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홍대 인디씬이 2015년 성인이 되는 20주년을 맞이하였다. 대부분 음악인들이 홍대 인디의 시작이라고 동의하는 1995년 4월 클럽 드럭에서 진행했던 커트코페인 추모공연 이후 20년이 흐른 것이다. 홍대 인디씬의 20주년은 많은 우여곡절이 있었고 많은 변화와 이야기를 가지면서 지금까지 성장해왔다. 지금 홍대 인디씬에서 활동하는 팀만 해도 1천여 팀이 넘는 것으로 추산되며, 음악생산의 양과 퀄리티만 봐도 메이저와 인디의 경계가 거의 사라진 시점까지 왔다.
지난 3월12일 인디20주년 기념 컴필레이션 앨범인 <인디 20>이 발매되었다. 이번 기념앨범은 크라잉넛, 노브레인, 황신혜 밴드, 이장혁 등 1세대부터 갤럭시익스프레스, 장기하와 얼굴들, 피아, 트랜스픽션, 요조, 최고은, 언체인드 등 인디 씬에서 내로라하는 뮤지션 20여 팀이 참여하였다. 이번 앨범을 통해 현재 한국 인디가 어느 정도 수준이고 이를 통해 한국 인디의 미래가 어떨지에 대해 점쳐 볼 수도 있다. 한 데 모이기 쉽지 않은 뮤지션들이 만나 마음껏 기량을 뽐낸 올스타 컴필레이션이기도 한 <인디 20> 앨범은 주류인 가요계에서 다루지 않는 다양한 장르의 음악을 지키고 발전시킨 홍대 인디의 모습을 대변하는 앨범이다.
인디음악의 변화 그리고 20주년의 기억
본지에서는 홍대 인디음악 20주년 기념앨범 <인디 20>을 맞아 홍대 인디의 산증인이자 역사인 김웅 대표는 21년 정도 인디음악 제작과 매니지먼트 일을 해왔으며, 최근 <인디 20>을 제작하고 발매했다. 前드럭레코드 대표이자 現 모스핏대표인 김웅대표를 통해 인디씬반전에 공연장들의 역할과 기여도, 그리고 과거 인디음악 환경에 대해 들어보았다.
당시 인디밴드들이 어떻게 형성되었는지요.
메탈의 전성시대에 섹스피스톨즈, The Clash등의 팀들이 있었어요. 홍대 인디씬에 영향을 미쳤던 것은‘너바나’가 전 세계를 강타할 때였습니다. 메탈은 속주기타를 해야 하고 운지법 연습도 어려웠어요. 보컬도 샤우팅이 되고 옥타브가 많이 올라가야 하는데 ‘너바나’는 기능적인 것 보다는 분위기나 정열 등을 담아 얼터너티브한 시도를 해서 성공을 거뒀죠. 거기에 영향을 받아서 얼터너티브나 펑크를 너무 어렵지 않게 바라보는 시각이 생겼어요.
커트코베인이 그것에 대한 영향을 미쳤다고 볼 수 있죠. 실제로 불을 지핀 게 커트코베인 추모공연을 하기위해 너바나 음악을 연주하다 보니깐 그들의 음악을 쫓아서 하게 되고 그러다 보니 그게 도화선이 되었던 거죠. 그걸 기점으로 드럭에서 라이브가 정기적으로 열리기 시작했고 펑크나 얼터너티브 밴드들이 계속해서 연주를 할 수 있었습니다. 너바나의 영향은 홍대에 큰 파도를 일으키며 상륙했고 그것을 기점으로 홍대에 펑크 얼터너티브 밴드들이 생겨나기 시작한 겁니다.
당시 국내에서 활동했던 밴드들은 누구인가요.
초창기에는 레이니썬, Ann 등의 부산밴드와 씬 이전에 활동하던 아트퍼포먼스적인 황신혜 밴드, 펑키한 음악을 한 고스락과 청년단체, 공연장 롤링스톤즈에서 하드락적인 기반으로 음악 하던 밴드 마루 등의 밴드들이 활동했어요. 크래쉬, 힙포켓 같은 데스메탈이나 하드락을 하는 팀들도 많았죠.
드럭에서 같이 일하셨다고 들었습니다. 드럭은 어떻게 공연장이 되었나요.
드럭은 초창기에 이석문 대표가 음악감상실을 만들었고, 그곳을 아지트처럼 다니던 친구들의 권유로 공연을 시작하게 되었다고 합니다. 커트코베인 추모공연 이후로 음악카페 같은 개념에서 공연장으로 변모하게 된 것이죠.
주로 찾아오던 팬들은 누구였는지요.
어린 팬들이 많았습니다. 장선우 감독의 ‘나쁜영화’에도 드럭이 나오는데, 그 당시에는 고등학생들끼리 “드럭에 가봤니?”라고 묻는 게 유행이었다고 해요. 음악을 처음 시작하는 친구들이 많았고 전설처럼 떠도는 희한한 공간이었어요. 그때 오던 수백 명중에 20~30%의 친구들이 음악 소비자에서 음악 생산자로 바뀌었으니까요. 당시 고등학생으로 놀러왔다가 아예 직업으로 바꾼 사람들도 있죠. 지금은 옐로우몬스터즈의 리더를 맡고 있는 용원이 같은 경우도 수용자로 들어왔다가 1~2년도 안돼서 자신도 음악하겠다며 밴드GumX를 만들고 몇 년 후 일본에 가서 성공한 케이스예요. 그들이 인디씬의 2~3단계 발전기반을 구축하는 역할을 했던거죠.
당시 공연장들의 수익은 괜찮았는지요.
다들 월세 내기도 힘든 라이브 클럽이었어요. 거기에 괴로웠던 건 경찰단속이었습니다. ’99년 11월 이전에는 라이브 클럽이 식품위생법 상에 일반음식점으로 분류되어 있어서 클럽에서 공연하는 것이 불법이었어요. 유흥주점 외 일반음식점에서 2인 이상의 가수가 공연하고 음주와 가무를 동시에 하는 것은 단속대상이었던 거죠. 당시 미8군이나 나이트클럽에서 밴드들이 공연했고 클럽이 형성되기 힘들었던 이유도 다 불법이었기 때문입니다. 이후 문화관광부 관계자와 드럭, 그리고 그 당시 공연장과 뮤지션들이 함께 합법화 운동을 많이 펼쳤죠.
1999년에 클럽과 밴드들이 의기투합해 라이브클럽 합법화를 촉구하는 공연을 열었고요. 결국 정부는 식품위생법 시행령을 개정해 일반음식점 내 밴드 공연이 가능하게 했어요. 그렇게 라이브클럽이 합법화가 되고나서 전국 50여 팀을 모아 마로니에공연에서 축하 릴레이 공연을 한 기억이 있습니다. 드럭은 초창기에는 굉장히 힘들었지만 크라잉넛이 성장하면서 같이 성장하며 잠깐이나마 운영에 여유가 생긴 적도 있었죠. ‘드럭에 가봤니?’, ‘말달리자’가 유행하면서 20대 초반의 젊은 사람들이 많이 찾아오면서 겨우 운영할 정도의 시절이 있었어요. 그 외의 다른 라이브클럽들은 생존하는 것조차 힘들었죠.이후 드럭에서 레이블활동을 하면서 음반제작도하고, 사업규모가 점점 커지면서 경영에 많은 어려움을 겪었어요
당시 공연기획은 어떤 형태로 이루어졌는지요.
그때는 밴드를 선택하는 과정이 오디션을 봐서 목요일에 세울 수 있는 지를 선별했습니다. 목요일에서 일요일까지만 공연을 했기 때문에 목요일에 공연을 세워봐서 실력이 되고 관중이 많이 오면 금요일과 주말에 공연에 세우는 시스템이었어요.
새로운 시장을 구축하는데 어려움이 많았을 것 같습니다.
방송국 들어 갈 때도 힘들었고 초창기다 보니 상당히 어려움이 많았죠. 당시에 메이저기획사만 방송국에 들어가서 방송에 나왔거든요. 그래서 처음부터 본체만체 하던 방송국에서 받아줄 때까지 계속 들이 밀었었죠. 크라잉넛이 TV와 라디오에 출연하니까, ‘우리도 나갈 수 있구나’라고 자신감을 얻는 뮤지션들이 생겨났죠. 크라잉넛이 앨범 십 만장 판매를 하고나니 다른 기획사들도 힘을 얻었던 것 같아요.
예전과 지금을 비교했을 때 인디를 좋아하는 사람들에는 어떤 변화가 있는지요.
초창기는 인디씬은 펑크나 얼터너티브 장르의 팀이 많았죠. 그러다 인터넷이 확산되면서 음반이 아닌 음원이 돌아다니기 시작했어요. 그게 싸이월드의 시절을 대변하는데 도토리로 컨텐츠를 구매하면서 음원의 개념이 생겨났죠. 싸이월드 이용자들이 싸이월드를 커뮤니티이자 홈페이지, 카페, 블로그와 같이 복합적으로 사용했는데 그러면서 소통하며 음악을 배경음악으로 활용했어요.
이전에는 음악을 듣기 위한 음악 감상 행위가 메인이었다면 싸이월드 시절부터 음원이라는 개념으로 커뮤니티활동을 하기 위한 배경음악으로 깔아놓기 시작한 것이죠. 따라서 가사가 임펙트를 주거나 쇼킹하면서 센 음악들이 잦아들게 되고 그러면서 라운지계열의 음악인 타루, 요조 같은 친구들처럼 듣기 편하고 심각하지 않은 주제의 음악이 강세를 보였죠. 그러다가 페스티벌이 많아지면서 다양한 장르의 밴드들이 부각이 되기 시작했고요. 지금은 생산하는 음악 장르가 다양해졌는데 페스티벌이 많아지면서 주제가 똑같을 수는 없어 다양한 음악창구가 생긴 것 같아요.
20년 넘게 활동하셨는데 인디음악을 보는 시각은 과거와 어떻게 달라졌는지요.
지금은 인디와 메이저를 구분할 필요가 없는 시대인 것 같아요. 인디란 말로 뭔가 규정지을 필요가 없는 거죠. 대중음악화 되어가고 있기 때문인데요. 덧붙여 말자하면 좋아진 측면이 있고 어려워진 측면도 있다고 봐요. 메이저도 아이돌이 대다수라 새로운 컨텐츠가 필요한 것 같고요. 인디씬에서도 시스템의 시대, 자본의 시대이다 보니 시스템을 구축하지 못하고 자본이 모자라면 음악매니지먼트를 뛰어들어서 하기 때문에 어려움이 많은 시대라는 생각도 들고요.
다만 홍보를 하는 창구가 SNS도 있고 유튜브도 있고 방송채널도 많아지고 해서 좋은 면도 있죠. 기획하는 사람들의 입장에선 집중이 안 되고 밴드들이 워낙에 많아 주목받기 어려운 부분도 있어요. 지금은 음반으로 돈을 벌 수 없는 시대에요. 장르는 넓어지고 뮤지션은 엄청 많아졌는데. 음악으로 돈을 벌수가 없다는 게 정말 아이러니인 것 같죠. 음악을 제작하는 자체가 머리가 복잡한 시대라고 봐요. 천만관객이 본영화의 배우는 천만관객에 맞는 부가가치가 따라오고 거기에 맞는 인기와 시선이 쏟아지죠. 하지만, 음반시장은 좋은 음악을 만들거나 싸이 정도 가치의 뮤지션이 됐어도 돈을 많이 벌어야만 그 음악의 가치를 인정해주는 것 같아요. 유독 음반시장에서만 자본주의의 폐해가 고스란히 드러나는 점이 아쉽죠.
아날로그에서 디지털로 바뀌는 과정에서 분배시스템을 제대로 관여하지 못한 탓이라고 생각해요.대기업 중심으로 분배가 되어버린 부분은 우리 사회의 크나큰 실수이기도 하고요. 거기다 정액제라는 것을 설정하는 문제에서도 제대로 대처하지 못했죠. 실제가치보다 작게 평가되는 게 슬픈 현실이에요. 예전에 가수 조성모가 음반을 100만장 팔았을 때는 그것에 맞는 가치와 시선을 보내주었는데 지금은 그러지 못한 게 현실이에요. 음악을 그때만큼 잘 만들어도 제대로 대우받지 못한다는 거죠.
인디씬이 활발해지기 위해 제도적으로 개선되어야 할 점들은 뭐라고 보시나요.
제도적으로는 음반분배에서 정액제를 없애줘야 하고 정부의 음원가격 승인제도를 폐지하여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예전처럼 음반가격을 제대로 매겨서 소비자가 외면하든 안 하든 간에 만든 사람들에게 권한을 주어 실패하면 가격을 내리고 성공하면 올리면서 시장경제원리에 따라 적정한 가격이 형성이 되도록 해야 한다고 봅니다. 그런 만큼 국가에서 승인하는 가격제도도 폐지되어야 하겠죠. 앨범은 가격을 마음대로 정할 수 있으나 음원은 가격을 정할수 없게 한 것은 옳지 않다고 봅니다.
MeCONOMY Magazine May 201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