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새롭게 부상한 CPTPP
CPTPP(포괄적・점진적 환태평양경제동반자협정) 가입은 신임 대통령에게 주어진 주요 외교・통상 과제 중 하나로, 취임 초기 국정 방향과 철학을 대내외에 보여줄 수 있는 상징적 결정이 될 수 있다. 한국은 글로벌 통상 질서의 변화에 선제적으로 대응하며 FTA 전략을 적극 전개하였다.
2004년 칠레와의 FTA를 시작으로 미국, 유럽연합(EU), 중국 등 59개국과 21건의 FTA를 체결함으로써 전 세계 GDP의 약 85%를 포괄하는 방대한 무역 네트워크를 구축한 개방경제국으로 도약했다. 하지만 최근 트럼프발 관세 전쟁으로 인해 우리는 물론 세계 경제에 암운이 짙게 드리워진 상태다. 이에 국제 통상 질서를 회복하려는 움직임이 가속되면서 CPTPP 가입 문제가 재부상하고 있다.
경제 대국 10위권인 한국이 이를 지렛대로 잘 활용한다면, 글로벌 통상 무대에서 규범 설정자(rule-maker)로서의 입지를 확보하는 전략적 전환점으로 작용할 수 있다.
CPTPP는 관세 철폐를 넘어 디지털 통상, 지식재산권, 환경과 노동 규범 등 미래 통상질서의 핵심 규범을 포함한 다자 협정이다. 따라서 CPTPP 가입은 디지털・환경 기반의 차세대 통상 구조로의 진입을 의미하는 중대한 정책 전환이라 할 수 있다.
CPTPP는 기존 FTA보다 훨씬 더 높은 수준의 자유화를 요구한다. 관세 철폐율이 95% 이상이고, 디지털 통상, 국영기업, 지식재산권, 환경・노동 기준, 전자상거래, 투자자-국가 간 분쟁해결제도(ISDS) 등 매우 포괄적인 규범을 담고 있다.
◇ 유럽연합이 움직인다
CPTPP는 단순한 무역협정이 아니라, 트럼프에 맞서 세계 경제 질서의 규범을 누가 선점하느냐의 문제로 확대되고 있다. 특히 미・중 경쟁이 격화하는 상황에서 CPTPP는 유럽연합을 비롯한 중견 국가들이 다자 연대를 통한 공급망 확보와 디지털 통상 선점을 새롭게 도모하는 장으로 부상할 가능성이 커졌다.
여기서 탈퇴했던 미국 트럼프 행정부가 기존 방침을 고수한 채 재가입하지 않는다면, 관세 전쟁과는 별도로 새로운 전기를 마련할 수 있을 것이다. 이에 CPTPP가 새롭게 평가받고 있으며, 유럽연합이 합류를 검토하는 등 새로운 움직임도 활발히 나타나고 있다.
영국은 2023년 7월에 정식 가입을 완료하며 EU 탈퇴 이후 인도・태평양 국가들과의 연계를 강화하려는 전략적 행보를 보였다. 중국은 2021년 가입 신청을 했으나 노동 및 환경 규범 수용, 국영기업의 경쟁 중립성 문제 등을 두고 기존 회원국들과의 충돌 가능성이 제기되고 있다. 대만은 중국보다 앞서 신청서를 제출했으며, 디지털 통상 강국으로서 CPTPP를 통해 공급망 협력을 강화하려는 의도를 명확히 하고 있다.
◇ 한국의 CPTPP 가입 효과
한국은 2022년부터 CPTPP 가입을 실질적으로 검토해 왔으며, 2024년부터는 본격적인 절차 논의에 착수한 상황이다. 그러나 농업 부문의 개방 압력, 국제 규범 수용에 따른 국내 제도 정비 부담, 그리고 CPTPP 가입이 중국과의 경제 및 외교 관계에 미칠 영향 등 복합적인 이슈로 인해 결정이 지연되고 있다.
한국이 CPTPP에 가입할 경우 이는 단순히 또 하나의 FTA를 추가하는 행위를 넘어선다. 한국이 앞으로 어떠한 세계 경제 질서 속에서 자국의 이익을 실현할 것인지, 또한 어떤 통상 철학과 규범을 수용하고 주도할 것인지를 결정짓는 중대한 정치・경제적 전환점이 될 수 있기 때문이다.
한국의 CPTPP 가입이 가져올 효과는 크게 두 가지로 볼 수 있다. 첫째, 가입을 통해 일본, 멕시코, 캐나다 등 현재 FTA가 없거나 불완전한 국가들과의 교역 장벽을 낮출 수 있으며, 자동차 부품, 전자기기, 식품 가공품, 화장품 등 주요 수출 산업에서 관세 인하 효과를 누릴 수 있다. 또한 디지털 통상 분야에서는 한국이 자국 기준을 국제 규범에 반영하며 선도국으로 자리 잡을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한다.
둘째, 공급망 다변화와 경제 외교의 다자화 측면에서 CPTPP는 전략적 의미가 크다. 코로나 팬데믹 이후 공급망의 지역화・정치화가 가속화되고 있는 시점에서 아태 지역의 규범 중심 블록에 참여하는 것은 중장기적으로 경제 안보를 강화하는 데 기여할 수 있다.
◇ CPTPP와 농업
그에 못지않은 구조적 도전 과제도 존재한다. CPTPP 가입 시 가장 큰 피해가 예상되는 분야는 농업이다. 쌀, 쇠고기, 유제품, 과일, 수산물 등 고관세 품목에 대한 개방이 이뤄질 경우 연간 최대 1조 원 이상의 농업 생산 감소가 발생할 수 있다. 이는 국내 농민들의 생계와 지역 농촌 경제에 심대한 타격을 줄 수 있다.
한국농촌경제연구원의 ‘농업전망 2024’ 자료에 따르면, 2023년 기준 한국의 농업 총생산액은 약 50조 원 수준이며, 이 중 쌀, 쇠고기, 유제품, 과일, 수산물 등의 고위험 품목이 상당한 비중을 차지한다. 쌀은 약 8조 원, 축산물은 약 10조 원, 과일류는 약 6조 원, 수산물은 7조 원 안팎의 생산액을 기록하고 있다. CPTPP 가입 시 이들 품목은 일본・호주・뉴질랜드산 등 저가 수입 품목과 직접 경쟁하게 되며, 이로 인해 최대 15~20%의 국내 생산 위축이 단기적으로 발생할 수 있다.
한국의 통상정책에서 중요한 수단으로 사용되어 온 할당관세(기존 관세율을 기준으로 최대 40%포인트까지 인하하거나 인상) 문제도 풀어야 한다. 할당관세는 특정 수입 품목에 대해 한시적으로 관세를 낮추거나 면제하여 수입 가격을 조절하고 물가를 안정시키기 위한 임시적 조세 정책 도구다.
농축산물 분야에서는 계란, 쇠고기, 닭고기, 밀, 콩 등 다양한 품목에 대해 적용되어 왔으며, 최근 몇 년간 농림축산식품부 소관 품목에서만 연간 수천억 원 규모의 관세 지원액(실제 걷지 않은 세금)이 발생하고 있는 실정이다.
CPTPP가 비차별성과 투명성을 핵심 원칙으로 삼고 있기 때문에 이에 가입하면 할당관세처럼 특정 국가나 품목에만 유리하게 적용될 수 있는 조치는 협정 위반 소지가 있다. 사전 협의 없이 관세를 인하하거나 다시 인상하는 행위는 엄격하게 제한되며, 임시 조치라도 합리적인 이유와 절차적 정당성이 뒷받침되어야 한다. 이는 국내 물가 안정 및 수급 조절 수단으로 자주 활용돼 온 할당관세 제도의 정책적 자율성이 CPTPP 가입 이후 크게 축소될 수 있음을 의미한다.
이러한 맥락에서 한국이 CPTPP에 가입하게 될 경우 기존의 할당관세 운용은 다음과 같은 방향으로 조정될 필요가 있다. 첫째, 관세 정책을 일회성・단기성 처방에서 벗어나 사전 예고된 기준과 수급 예측에 기반한 ‘긴급 세이프가드’ 체계로 전환해야 한다.
둘째, 물가 조정이나 수입 급증 대응을 위해 할당관세에 의존하기보다는 가격안정기금과 직불제 등 재정 기반의 정밀한 대응 시스템으로 정책 패러다임을 전환할 필요가 있다. 셋째, CPTPP 협상 과정에서 농업 분야에 대한 예외 조항 확보와 더불어 일정 수준의 정책 유연성을 공식적으로 보장받는 것도 중요한 전략 과제가 될 것이다.
CPTPP 가입과 관련해 가장 큰 우려를 표하는 사람들은 농민이다. 이들은 시장 개방에 따른 생산 기반 붕괴와 생계 불안, 지역 공동체 해체를 걱정하고 있다. 이들의 정부에 대한 신뢰 회복 없이는 통상정책에 대한 지지 기반 확보도 어렵다. 이에 따라 농업 보호와 함께 농민의 불안을 실질적으로 해소할 수 있는 제도적 대응이 병행되어야 한다.
우선 정부는 CPTPP 가입 전후로 농민 피해보상과 산업 전환을 총괄할 ‘농민보호 및 전환지원 특별위원회’를 설치해 CPTPP로 인한 피해 예측, 손실 보전, 품목 전환, 교육 지원까지 일괄적으로 계획하고 실행할 수 있는 컨트롤 타워를 마련해야 한다. 특히 일정 소득 이하 농가에는 기본 농업소득을 보장하는 ‘생계안정계좌’를 도입하고, 영농 중단 또는 전환 농가에 대한 재기지원형 직불제를 신설함으로써 생계 불안정성을 최소화할 필요가 있다.
또한 지방정부와의 협업을 통해 지역 맞춤형 CPTPP 대응 전략을 수립해야 한다. 일례로, 농업인의 디지털・저탄소 전환 교육, 수출형 품목 개발 지원, 농지 활용 다각화 등 지역 밀착형 대책을 병행해야 한다. 이러한 조치는 단기 보상 차원을 넘어 농업의 지속 가능성과 지역 경제 생태계 보존이라는 장기 과제에 대한 전략적 해법이기도 하다.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정부와 농민, 전문가, 시민사회 간의 지속적인 소통을 제도화하여 통상정책에 대한 사회적 합의를 구축하고 농업과 국익이 상충하지 않도록 설계하는 것이다. 이러한 기반을 갖춰야 CPTPP에 대한 국민적 신뢰를 확보할 수 있다.
◇ CPTPP 대응 전략
이러한 상황에서 한국은 CPTPP 가입을 위한 실질적이고 구체적인 대응 전략을 마련해야 한다. 그 방향은 다음과 같아야 한다.
첫째, 농업 등 민감 품목에 대해서는 일본, 캐나다처럼 장기 유예 혹은 예외 품목으로 지정해 개방 충격을 최소화해야 한다. 동시에 피해를 완화할 수 있는 제도적 장치, 예컨대 공공 비축제도 확대, 가격안정기금의 충분한 확충, 공익형직불제 개편 등을 통해 농가의 소득을 안정적으로 보호해야 한다.
둘째, CPTPP의 규범을 수용하는 데 있어 국내 법제와의 정합성을 높이는 방향으로 법・제도를 점진적으로 정비해야 한다. 특히 환경・노동 기준은 산업계와의 사전 협의와 로드맵 설정을 통해 사회적 갈등을 최소화할 수 있는 절차적 접근이 요구된다. 중소기업을 보호하기 위한 공공조달 시스템의 개편, 디지털 통상 분야에서 한국형 기준의 국제화 전략도 병행해야 한다.
셋째, CPTPP 가입으로 인해 중국과의 외교 마찰이 심화될 가능성을 최소화하기 위해, RCEP(역내포괄적경제동반자협정), IPEF(인도・태평양 경제프레임워크), 한중 FTA 등 기존 협정과의 병행 전략을 수립하고, 다양한 다자외교 채널을 통해 균형 있는 경제 외교를 실현해야 한다.
넷째, CPTPP를 농업의 위기가 아닌 기회로 전환할 수 있도록 수출형 농업 품목 개발, 디지털・저탄소 농업 인프라 확대, 스마트 산지유통체계 구축 등 농업의 체질 개선과 경쟁력 확보에 투자를 집중해야 한다.
결국 CPTPP 가입은 한국이 미래의 세계 경제 질서 속에서 어떤 위치에 서고자 하는지에 대한 국가 전략의 결정판이 되어야 한다. 한국은 CPTPP라는 거대한 경제 협정 속에서 단순히 수동적인 수용자가 아닌, 규범 형성에 기여하고 자국 산업을 보호하면서도 글로벌 선도국으로 발돋움할 수 있는 능동적 참여자가 되어야 한다.
농업을 비롯한 국내 취약 산업에 대한 제도적 보호장치를 충분히 마련하고, 디지털 통상 등 미래 성장 분야에서 국제 규범을 주도하는 전략이 병행될 때, CPTPP는 한국 경제의 도약을 가능케 하는 제도적 발판이 될 것이다. 지금 필요한 것은 국익을 중심에 둔 통찰력 있는 전략 수립과 국민적 합의이며, CPTPP 가입 여부는 이러한 전략 아래 신중하고도 결단력 있게 결정되어야 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