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05.15 (수)

  • 흐림동두천 10.5℃
  • 흐림강릉 12.9℃
  • 서울 11.8℃
  • 흐림대전 18.9℃
  • 맑음대구 26.4℃
  • 맑음울산 25.5℃
  • 흐림광주 16.9℃
  • 맑음부산 22.9℃
  • 흐림고창 13.6℃
  • 구름조금제주 21.8℃
  • 흐림강화 11.0℃
  • 구름많음보은 22.1℃
  • 흐림금산 21.4℃
  • 구름많음강진군 20.5℃
  • 구름많음경주시 26.8℃
  • 맑음거제 22.4℃
기상청 제공

기획


감미로운 플룻으로 지역 봉사에 앞장선다!

풀립스 플루트 오케스트라 "오직 실력으로 뛴다"

   

   

풀립스 플루트 오케스트라는 여성 단원 40여 명으로 구성돼 있는 인천 지역의 명품오케스트라다. 2003년 플루트를 좋아하는 연주자들이 모여 만든 풀립스 플루트 오케스트라는 올해로 11년째, 지역 봉사 연주를 하다가 실력을 인정받아 작년 서울 세종문화회관무대에 섰고 2년 후에는 이태리 피렌체에서 열리는 국제음악제에도 참가할 예정이다. 박하실 단장을 만났다.

 

풀립스 플루트 오케스트라는 200310여 명의 단원과 함께 창단했습니다. 저는 창단 후 3년쯤 지나서 제가 이끌고 있던 연주자들과 함께 합류하게 된 것입니다.” 박하실 단장은 음대에서 피아노를 전공했다. 이후 사회에 나와 피아노와 플룻을 가르치는 학원을 30년 이상 운영했다. “원래는 학원에서 피아노만 가르치다가 플룻을 하고 싶어 하는 학생들이 있어서 다시 국민대학교 종합예술대학원에 들어가서 플룻으로 석사학위를 받았습니다. 학원 제자들과 플루트 앙상블을 만들었죠. 플루트를 좀 더 제대로 배워야겠다는 생각으로 풀립스 플루트 오케스트라에 참여했어요.”

 

플루트라는 악기를 선택하게 된 이유는? 


피아노는 말 그대로 반주를 하는 악기거든요. 물론 피아노음악이 화려하고 좋긴 하지만 항상 혼자서 해야 하는 반주인 것이죠. 그러다 20년 전 플룻을 시작했는데 해보니까 좋더라고요. 가장 좋은 것은 여러 명이 같이 듀엣도 하고 앙상블도 하고요. 피아노는 옮겨 다닐 수가 없는데 이건 옮겨 다닐 수도 있잖아요.

 

플룻 연주를 했을 때 관객들의 반응은? 


오케스트라 하면 관현악이잖아요. 그래서 플룻으로 연주한다고 하면 보통 솔로 악기를 생각해요. 플룻 가지고 무슨 오케스트라를 하냐고 하는 분들이 많죠. 플룻도 피콜로. 알토 플루트, 베이스 플루트가 있어요. 여기에 콘트라베이스, 첼로, 드럼 등이 받쳐주면 오케스트라 음향이 나와요. 저희들이 인천종합예술회관에서 연주해 왔는데 와서 저희 연주를 들어본 사람들이 그래요. 플룻을 가지고 이런사운드가 되는 줄 몰랐다고요. 해마다 하다 보니까 실력도 나아지고 레퍼토리도 다양해지면서 좋다고 말하는 분들이 많아졌습니다.

 

단원이 여성으로만 구성되어 있다고 했는데 ...


애초에 만들 때 여성단원 위주로 만든 건 아니에요. 현재 단원들은 인천지역에서 음악학원을 하는 원장들이 많은데 피아노나 성악을 전공한 분들이 대부분이죠. 저희가 매주 화요일 오전에 연습을 하는데 남성들의 경우 오전에는 직장을 가야 하다 보니까 쉽지 않은 것 같아요. 예전에 슈퍼마켓을 하는 남성분이 한 분 오셨는데 혼자다 보니까 적응을 못하시더라고요. 남자단원들이 있으면 좋죠. 병원에 봉사 갈 때도 남자단원들이 있으면 훨씬 수월하잖아요. 본의 아니게 여성으로 단원이 구성되다 보니 지난 3월에 서울 세종문화회관에서 연주할 때 콘셉트를 우먼파워, 봄을 깨우다라고 정했어요.(웃음)

 

    

 

구성 멤버에 대해 소개해 주세요. 


처음에는 단장과 총무 이렇게만 있었는데 제가 단장이 되면서 전 단원 임원화라는 캐치프레이즈를 내걸었어요. 임원을 많이 시킨 거죠. 무슨 일이 생기면 임원들이 모여서 의논해서 해결하다 보니까 불만이 없어졌어요. 창단멤버 중에는 음악을 전공하지 않은 단원들도 있어요. 그분들이 뭔가 배우기 위해 문화센터에 갔다가 플룻을 배워서 단원이 된 것인데요. 지금은 전공자들보다 더 잘하고 너무 열심히 해요. 저희가 세종문화회관에서 연주도 하다 보니까 소개를 받고 근래에 503분이 오셨어요.

 

그런데 우리 팀이 너무 잘 하니까 나가려고 하는 거예요. 저희는 실력도 중요시 하지만 친목도모를 더 중요시 하거든요. 그래서 이분들이 함께 할 수 있도록 열심히 보자고 했고 실력이 안 되면 당분간은 무대에 안 올라가도 된다고 설득해서 같이 노력하는 중이에요. 그분들도 문화센터에서 충분히 배우고 있는 분들인데 앙상블 활동을 하고 싶어서 오신 분들이거든요.

 

다른 모임과 다른 점은 뭐라고 생각하나? 


일단은 성취욕이 크죠. 연주만 하는 게 아니라 드레스도 맞춰 입고 화장도 하고 무대에 서면 가족들에게 굉장히 자랑스럽죠. 남편이나 자식들도 마찬가지고요. 음악으로 모인 사람들은 음악으로 대화가 되다 보니까 여러 갈등도 음악을 하면서 풀어지게 되고요. 일단 정기연주를 하고 나면 그동안 어려웠던 점들이나 이런 게 다 풀려요. 그만큼 성취욕이 가장 크다고 할 수 있죠. 서로에게 많이 배우죠. 선배들이 그동안 터득한 주법을 초보자들에게도 가르쳐 주기도 하고요. 많은 도움이 되죠. 또 음악은 항상 사람을 행복하게 해주잖아요. 저희가 병원에 가서 음악봉사를 할 때 늘 빼놓지 않고 하는 멘트가 음악으로 행복한 삶을 살았으면 좋겠다는 거예요. 누구든지 음악은 좋아하잖아요. 

 

전국에 플룻만 하는 오케스트라가 있나? 


아주 많아요. 지난번 지휘자님도 그렇고 지금 지휘자님도 플룻 오케스트라를 몇 군데에서 지휘를 하고 계시고요. 우리 풀립스의 장점은 기초가 아주 탄탄하다고 말하고 싶어요. 좋은 지휘자님을 만난 것도 있지만 단원들의 열정이 넘치기 때문에 가능하다고 봐요. 그러다 보니까 실력이 다른 오케스트라보다는 월등해요. 우리 연주를 들어본 사람들은 플룻으로도 저런 연주가 가능하구나 하면서 감탄하는 분들이 많아요. 김소영 지휘자님을 소개하자면 플룻연주 편곡의 1인자예요. 플룻앙상블이나 플룻오케스트라 곡을 거의 편곡 하는데 교향곡들을 플룻음색에 맞게 편곡해요. 플룻스코어라는 사이트도 운영하시는데 아마 전국적으로 우리 지휘자님 편곡을 안 보는 곳이 거의 없을 거예요. 실력도 좋고 오래하신 분이라 존경스럽죠.

 


병원 봉사를 많이 다닌 것으로 아는데요.


가장 보람을 느끼는 곳이 병원이예요. 노인병원 같은 곳에 가면 휠체어를 타고 링거를 꽂은 채로 오시는 어르신들이 많아요. 젊은 단원들은 처음에는 자신의 실력을 자랑하고 싶다는 마음으로 음악을 하지만 이런 분들을 보면서 울죠. 그분들이 아픈 몸으로 박수도 쳐주고 앙코르도 해주고 또 끝나고 나면 언제 올 거냐고 하면서 아쉬워하고요. 단원들이 봉사연주를 갔다 와서 하는 말이 부모님 생각이 가장 많이 난다고 해요. 저의 경우, 병원 봉사는 특별하답니다.

 

친정 엄마가 당뇨병으로 신장 투석을 해오셨거든요. 경기도 화정에 있는 명지병원인데 엄마를 모시고 가면 보통 4시간이 걸리더라고요. 병실이 너무 삭막하고 환자나 보호자들이 많이 지쳐있는 겁니다. 그때 생각한 것이 이분들에게 음악을 들려드려야겠다. 그러면 조금이라도 마음이 편해지겠지 그런 생각이 들더라고요. 그래서 무작정 병원 원목실을 찾아가서 내가 이런 일을 하고 있는데 음악봉사를 하고 싶다고 말했죠. 그러고 나서 바로 제자들과 음악봉사를 하게 됐습니다.

 

풀립스가 해체될 위기가 있었어요. 2011년 경기도 문화의 전당에서 연주를 앞두고 지휘자님이 오케스트라 피트(무대 아래쪽 악단석)에 떨어져서 갑자기 돌아가셨거든요. 그 이후 정말로 힘들었던 것 같아요. 당시 인천문학경기장에서 연습을 하고 있을 때인데 지휘자님이 생각나니까 단원들이 거기에 연습하러 오는 걸 꺼려했어요. 지휘자님께서 워낙에 좋은 분이라 단원들을 잘 챙겨주시다 보니까 슬픔이 오래 남은 거죠. 정말로 단원들이 만나면 그냥 울었어요. 그때 제가 단장을 하고 있을 때인데 이대로 두면 안 되겠다는 책임이 생기더라고요. 그래서 병원에 가서 봉사연주를 하자. 이렇게 단원들을 설득해서 주말마다 봉사연주를 했어요. 그 덕분에 슬픔을 극복할 수 있었던 것 같습니다.

 

제가 단장을 한 지는 올해로 5년쨉니다. 원래 단장은 2년에 한 번씩 투표를 해서 뽑는데 단원들이 부족한 저를 만장일치로 다시 단장을 시켜 줘서 연속해서 하고 있습니다. 아마 잘 해서라기보다는 나이가 가장 많아서 그런 것 같아요. 저희 풀립스는 현재 46명인데 50명 정도까지는 받아들일까 해요. 11회 정기연주회를 하고 나서 잘 한다고 소문이 나면서 지금은 인천지역뿐 아니라 다른 지역에서도 많이 들어오길 희망해요.


명해진 계기는? 


지난해 세종문화회관에서 생활예술오케스트라를 했는데 51개 단체가 지원해서 축제를 열었습니다. 여기서 경선을 했는데 저희 팀이 뽑힌 겁니다. 주최가 세종문화회관이었는데 저희는 서류만 한번 넣어보자고 해서 넣은 건데 합격을 한 거예요. 작년 7월에 2차 예선이 있었는데 만약에 떨어진다고 해도 세종문화회관에서 연주를 해본다는 것에다 우리의 목표를 두자면서 연습을 했는데 붙은 거예요. 본선이 1018일에 있었는데 14개 팀이 뽑혀서 연주를 했고 거기에 우리가 뽑힌 거죠.

 

뽑힌 팀은 올해 세종문화회관을 무료로 대관을 해주고 단독 연주를 해주기로 해서 지난 322일에 우리가 두 시간 동안 단독연주를 한 겁니다. 세종문화회관은 우리 단원들에게 꿈의 무대나 마찬가지였죠. 앞으로 예술의 전당 2500석 콘서트홀에 우리 단원들이 연주를 해보는 게 꿈이에요. 꿈은 이뤄진다고 하잖아요. 저는 이뤄질 거라고 믿어요.

 

음악은 우리를 정신적으로나 육체적으로나 치유할 수 있는 힘과 용기를 주는 것 같군요. 


풀립스에 온 정성을 쏟았던 개인적인 사정도 있어요. 남편이 국가유공자인데 월남참전 때문인지 희귀성질환이 와서 고생을 정말 많이 하고 있습니다. 친정엄마는 당뇨로 투병 중인데 남편까지 그러다 보니까 굉장히 힘들었죠. 그런 상황에서 일주일에 한 번 음악봉사를 하는 게 너무 좋은 거예요. 마침 미국 제약회사인 노바티스사가 약을 개발해서 서울암센터와 아산병원 등에서 임상실험을 한다고 하더라고요. 실험대상자를 모집하는 과정에서 남편이 모든 조건이 맞아서 암센터에서 치료를 시작했어요.

 

약이 재발을 막는지 못 막는지를 실험하는 치료인데 남편이 모든 조건이 맞아서 치료를 시작했어요. 그 약으로 치료를 받으려면 1년에 1억 원 정도가 든다고 하더라고요. 희귀성 질환이라 딱히 치료약이 없던 상황이었는데 치료대상자가 되어서 치료를 하고 있어요. 원래 5년 동안 실험을 해야 하는데 남편은 2년을 치료하기로 했어요. 이 질환은 희귀성이라 치료를 한 다음에 재발이 되면 가망이 없대요. 제약회사에서 하는 말이 이 약이 재발을 막는데 80% 정도 효과가 있다고 하더라고요. 그 덕분인지 남편은 이 약으로 치료를 받고 종양이 없어 졌다가 2년 지나서 다시 전이되는 바람에 4년째 치료를 받고 있는 중이예요. 

 

지금은 학원을 그만 뒀어요. 제가 학원 한다고 늦게 들어가다 보니까 남편이 라면도 먹고, 먹는 게 잘 안 챙겨지더라고요. 그래서 안 되겠다 싶었죠. 가정이 가장 중요한데 이러다 큰 일 나겠구나 이런 생각이 든 거예요. 그래서 제자한테 학원을 넘기고 지금은 남편한테 올인하고 있어요. 힘든 점도 많죠. 그 힘든 것을 이겨내는 게 오케스트라 음악 활동이랍니다. 남편도 제가 집에 가만히 있는 것보다는 활동하는 것을 좋아하고요. 감사하게도 지금은 종양이 활동을 멈춰서 남편도 어느 정도 건강을 되찾아 가고 있어요. 꾸준히 약을 먹고 있습니다. 만약에 약을 안 먹는다면 종양이 다발성으로 퍼진다고 들었어요. 남편이 참 대단한 것 같아요. 오랜 투병 생활에 마음이 약해질 법도 한데 정말로 의지가 강해요. 그런 점이 존경스러워요. 그런 모습을 보면 저도 열정적으로 봉사활동을 할 수 있는 것 같아요.


 

병원에서 음악봉사를 할 때는 주로 어떤 곡을 연주하는지요? 


정기연주회는 클래식이 들어가야 하니까 플롯으로 편곡해서 관객들이 쉽게 접할 수 있도록 하고 있어요. 예를 들자면 비발디, 모차르트, 차이코프스키, 베토벤, 슈만, 브람스 등의 유명한 클래식을 플롯에 맞게 편곡해서 연주하는 거죠. 이런 곡들은 관악기가 많이 들어가야 하는데 저희는 플룻 한 가지만 가지고 연주를 하기 때문에 여기에 맞게 편곡을 해야 합니다. 병원에서 음악봉사를 할 때는 환자들이 좋아하는 음악을 연주해요.

 

인천 인하대병원의 경우 주로 노인층이 많더라고요. 입원하시는 분도 노인층이고 외래로 오신 분들도 노인층이 많고요. 그래서 세미클래식을 연주해 오다가 요즘은 목포의 눈물이라든가 돌아와요 부산항’, ‘내 나이가 어때서이런 노래를 연주하는데 너무 좋아하는 겁니다. 한 번은 목포의 눈물을 연주하는데 앞에 계신 할머니 한 분이 노래를 다 따라 부르시는 겁니다. 그래서 지휘자님이 할머님을 앞으로 나오시게 해서 우리가 반주를 할 테니 노래를 부르시라고 했더니 가사 하나 안 틀리고 부르시더라고요지금은 고정적인 레퍼토리가 됐죠. 노인복지회관에 가서도 앙코르를 신청하면 그런 트롯가요를 연주합니다. 요즘은 지휘자님께서 아예 어르신들이 좋아하는 노래들을 편곡해서 준비해뒀다가 그런 곳에 가면 연주해 드립니다. 

 

단원이 46명이면 운영비용이 만만치 않을 텐데 ...


저희는 모두 자비로 운영해요. 일단 입단하게 되면 10만원의 입단비를 내야하고 매월 5만원의 회비를 내서 그 돈으로 운영해요. 정식으로 연주를 하게 되면 대략 700~800만원 정도의 비용이 들어가는데 그때는 악기점이라든지 단원들의 남편(사업가)들에게 스폰서를 부탁합니다. 그 돈과 모아 놓은 회비를 보태서 비용을 마련하죠. 그래도 지금은 단원이 많으니까 조금은 재정이 나은 편이죠. 남은 돈은 병원 봉사 갈 때나 요양원 같은 곳을 갈 때 떡과 과일을 사가지고 가기도 합니다. 정기연주회는 1년에 한 번하는데 올해는 66(PM 6:30)에 인천문화재단에서 다문화가정을 초청할 계획입니다. 장소는 인천아트센터인데 저희 단독으로 1시간 40분간 하게 돼요.

 

앞으로 희망이라면? 


현재 인천 남구 구립오케스트라를 추진 중에 있어요. 구립 오케스트라가 된다면 남구청에서 예산을 받아 운영되기 때문에 안정적으로 활동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해요. 현재 저희가 연습하는 곳이 부평아트센터인데 장소가 좋다 보니까 경쟁이 치열해요. 신청을 했다가 탈락하면 연습을 못하는 거죠. 그래서 지난 해 안정적인 연습을 위해 연습실을 구해보자고 장소를 물색했는데 시끄럽다고 임대를 안 해주더라고요. 부평아트센터에서 2년 정도 연습을 하고 있는데 늘 장소가 걱정스럽죠. 다행히 남구청에서도 아주 적극적으로 검토하겠다고 하고 호응도가 좋아서 잘 될 거라고 기대하고 있어요.

 

또 다른 꿈도 있어요. 저희 단원들 나이가 20대부터 40대까진데 현재 40대 후반이 가장 많아요. 그래서 풀립스 안에 적은 인원으로 실버앙상블을 하나 만들고 싶어요. 벌써 11년이 됐으니까 이제는 젊은 단원들에게 물려주고 머리가 희끗한 할머니들이 실버앙상블을 만들어서 60살이 되든 70살이 되든 연주를 한다, 생각만해도 멋지잖아요. 저희 단원들은 모두 음악을 오래했기 때문에 실력은 충분히 갖춰져 있어요. 물론 더 다듬어야 하겠지만, 올해 서울 세종문화회관에서는 연주해 봤으니까 앞으로 예술의 전당이라든지 큰 무대에서 연주를 해보는 게 희망입니다.    

 

활동범위를 넓힐 계획은 없는지 ...


과거에 부산에 가서 연주를 한 적이 있어요. 이제는 인원이 충분하고 실력도 되니까 기회가 주어지면 단독으로 어디든지 가서 연주를 하고 싶어요. 저희들이 2017년에 이태리 피렌체에서 열리는 국제음악제에 갑니다. 거기서 한 시간 연주를 하게 돼요. 현재 우리 단원들이 거기 가서 마스터 클래스를 받기 위해 경비를 모으고 있어요. 앞으로 중국이라든지 해외로도 눈을 돌려서 활동범위도 넓혀가고 싶어요.


MeCONOMY Magazine May 2015




HOT클릭 TOP7


배너






배너

사회

더보기
제3회 물망초人 수상자로 도쿄대 오가와 하루히사 명예교수 선정
국군포로와 납북자, 탈북자 등 역사의 조난자들을 위해 행동하는 양심 '사단법인 물망초'가 도쿄대 오가와 하루히사 명예교수(84세)를 제3회 물망초人 수상자로 선정했다. 오가와 하루히사 교수는 일본에서 ‘북한인권운동의 시조’로 불린다. 1994년에 ‘북조선 귀국자의 생명과 인권을 지키는 모임(北朝鮮帰国者の生命と人権を守る会)’을 창설해 대표를 역임한 이후 2008년에는 정치범수용소 폐지를 주장하는 No Fence(북조선 강제수용소를 없앨 행동 모임, 北朝鮮の強制収容所をなくすアクションの会)를 창설해 지금도 대표를 맡고 있는 현역이다. 마르크스레닌주의에 매료돼 재일 한국인 북송을 지지하던 학생이었던 그는 1993년 8월 일본 도쿄의 한 식당에서 열린 북조선 귀국자 모임에 참가한 것을 계기로, 북한인권 문제 해결을 위해 1994년 북조선 귀국자의 생명과 인권을 지키는 모임을 창설했다. 이후 활동의 초점을 전반적인 북한 인권문제로 옮겨 강제수용소 철폐에 전력을 기울이며, 강제수용소의 실상을 고발하는 탈북자 수기 읽기 운동을 벌였다. 결국 ‘북조선 귀국자의 생명과 인권을 지키는 모임에 이어 ’No Fence’라고 하는 북조선 강제수용소를 없앨 행동 모임을 만들어 80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