 후 줄지어 조선신궁을 참배하고 오후 8시 2분발 열차로 경성역에서 부산으로 떠났다.(경성일보.1944.7.3기사) 이때 동원된 한 대원은 조선 신궁에서 경성역 쪽 거리를 보니 온통 가족들로 메워져 있었다고 말한다.

 

출발 전 단체 기념사진 찍기나 장행회는 정신대 뿐만 아니라 징병자의 경우는 물론 근로보국대나 징용에서도 보여지는 전형적 행사였다. 사진이 적지 않게 남아 있는 것도 그 때문이다. 후일 정신대원들은 자신들을 [격려와 환송 속에서 일본으로 향한 사람들]로 인식하고 자책감을 보이기도 한다. 한 대원은 순천군청의 송별회에 가니 조선인 군수가 고급 카스테라 한 상자씩을 나눠 주더라고 말한다. 학교 전별금을 받았다는 증언도 있다. 학교도 다니고 우수하고 건강한 사람들이 선발되었기 때문에 우쭐하는 기분이었다고 회고하기도 한다. 취학 못한 빈곤층 소녀나 여공들 눈에는 정신대가 부러웠을 수 있었다.

 

정신대에는 교사나 관청의 노무 담당 직원이 인솔자로 동행했다. 인천대의 경우 인솔교사 외에 송현국민학교 교장 이 동행했다. 전라남도대의 경우 1차 정신대 150명은 손상옥이라는 한인 교사(당시 18세. 창씨명 마츠야마-松山)가 인솔자였다. 여러 일본인 교사가 인솔을 희망했지만 교장이 자신을 지명했다고 그녀는 말한다. 교사는 인솔 후 곧바로 돌아오지 않고 수개월 동안 머물면서 대원들을 돌보았다. 또한 부모 대표들이 직접 현지시찰단으로 일본 공장을 방문하기도 했고, 자기 어머니가 시찰단으로 공장에 왔었다고 증언하는 대원도 있다. 교사가 인솔 후 한 동안 보호자 역할을 했다는 증언은 모든 회사에서 확인된다. 일본인 교사 오카(岡)도 인솔 후 한동안 후지코시에서 머물렀다. 인솔 교사나 담당 공무원이 조선으로 돌아오면 정신대원들이 일본 공장에 잘 도착했거나 잘 지낸다는 보고 모임을 열어 선전하면서 보호자들을 안심시켰다. 지속적으로 정신대를 동원하기 위한 조치이기도 했다.

 

다음으로 귀국 과정이다. 먼저 해방 이전의 귀국이다. 후지코시는 군수성의 명령으로 조선 사리원에 새 공장을 건설, 대원들을 그곳으로 전속시키기 위해 1945년 7월 약420명의 대원을 니이가타에서 청진항으로 귀국시켰다.(공습위험으로 정상적 연락선 운항은 중지) 사리원을 거쳐 경기도청에서 해산했는데, 그때 회사는 대원들에게 급여기록이 적힌 급여봉투만을 줬고 여비는 지급하지 않았다. 대신 집까지 갈 수 있도록 흰 종이에 도장을 찍은 기차표 대용 종이를 나눠줬다. 그들은 새 공장에서 일할 연락을 기다리라는 지시를 받았으나 귀향 후 곧 해방을 맞았다. 이들은 상당한 기술을 습득한 대원들로 사리원 공장에서는 조선 노동자들에게 기술을 가르치는 사원으로 상정돼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해방 이후의 귀국은 일본도 한국도 극도의 혼란기였으므로 동원 때와는 다른 어려움이 있었을 것이다. 그들은 시모노세키나 하카타, 혹은 니이가타에서 회사직원 등 의 인솔로 귀국했다. 해방 후 귀국 시에 적어도 일본인 교사 2명(오카베, 긴죠)이 부산까지 인솔했다. 토쿄마사 대원이 부산항으로 귀국했을 때 대원들의 몰골(태풍 영향으로 배안이 뒤죽박죽 돼 있어 대부분의 대원이 신발을 신지 않은 상태였다고 함)을 보고 분개한 청년단들이 인솔자였던 일본인 사감을 폭행하려 하자 대원들이 이 사람은 우리를 보호해준 사람이니 절대 그러면 안 된다고 모두 매달려서 말렸다고 한다.(진상규명위원회 오일순 구술)

 

해방 후 정신대 귀국을 알리는 신문기사도 있다. 매일신보(1945.10.27)는 경기도 정신대 200명을 비롯해 정신대가 모두 돌아왔다는 사실, 대원들이 탈모나 피부병 등 으로 건강하지 못하다는 사실, 그리고 보호자들이 그에 분개해 항의 대회를 촉구하고 있다는 사실 등을 큰 기사로 전하고 있다.

 

이상의 귀국은 정상적인 단체 귀국이다. 정신대원 중에는 공장을 이탈한 경우가 있는데, 그중에는 탈출 후 곧 밀항해 조선으로 돌아온 경우도 있고 해방 후 다른 일을 하다가 귀국한 경우도 있다. 동원 중 사망자도 있었다.

 

 

황민화 교육과 자발성 논의

 

정신대는 적어도 형식적으로는 보호자 동의가 전제돼 있었다. 대부분의 부모가 강하게 반대했는데 그래도 정신대원이 된 경우는 부모를 설득하거나 혹은 부모 도장 을 훔치거나였다. 학교에서는 지원했다가 부모가 반대해 포기하겠다고 교장에게 알렸더니 간다고 약속했다가 안가면 부모를 감옥에 보내겠다고 해서 부모 도장을 몰래 훔쳐 교장에게 갖다줬다고 말하는 대원이 다수 있다. 농촌지역 모집의 경우 관헌이 찾아와 정신대에 가지 않으면 다른 가족을 징용이나 보국대로 보내겠다고 협박해 동의했다는 대원도 있다. 학교동원인가 지역동원인가, 그 지역이 농촌인가 도시인가에 따라 정신대원들이 느낀 강제성이 다르게 나타날 수 있겠다.

 

일하면서도 공부할 기회가 있다는 것이 소녀들에게는 큰 유인이었다. 실제로 정신대를 선전할 때 상급학교 진학 가능성이 있다는 것, 혹은 정신대에 다녀오면 상급학교 편입이 가능하다는 말을 들었다는 증언자가 많다. 조선에서 진학할 수 없었던 이유는 성적문제도 있었고(민족차별 교육으로 조선인의 진학이 상대적으로 어려웠음) 경제사정이 허락하지 않는 문제도 있었다. 그러나 일본에서 상급학교에 진학한 사례는 없었고 귀국한 후의 편입학도, 여학교 졸업장을 받은 사람도 없었으므로 그것은 거짓 선전이었다. 다만 정부 강제동원 진상규명위원회의 당사자 구술자료에는 매우 예외적인 사례가 있다. 토쿄마사에서 간호전문학교(속성과정)에 보내 간호사자격과 산파자격을 딴 경우(2인)이다.

 

임금을 받는다는 유인은 특히 지역동원의 경우에 크게 작용했다. 앞의 글에서 밝혔듯이 당시 정신대원 또래의 조선 여공 임금은 월 7.8엔 수준이었고 거의 절반은 식비로 공제당하는 실정이었다. 집 한 채 살만한 돈을 번다는 말을 듣고 정신대에 지원했다는 대원도 있다.

 

미쓰비시 일본소송의 경우 원고 7명 중 5명이 부모 도장을 훔쳤다. 나머지 두 명 중 한 사람은 끈질기게 부모를 설득해 갔고 다른 한 명은 가족의 반대가 심했기 때문에 보호자 격인 연장자가 같이 정신대로 따라갔다. 그러므로 7명 모두 보호자가 강하게 반대했지만 결국은 반대를 뿌리치고 정신대로 나선 것이다. 그 소녀들에게는 어떤 유인이 있었는가? 일부 논자들은 그 의식구조 속에 일제가 학교를 통해 내선일체와 황민화(皇民化) 교육을 주입한 영향이 있었기 때문이라고 말한다.

 

그러나 나는 그 의견에 동의하기 어렵다. 확실히 나라에 보탬이 되고 싶었다는 대원들의 증언이 있기는 하지만 그것은 주로 [일본을 믿고 갔는데 결과가 참담했다]는 이야기 문맥에서 나온 말이다. 특히 일본 정신대원들의 증언들과 비교 검토해 본다면 그러한 조선대원들의 생각을 황민의식이라고 표현할 수 있을지 의문이다.

 

새로운 세계로 향하고자 하는 마음에는 새 세계가 가진 매력 즉 흡입요인(pull factor)과 현 세계로부터 벗어나려고 하는 심정 즉 탈출요인(push factor)이 복잡하게 얽혀 작용하는 법이다. 정신대 소녀들에게 황민화교육에서 만들어진 일본에 대한 동경심이 있었겠지만 결코 탈출요인이 무시될 수 없다. 거기에는 오히려 경제사정, 성적이나 민족차별로 인해 상급학교에 갈 수 없는 상황, 심각한 여성차별문화 등 그곳에서 벗어나고 싶다는 요인도 적지 않았을 것이다.

 

한편 일본인 정신대원의 황민의식은 이와는 사뭇 다르다. 한 일본 소녀는 [여자는 전장에 나갈 수 없으니 나라를 위해 직접 병기(兵器)를 만들어야겠다]는 심정으로 부모 허락도 받지 않고 정신대에 참가했다고 말한다. 일본정신대는 자진해서 현장 노동시간을 늘리기도 했다. 어느 정신대원은 해군공창에 배속돼 사무직을 맡게 되 자 [나라를 위해 왔으니 현장으로 보내달라]고 요구했다. 이러한 의식과 조선정신대의 생각은 그 본질이 다르지 않을까? 더욱이 만약 조선정신대에도 황민의식이나 애국심이 매우 중요한 지원동기였다고 한다면 왜 조선의 고녀(高女. 고등여학교. 국졸 후 4~5년) 학생들은 정신대에 지원하지 않았는가 라는 물음에 대답하기 어렵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정이 워낙 특별해 어떻게 해석해야 할지 나 자신이 당황스러운 경우도 있다. 정신대원으로 일본에 간 후 힘든 생활을 아버지에게 전하려고 손가락에 피를 내어 [일본은 반드시 이긴다](日本は必ず勝つ)고 하는 혈서를 써 보냈던 소녀(미쓰비시 소송 원고)의 경우이다. 그에 놀란 아버지가 일본으로 와서 같이 조선으로 돌아가자고 했으나 일본에 남아 공부를 하고 싶다는 생각에 아버지와 함께 귀국하지 않았다. 그 후 그 공장에 지진이 발생해 정신대원 중에도 6명의 사망자가 발생하자 아버지가 다시 일본으로 찾아왔지만 이때에도 일본 학교에 가고 싶다는 생각에 조선으로 돌아가지 않았다.

 

어린 소녀의 판단이기는 하다. 그러나 이러한 상황을 어떻게 설명할 수 있는지, 그녀에게 공부란 무엇인지, 또 일본이란 무엇인지 해석하기가 어렵다.

 

 

MeCONOMY magazine May 20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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