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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획


[제5편] “하루 사과 하나면 의사에게서 멀어질 수 있다”

윤영무 기자가 간다
『생명을 살리는 흙의 건강 처방전』

어렸을 때 음복(飮福)으로 먹은 사과의 맛


입맛이야 사람에 따라 다르지만, 요즘 나는 사과를 먹다가 “왜 이렇게 싱겁지?” 하면서 예전의 사과 맛을 생각하며 고개를 갸우뚱거릴 때가 한두 번이 아니다. 예전이라고 하면 내가 어렸을 때다. 내가 살던 시골 동네에는 사과 과수원이 없었기 때문에, 제사가 있는 날이나 사과 구경을 했다. 

 

 

달빛이 하얗게 내리는 한밤중에 아버지의 손을 잡고 동네 앞길을 한참 지나 큰아버지 집으로 가서 제사를 지냈던 나는 제사상에 올라온 빨간 사과에 제사 내내 눈을 떼지 못했다. 하지만 내 마음대로 집어 들었다가는 버르장머리 놈 소리를 듣게 될까 봐, 음복(飮福)할 때를 기다렸다가, 어른들이 챙겨주는 서너 조각의 사과를 맛보는 게 고작이었다. 1년에 제삿날 몇 번, 명절에 먹어보는 사과가 전부였지만 그 맛은 인이 배어 지금까지 내가 먹었을 것으로 추산되는 만여 개가 넘는 현대식 사과 맛을 평가하는 기준이 되었었고, 시답지 않은 사과에 넋두리하는 근거가 되었다.

 

한 달 키워 도계(屠鷄), 양념 맛으로 먹는 치킨에 대하여


그 당시 아버지는 집 뒤뜰에 3백여 평의 닭 우리를 짓고, 털이 하얀 레그혼 수백 마리를 반 방목으로 키웠다. 방앗간에서 가져온 쌀겨와 잡초를 섞어 먹였으며, 닭이 좋아하는 미꾸라지와 개구리 등의 육식성 먹이를 잡아다 주었다. 그런데 어느 날 건강하던 닭들 가운데 몇 마리가 햇볕이 드는 우리 구석에서 눈꺼풀을 내리고 조는 듯이 꼼짝 않고 있었다.

 

어머니는 그걸 보자마자 마을에 닭 병이 돌고 있다며 멀쩡한 다른 닭들이 전염되기 전에 중간 상인에게 넘겨야 한다고 아버지를 종용(慫慂)함으로써, 우리 닭들은 길지 않은 생을 마감해야만 했다. 그들에게 먹이를 주는 등 일부분 키워준 나로선, 중간 상인의 자전거 짐칸 닭장에 빼꼭히 갇혀 실려 가면서 애절하게 나를 바라보는 녀석들의 눈동자에 마음이 아팠었다.

 

그때 누군가에게 닭은 길면, 20년을 산다는 소리를 들은 기억이 있다. 그래서 한 달도 못 살고 1초에 한 마리씩 인간에게 자신의 달걀과 살을 바치고 죽어가고 있다는 요즘 닭을 생각하면 불쌍하기도 하고, 치킨을 앞에 두고도 입맛을 잃기도 했다. 하기야, 요즘 치킨을 누가 닭 맛으로 먹는가, 양념 맛으로 먹는 게 아니던가.


양계장 터에서 자연 재배로 키운 복숭아

 

아버지는 닭이 사라진 양계장 터에 복숭아 등의 유실수 50여 그루를 사다가 심으셨다. 그로부터 몇 년 뒤인지 모르겠지만, 어느 해, 이런저런 과일이 열려 익었는데 그중에서도 복숭아가 단연 으뜸이었다. 과육을 씹으면 입안에서 아삭거리며 녹았다. 단맛이 강하고, 향이 일품이었다. 어느덧 60여 년이 화살처럼 흘렀지만, 그때의 식감을 어떻게 잊겠는가. 어쩌다가 복숭아를 안고 있는 동자(童子)의 그림을 보면, “저게 내가 먹던 바로 무릉도원(武陵桃源)의 복숭아”라고 소리를 지르기도 한다.

 

가축과 나무 기르기에 취미와 소질이 남다르셨던 아버지는 아쉽게도 사과나무를 심지 않으셨다. 경북 대구, 황해도 황주 등지를 주산지로 꼽던 때였으니까 우리 고향과는 기후조건이 맞지 않는다고 판단하셨던 것 같다. 대신 다른 나무에 비료를 주거나 농약을 치지 않고, 자연농법으로 키웠다. 당시 전국적으로 퇴비증산 운동이 벌어지고 있었으므로 우리집도 산과 들에서 베어 온 풀을 차곡차곡 쌓아 발효 퇴비를 만들었다.

 

그것을 논밭에 뿌렸으니, 과수원에도 그런 발효퇴비가 시비(施肥)되었을 것으로 추측된다. 대문 밖 채마(菜麻) 밭의 가장자리가 퇴비 자리였다. 기온이 떨어지는 늦가을과 겨울에 옆으로 지나다니면서 보면, 발효열로 김이 모락모락 오르는 게 보였고, 술 익을 때 나는 향긋한 냄새를 풍겼다.

 

복숭아는 어린 내 조막손보다 커서 두 손으로 감싸 안아야 할 부피였는데, 신문지 봉지에 싸여 나무마다 주렁주렁 달려 있었다. 가족과 친지, 그리고 동네 사람을 불러 모은 아버지는 감나무 아래 평상(平床)에서 복숭아 시음회를 열었다. 참석한 분들은 다들 맛이 좋다면서 탄복했다. 복숭아 만이 아니었다. 같은 흙에서 키운 우리 집 채소는 모두 약성(藥性)이 좋았던지 백김치와 동치미를 담으면 맛이 좋기로 동네에서 소문이 자자했다.

 

그런 맛을 잊지 않은 나는 “젠장, 사과 주스가 싱겁더니, 이번엔 오이지야, 맛이 왜 이리 싱겁지? 오이 맛이 전혀 안나”라면서 툴툴거린다. 그러면 아내는 “요즘 과일이나 채소가 다 그러려니 하고 까다롭게 굴지 마시죠”하면서 내게 염장을 지르는데 말싸움하기 싫은 나는 방으로 들어와 갈릴레오처럼 “그래도 지구는 돈다”고 중얼댄다.


“음~ 내가 어렸을 때 먹던 채소와 과일 맛보기는 어렵겠어. 이러다가 정말 먹을 만한 게 없겠어.”

 

사과 과수원에 방치된 우듬지 사과 서리하기
 

20여 년 전쯤 경북의 사과 산지로 취재하러 갔다가 우연히 산자락과 산 중턱 사이에 있는 과수원을 지나게 되었는데, 내 눈을 스쳐 가는 밑동이 굵은 사과나무 꼭대기마다 탐스러운 붉은 사과가 햇빛에 반사되어 반짝이고 있었다. 70여 그루쯤 되는 사과나무의 우듬지마다 10여 개가 넘는 사과들이 붙어 있었던 거였다.


“어라? 새 먹이로 남겨 둔 사과치고는 너무 많지 않나?” 나는 마침 비닐 농막에서 일하던 60대 초로의 주인을 발견하고 연유를 물었다. 그가 말했다.

 

“오래된 사과나무라, 자연히 높은 나뭇가지 꼭대기에 사과가 열리는데 거기까지 올라가 사과를 딸 사람이 없어서 남겨 둔 것입니다. 안 따는 게 아니라 못 따는 거지요. 일할 분이 할머니와 노인 뿐이니 사다리를 놓고 올라가서 따라고 할 수 없잖습니까?” 당시 나는 젊었으므로 “뭐 그다지 높아 보이지도 않는다”고 너스레를 떨었고, “가지 높이 붙어있는 사과와 귤을 따 본 적이 있으니 못 따고 남겨 둔 사과를 전부 내게 파시라”고 했다.

 

솔직히 말하겠다. 사과 따주기 봉사를 한 번 했었고, 제주도에서도 귤을 따 본 경험이 있다. 로망처럼 들리겠지만 직접 해보시면 무지하게 힘이 든다는 걸 실감할 것이다. 특히 비료와 농약을 사용하지 않아 제멋대로 자란 수십 년 된 귤나무는 이상한 특징이 있다. 하필 가운데 가지 끝에 좋은 귤을 집중적으로 매달린다. 발뒤꿈치를 들고 손을 뻗어 귤을 따고 나면, 다리가 후들거린다. 포도를 못 따고 저놈의 포도는 셔서 못 먹을 거라고, 투덜거리는 이솝의 여우를 생각하시면 된다.

 

결국, 내 제안은 받아들여졌다. 뜸을 들이며 생각하던 주인은 50만 원에 낙찰을 봤다. 나는 “사과를 따려면 혼자서는 안된다. 날짜를 잡아 다른 사람들과 함께 올 터이니, 그때 내가 전화하면 바로 나에게 전화를 다시 주시라”는 단서를 달았다. 그 뜻을 알아챈 주인이 마소를 지으면 그러겠다며 약속했다.

 

훔친 사과라서 맛있는 것일까?

 

서울로 돌아온 나는 “사과 서리할 수 있는 과수원 발견. 날짜를 잡아 같이 갈 사람 모집” 사발통문을 지인과 친구들에게 돌려 가칭 ‘사과 서리 갱단’을 모집했다. 사흘 만에 부부를 포함한 15명이 가겠다는 의사를 밝혀왔다. 그들과 약속한 날, 나는 인터넷에서 산 알루미늄 사다리를 일행의 차에 싣고, 그와 둘이 미리 현장에 와서 우리 뒤를 이어 도착하는 일행들에게 과수원 아래 길가에 주차하도록 유도하고, 훔친 사과를 담을 자루와 그릇 등을 챙기도록 한 다음, 좌우를 살피는 시늉을 하면서 예의 과수원 둔덕으로 안내했다. 선글라스를 쓴 사람, 모자를 푹 눌러 얼굴을 가린 사람, 여차하면 튀겠다는 자세를 취하는 사람 등 일행은 긴장감이 얼굴에 가득했다.

 

내가 말했다. “걱정하지 마시라. 주인이 나타나면 아는 사람이 내게 전화해 주기로 했으니까. 안심하시고, 저기 사과나무 꼭대기에 붙은 사과를 여러분 재주껏 따서 자루에 담아 가면 됩니다.”

 

그런데 이상했다. 내 말을 듣고도 거동할 기미가 안 보인다.  ‘걸리면 큰일’이라 겁을 먹은 사람도 있었다. 그래서 내가 사과나무에 올라가 직접 사과를 따는 시범을 보이자, 남자들 보다 여자들이 먼저 각자 사과나무에 달려들어 올라갔으며, 남자들은 슬금슬금 뒤따라 갔다.

 

그걸 본 나는 새삼 여성의 생활력이나 생존력이 왜 강한지를 알 듯했다. 하나라도 더 따려는 그들이 자루 하나를 채우고, 두 번째 자루, 세 번째 자루를 채우려고 할 때쯤, 나는 전화 소리가 들리지 않은 만큼 거리를 두고, 과수원 주인에게 전화했다.

 

“지금 과수원에서 사과를 따고 있습니다. 제게 전화를 부탁합니다.”

 

주인이 내 말대로 잠시 후 전화를 걸었고, 나는 “뭐라고? 주인이 온다고?” 하면서 전화를 끊고 손나팔로 그들에게 황급히 외쳤다.

 

 “방금, 과수원 주인이 떴다. 빨리 도망쳐라!”

 

한참 재미있는데 이게 무슨 소리? 깜짝 놀란 그들은 서로 얼굴을 쳐다보다가 여자들은 사과 자루를 머리에 이었고, 남자들은 양어깨에 사과 자루를 들쳐 매고 자동차가 있는 곳으로 내달렸다. 트렁크가 쿵 하고 닫히는 소리가 메아리쳤고, 자동차 급발진 소리와 함께 뒷바퀴에서 일어나는 뿌연 흙먼지 속으로 바람처럼 사라졌다. 그들이 떠난 곳에 정적이 흘렀을 때 과수원 주인이 나타나서 웃었고, 아직도 따지 못한 우듬지 사과들이 나를 보고 재미있는 표정을 지었다. 2시간쯤 지났을까, 달아난 일행 중 한 명이 전화에 대고 사과를 베어 물더니 킬킬대며 물었다.

 

“친구야, 내 생전 이렇게 맛있는 사과는 처음 본다. 맛이 기가 막히네, 그런데 사과 맛이 왜 이렇게 좋지?”

 

그 말에 듣는 순간, 관능적인 전라(全裸)의 여배우가 얼굴과 목을 남기고 빨간 사과 무더기 속에서 누워 있던 영화 제목과 포스터가 생각났다.

 

“바보야, 그건 훔친 사과니까 맛있는 거야. 올 추석 선물은 그걸로 땡이다.”

 

우둠지에 달린 사과 서리 이벤트를 벌여서 흥행에 성공한 나는 “훔친 사과는 맛있다”라는 카피를 써서, 사과 과수원의 일손을 덜어드리자는 속편(續編)을 준비한 뒤, 내가 아는 몇 분 사장님에게 사과 서리를 건의했다. 모두 재미있는 아이디어라고 관심을 보였고, 한 사장님은 비서를 불러 당장 준비하라고 지시를 내렸다. 그러나 실행은 말처럼 쉽지 않았다. 이벤트도 사업이라 예산이 잡혀야 하고, 준비할 서류에 젬병인 나는 추동력을 잃고, 풍선 바람 빠지듯 되고 말았다.

 

그로부터 몇 년이 더 흘렀을까. 우연히 텔레비전에서 비료, 퇴비, 농약을 쓰지 않고, 오로지 잡초만을 이용해 ‘기적의 사과’를 만든 일본의 한 농부 이야기를 뉴스에서 보게 되었다.

 

 

죽기 살기로 ‘기적의 사과’를 만든 일본 농부의 농업역사 바꿔놓기


다음은 2009년 8월, 조선일보 일본 특파원이었던 선우정 기자가 기적의 사과를 만든 주인공, 기무라 아키노리(木村秋則, 당시 60살) 씨를 만나 인터뷰 한 기사 중 필자가 발췌하고 가필한 것이다.


일본의 북단 이와키산(岩木山) 자락. 눈에 보이는 천지가 사과나무로 덮여 있다. 이곳을 중심으로 아오모리 현이 만들어 내는 사과는 일본 전체 생산량의 절반. 도요타시가 일본 제조업의 성지라면 이와키 산은 농업의 성지다. 이 산자락에서 기무라 씨는 37년째 사과를 키우고 있다. 환갑이지만 나이보다 늙어 뵈는 것은 자연 재배로 사과 농사를 짓다가 먹고 살기 힘들어지자 카바레 호객꾼으로 알바를 하다가 야쿠자의 주먹에 맞아 이가 빠진 탓도 있다. 그런 치아로는 자기가 재배한 사과조차 제대로 베어 물지 못할 듯 했다.


그가 쓴 책 〈사과가 가르쳐 준 것〉, 〈모든 것은 우주의 재배〉는 일본 전국 서점가의 베스트셀러다. 그리고 작년부터 베스트셀러가 된 〈기적의 사과〉라는 공저는 지난달 한국에서도 번역·출판됐다. 기무라 씨의 밭을 찾으려고 산자락에서 1시간을 헤맸다. 이런 곳에 왜 6천 명이 찾는 것일까. 천지가 사과밭이지만 생태계가 회복된 '자연'이 이곳에만 있기 때문일 것이다.

1978년부터 31년 동안 농약 한 방울, 비료 한 주먹도 뿌리지 않은 기적의 땅, 8,800㎡(2700평). 같이 농사를 짓는 아내가 농약 알레르기가 심해서 시작한 일이었다. 기무라 씨의 ‘기적의 사과’가 세상에 알려지게 된 것은 도쿄에 있는 시로카네다이(白金臺) 레스토랑에 의해서였다.


기무라 씨의 사과만을 쓰고 있던 이 식당, 이이구치 히사카즈(井口久和) 주방장은 사과를 쓰고 남은 것을 한쪽에 두었다가 깜박 잊고 있었다가 몇 년이 흘러 썩지 않고 우연히 사과가 쪼글쪼글한 상태로 그대로 남아있는 것을 발견했다. 이 사실이 매스컴에 알려짐으로써 기무라 씨의 사과는 전국적으로 유명해졌고, 기무라 씨는 전 세계를 돌면서 자신의 사과 재배를 강연한다.

 

〈기적의 사과〉의 공동 저자인 이시카와 다쿠지(石川拓治)는 기무라 이키노리 씨의 농업 경제사적 역할을 이렇게 정의했다.

 

“1911년 꽃썩음병과 갈색무늬병이 창궐했을 때 농약이 없었다면 아오모리 사과는 사라졌을 것이다. 그해가 일본의 사과 역사에서 사상 처음 농약이 쓰인 해였다. 그 후 일본 사과의 비약적 성장은 농약이란 '절대 기반' 위에서 가능했다. 기무라는 아오모리 사과를 100년 전 환경으로 돌려놓은 것이다.”

 

자살하려고 산에 올랐다가 도토리나무를 보고 깨달은 생태계의 원리


“무농약·무비료 재배를 시작해 열매를 맺을 때까지 얼마나 걸렸나요?”

 

“10년쯤 걸리는 것 같습니다.”


“놀라운 인내력이군요.”

 

“자연의 사이클은 아주 길지요. 24시간이란 조급한 인간이 만든 것에 불과하니까. 밭이 달라지는 한 장면, 한 장면이 긴 드라마이지요. 흙 위 세상만 바라보면서, 지표만 바라보면서 6년을 지독하게 고생했지요.”

 

〈기적의 사과〉에서 그는, 농약을 끊은 직후의 과수원 풍경을 이렇게 말했다.

 

“벌레들이 어린 새잎이 붙은 가지 끝까지 바글바글 몰려들어서는 만원 전철처럼 밀치락달치락 야단법석을 떨어요. 벌레 때문에 사과 가지가 휠 정도”였죠. 나무 한 그루에서 하루 동안 잡은 벌레는 비닐봉지 세 개 분량. 하루도 거르지 않고 아침부터 밤까지 잡았죠.“

 

“밭이 어떻게 변하던가요?”

 

“반점 낙엽병으로 첫해 8월 말에 잎이 95% 떨어졌지요. 잎이 떨어지자 가을에 꽃이 피는 겁니다. 미친 꽃이지요. 이듬해엔 8,800㎡의 밭에서 꽃 한 송이 피지 않았어요. 이듬해부터 수확량 0. 건강보험료, 아이들 교육비를 못 냈지요. 지우개를 3개로 잘라 아이들에게 나눠줄 정도였으니까요. 카바레 아르바이트로 이가 부러진 것도 그때의 생활고 때문이었지요.  4∼5년 지나니까 친구가 그래요. '가족 생각 좀 하라'고. 하지만 마음속에선 반대로 얘기해요. '가족이 중요하니까 끝까지 해'라고. 아내가 농약에 약하니까 아이도 약하겠지요. 아이에게 줄 수 없는 사과를 만들어서 무슨 의미가 있을까요.”


“책을 보니, 죽을 생각도 하셨더군요.”

 

“밧줄 세 가닥을 엮어서 산으로 갔어요. 나무에 목을 매려고요. 탈출구가 없을 때였습니다. 모든 수단 다 써도 나무는 죽어가고.  그런데 죽는다고 생각하고 마음을 비우니까 전에 안 보이던 산(山)이 보였어요. 올가미에 목을 넣으려고 하는데 바로 제 눈앞에 도토리나무가 보였지요. 비료도 안 주고, 농약을 치지 않는데 어떻게 저렇게 해마다 열매를 맺을 수 있을까? 산에도 벌레가 있고, 같은 햇살을 받는데 내 과수밭과 다른 게 있다면, 그건 흙이 아닐까? 그런 생각이 번쩍 들었지요. 저는 올가미에서 목을 빼고, 도토리나무 주변을 살폈지요. 풀이 우거졌고, 흙을 파보니 포근하고 향기로웠습니다. 그래 바로 이거다. 흙이야. 흙을 바꿔야 만 해, 왜 여태껏 이걸 몰랐을까? 마지막으로 흙을 바꿔야겠다, 그래도 안 되면 다시 죽자고 각오하고 산에서 내려왔지요.”


흙을 바꾸면, 자연 생태계 공존, 숲속 같은 사과나무밭

 

사과밭은 숲처럼 상쾌했다. 농약 냄새도 비료 냄새도 없었다. 날아든 한 마리 곤충은 하늘소. 기무라 씨는 구멍이 숭숭 뚫린 사과 잎을 따 보이며 물었다.

 

“무슨 구멍이라고 생각하세요?"

 

“벌레 먹은 흔적 아닌가요?"

 

“이 밭에는 벌레가 없어요. 6년 전부터 사라졌어요. 농약이 없으니까 벌레도 없는 거예요. 농약을 뿌리니까 벌레가 있지요. 구멍은 사과나무가 검은별무늬병에 걸린 환부(患部)를 떨어뜨린 거예요. 자기 치료를 한 것이지요. 처음엔 못 믿겠다던 스기야마 선생(杉山修一·히로사키대 농학생명과학부 교수)이 직접 균을 이식해 확인했어요."


“나무에 저항력이 생겼군요.”

 

“병은 늘 있어요. 차이는 농약을 뿌린 나무는 또 농약에 의존하지만, 안 뿌린 나무는 손상을 크게 입지 않고 스스로 치료하는 겁니다. 나무의 균들끼리 '식물연쇄(植物連鎖·먹는 생물과 먹히는 생물의 연쇄적 관계)'를 일으키는 것 같아요. 생태계가 복원됐기 때문이 아닌가 합니다. 저의 밭은 산을 재현해 놓은 것입니다."


"산에는 농약을 살포하지 않지요. 잡초를 자르지도 않아요. 그래도 벌레는 적고 나무는 건강해요. 밭에서도 잡초를 자르지 않았어요. 그리고 주위에 콩을 심었어요. 그러면 흙이 달라져요. 콩은 스스로 뿌리혹박테리아를 만들어 질소를 저장해요. 이것이 공기와 흙의 질소 순환에 아주 중요한 역할을 하지요. 흙이 달라지면 풀도 달라지더군요. 지금까지 7번 달라지는 걸 봤어요. 처음엔 잎이 좁은 볏과(科) 식물이 많았고, 점점 잎이 넓은 잡초가 들어와 공존하게 됐지요.”


“밭의 생태를 관찰하시는군요.”

 

“그렇죠. 현대 농업은 관찰하는 능력을 잃었어요. 흙 위만 생각하지요. '수확으로 땅에서 이만큼 양분이 사라졌으니 이만큼 비료로 보충해야지' 하는 수학적 계산만 해요. 양분을 주면 박테리아는 활동을 쉽니다. 주지 않아야 활동하지요. 그들이 활동해야 흙이 만들어집니다. 인간의 장(臟)도 마찬가지예요. 나무만 보지 말고 흙을 봐야지요."


“풀이 흙을 어떻게 바꾸나요?”

 

“작년 5월에 독일 유기농 농가의 초청을 받았어요. 흙을 좀 파보자고 했지요. 지표 10㎝ 밑에서 이미 온도가 8도나 내려갔어요. 차가웠어요. '여러분이 수확하는 감자가 그래서 작다' 고 했어요(유기농이기 때문에 감자가 작은 것이 아니라는 뜻). 산은 흙의 온도 변화가 크지 않아요. 지금 30도가 넘는 땡볕이지만, 우리 밭을 파보면 22∼24도를 유지하고 있습니다. 그냥 따뜻한 상태가 계속 유지되지요. 미생물이 살아 있기 때문입니다."

 

"그렇다고 무조건 자연 그대로 놔두면 되는 건 아니지요. 잡초를 놓아 두니 설익은 사과가 열리더군요. 그래서 이듬해 9월에 한 번만 밭 절반의 풀을 잘랐지요. 그랬더니 자른 곳에서 열린 사과만 익어요. 사과나무에 가을이 왔다는 사실을 인간이 알려줄 필요가 있었던 것이죠. 흙 속 온도가 변하지 않으니 사과나무가 계절의 변화를 몰랐던 것이 아닐까 합니다. 맛있는 사과를 얻으려면 역시 인간의 손길이 필요했던 것이지요.”

 

“수확량은요?”


“1987년 처음으로 꽃 7개를 피웠죠. 5개는 벌레가 먹고, 인간의 몫으로 열매 2개를 얻었습니다. 작년엔 이 밭에서만 1,000상자(기무라 씨의 밭은 나뉘어 있다) 수확했어요. 농약을 사용하는 밭의 70% 정도 수확했습니다. 2년, 3년 뒤엔 같아질 듯해요. 탁구공만 하던 크기도 지금은 차이가 없어요. 커지면 상자에 들어가는 사과가 적어지니까, 그것도 고민이네요. 손님들이 '숫자가 왜 이렇게 적어졌어?' 하고 불평할 테니까.  그런데 이상하죠? 아무것도 안하는데 계속 알이 굵어지니까요.”

 

자연 재배의 사과 수확량, 관행 농법과 맞먹고 가격은 몇 배 차이


“10년을 노력하면 누구나 성공할까요?”


“다른 농부들도 실험하고 있어요. 홋카이도의 8000㎡ 사과밭에선 작년에 열매가 12개 맺었습니다. 7년 만의 결실이지요. 시행착오를 줄여서 11년에서 7년으로 짧아졌습니다. 올해는 열매가 100배 이상 늘어날 거예요. 한국 농가에서도 막 사과나무를 심었지요. 일부러 척박한 흙을 골랐습니다. 나무 주위에 4년 동안 콩을 심으라고 했어요. 사람도, 나무도 흙이 만들어지는 모든 과정을 경험하라고. 7년 뒤 그 경험을 농가에 확산시키라고."

 

“자연 재배는 모든 작물에 가능할까요?”


“쌀, 옥수수, 채소, 파인애플, 망고를 해보니 가능했어요. 자연의 프로그램대로 흙을 만들면 뭐든지 됩니다.”


“농약과 비료를 '악(惡)'이라고 보시나요?”


“인간은 농약과 비료에 참 많은 신세를 졌어요. 고맙지요. 하지만 사용하지 않고도 같은 수확량, 같은 품질의 열매를 얻을 수 있다면, 사용하지 않는 것이 좋은 것입니다. 그뿐입니다.”

 

“가격이 비싸지요?”

 

“한 상자에 16∼20개 정도 들어가는데 상자당 4,200엔(5만5000원)에 배송합니다. 다른 사과보다 평균 상자당 500엔 정도 비싸지 않을까요?”


“더 비싸게 받아도 잘 팔릴 텐데요.”

 

“어차피 돈을 벌려고 시작한 일은 아니니까. 앞으로 더 많은 농가가 자연 재배에 성공하면 원하는 사람들이 더 싸게 먹을 수 있겠지요.”

 

 

사람의 뼈와 살은 흙의 성분과 같아, 흙으로부터 영양 섭취해야


나는 ‘기적의 사과’를 먹어보지 못해서 맛이나 가치를 평가 할 수 없지만, 관련 유튜브를 찾아보니 자연 재배 사과는 익기 전인데도 단맛이 날 정도로 맛있다고 했다.

 

국립원예특작과학원이 발표한 사과의 효능에 따르면 ▲고혈압 예방(사과의 칼륨) ▲콜레스테롤조절(사과의 펙틴), 콜레스테롤 흡수 및 배설 촉진 ▲당뇨병 예방(사과의 팩틴, 당질을 흡수) ▲피로회복(사과의 사과산, 구연산은 유산 저하, 신진대사 활발) ▲대장암 발생 감소(사과의 식이 섬유, 변비 해소) ▲충치 예방(사과의 과육, 자연의 칫솔, 잇몸 건강) ▲어깨 결림 및 요통 감소(사과산 구연산 등) 그야말로 ‘사과가 익으면 사람들이 건강해서 진료 볼 일이 없는 의사가 당황해 얼굴이 붉어진다’는 우스갯소리가 농담으로 들리지 않을 정도로 사과의 효능이 대단하다.

 

그렇지만 살아있는 흙에서 자생력을 가진 사과나무에서 자란 ‘기적의 사과’와 농약을 12번 이상 쳐야 수확한다는 관행 농업으로 키운 사과가 효능 면에서 같을 수야 없으리라. 

 

우리 몸의 70%를 이루는 수분은 바닷물과 화학적인 성분이 같고, 뼈와 살은 흙의 성분과 같다. 사람은 흙의 영양분을 흡수하는 식물을 먹어야 필요한 영양성분을 얻어서 살아갈 수 있다. 하늘과 흙의 섭리에 따를 때 자연이 ‘기적의 사과’를 내 준다. 이것이 비료나 퇴비를 쓰지 않으면, 벌레가 꼬이지 않고, 벌레가 없으면 농약을 칠 필요가 없으니, 흙부터 살리라는 하나님의 말씀이 아닐까. (다음호에서 계속)

 

MeCONOMY magazine May 20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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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균관의대 교수들 "의료 공백 등 사태 악화되면 병원 떠날 수 밖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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