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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잊혀진 존재, 국군포로

한국전쟁 이후 남북 체제 대치 상황에서 발생한 국군포로 문제는 반드시 해결해야할 과제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문제 해결은 쉽지 않다. 이는 그동안 북한이 국군포로가 전혀 존재하지 않는다는 입장으로 일관했기 때문이다. 2014년 5월, 국내로 귀환한 국군포로는 모두 80명이다. 이들의 존재는 북한이 거짓말을 하고 있다는 것과 북한에 존재한 국군포로가 훨씬 많다는 것을 입증하고 있다. 국군포로로 북한에 억류됐다가 지난 2000년 70세의 나이로 죽음의 두만강을 건넜던 유영복(84) ‘귀환용사의회’ 회장을 통해 국군포로가 대한민국에 바라는 바를 들어봤다.

 

국내 귀환 국군포로 80명


1950년 6·25가 발발한 이후 1951년 11월 27일 판문점에서 휴전회담이 시작됐고 1953년 7월 27일 정전협정이 체결됐지만 미귀환 국군포로 문제는 60여 년이 지난 지금까지 풀리지 않는 문제로 남아있다.

 

1994년 조창호 중위가 처음으로 귀환하면서 국방부는 국군포로 현황 파악과 전산화 작업을 추진했다. 국방부의 전산화 작업 결과 전쟁 실종자가 41,971명으로 파악됐으며 포로교환 시 귀환한 8,726명과 전사처리자 13,836명을 제외한 19,409명이 실종된 것으로 파악됐다. 아직 송환되지 못한 국군포로의 규모는 상당할 것으로 보고 있다. 미귀환 국군포로의 송환문제는 북한당국의 협조가 전제돼야 하는데 북한은 국군 포로의 존재를 지속적으로 부인하고 있어 국군포로 문제해결이 쉽지 않은 상황이었다.


현재 국내로 귀환한 국군포로는 모두 80명이며 그 중 32명이 사망했고, 48명이 생존해 있다. 귀환한 국군포로와 북한이탈주민의 증언으로 북한에 생존해 있는 국군포로를 560여 명 정도로 추정하고 있다. 국방부는 생존자 외에도 사망자 910명과 실종자 300명을 포함해 1,770명의 국군포로가 북한에 억류돼 있거나 사망한 것으로 확인 및 추정하고 있다.


그렇다면 국군포로 문제는 송환뿐만 아니라 인권유린 관점으로 접근할 필요가 있다. 이를 해결해야하고 해결할 수 있는 주체는 국가다. 자국민 보호라는 국가의 기본적인 책무라는 관점에서 접근해야함이 마땅하다.

 

「국군포로의 송환 및 대우 관한 법률」제3조(국군포로의 송환 등에 관한 국가의 책무) 1항에서 “국가는 국군포로의 실태파악 및 송환과 국군 포로 및 억류지출신 포로가족의 대우와 지원에 관한 기본정책을 수립·시행해야한다”고 명시하고 있어 국가의 책무임을 밝히고 있다.

 

2000년 남북정상회담 이후 정부는 지속적으로 국군포로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노력했지만 북한은 협의 자체를 부인했다. 이런 북한의 태도 때문에 정부는 가족 간 생사확인과 상봉에 주력했지만 국군포로나 납북자의 송환이라는 성과는 없었다.

귀환 국군포로 조사∙ 연구 진행돼야

 

이러한 결과에 대해 일각에서는 이미 귀환한 국군포로에 대한 조사와 연구가 미흡하다는 지적이 계속되고 있다. 또한 정부와 민간의 역할분담을 통한 공동 노력이 필요하고 국제사회와의 공조를 통한 공동대응 방안을 마련해야 한다는 목소리도 높다. 이에 정재호 국군포로·납북자정착지원센터 센터장은 “귀환 국군포로들의 사망과 고령화로 관련 경험에 대한 기억이 소멸될 우려가 있기 때문에 국군포로 문제에 대한 조사와 연구가 하루빨리 진행돼야 한다”고 말했다.

이어 “귀환 국군포로는 한국전쟁 이후 북한의 포로송환 의무 이행에 대한 국제법 위반 여부를 판단할 사건을 경험한 귀중한 존재”라며 “이들을 통해 체포 당시 시점부터 북한 억류생활, 북한을 탈출하여 귀환하는 과정까지 각 시기마다 포로에 대한 국제법상 위반되는 사건들을 조사할 필요가 있다”고 밝혔다.

 

그는 귀환 국군포로들의 소중한 생애 경험을 역사에 남기고 후세대에게 알리기 위한 활동을 수행해야 한다며 귀환용사들의 존재와 활동을 중고등학교 교과서에 기록하거나 전쟁기념관과 같은 안보 공간에 기념비를 세워서 기념할 필요가 있다고 주장했다. 본지는 지난 2000년 귀환해 귀환용사의회 회장으로 국군포로를 위한 목소리를 내고 있는 유영복 귀환용사의회 회장의 이야기를 직접 들어봤다.

 

북한에 억류됐다가 탈출하신 것으로 압니다. 어떻게 탈출하신 건가


저는 항상 남한에서 찾으러 올 거라는 기대로 살았습니다. 그러다가 2000년 7월에 북한을 떠나게 되었는데요. 당시만 해도 탄광 광산에서 일하면서 탈북할 용기가 없었고 용기만으로 되는 것도 아니었습니다. 더군다나 그곳에서 가정을 이뤘는데 국군포로 자식으로 설움이 많았던 자식들을 두고 오기가 쉽지 않았습니다.

 

2000년 6월로 기억되는데요. 남한에서 김대중 대통령이 북한에 오셨습니다. 얼마나 감격스러웠는지 모릅니다. 김대중 대통령이 국군포로 문제를 언급하고 우리 국군포로들을 우리의 고향으로 고국으로 데려갈 것이라는기대도 컸습니다. 그런데 6·15남북공동선언문에 국군포로 문제가 전혀 언급되지 않아 상당히 실망했죠. 이제 더는 기다릴 수가 없다고 생각해 한 달 후에 바로 탈출했습니다. 그때 제 나이 70세였습니다.


물론 탈출을 할 때는 이미 살 만큼 살았으니 잡혀죽어도 한이 없겠다는 생각으로 그해 7월 27일 혼자서 두만강을 건넜습니다. 그렇게 중국으로만 가면 한국에 올 수 있을 줄 알았습니다. 그런데 막상 중국에서 여권 문제 등 많은 어려움이 있었습니다. 결국 그립던 고국에 돌아와 가족도 만나고 소속됐던 본부대 장병들도 만났습니다. 그때 사단장이 그럽디다. “당신이 전사한 줄 알았는데 살아서 그래도 대한민국으로 목숨 걸고 탈출해온 당신. 당신이 용감히 싸운 것을 기억한다”고요. 가슴이 시려 그 말에 감동했습니다.

 

평생을 가슴 속에 그리던 곳인데요. 현재 생활은 어떠신가요.

부대에서 훈장을 주는데 너무나 가슴이 벅찼습니다. 나보다 더 용감히 싸운 분들이 있는데 내가 대신 받는 것이 아닌가 하는 미안한 마음도 들었고요. 북한에 있었던 국군포로들도 단 하루만이라도 남한에 와서 살 수 있다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죠. 이곳에 와서 기쁘지만 오지 못한 이들 생각에 미안하기도 합니다. 남한으로 온 지 14년이 됐는데 국군포로들이 북한에 얼마나 살아있을까 하는 걱정도 되고요. 현재 남한으로 귀환한 국군포로는 80명인데 33명이 돌아가셨습니다. 또 살아있는 사람 중에서 3분의 1이 병원생활하고 있고 나머지 3분의 1은 거동이 불편한 상태입니다.
막상 고국으로 돌아왔지만 아쉬운 부분도 많을 것 같습니다.


북한은 계속해서 국군포로가 존재하지 않는다고 주장해왔었고 한국정부도 그랬습니다. 그런데 1992년 한국과 중국이 수교하면서 국군포로가 중국을 통해 한국으로 귀환이 가능해졌죠. 1994년 조창호 중위가 귀환을 시작하면서 총 80명의 국군포로들이 본국으로 돌아오게 됐는데요. 결국 그것이 국군포로가 없다고 주장했던 북한과 찾으러 오지 않았던 대한민국 정부에게 국군포로의 존재를 공식적으로 알리는 기회가 된 것입니다.

 

사실 죽음을 무릅쓰고 귀환하다가 죽임을 당한 이들도 많습니다. 우리 귀환군인들은 북한이 인도주의적인 관점으로 풀어준 것이 아닙니다. 스스로 가족도 두고 죽음을 각오하고 두만강을 건너온 것이죠. 국군의 명예를 끝까지 지킨 겁니다. 정부가 우리를 판문점을 통해 데려왔으면 우리는 귀환병인데 목숨을 걸고 스스로 돌아왔기 때문에 귀환용사라고 부릅니다.

 

이에 반해 북한의 장기수들은 대한민국 정부의 인도주의적인 관점으로 판문점을 통해 북으로 돌아갔죠. 그들은 그렇게 북한으로 가서 영웅대접을 받았습니다. 목숨 걸고 귀환한 국군 포로들과는 사뭇 다른 대접을 받고 있는 것이죠.

 

귀환용사의회를 만드신 계기가 있으신지요.

 

우리는 국군포로가 없다는 북한 당국의 말이 거짓이라는 것을 증명하고 탈출해 왔습니다. 마음은 고국으로 돌아가고 싶었지만 고국으로 돌아오지 못한 채 먼저 저 세상으로 간 동료들도 다 우리와 같은 심정이었을 것이기에 ‘귀환용사의회’를 만들었습니다. 하루라도 발전된 대한민국의 모습을 함께 봤으면 어땠을까 싶어요. 죽은 사람들은 말을 못하니까. 살아있는 자로서의 도덕적 의무라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또 아직 끝나지 않은 6·25, 6·25를 모르는 후세대들에게 알려야 했습니다. “아픈 역사들을 잊지 말아 달라”고 말하고 싶어요. 광산탄광에 일하면서도 본분과 명예를 지킨다는 신념으로 살았는데 통제와 고역이 길어지다 보니 몇만 명 중에 겨우 80명이 돌아왔습니다. 후세대들에게 안보의식을 높이고 대한민국의 명예를 지킨다는 의미의 산교육으로 우리 귀환용사들을 사용하기를 바랍니다. 전쟁기념관에도 국군포로, 귀환용사들 관이 있다는 것을 후세대들에게 교육했으면 좋겠고요. 우리는 절대 변절자가 아닙니다.

그렇다면 현재 북한에 얼마나 많은 국군포로가 살아남아 있을 것으로 보시는지요.

 

한국전쟁 당시 국군포로는 8만2천여 명으로 정전협정때 8천여 명만 국내로 돌아왔어요. 정부는 남겨진 국군포로 가운데 3백5십여 명 정도가 생존해 있는 것으로 추정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내 생각에 국군포로 귀환 문제는 때가 너무 늦었어요. 이미 때늦은 일이 돼버렸습니다. 국군포로들이 살아있다면 이미 대부분이 80대예요. 얼마나 살아남아있는지 모르지만 몇 안 되는 국군포로 생존자 중에서 오고 싶어도 오지 못하는 분들이 대부분일 것입니다. 이제 혼자서 움직이기도 힘들고, 북에 아들딸손자까지 다 둔 사람이 한국에 올 자신도 없으며 한국에 와봤자 혼자서 뭐하겠어요. 국가가 나서서 데려온다면 모를까, 데려온대도 가족 다 두고 한 사람만 데려올 수도 없고. 정부가 적극적으로 해결해주지 않아서 아쉽기만 합니다.

박근혜 정부에게 바라는 바는

 

국방부에 왜 국가가 국군포로문제를 어떻게 하지 못하느냐고 말한 적이 있어요. 김대중 대통령도 2000년 6월 북한에 왔을 때 국군포로문제에 대해 한 마디도 하지 않았고요. 일본은 몇 안 되는 민간인 납북자에 대해 북한에 계속 요구하고 총리가 직접 가서 데려오더군요. 미국은 6·25전쟁 때 죽은 유해를 북한에 가서 가져오고 있고요.


그런데 우리 대한민국은 살아있는 국군을 못 데려와서 안타깝기만 합니다. 이미 너무 때가 늦어버렸지만 단 한 사람이라도, 마지막 1명이라도 포기하지 말고 국가적인 의지를 보여주길 바랍니다. 또한 국제사회와도 공조해서 북한의 만행에 대해 알려야 합니다. 나의 이런 바람이 현실성 없는 요구가 아니길 바래요. 북한이 억지 쓰고 있기는 하지만 한국 정부는 끝까지 밀고 나가기를 부탁합니다. 대한민국이 경제는 발전했을지언정 이런 문제에 있어서는 안타깝기만 합니다.

후세대에게 하고 싶은 말씀은

 

비참했던 사실들을 잊지 말고 아직 끝나지 않은 6·25전쟁을 마음 속으로 잊지 않아야 합니다

 

MeCONOMY June 20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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