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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문화


고종 자주외교의 상징, 주미대한제국공사관

102년 만에 되찾아 복원 중, 2015년 오픈 예정

 ▲1903년 주미대한제국공사관


“역사에 기록될 가장 중요한 일을 증언하겠다. 고종 황제는 일본에 항복한 일이 결코 없다. 굴종하여 신성한 국체를 더럽힌 일도 없다. 휜 적은 있으나 끝내 굴복하지 않았다. 그는 고립무원의 군주였다. 한민족 모두에게 고한다. 황제가 보이신 불멸의 충의를 간직하라.”

1942년 워성턴에서 열린 ‘한인자유대회’ 때 미국인 헐버트의 연설문 중 일부.

조선왕조의 마지막 왕이자 대한제국 최초의 계몽군주였던 고종(황제)은 우리가 알고 있는 것처럼 아버지 흥선대원군과 아내 명성황후 사이에서 유약하고 무기력한 왕이었을까. 나라의 운명이 풍전등화 같았던 시절 비운하기만했던 인물이었을까.

고종황제(1852~1919)의 밀사이자 고종의 신뢰할 수 있었던 친구였던 헐버트는 고종 황제에 대해 “그는 매우 친절하고 자상했고 잘 웃는 편이었다. 권위적이고 강한 인상이라기보다는 목소리도 부드러웠고 쾌활한 모습이었다. 영어를 못했으나 우리에게 친절하게 대해 주었다”며 “또한 마음을 열고 많은 외국인들과 깊은 교류를 나눴다. 신문물에 대해서도 오픈마인드였으며 신설 학교를 세우는 데에도 적극적이었다. 을사늑약의 무효를 끝까지 주장했고 일제에 의해 퇴위당한 후에도 자신이 해야 할 ‘저항’을 쉬지 않았다. 카리스마를 가진 지도자는 아니었을지 몰라도 합리적인 지도자였다”고 회고했다.

반면 일제는 계속해서 고종은 우유부단하고 유약한 군주라는 이미지로 우리백성들을 호도하고자 했고 그 영향이 아직까지 남아있다.

고종을 어떻게 볼 것인가에 대한 많은 이견이 있지만 헐버트의 증언처럼 고종은 자신의 한계와 실수 중에도 끝까지 저항했던 내면의 힘과 용기가 있었던 인물이었을 것으로 보인다.


이런 고종 황제가 주권 수호 외교 중 하나로 중요하게 생각했던 것 중 하나가 ‘주미대한제국공관 매입’이었다.

1882년 미국과 수호통상조약을 맺은 고종은 청나라∙러시아∙일본의 압박에 맞서 미국과의 관계를 강화하기 위해 1889년 11월 당시로는 거금인 2만5천 달러의 내탕금(왕실자금)을 들여 이 건물을 구입했다.

국외소재문화재단 강임산 팀장은 “고종황제가 자주적인 외교와 외교적 외연을 넓히기 위해 상당한 재원과 인적 자원을 투자해 워싱턴 한복판에 일종의 전진기지를 세운 것이다. 1889년 2월 처음 외교업무를 시작했고 대한제국과 관련된 국외유적 중에 단독 건물로는 거의 유일하게 남아있는, 역사적 가치가 큰 건물이다”고 설명했다.

 ▲ 대한제국 고종황제

미국 워싱턴D.C. 소재 ‘주미대한제국공사관’은 백악관에서 1.5km 거리로 걸어서 20분 정도로 접근성이 좋다. 서울의 북촌 한옥마을처럼 19세기 초 빅토리아풍 건축물이 많은 워싱턴 로건서클 역사지구에 위치해 있는 이 건물은 1877년 건립된 지하 1층, 지상 3층짜리 빅토리아 양식의 건물이다.

1905년까지 지금의 주미한국대사관과 같은 용도로 사용됐으나 1905년 11월 을사늑약 이후 관리권이 일제에 넘어가고 한∙일강제병합을 2개월 앞둔 1910년 6월 일본 정부가 강압에 의해 단돈 5달러로 소유권을 가져갔다. 일본은 매입 직후 몇 분 만에 미국인 풀턴에게 이 건물을 10달러에 되팔았다.

이후 이 건물은 100여 년의 시간이 흐르는 동안 주인이 바뀌고 재활병동 운송사무실 등의 용도로 사용되다가 2012년 10월 드디어 정부가 매입계약을 체결, 한미수교 130주년, 빼앗긴 지 102년 만에 우리 품으로 돌아왔다.

강임산 팀장은 “당시 주미대한제국공관은 전진 외교의 상징이었다. 후에 강제 합병 되면서 빼앗긴 주권의 상징이 됐고 후에는 되찾아야할 역사적 상징으로 인식됐다. 안창호 선생님 유품뿐만 아니라 하와이 샌프란시스코 교민들 유품에도 공관 이미지로 제작한 엽서가 자주 등장한다”고 전했다.

 ▲ 2013년 4월 공사관 전경


현재 국외소재문화재재단(이사장 안휘준)이 공관을 실측∙검사∙복원∙리모델링 및 관리를 맡고 있다. 국외소재문화재재단 측은 “현재 실측 중인 이 건물은 빠르면 2015년 하반기쯤 일반인에게 오픈돼 홍보∙전시∙문화공간 등으로 사용될 예정”이라고 전했다.

고종의 의지요 희망인 동시에 절망이었던 공관. 일본에 의해 강제 매각된 지 100여 년 만에 고종의 후손들이 그것을 되찾았다.

그가 절망이 두려워 아무것도 하지 않는 것 대신 실패와 절망을 선택했기 때문에 우리는 되찾을 무엇인가를 선물 받았다. 그 선물이 워싱턴D.C. 로건서클에서 희망과 번뇌가 재해석된 모습으로 2015년쯤 우리에게 오픈될 예정이다.

이희 기자 / leehee@mbceconomy.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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