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04.26 (금)

  • 흐림동두천 1.0℃
  • 흐림강릉 1.3℃
  • 서울 3.2℃
  • 대전 3.3℃
  • 대구 6.8℃
  • 울산 6.6℃
  • 광주 8.3℃
  • 부산 7.7℃
  • 흐림고창 6.7℃
  • 흐림제주 10.7℃
  • 흐림강화 2.2℃
  • 흐림보은 3.2℃
  • 흐림금산 4.4℃
  • 흐림강진군 8.7℃
  • 흐림경주시 6.7℃
  • 흐림거제 8.0℃
기상청 제공

문화


정치 리더십과 개혁을 보여준 정조의 탕평 사상

한국정신문화 찾아서 (31)

조선시대 역사를 서술한 그간 관점을 보면 당쟁은 너무 부각된 반면에 정조를 비롯한 왕들의 탕평 노력은 과소평가된 듯하다.

 

 

인류사를 보면 당파 간 갈등과 전쟁의 역사임을 뚜렷이 알 수 있다. 인간들 사는 속에 갈등과 다툼이 늘 있어왔다. 그 갈등을 피를 부르는 다툼으로 가지 않도록 하는 게 정치의 상책이라고도 할 수 있다. 인간은 크든 작든 욕망을 가진 존재들이며 욕망과 이익을 따라 끼리끼리 뭉쳐지면 당파 간 갈등으로 격화되어 음모를 꾸미고 죽이기까지 한다.

 

대 식민지 시기 일본인 학자들이 조선시대를 당쟁의 역사로 압축해 표현한 것은 그들의 협소한 역사 지식과 군국주의적 사관에 입각한 것이라는데 별반 이론은 없을 듯 하다. 객관이란 포장 아래 그들의 무지와 의도를 감춘 것일 터 이지만 그걸 알아채지 못한 당대와 후세의 일부 지식인들이 더욱 아쉬울 따름이다. 


한반도는 신라에 의해 통일된 이후에는 하나의 통일된 왕조로서 고려, 조선으로 이어져 왔다. 이웃 중국과는 바다와 만주라는 완충지대를 두고 떨어져 있고 일본과도 바다를 사이에 두고 있다. 하여 외세와의 전쟁이 없었던 시기는 왕권에 도전 하는 세력은 없었던 편이었다. 대부분의 정치 행태는 왕 아래 제반 정치세력 간 당파 경쟁이 정치 행위의 표현이었다. 다시 말해 당쟁이 특이한 정치문화적 성향이 아니라 보편적인 정치 행태였다는 얘기다.


중국은 거대한 땅덩어리 안에 많은 인구가 군집돼 있는 지리적 조건을 가지고 있다. 이런 지리적 환경에서는 각 지역의 이해는 지역 국가들의 창업이 들고 일어났고 전쟁으로도 쉽게 번졌다. 춘추전국시대, 오호십육국 시대 등에서 볼 수 있는바 와 같다. 통일 왕조가 들어선다고 해도 당쟁이 일어나면 중앙 정권의 쇠퇴와 지방 제후들의 이탈, 반란으로 나타났다. 중국은 땅이 넓은 만큼 당쟁이 전쟁이나 왕조 분열로 나타나거나 당쟁의 싹을 잘라버리고 탄압하는 절대왕권의 형태가 특징적인 모습이었다. 통일 왕조가 성립됐다고 해도 그리 오래가지 못했거나 명목상 오래 간다고 해도 사실상 지역 세력들이 독립 왕조처럼 군림했다. 

 

중국 대륙과 유사한 지리적 환경을 가진 곳이 유럽이다. 유럽은 중국의 진·한·당·원·청나라와 같은 통일된 왕조 아래 있었던 적이 거의 없었다. 그런 상황 속에 이해 다툼과 경쟁은 피할 수 없었기 때문에 전쟁의 역사를 20세기까지 끌어왔다.


오늘날 중국을 이해하는 데서도 이 점을 알아야 중국의 추세를 알아챌 수 있다. 시진핑 주석은 소위 ‘중국몽’을 구현하기 위해 ‘절대왕권’과 같은 전통적인 중앙집권체제를 확립하려고 하는 것이다. 탕평과는 거리가 멀고 정적과 당파를 제거하 여 분열을 막고 전 중국 인민의 힘을 굴기에 집중시키려는 전략인 셈이다. 

 

조선의 당쟁은 일종의 정치행위의 표현


조선과 같은 하나의 안정된 왕권 아래서 당쟁은 그 자체로 나쁜 것은 아니며 더욱이 그런 행위가 일상적인 시스템과 관행으로 이뤄질 경우 바람직하다. 오늘날의 민주체제와 크게 다를 게 없다. 각 당파가 정치적 의견을 자유로이 드러내놓고 토 론하고 이견을 조정한 뒤에  왕이 서로 다른 의견을 듣고 결정을 내리는 시스템이 작동될 경우 정책의 추진은 힘을 얻을 것이다. 

 

당쟁의 긍정적인 모습이 드러나려면 전제가 필요하다. 세종과 정조처럼 강력하고 지혜로운 리더십을 발휘하면 각 당파들이 당리당략을 자제하고 공의로운 합의에 도달한다. 그간 쌓여 있던 폐단과 모순들이 개혁적 정책으로 풀어져서 백성들의 삶은 편안해지고 국력은 튼튼해지는 것이다. 


한 왕조에서 이와 같은 영명한 군주를 만나기는 쉽지 않다. 대부분의 왕들은 유력 당파 사이를 왔다 갔다 하면서 신하 들로부터 위신을 잃어버리거나 유력한 당파의 꼭두각시가 되고 만다. 왕이 어리석고 감정의 기복이 심하며 판단력이 흐릿하면 아무리 뛰어난 신하가 있어도 빛을 발하기는 커녕 간신들의 참소와 음모에 의해 희생되는 일은 흔하다. 조광조와 율곡이 뜻을 펴지 못했고 이순신 장군은 죽음의 문턱까지 갔다. 


조선의 당쟁이 왜 피를 많이 흘렸는가. 커뮤니케이션의 문제도 매우 컸다고 본다. 즉 약간의 사실과 소문, 상상, 주관적 해석이 뒤섞인 말들이 궁정을 중심으로 난무했다. 왕이 판단이 흐리고 감정적이고 불길한 상상을 쉽게 하는 왕이라면 국문은 참혹한 지옥으로 변했다.  

 

탕평 사상은 「서경」의 황극 탕평에서 유래 : 왕 주도의 정치를 실행함을 의미


「서경」 주서, 홍범구주를 보면 ‘황극’에 대한 설명이 나와 있다. 황극은 임금이 지극한 표준을 세우는 것이라고 했다. 이리하면 백성들이 나쁜 당을 만들거나 관리들이 패거리를 만들지 않을 것이라고 말했다.

 

임금이 덕을 말하는 이를 거두어 사용하면 그가 임금의 표준을 따를 것이고 치우침이 없고 편을 가름이 없으면 왕도가 ‘탕평’해질 것이라는 내용이다.

 

조선의 정치는 군신공치, 즉 군주와 현명한 신하가 공동으로 다스리는 것을 이상으로 삼았으나 실제로 군신공치는 실패를 부르는 이상론에 가까운 듯하다. 아마도 정조는 군신 공치론보다는 왕을 중심으로 한 황극 탕평론이 현실에 부합한다고 생각했음직하다.    


정조의 정치를 ‘탕평의리’라고 한다. 이는 각 당파와 인재들과 더불어 사람이 마땅히 지켜야 도리인 의리를 정조 자신과 함께 의논하고 모색하여 적절한 의리를 이끌어내는 정치를 말한다. 이때 특정 정파의 이익에 휘둘려 공의를 훼손시켜서는 안 됨은 물론이고 당연히 공연한 분란을 일으켜서도 안 된다.  

 

 

정조는 사도세자의 아들이다. 사도세자는 할아버지인 영조가 역모죄로 뒤주에서 굶어 죽게 했다. 사도세자는 본인의 불안한 정신 상태, 영조의 과도한 기대와 판단 미스, 당시 세력을 잡고 있었던 노론과 외척의 책동 등으로 인해 비극적인 삶을 맞이했다. 정조는 사도세자를 죽음으로 몰고 갔던 세력들의 방해와 위협에 시달리다 가까스로 왕위에 오르게 된다.

 

정조는 자신의 정통성과 사도세자의 명예 회복, 할아버지 영조의 결정에 손상을 가지 않는 ‘의리’를 찾아야 했다. 아울러 노론과 소론 등 각 당파와 정약용을 비롯한 인재들을 고루 등용해 품고 있었던 개혁을 차질 없이 추진하고자 했다. 그런 정조의 정치 행위가 다름 아닌 ‘탕평’이었다.   


정조의 탕평 통치는 각 당파를 추스르며 때로는 강한 처벌로 다스리거나 처벌의 범위를 최소화하는 지난한 험로를 걸어가며 하나씩 난제를 극복해갔다.

 

정치가로 볼 때 세종보다는 더 어려운 시기를 잘 헤쳐 나가면서 자신이 하고자 했던 개혁을 추진했다. 규장각을 설립하고 초계문신 제도를 실행 했다. 또 특허받은 상인들만 물건을 팔 수 있는 금난전권을 폐지하여 자유로운 상업 활동을 진작했다.

 

선대왕들이 손도 못 댔던 군제를 개혁했다. 그리고 아버지 사도세자의 묘를 수원 화성으로 옮겨 왕릉급으로 추존함과 동시에 수원 화성이라는 신도시를 건설했다.  

 

이 네 가지 정책은 모두 굵직한 것들로 실로 누적된 폐단을 씻어내고 새로운 피를 수혈하는 개혁이었다. 규장각 설립과 초계문신 제도는 한 마디로 인재 육성으로 나라를 튼튼히 하겠다는 것이다.

 

규장각은 학문 연구도 하지만 정조의 정책을 개발하는 곳이다. 정조는 규장각에서 합리적인 근거와 논리로 마련된 정책이었기에 자신 있게 정책을 추진할 수 있다. 38세 미만의 뛰어난 젊은 학자들을 초계문신으로 선발하여 오로지 학문에만 열중하게 했다. 정조 재위 기간에 모두 130 여 명의 초계문신들이 선발됐다. 


금난전권 폐지는 상업 활동을 경시했던 조선 시대에 획기적인 경제개혁이었다. 조선 시대는 정조 이후부터 비록 대외무역까지 나아가지는 못했으나 막혀 있었던 상업의 물꼬를 터 준 쾌거였다. 정조는 많은 국고를 낭비하는 오군영을 통폐합 하고 신식 군대인 장용영군을 설치하고 인사권을 장악했으며 자신의 입회하에 군사훈련을 자주 실시했다. 


끝으로 사도세자의 능을 추존하는 일련의 행위는 사사로운 감정에 기운 것이 아닌가 하는 의구심이 들지 모르나 ‘조선 은 효의 나라’라는 국격을 드높여준 문화 행위였다. 정조는 현룡원을 자주 참배했다. 뿐만 아니라 경기도 인근에 있는 왕릉들을 66차례나 방문하여 재를 올리고 그 자리에서 백성들의 억울한 일을 풀어주는 자리를 마련했다.    

 

정조는 그의 재위 25년간 위에 거론한 정책 외에도 의서 간행과 보급, 문예부흥 정책 등 크고 작은 많은 개혁을 왕성하게 추진했다. 강력하고 지혜로운 왕이 일을 하면 얼마나 많은 성과를 내고 그 결과 나라와 백성들의 삶이 새로운 기운을 얻을 수 있는가를 보여주고 있다.      


오늘날 당쟁도 조선시대 당쟁에 못지않아


조선시대의 당쟁은 완고한 명분 의식에다가 소통이 잘 안되고, 부실한 사실조사와 정치적 의도가 깔린 상소문 등으로 인해 불필요하게 격화된 면이 있었다. 그러나 오늘날의 당쟁도 예전에 비해 결코 못지않은 것 같다. 오늘날, 수많은 언론들이 존재하고 SNS가 있고 여러 사법기관이 있음에도 당쟁이 잦아들기는 커녕 오히려 기승을 부리고 있는 형편이다. 


인류 역사에서 민주주의 체제가 가장 앞선 제도이긴 하나 대통령이나 의원내각제의 총리가 강력하고 뛰어나지 못하면 당파 간 대립과 갈등으로 정책은 지지부진하다. 야심찬 정책이 제안돼도 의회에서 통과되지 못하고 사장되기 일쑤다.

 

대통령이 소속된 집권당이 소수당일 때도 많다. 미국과 같은 상하 양원제 아래서는 더욱 정책 추진이 여의치 않은 경우가 많다. 눈 뜨고 당한다고 할까. 요즘 미국 민주주의 위기는 양원제의 약점도 한 몫 하는 것 같다.

 


우리나라에서는 대통령이 아예 야당과 소통 단절하다시피 한 사례도 적지 않다. 영조와 정조는 정적인 당파까지 포용하고 결정적인 잘못이 발견될 때까지는 인내하고 자신을 반대했던 당파의 말을 경청했다. 우리나라의 정치 지도자들은 정치적 양보와 타협은 ‘패배’라는 인식이 너무 강하게 박혀 있는 듯하다. 


이웃 일본의 의원내각제를 보면 총리가 너무 약한 게 문제다. 자민당 일당 지배라고 해도 자민당 내 계파가 또 하나의 당파를 형성하다 보니 취약한 총리를 계속 배출하는 것 같다. 자민당 집권 정부의 정책이란 것 자체가 강력한 개혁적인 것은 드물고 뜨뜻미지근한 것들이 올라오는 것 같다. 일본에선 야당 정책이 훨씬 참신해 보이는데 집권에 성공하지 못하고 있다. 


아무리 선진적인 체제가 민주주의 체제라고 해도 강력하고 지혜로운 최고 지도자를 만나지 못하면 무용지물에 가깝고 오히려 선동정치가와 포퓰리즘 정당에게 놀아날 수 있다. 그런 점에서 민주주의 위기는 21세기 전반기에 뚜렷한 특징으로 나타나고 있는 것 같다.


그간 실패한 왕조라고 폄하됐던 조선 왕조의 탕평 사상은 민주주의 위기를 극복할 정치 리더십으로 재평가 받을 필요가 있어 보인다.

 

정조가 몸소 보여줬던 탕평정치, 즉 각 정파는 물론 백성들이 공감할 수 있는 공의로운 의리를 치열한 논의를 통해 찾는 정책 행위를 말한다. 탕평정치는 정의와 의리, 윤리와 같은 대원칙은 지키되 거기에 얽매이지 않은 유연성을 가지고 무엇보다 인내하는 리더십이다.

 

이렇게 합의된 공의가 모아지면 어떤 난제라도, 해묵은 폐단도 뚫고 나가는 힘을 가질 수 있었다. 정조는 탕평정치를 통해 수명이 다하는 날까지 개혁을 추진하여 큰 성과를 거뒀다. 정조의 탕평 정치와 사상은 지금 정치지도자들도 충분히 본받을 만한 것 같다.

 

MeCONOMY magazine February 2022




HOT클릭 TOP7


배너







사회

더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