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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


기독교와의 만남, 새로운 열림

 


한국 정신문화를 찾아서(35) 기독교와의 만남, 새로운 열림


 

한국인은 환인, 환웅, 단군의 자손이라고 해서 천손이라고도 한다. 삼국유사의 단군 기록을 보면 우리 조상들은 곰과 호랑이의 토템 신화를 가지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이것은 고조선과 고구려 지역 유적 발굴에서도 드러나고 있다.

 

단군은 환웅 신과 인간의 결혼에 의해서 탄생해서 고조선을 통치하는 세속의 왕이 된다. 신의 아들이 인간 세상의 왕이 되면 종교화되지는 못한다. 고조선은 ‘널리 인간을 이롭게 하라’는 홍익정신이라는 보편적 가치를 가지고 있었던 것은 분명한 것 같다. 그러나 홍익인간 정신을 정치와 사회, 개인 영역에까지 확장하고 체계화한 사상가는 없었던 것 같다.

 

아마도 고조선 시기에 그런 종교사상가가 있었는지 모르나, 독자적인 문자 문명을 가지지 못했기 때문에 종교와 사상, 학문으로 발전시키지 못했을 것이다. 문자는 필요에 의해 생기고 그런 문자를 기반한 문명도 번듯한 생산력, 활발한 경제 및 무역 활동, 적정한 규모 이상의 인구 포용, 대도시의 형성, 이것들을 종합적으로 관리하는 관료 체제 등이 전제되지 않으면 성립될 수 없다.

 

삼국시대에 들어와 국가 체제를 정비하고 강화하기 위해 문자의 필요성을 절감하고 삼국은 한자를 도입했다. 이 한자에 달려 유교와 불교와 도교의 경전이 들어왔다. 이렇게 유교와 불교와 도교 혹은 선교가 전해져 왔고, 여기에 기층 백성들 사이에 널리 신봉된 무속 신앙이 존재하고 있었다.

 

조선인이 먼저 찾은 기독교

 

기독교의 중국 전래는 조선보다 훨씬 이른 시기부터 있었다. 13세기 원나라 시기에 한동안 가톨릭이 성행한 적이 있었고, 중간에 공백이 있다가 16세기 후반에 명대에 다시 전해진다. 그 유명한 예수회 신부 마테오 리치 등 일군의 예수회 신부들이 선교사로 입국했다. 천주교는 청대로 이어진다. 일본의 천주교 전파도 조선보다 일찌감치 이뤄져 임진왜란 당시 신부를 대동하고 조선 땅에 들어오기도 했다.

 

조선의 천주교 전파는 아주 늦었지만, 조선인 스스로 신앙공동체가 만들어지고 신자들이 성직자들을 초청하여 정식으로 신앙생활을 했다. 이런 경우는 너무나 유명한 이야기이고, 본 시리즈에서 다룬 적이 있어서 생략한다.

 

개신교의 전파도 기묘하게도 조선인들이 스스로 선교사를 찾아감으로써 시작됐다. 류대영 교수가 저술한 「새로 쓴 한국기독교의 역사」에 초기 개신교 전파 상황이 잘 정리돼 있어 소개한다.

 

스코틀랜드 연합 장로교회 소속 선교사인 로스는 1874년 가을 조선인을 만나러 당시 청과 조선의 비공식 교역 장소였던 고려문을 찾아갔다. 고려문은 의주에서 북쪽으로 45킬로미터 떨어진 봉황성에 있던 책문을 가리킨다. 로스 선교사는 이곳에서 조선의 의주 상인을 만나 그에게서 한국어를 배운다. 예나 지금이나 선교사들은 현지어를 배우는 것이 선교의 첫발이다.

 

중국어와 만주어를 할 줄 안 로스는 조선 선교의 뜻을 두고 조선말을 배우게 된 것이다. 그가 만난 의주 상인도 중국어와 만주어를 잘 알고 있었을 것이고, 서로 중국어와 만주어로 소통하면서 일정 기간 집중해서 조선어를 배웠을 것이다. 헤어지면서 로스는 그 의주 상인에게 한문 성서와 전도 책자를 전해줬다. 의주 상인은 집으로 돌아가 자기 아들에게 한문 성서와 전도 책자들을 전해줬고, 아들이 친구들과 돌려 읽었다.

 

의주 상인의 아들인 백홍준과 그로부터 성서와 전도 책을 받고 읽은 친구 중의 한 명이 크게 깨우침을 얻는다. 그들은 스코틀랜드 연합 장로교회 선교사로서 로스와 함께 활동하고 있던 맥킨타이어 선교사에게 찾아와 세례를 받고 개신교 신자가 됐다. 이들이 최초의 개신교 신자들이다.

 

로스와 맥킨타이어 선교사들이 거주하고 있던 곳은 잉커우였다. 잉커우는 랴오닝성의 요하 하구에 위치한 개항 도시로서 당시 영국 영사관 등이 설치돼 있던 곳이었다. 최초의 개신교 신자들인 백홍준 등은 순전히 성서와 전도 책만을 읽고 기독교 신앙을 가지기로 결심하고, 의주에서 걸어서 6일이 걸리는 잉커우로 찾아왔다. 기적 같은 일이다. 그들 신자를 중심으로 1880년 가을 마침내 잉커우에서 최초로 조선인 신자들이 모인 신앙집회를 열었으며 1881년에는 그 숫자가 1백 명에 이르렀다.

 

로스 선교사는 1876년 두 번째로 고려문을 찾아간다. 그 시점은 조선이 사실상 개방을 시작한 일본과 수호조약을 맺은 직후였다. 조선은 그 이후 미국과 영국, 프랑스 등과 차례로 외교 관계를 맺는다. 바야흐로 은둔의 나라인 조선에 기독교의 빛이 들어갈 것을 감지한 로스는 두 번째로 고려문을 방문했다.

 

방문 목적은 이응찬이란 의주 상인을 한글 교사로 고용하여 한글 성서를 만들고자 함이었다. 언어적 재능이 있던 로스는 이응찬으로부터 한글을 배우는 한편, 이응찬과 백홍준, 서상륜 등과 함께 본격적인 성서 번역 작업에 착수했다. 이들이 번역한 한글 성서는 1882년 3월 「예수 성교 누가복음 전서」란 이름으로 3000권이 발행됐다. 1887년에는 최초의 한글 신약성경인 「예수성교전서」가 출간됐다.

 

류대영 교수는 당시 천주교에는 한글 교리서는 있었지만 한글 성서가 없었다면서 개신교의 한글 성경 발간으로 한자를 잘 모르는 일반 백성들과 여성들이 성서를 접할 수 있게 됐다고 밝혔다. 변변한 한글 서적이 없는 시대에, 한글 성경의 보급은 한글의 확산과 발전에도 크게 기여했다. 한글 성경은 그 이후에 계속 개정·증보를 거듭하는 과정에서 다듬어짐으로써 한글 표준화에 이바지했다.

 

이들 한글 성서는 압록강 일대 서간도 한인촌과 의주, 평양, 황해도, 서울 등에 전달됐으며 뿐만 아니라 부산, 원산, 제물포 등 개항장과 대구에도 전달됐다. 참으로 놀라운 일은 외국 선교사들의 직접적인 전도 활동도 없이 한글 성경을 읽고 조선 동포의 권유만으로 신앙공동체가 생겨났다는 점이다.

 

로스 선교사가 예언한 바대로, 조선인은 “본성적으로 중국인보다 더 순수하고 종교적”이어서 기독교를 잘 받아들일 거라는 확신이 실제로 이뤄지고 있었던 것이다. 유교와 불교의 교리 체계와는 다른 종교를 성경만 읽고 감동받아 받아들인 사례가 또 있을까 싶다.

 

그 정신 문화적 배경에 대해서 여러 학자의 해석이 분분하다. 필자가 보기에는 한국인은 끊임없이 요동치는 중국의 중원과 북방 유목지역과 다소 차단되고 자족경제가 가능한 공간에서 면면히 살아왔다. 그와 같은 제한된 공간에서 한국인들은 자신의 삶을 생각하는 사유 능력이 비교적 잘 발달한 점을 하나의 요인으로 지적할 수 있을 것 같다.

 

한국인은 불교와 유교와 성리학 등 외래 종교와 사상을 받아들이면 철저히 탐구하고 심화시키는 것을 보면 한국인의 사유 능력을 짐작할 수 있다. 한국인은 유교와 불교, 무속 신앙을 가지고 있음에도 고조선 이래 하느님에 대한 관념을 잃지 않고 살아온 것 같다. 하느님에 대한 익숙한 관념과 독립적인 사유 능력이 기독교를 수월하게 수용할 수 있었던 원인으로 짐작할 수 있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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