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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획취재


흙의 반란이 시작됐다(11)

 

흙에 관한 글을 연재하다보니 최근 결론 비슷한 믿음을 가지게 되었습니다. 반세기 전부터 시작된 관행농업으로 유기물 함량이 떨어지고 유효한 미생물이 소멸해 척박하게 변해가는 우리나라 농경지의 흙을 살리려면 우리 조상들처럼 산이나 들에서 나는 풀을 이용해 식물성 퇴비를 만들어 흙에 돌려줄 수밖에 없다는 것이었지요. 


비료와 농약이 없던 시절에 하던 이야기라고 치부할지 모르지만 사실 흙을 살리는 방법으로 퇴비만한 게 없습니다. 스마트팜, 인공지능 등과 같은 첨단 기술은 퇴비를 만드는 데 활용할 수 있어도 흙의 생물다양성을 이루는 미생물 의 먹이가 될 수 없으니까요. 흙이 반란을 일으키기 전에 생태농법을 실천한 우리 조상들의 지혜를 제2의 퇴비증산 운동으로 승화시켜보면 어떨까 싶었습니다. 

 


서툰 낫질로 산 풀을 베어 퇴비장을 만들던 어린 시절 



철없던 시절 저 역시 산에 올라가 퇴비용 풀을 베었던 기억이 있습니다. 서툰 낫질이어서 벤 양이 그리 많지 않았지만 그래도 내 몸에 맞지도 않은 어른 지게에 지고 대문 밖 채전(菜田)가장자리 퇴비장에 부지런히 부려놓곤 했습니다. 집집마다 그랬고, 마을끼리 퇴비 경쟁을 했었으니까요. 작은 힘이나마 저도 거든 것이겠지요. 


당시 어렸던 저는 먼 동네 민둥산에 올라 아버지 대신 나무심기에 동원되어 소나무를 심었던 기억이 있습니다. 그때 여러 사람들이 심었던 그 소나무들이 아름드리 숲으로 바뀌어 새들이 노래하고 두꺼운 낙엽 층에 저장된 물이 작은 시냇물이 되어 흐르는 것을 보면 기분이 좋아집니다.  


식량증산을 위해 퇴비증산 운동을 펼쳤던 70년대 초, 그 시절 사진을 보게 되면 입가에 절로 웃음이 나옵니다. 하지만 식량자급을 위한 퇴비증산에 나선 당시 어르신들이나 저의 형님 또래 분들이 참으로 대단하고 존경스럽다는 생각을 하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인터넷에 들어가 퇴비증산운동을 쳤더니 마침 당시 상황을 재미있게 묘사한 문제열 국립한경대학교 연구교수의 전국매일신문 칼럼이 있어서 저자의 양해를 받지 않았지만 제 또래 연령층은 누구나 공감할 것 같아서 여기에 전재(轉載)해 드리겠습니다. 
 

새벽4시부터 울리는 퇴비 독려 스피커에 잠 못 이루고 「개학이다. 방학숙제도 문제인데 개학날에는 등에 한짐 가득 풀을 메고 가야 한다. 이것도 숙제다. 모든 농촌학교에서는 모아진 풀을 쌓아 퇴비를 만들어 이듬해 자투리땅에 섞어 넣고 콩과 옥수수 등을 심었다. 


이런 퇴비증산사업은 비료가 부족했던 1970년대 쌀 생산력 증대를 위해 대대적으로 추진했다. 농촌마을 곳곳에는 ‘식량증산’과 ‘퇴비증산’이라는 표어가 늘 나란히 붙어있었다. ‘퇴비증산으로 쌀 3000만석 돌파하자. 집집마다 퇴비사 너도나도 풀베기’구호와 함께 새마을 운동과 연계한 농촌역점시책이었다. 

 

퇴비장은 가로세로 4∼6미터 정도로 네모나게 만들고 물이 새지 않게 바닥은 콘크리트를 치고, 둘레는 낮게 벽돌 로 쌓았다. 도에서는 군별, 군에서는 면별, 면사무소에서 는 부락(마을)별, 가구별 농경지면적에 따라 퇴비생산목 표를 주었다. 퇴비장 전면에는 생산자, 퇴비장 크기, 목표 량을 기록한 푯말을 꽂아 놓는다.


풀이 무성한 7월부터 9월까지 계속됐다. 이른 새벽 4시만 되면 면서기가 나와 퇴비를 하라고 ‘새벽종이 울렸네. 새아 침이 밝았네. 너도나도 일어나 새마을을 가꾸세’ 라며 새 마을 노래를 마을 스피커가 터지도록 들려줘 도저히 잠을 잘 수가 없었다.


면서기가 엄청 미웠지만 도저히 반항할 수가 없었다. 면장이나 군수가 풀베기 순시를 나온다면 면서기는 더 난리를 치며 마을을 한바탕 뒤집어 놓는다. 아이 어른 할 것 없이 낫 들고 이슬속의 들과 산기슭, 하천 등을 헤집고 다녔다. 언덕배기 쑥대며 잡풀들, 심지어는 퇴비 부피를 늘리기 위해 한강변 갈대, 싸리나무며 잡목들까지 모조리 베어 지게로 지고, 리어카로 실어 퇴비장에 넣고 높게 쌓아 작은 동산을 만들었다. 


어린 아이들은 낫질이 서툴러 손가락을 베이고, 돌멩이에 부딪친 낫이 튀면서 정강이까지 다치어 피를 흘리는 일도 다반사였다. 한편 풀이 새까맣게 잘 썩어야 거름기가 좋다고 외양간 소똥과 깐 볏짚, 부엌 아궁이 속재, 마당 한 편에 모아둔 오줌통의 오줌까지 퇴비위에 섞어 주었다.

 

가을의 문턱에 들어선 9월 말경 군청에서 퇴비심사를 나온다고 하면 온 마을이 비상이다. 군서기와 면서기가 줄자를 가지고 나와 가로 세로 높이를 재고 퇴비량을 산출한다. 이때는 마을 이장과 새마을지도자가 퇴비 평가에 동석한다. 


‘개인퇴비증산왕’, ‘우수마을상’까지 타이틀이 붙은 터라 최고를 차지하기 위해 온갖 수단을 다 동원한다. 우수마을에는 귀한 화학비료인 금비(金肥)를 상품으로 줬다. 친환경비료를 많이 만든 사람에게 화학비료를 상으로 준다는 게 우습지만 그런 시대였다. 퇴비 목표를 이루지 못하는 마을엔 화학비료 배정을 줄였다.


우선 1등을 하려면 퇴비의 부피가 중요하다. 부피를 늘리기 위해 퇴비장 가운데를 통나무로 틀을 짜서 공간을 만들고 그 위에 풀로 덮는다. 이때 심사 나온 군서기와 면서기가 퇴비더미 위에 못 올라가도록 고약한 냄새가 나는 돼지분뇨와 인분, 오줌 등을 촉촉이 발라 놓는다.

 

그런데 한 집에서 사고가 났다. 면서기가 여름내 퇴비 독려를 다녔는데 이런 핑계, 저런 핑계로 퇴비를 하지 않았는데 심사 때 보니 굉장히 높은 퇴비가 쌓여 있었다. 


면서기가 기분이 좋아 군서기가 보는 앞에서 퇴비더미 위를 올라가는 순간 땅속으로 사라지는 코미디 아닌 코미디가 벌어졌다. 퇴비더미 가운데를 대충 솔나무 가지로 엉성하게 채워놓고 그 위에 가벼운 풀을 살짝 덮어 놓은 것이었다.

 

퇴비더미 심사를 나오면 가로, 세로, 높이만 재고 갈 줄 알았던 것이다. 마을이장과 새마을 지도자는 군서기와 면서기에게 사과를 하고 집주인에게 면박을 주고 난리가 났다. 퇴비증산사업은 1970년대 말 초가지붕을 슬레이트와 기 와지붕으로 개량하면서 역사 속으로 사라졌다.

 

지붕을 만들던 볏짚이 남게 되자 이를 땅에 뿌리게 됐는데, 자연스럽게 풀도 필요가 없게 된 것이다. 거름과 퇴비는 땅들의 건강한 식사였고 자연을 순환시키는 물질이었다. 삶의 이치도 그렇지 않을까 생각해본다. 누군가는 더럽고 어두운 곳에서 건강한 사회를 만들기 위해 거름과 퇴비의 역할을 하지 않을까. 그분들에게 경의를 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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