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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터뷰


토정 이지함의 사회복지사상-한국의 정신문화를 찾아서(13)

【M이코노미 이상용 수석논설주간】토정 이지함은 토정비결로 유명하지만 사실은 그의 국부론과 사회복지사상은 당대의 모순을 극복해 국부와 민생을 살리는 획기적인 방안으로 평가받아왔다. 이런 사실이 후대 학자들에 의해 조금씩 언급돼 오던 중 장용기 초당대 박사가 본격적으로 토정의 전생애와 기록물을 검토하고 나아가 그의 사회복지사상을 세계 복지사상의 효시로 알려진 영국의 구빈법 사상과 비교했다. 작년 2월에 출간 된 장용기 박사의 학위 논문 「토정 이지함의 사회복지사상 연구」를 중심으로 토정의 사회복지사상을 살펴보고 장용기 박사와 인터뷰 했다.

토정 이지함(1517-1578)

 

중종 12년에 태어나 인종과 명종과 선조대를 살았고 임진왜란(1592)이 일어나기 10여 년 전에 숨졌다. 그는 당대의 거유(巨儒)인 퇴계와 율곡, 남명과 동시대에 살았다. 이색의 6세손이며 조카 이산해가 영의정을 지낸 사대부 명문집안이었다. 본관은 충청도 한산이며, 생애 대부분을 마포강변에서 흙집을 짓고 살았다고 해 토정이란 호가 널리 알려졌다.

 

그는 역학과 수학, 천문지리학에도 밝아 후대에 ‘토정비결’의 저자로 알려지게 되었다. 토정은 1517년 충청도 보령군 청라면에서 태어났으며 그의 나이 14세, 16세에 부모를 연이어 여의었다. 이후 형 이지번을 따라 서울에 옮겨와 성장했다. 20대 초반에 왕실 혈통인 이정랑의 딸과 결혼했으나 장인이 역모의 우두머리로 모함받아 처형됐다. 과거를 준비하던 토정은 처가와의 연좌제로 시험자격을 잃고 20년 넘게 천하를 주유했다.

 

서화담의 문하에서 공부했으며 율곡과 성혼과 깊은 교분을 나눴으며 임금에게 도끼를 지닌 채 상소를 올렸다는 조헌을 제자로 두었다. 율곡은 그의 저서 「석담일기」에서 20여 년 연상토정에 대해 “내가 일찍부터 속마음을 내비치고 조금의 장벽도 없었다. 선생은 나에게 사람의 기대를 받아들이는 인망(人望)을 요구했고, 나는 선생에게 너무 자유분방한 천방(天方)을 조금 거둘 것을 요청했다. 서로를 살피고 격려를 아끼지 않았으며, 늦은 공업을 얻기를 빌었다”고 적어놓았다.

 

선조수정실록에 기록되기를 왕실의 딸과 혼례를 치른 다음 날 한양 홍제교를 지나다가 거지 아이 세 명이 곧 얼어 죽을 것 같아 입고 있던 도포를 세 폭으로 찢어 건네주었다는 일화가 전한다. 처가의 억울한 역모사건에 연루돼 과거 길이 막힌 토정은 나라 곳곳을 다니며 백성들의 삶에 깊숙이 파고 들며, 위로는 관료들에서 아래로는 천인에 이르기까지 교유했다. 그는 당시 천업으로 여김을 받던 상업은 물론, 염전업, 수산업에 직접 종사했으며 유배의 땅 제주도를 세 번이나 왕래했다.  

 

토정은 20여 년의 방랑 끝에 선조 즉위에 즈음해 연좌에서 해제됐다. 그의 나이 57세(선조6)에 재야의 탁행지사 천거로 1573년 포천 현감에 부임했다가 1년 후 직에서 내려왔다. 5년 후인 1578(선조 11)년에 아산 현감으로 부임했는데 3개월 만에 갑작스런 병환을 얻어 숨졌다.

 

정약용의 「목민심서」에 토정의 아산현감 시절 기록이 있다. 아산 현감 부임 직후 백성들이 왕실에 물고기를 보내기 위해 정식 부역 절차도 없이 수시로 고기잡이에 동원돼 고통이 크다는 소리를 들었다. 토정은 즉시 그 양어장을 메워버리게 해 후환을 근절시켰다는 것이다. 토정이 병으로 죽자, 아산 주민들이 거리로 쏟아져 나와 눈물을 흘렸다고 선조수정실록에 적혀 있다.  토정은 사후 135년인 1713년(숙종 39) 이조판서에 추증되었다. 그의 위패는 아산의 인산서원과 보령의 화암서원에 모셔져 있다.   

 


토정이 살았던 시대


토정이 살았던 조선중기에 이르면 개국초기의 위민정신은 희미해지고 훈구공신에게 많은 토지가 주어지고 세습되면서 고려 말의 대지주 경작제가 부활되었다. 이에 백성들은 과 중한 조세와 공물, 군역을 피하기 위해 소작농이 되거나 노비 또는 유랑민으로 전락해갔다.

 

“요즘 정치가 어지럽고 관리들의 수탈이 가혹하고 각종 부역 동원도 자주 있습니다. 굶주림이 거듭되고 전염병이 잇따르니 젊은이는 사방으로 흩어지고 약한 백성은 구덩이에서 허덕이고 있습니다. 밭과 들은 모두 황무지가 되었고 100리 안에서 민간의 밥 짓는 연기를 볼 수 없으니 그 상황이 비참하고 처량해 사람들이 저절로 눈물을 흘립니다.”(율곡전서)

 

다음은 토정이 포천현감으로 있으면서 굶주림으로 남편을 잃은 40대 여인을 만났던 기록이다.

 

“여인이 말하기를 ‘나의 기혈이 말라 세 살 아이에게 젖을 먹이지 못한 것이 또한 오래되었습니다. 단옷날 밤중에 어린 애의 손발이 겨울 추위처럼 떨었습니다. 곧 놀라 일어나 손을 아이 입에 대니 숨이 이미 끊어졌습니다. 방 안에 달려가 항아리의 바닥을 손으로 쓸어 우연히 쌀 낟알을 찾아냈습니다. 급히 씹어 물에 타 입에 부었더니 조금 뒤 숨이 통하였습니다. 이후 며칠이나 더 살았는지 알 수 없습니다’라고 흐느꼈습니다. 말을 다 잇지도 못했습니다. 신이 그 말을 듣고 그 얼굴색을 보며 눈물이 흘러내리는 것도 느끼지 못했습니다.”

 

토정은 일가친척의 군역까지 져야 하는 제도로 인해 나이 70세가 넘도록 결혼을 못하거나 고향을 떠나는 사례를 지적하고 나쁜 제도의 폐지를 주장했다.

 

“가난한 백성이 졸지에 (친척의 군역을) 변제하지 못하면 옥에 가두고 독촉합니다. 남자들은 자신이 번을 사고 또 일가의 번까지 서야 합니다. 여자들은 자신의 가족에게 배당된 군포를 관청에 바치고 또다시 일족의 군포까지 바쳐야 합니다. 남자는 군대 행렬에서 울 고 여자는 감옥에서 울부짖습니다. 농사와 누에 치는 일이 제 때를 잃어, 입고 먹을 것이 모두 없습니다. 때문에 흩어지고 달아나고 숨어서 타향으로 사라져 없어지기에 이릅니다” 라고 토정은 상소문에 적고 있다.

 

조선 왕조는 연산군 이후부터는 군역과 요역(국가의 노동력 징발), 공납의 의무가 양반과 중인에겐 제외되고 일반 백성(양인)에만 지워졌다. 

 


토정 이지함의 구빈정책   


토정은 야인시절에 육지와 바다와 강의 이점을 활용한 상업 행위로 큰돈을 벌어 빈민들에게 나눠줬다. 그는 장사법을 백성에게 가르쳐 주어 스스로 생업을 영위하도록 했다. 바다 가운데 섬에 들어가 박을 심어 수만 개의 바가지를 곡식 몇 천 석과 바꿨다. 나중에 경강 마포에 저장해둔 이 곡식들을 백성들에게 나눠주고 떠나갔다고 「토정유고」에 실려 있다.    

 

토정이 전라좌수영 관저에 머물 때 글공부를 열심히 하는 어린 관노비 김순종을 기특히 보고 절도사에게 관노비에서 빼줄 것을 허락받고 고향 보령으로 데려왔다. 토정이 그 아이를 직접 가르쳐 사마시 과거에 합격시켰으며 좋은 가문과 혼례를 주선하였다고 전한다. 토정 이지함의 최대 업적은 아산 현감 부임 즉시 설립한 ‘걸인 청’이다. 유리걸식하는 걸인들을 1대1로 상담해 길쌈과 땔감 장사 등 그들이 가장 잘할 수 있는 업을 선택하도록 권했다. 잘하는 일이 없다는 걸인들에게 짚신을 삼도록 해 생활자금을 마련하게 했다.

 

비록 토정의 홀연한 죽음으로 곧 흐지부지 하게 됐으나 조선왕조 500년간 그런 참신하고 ‘현대적’인 시도는 전무후무했다. 포천현감 시절에 임금에게 올린 상소문에는 관리들의 타고 난 능력의 차이를 고려한 적재적소의 인사정책을 적확한 비유를 들어 건의했다. 당시 대부분의 사대부들이 성리학적 세계관에 젖어 오로지 성인군자 됨과 예 지킴을 강조하던 시절이었던 점을 비추어 보면 얼마나 시대를 앞서간 인물이었는 가를 알 수 있는 대목이다.

 

“매는 꿩을 잡게 하고 닭은 새벽을 알리게 하며 말은 수레를 끌게 하고 고양이는 쥐를 잡게 한다면 이 네 가지 동물은 다 쓸 만한 재주를 보입니다. 그렇지만 해동청은 천하에 좋은 매이지만 새벽을 알리는 일을 맡긴다면 늙은 닭만 못할 것입니다. 한혈마는 천하에 제일가는 좋은 말이지만 쥐를 잡게 한다면 늙은 고양이만 못할 것입니다. 하물며 닭이 사냥을 합니까. 고양이가 수레를 끌 수 있습니까. 이 같이 한다면 이 네 가지 동물은 다 천하의 버린 물건이 될 것입니다.”

 

토정의 상소문은 오늘날에 내놔도 손색이 없는 강점중심의 인재관을 가지고 있었음을 보여주고 있다. 또 토정은 본업인 농업과 말업인 상공업을 상호보완하는 경제정책을 취할 것으로 주장했다. 이를 통해 국가에 전적으로 의존하는 구빈사상에서 탈피해 지역 자립형 생산적 복지사상을 포천현감 재직 시에 건의했다.

 

“(구빈을 위해) 논자들은 조정에 요청해 중앙창고의 쌀과 부자 고을의 곡식을 가져와 구제한다면 어찌 어렵겠는가 라고 합니다. 신은 그렇지 않다고 생각합니다. 이전에 중앙과 다른 고을 곡식을 포천에 가져온 것이 이미 5~6천 석을 넘었습니다. 그러나 백성들의 굶주림과 곤궁함은 이전과 다름이 없습니다. 경창의 양곡과 부유한 고을의 곡식도 그 수량은 한정 돼 있습니다. 전국의 궁핍한 고을에서 끝없이 진휼을 청하고 창고의 곡식을 내주는 일이 거듭되면 조정도 계속할 도리가 없습니다.

 

옛사람이 이르기를 밑바닥이 새는 잔은 드넓은 바닷물로도 채울 수 없다고 했습니다. 대개 덕은 근본이라고 할 수 있고 재물은 말단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근본과 말단은 어느 한쪽도 버릴 수 없는 것입니다. 근본으로 말단을 제어하고 말단으로 근본을 보충한 다음에야 사람의 도리가 궁색하지 않게 됩니다. 재물을 생산하는 도리 역시 근본과 말단이 있습니다. 곡식을 생산하는 농업이 근본이라면 소금을 굽거나 철을 주조하는 일은 말단입니다. 근본인 농업으로 말업인 상공업을 제어하고 말업인 상공업으로 근본인 농 업을 보충한 뒤에야 모든 재용이 궁핍하지 않게 됩니다.”

 

토정은 이에 한발 더 나아가, 열악한 포천재정과 현민들의 일자리 창출을 위해 전 국토에 묻힌 은과 옥 등 광물자원 개발과 무인도와 바다를 활용한 수산자원 개발을 허가해줄 것 을 상소했으나 채택되지 못했다.  후대의 실학자인 박제가는 그의 책 「북학의」에서 “토정 이지함은 일찍이 다른 나라의 상선 여러 척과 통상하고자 했다. 전라도의 가난을 구제하려 했기 때문이다. 그분의 앞선 견해가 너무 탁월해 진실로 다가갈 수가 없는 마음이다.” 라고 술회했다.

 

 

 Interview 장용기 나주 고구려대학 교수  

 

Q. 토정의 국부론과 사회복지사상은 현대의 시각으로 보더라도 상당히 개혁적이고 성공 가능성이 높았던 것이었음에도 당대 에 채택되지 못한 이유는 무엇이라고 보시는지요?


 장용기 교수   토정 이지함 사상의 본질을 묻는 핵심질문입니다. 저도 논문을 쓰면서 계속 고민한 부분이 이상용 수석논설주간께서 지적하신 바로 그 대목이었습니다. 명쾌한 해답을 찾지는 못했습니다만. 토정 이지함의 민생과 국부의 개혁사업이 왜 시도조차 되지 않았는가? 굳이 첫 원인을 따지자면 시대적으로 16세기 조선은 신분과 서열을 중시하는 유교의 성리학 근본주의에 빠지면서 정치경제 사회적으로 변화를 거부하는 사회였다고 봅니다.

 

그 당시 기득권계층인 양반과 사대부 관료들이 기존 질서에 안주하면서 변화나 개혁을 원하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자신들이 살아가는데 아무런 어려움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두 번째는 개혁세력이 약한 데다 이들 정치력의 한계라는 점을 들 수 있습니다. 18세기 개혁군주로 불리는 정조 임금의 정책을 반대했던 당시 정치 실세이자 서인의 영수 고위 관료 심환지가 있었습니다. 좋다 나쁘다는 인물평을 떠나 정조는 재임기간 299통의 사적인 편지를 교환하며 심환지에게 협조를 구하고 도와주는 내용이 나옵니다.

 

16세기 선조 임금 때 대표적인 개혁가로 율곡 이이를 꼽습니다. 토정유고를 보면 이지함과 이이와의 각별한 관계가 실려 있습니다. 토정은 당시 조선사회를 ‘부모 잃은 고아가 오장에 병까지 들어 죽음이 아침저녁에 있는 사회’라고 했고 율곡은 “토붕와해(土 崩瓦解)의 시대”라고 규정했습니다. 흙이 무너지고 기와가 산산이 깨진다는 뜻으로 당시를 위기 국면으로 본 겁니다. 그런데 조정의 고위 관료였던 율곡에 대한 선조의 신뢰는 대단했고 토정도 율곡에게 큰 기대를 걸고 있습니다.

 

율곡은 선조의 정책이 맘에 들지 않으면 병을 핑계로 사직하곤 했는데 야인이었던 토정이 율곡을 찾아가 그래서 안 된다고 설득하곤 합니다. 토정은 율곡을 자신의 사상과 정책을 실행해 줄 고 위 관료로 생각했음이 드러납니다. 율곡의 대쪽같은 성품이 당시 기득권 서인 반대 세력과 중재 조정하다 실패하면 자신이 포기해 버리는 설득과 협상의 부재가 아쉽습니다. 아무리 좋은 정책이라도 ‘반대를 위한 반대’에 부딪치면 힘이 들기는 요즘 세태도 마찬가지입니다. 특히 개혁 세력이 소수일 때는 더욱 그렇습니다.

 

마지막으로 역사에 가설은 없습니다만 지금도 이어지는 시군 행정간 경계 관할주의는 조선시대에도 여전했습니다. 군수나 현감이 행정과 경제, 치안 등 지역을 책임지는 자립원칙이 적용된 결과이겠지요. 토정이 경기 포천현감 때 세 가지 민생과 부국의 대책을 올린 상소 가운데 가장 중점을 둔 것은 육지와 해양자원의 활용이었습니다. 특히 바다와 섬이 없는 경기도 포천현의 경제를 살리기 위해 주인이 없는 국가 소유, 전라도 만경현의 섬과 황해도 풍천현의 섬을 수산과 소금 생산기지로 임시로 빌려 쓰겠다고 하는 대목이 나옵니다.

 

당시 군현 간의 경계 관할주의를 융통성 있게 활용하자는 것입니다만 건의는 받아들여지지 않았습니다. 만약 이 두 개 섬이 토정의 관할 행정구역에 있었다면 어떤 성과를 냈을까 하는 아쉬움도 남습니다. 현대 사회도 행정 관할주의는 여전합니다. 다만 군과 군이 서로 협조하는 광역시스템이 그 당시와 차이가 있지만 토정 이지함의 실사구시형 정책이 실천으로 이어지지 못했음을 안타깝게 생각합니다.    

 

Q. 토정 사상은 오늘의 한국 현실에서도 그 함의가 적지 않다고 논문에서 지적했는데, 토정 사상의 현대적 의미에 대해 말씀해 주세요. 


 장용기 교수    토정 이지함의 사상은 넓게는 사회복지도 포함되지만 엄밀하게는 사회경제학자라는 측면이 더 강하다는 생각입니다. 토정은 ‘본과 말의 상호보완’을 강조했는데요. ‘당신들의 의견도 맞다’며 상대를 인정하는 현실인식에서 출발하고 미래를 보자는 거지요. 조선시대 사림 대 훈구 싸움의 원인은 항상 과거에서 찾거든요. 과거에 집착하게 되면 현재나 미래도 없습니다. 지금도 정치는 보수와 진보, 경제도 재벌 대기업 대 경제민주화 등 양극으로 갈라져 있습니다. 그리고 정권만 잡게 해주면 모든 걸 이뤄내겠다는 목소리만 요란할 뿐 서민들의 삶과 연결되는 여야협조는 한 걸음도 못 떼고 있습니다.

 

과거를 잊자는 말은 아닙니다만 발목은 잡지 말 자는 것입니다. 예를 들면 재벌을 비호하지는 않지만 과거 군사독재 시절의 산물이고 현실입니다. 현실경제는 대단히 중요합니다. 재벌들이 잘한 일은 칭찬해주고 자진해서 개혁 할 수 있는 기회를 만들어 주는 것도 정치와 사회의 역할이라는 생각입니다.

 

앞서도 말씀드렸지만 토정의 실천사상은 지금도 유효하다고 생각됩니다. 조선 시대처럼 노골적으로 사농공상의 신분적 차별은 없지만 현실에서는 기득권의 세습, 금수저와 흙수저, 아직도 시민들 뇌리에 각인된 교육부 한 고위관료의 ‘민중은 개돼지론’, 그리고 결혼을 기피하는 ‘비혼문화’가 일반화되고 있습니다.

 

저는 개인적으로 기득권이 “나쁘다” “없애자”는 데 동의하지 않습니다. 기득권은 그 지위나 자격을 따기 위한 노력 등 사회의 역동성의 순기능적 성격도 있기 때문입니다. 다만 그 기득권이 사회의 부를 착취하는 수단이 되고 신분이 되고 대물림이 되는 그들만의 리그가 돼서는 안 된다는 겁니다. 이런 폐해가 이어지지 않도록 법과 제도정책을 만들어야 한다는 것이지요. 그럼에도 우리사회가 도입하지 못하는 것은 이런 법과 제도를 만드는 사람들이 기득권인 국회의원과 해당 전문가, 고위관료이기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특히 토정 이지함의 현장 정신은 오늘날에도 곱씹을 만한 대목이라고 봅니다. 포천과 아산현감 때 선조임금에게 올린 두 편의 상소문을 보면 백성들의 실상이 눈에 잡히고 손에 잡히는 듯 현장감이 넘칩니다. 어업수산기지로 만경현(지금의 군산) 양초도와 소금생산기지로 황해도 풍산현 초도 등 두 섬을 꼭 집은 것은 조선의 해금 공도정책 속에서도 전국의 섬을 샅샅이 조사했다는 반증입니다.

 

유교 성리학의 창시자인 중국 송나라 주희 선생을 신분과 서열을 따지는 고리타분한 유학자로 봅니다만, 그분의 실제 삶은 지극히 친백성적이었습니다. 사창을 실제로 운영해 쌀을 사고팔고 하면서 백성들의 가난을 구제했습니다. 성공 비결은 관 주도가 아닌 민간운영이라는 현장관점에서 접근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사창제도를 도입한 조선은 주자학을 신봉하면서도 양반유학자는 장사해서는 안 되고 사창도 주자방식의 철저한 민영이 아닌 지역향촌 사대부나 관이 개입했습니다.

 

제도의 현지 특성과 본질은 보지 않고 껍데기만 도입한 결과입니다. 현재도 법과 정책, 제도를 만드는 정치인이나 공직자나 학자 등 전문가들이 한국의 문화 특성 등을 무시하고 탁상에서 해외 선진국의 성공사례나 이론을 짜깁기해서 내놓지 말아야 하겠습니다.   


Q. 한국의 전통적 경로효친사상을 바탕으로 한 사회복지사상과 정책의 가능성에 대해 말씀하셨는데, 좋은 방안이 있으면 공 개해주세요.

 

 장용기 교수    논문 딱 한 편 써서 사회복지학박사 학위를 받았지만 저는 전문연구가도 전문학자도 더더욱 아닙니다. 그러나 제가 30년 넘게 지역 현장기자 경험과 토정의 사회복지 실천에 강점을 둔 논문을 쓰면서 눈여겨보는 실천 현장이 있습니다. 이제는 사라져가는 전통적 경로효친사상과 사회복지의 현대적 실천현장으로 섬과 바다를 주목하자는 것입니다. 조선시대는 왕조가 앞장서서 강제적인 공도정책으로 섬을 떠나게 했지만 이제는 인구감소와 수도권 대도시 집중 등 사람들이 살지 않아 스스로 섬이 비워지는 현대판 공도가 되고 있습니다.

 

“조선시대 공도와 현대판 공도”, 역사의 아이러니이지요. 그래서 4차 산업을 적용하는 역발상의 패러다임 전환이 필요하다고 봅니다. 섬은 육지와 달리 큰 면적의 규모가 아니어 서 대단위 사업장이나 농산·축산업을 할 수가 없는 곳입니다. 바로 그 강점을 살리자는 것입니다.  예전부터 전국의 섬, 특히 서해안 섬에는 바다 자연이 준 선물이 넘쳤습니다. 본인이 부지런하면 바닷가에 나가 파도에 떠밀려온 미역과 톳 등 해산물을 따고 줍거나 낙지라도 잡아 보릿고개 등 굶주림을 넘길 수 있는 곳이 바로 섬이었습니다.

 

과거 공도정책에도 유랑민과 노비들이 섬으로 간 이유는 뭐 겠습니까? 최소한의 생존권 보장이라는 희망이 있기 때문이 었습니다. 그래서 조선시대 소설에도 홍길동 무리가 바다 건너 이상향 율도국을 찾아 떠났다는 스토리가 나오기도 하지요.  천 개가 넘는 섬이 있는 전남 신안을 비롯해 진도, 완도군은 한 해역을 끼고 있어 대한민국 미래 삶의 창고입니다. 특히 신안군은 천사대교 완공으로 육지 접근성이 높아지면서 많은 관광객이 이어지고 있습니다.

 

세계 최초의 ‘섬의 날’도 제정됐습니다. 이순신 장군이 임진왜란이 끝난 뒤 유성룡 재상에게 보냈다는 “재조산하(再造山河)” 라는 기치를 문재인 대통령도 정권출범 때 내걸었습니다. 육지와 바다를 개조할 정도로 나라를 다시 만든다는 뜻입니다.  21세기 대한민국 재조산하의 출발점을 섬과 바다에서 찾자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곳에서 현대적 의미의 경로효친 사상의 실천 모델을 만들자는 것입니다.

 

아시다시피 섬은 남녀노소가 모두 어울려 살 수 있는 곳입니다. 어르신들이 역할도 할 수 있는 곳이고요. 지금 박우량 신안군수가 관광에 머물지 않고 청정바다를 중심으로 1차 친자연 농축수산사업과 2 차 가공, 3차 유통 레저 교육 문화 등 함께 어울려 살 수 있는 6차 산업을 추진하는 모습을 관심 있게 지켜보고 있습니다. 더군다나 고령화시대 대규모 베이비부머 국민연금세대가 속속 은퇴하고 있습니다. 젊은 층과 노년층이 함께 할 수 있 는 현대판 경로효친 모델 시범사업을 섬을 대상으로 펼칠 것을 정부에도 제안합니다.

 

특히 서해안 섬은 통일신라시대 장보고 선단이 한중일 삼각 항로의 중심권역이었습니다. 그래서 대한민국 영토의 5배가 넘는 섬과 바다를 중국과 일본 미국 그리고 동아시아인들의 섬 집단이주와 섬 장기임대 등 산업과 문화의 21세기 동아시아 공유공간으로 만들자는 것입니다. 20세기 산업화시대의 후진지역이 21세기 청정 패러다임의 관점에서 보면 새로운 선진지역으로 거듭날 수 있다는 미래 역사적 추세와 가능성을 신뢰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MeCONOMY magazine April 20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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