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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획


버거킹의 공동창업자 제임스 맥라모어(James McLamore)를 아시나요?

그가 죽고 2년 뒤인 1998년 《The Burger King; Jim MaLamore and the Building of an Empire》라는 자서전이 미국에서 처음 나왔다. 그런데 그로부터 22년 만인 지난해, 《The Burger King: A Whopper of a Story on Life and Leadership by the McLamore Family-빅사이즈 햄버거의 기적, 버거킹》으로 부제를 바꾼 그의 자서전이 다시 출간됐다. 우리나라에선 지난 10월에 번역돼 나왔다. 

 

4반세기 전에 죽은 저자의 자서전이 지금 나온 속사정이야 알 수 없다. 하지만 현대 외식 프랜차이즈업의 표준을 만들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닌 제임스 맥라모어의 사업과 인생이 다시 등장한 배경이 세계적인 팬데믹과 기후위기 상황과 관련이 있지 않을까? 패스트푸드의 창업자를 통해 QSR(Quick Service Restaurant) 산업의 미래를 앞당겨 준비해 보자는 뜻인 듯하였다. 맥도날드와 경쟁하고 있는 버거킹 창업자의 통찰력을 통해, 미래의 햄버거를 만들어 보는 것도 나쁘지만은 않을 듯하다. 

 

혁명은 변두리, 작은 도시의 햄버거 가게에서 시작된다

 

버거킹 혁명은 우리나라 남한을 옮겨 놓으면 쏙 들어가고도 남는 미국 동남부 플로리다반도(半島)의 잭슨 빌과 마이애미라는 인구 20~40만 명의 중간급 도시에서 시작됐다. 시기는 한국 전쟁이 막 끝난 해인 1953년 7월 28일. 휴전한 다음 날이었다. 


플로리다 잭슨 빌에서 드라이브인 식당을 하던 「매튜번즈」라는 사람이 그의 여조카 남편인 「케이스 크레머」를 데리고 소문난 캘리포니아 샌버너디노의 맥도날드 형제가 운영하는 햄버거 가게에 확인차 갔었다. 말 그대로 가게 앞에 손님들이 줄을 선 것을 본 그들은 자기들도 햄버거 가게를 차리겠다고 결심했는데, 마침 「조지 리드」 라는 발명가가 12개의 패티를 한 번에 굽는 인스타-브로일러(Insta-Broiler)를 써서 「햄버거 인스타 킹」 이란 이 름의 햄버거 식당을 차렸다. 햄버거 하나에 15센트를 받았다. 

 

그런데 이 식당을 유심히 지켜보던 잭슨 빌 인근의 한 레스토랑에서 매니저로 근무하던 「데이비드 에저튼 (David Russell Edgerton Jr. 1927~2018)」이란 젊은이가 “저렇게 만들어 팔면 대박이겠다”라고 하며, 식당 매니저를 그만둔 뒤 1954년 3월 1일, 「매튜번즈」와 가맹계약을 맺고 「햄버거 인스타 킹 마이애미 지점」을 차렸다. 그리고 석 달 뒤, 자신의 코넬 대학교 호텔경영학과 동기이자 요식업계 친구인 「제임스 맥라모어(이하 제임스)」를 불러 동업을 제의했다. 마이애미가 낯선 그로서는 플로리다를 잘 아는 사람이 필요했기 때문이었다. 

 

제임스 역시 식당을 하고 있었다. 1947년 대학 졸업 후, 번번이 구직에 실패했다가 간신히 월급 267달러짜리 델라웨어주 윌밍턴에 있는 YMCA 식당 관리자로 일하던 중, YMCA 맞은편의 패스트푸드 식당이 장사가 잘되는 것을 보고, 자신도 1950년 1월에 ‘콜로니얼인’이란 이름의 식당을 냈다. 장사가 제법 잘됐다.

 

그런 가운데 1952년 2월 마이애미에 빌딩을 짓던 장인이 “빌딩 1층에 식당을 열지 않겠느냐?”는 제안을 받고, 현장을 답사한 뒤, 장인과 임차계약을 맺었다. 그러나 그는 마이애미가 겨울이 성수기, 나머지 계절은 비수기라는 것과 빌딩의 세입자들이 주로 병, 의원들이어서 상시 근무자가 적다는 걸 몰랐던 탓에, 그가 낸 ‘브리켈브리지 레스토랑’은 운영이 힘들 수 밖에 없던 건 당연한 일이었다. 

 

우리는 스스로 생각하는 것만큼 똑똑하지 않을 수도 있다

 

그런 상황에서 잘 아는 대학 동기로부터 동업을 제의받은 것이었다. 그는 우선, 동업을 제안한 「에저튼」이 자기보다 창의적이고 두뇌가 비상하다는 것을 알고 있었 고, 반면 자신은 디테일과 숫자에 강하다는 것을 인지하고 있었으므로 동업을 결정했다. 예상대로 두 사람은 금방 의기투합했다. 더구나 그가 보기에 「햄버거 인스타 킹」은 셀프서비스 방식을 최초로 도입한 데다가 메뉴 구성이 간단하고, 가격이 낮았으며, 서비스가 빨라서, 전국 프랜차이즈로 확장하기도 쉬울 것 같았다. 

 

그는 자신의 두 번째 가게 「브리켈브리지 레스토랑」 을 매각하고, 그 자금으로 에저튼과 5;5의 지분으로 「Burger king of Miami」 회사를 설립한 다음, 곧바로 에저튼 소유의 「햄버거 인스타 킹」 마이애미 매장과 부채를 인수해 사업 확장에 들어갔다. 2년 동안 플로리다에 4개의 점포를 늘렸다.

 

그런데 인스타 브로일러는 고장이 잦아서 말썽을 부렸다. 화가 난 이들은 직접 고기패티를 굽는 기계를 만들었다. 이것이 직화 방식의 프레임 브로일러로 패티에 육즙이 살아있고 불맛이 났다. 이게 인기를 끌자, 이들은 「햄버거 인스타 킹」에서 인스타를 빼고, 「버거킹」으로 브랜드를 확정하고, 햄버거 하나에 18센트를 받았다. 하지만 당시 햄버거 시장은 레드오션이었다. 경쟁이 치열해지면서 적자가 늘기 시작했다. 흑자로 바꾸려면 매장 수를 늘려야 했고 그러려면 광고를 해야 하는데 필요한 자금을 유치하기가 만만치 않았다. 

 

결국, 회사는 1956년, 설립 2년 만에 파산 위기에 직면했다. 그러나 하늘이 무너져도 솟아날 구멍이 있다던가, 그는 은퇴한 사업가인 「하비 프루호프」를 만났다. 하비는 그에게 딱 한 가지를 물었다.

 

“그래~ 젊은이, 앞으로의 계획이 뭔가?”


그는 재무제표를 보이며 솔직하게 회사 상황을 설명하고 향후 재건 계획을 소상히 밝혔다. 그러자 하비는 6만 5000달러의 투자를 약속하고 지분의 절반을 갖는다는 조건으로 최종 계약서에 서명했다. 그 뒤로 하비는 그의 멘토가 돼 주었다. 

 

"투자금을 모두 날릴 각오로 투자했다”고 한 하비는, “달걀은 한 바구니에 담아야만 하며, 우리는 그 바구니만 쳐다봐야 하는 것이라”고 말했다. 하비가 투자한 지분은 나중에 1억 달러 이상으로 늘어났다.

 

전문가는 미친 듯이 단순한, 제대로 된 하나를 만드는 사람

 

그와 에저턴은 「햄버거 인스타 킹」의 플로리다 게인즈빌 지점의 개장식에 갔다가 거기에서 한 블록 떨어진 거리를 지나다가 우연히 손님들로 북적이는 한 드라이브인 식당을 보았다. 낡고 지저분한 건물이었고 들어가 보니 서빙도 엉망이었으며, 주차장 바닥은 포장이 안 돼 차들이 먼지를 풀풀 날리며 들락거렸는데도 손님들은 차례를 기다렸다가 가방에 커다란 햄버거를 몇 개씩 넣어서 나오고 있었다. 두 사람은 그 집의 햄버거를 먹어보고 무릎을 쳤다. 햄버거의 부피는 잠수함 만한 데 맛이 좋았던 것이 었다.


“이거야!” 

 

두 사람은 마이애미로 돌아오는 차 안에서 ‘우리도 크고 맛있는 햄버거를 만들자,’며 이름까지 지었다. “‘엄청난 것’이라는 뜻의 ‘와퍼(Whopper)’가 어떨까? 하나에 37센트를 받자”며 가격까지 정했다. 이건 경쟁사인 맥도널드, Wendy’s와도 차별화할 수 있겠다고 생각했다. 예상은 적중했다. 와퍼를 사러 수많은 사람이 몰렸다. 와퍼를 출시 한 지 1년만인 1958년, 그들은 버거킹 간판 밑에 ‘와퍼가 시작된 곳(Home of the Whopper)’이라는 문구를 추가해 자신들의 가게가 새로운 메뉴의 원조라는 사실을 홍보했다.

 

이때까지도 두 사람은 와퍼가 전 세계에서 가장 인기 있는 햄버거가 될 거라고는 생각하지 못했다. 그들은 경영난에 처해 있던 「햄버거 인스타 킹」의 사업권을 인 수한 뒤, 브랜드를 모두 「버거킹」으로 바꿨고, TV 광고를 시작해 가맹점을 모집했다. 

 

 

"어떤 왕이 왕자와 공주를 데리고 마법사를 찾아간다. 왕은 마법사에게 햄버거를 주문하는데, 마법사가 왕을 햄버거로 만들어 버거킹이 된다”고 만화 광고를 했다.  

 

버거킹은 가맹점 운영방식을 맥도날드와 달리했다. 버거킹과 가맹사업 계약을 맺은 가맹점주들에게 버거킹 브랜드를 사용하되 매장을 자유롭게 운영할 수 있게 했다. 덕분에 버거킹은 맥도날드보다 먼저 해외에 진출해 1963년, 푸에르토리코에 첫 가맹점을 열기도 했다. 확장이 꾸준히 이어졌지만, 맥도날드가 1965년 기업공개를 하면서, 가맹점과의 유기적 성장을 해야 하는 버거킹이 따라잡기에는 한계가 있었다. (다음 호에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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