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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획


맥도널드 「레이 크룩」이 드리는 성공 철학 【제2편】 "노력하기 싫은데 성공은 하고 싶다고?"

『벼랑 끝에 선 자영업자들에게』

 

코로나19 4차 대유행으로 사회적 거리두기가 격상되자, 소상공인들이 “우리는 죄인이 아니다”라고 외치고 있다. ‘더는 버틸 힘이 없다’면서 57%가 휴업, 폐업을 고민하고 있다. 53세에 도전을 시작한 맥도날드의 실질적인 창업자 「레이 크록」에게 위기를 탈출할 조언을 들어본다.

 

53세에 장사에 도전할 수 있도록 하는 힘은 어디서 오는가?

 

「레이 크록」이 주변의 반대를 무릅쓰고 1년여의 준비 끝에 1955년 4월 15일 자신의 첫 맥도널드 1호 매장을 낸 나이는 53세였다. 은퇴를 준비하는 나이였지 새롭게 뭔가 시작할 나이가 아니었다. 그런데 뭘 믿고 늦은 나이에 음식점을 열었을까?

 

맥도널드 형제와 프랜차이즈 계약을 맺고 자신의 맥도널드 1호점을 냈던 1950년대는 진공청소기, 세탁기, 토스터, 믹서, 다리미 등 가사 노동에서 벗어나게 해주는 가전제품들이 등장하던 시기였다. 아울러 중류 가정에 있던 동거자 하녀와 요리사가 사실상 사라지고 있었으며 미국은 경제적으로 성장하고 있었다.

 

하지만 그가 매장을 연 배경은 이러한 경제, 사회적 분위기가 아니었다. 오히려 종이컵, 주방기기, 식당 소품, 믹서기 판매 영업사원으로 30년 이상 쌓은 장사의 경험이었다. 그런 물건을 팔면서 식당을 다니는 동안 자연스럽게 식당 운영을 어떻게 하고 어떤 식당이 장래성이 있는지를 보는 안목이 생겼기 때문이었다. 음식과 관련한 상품을 팔려면 식당의 영업방식이나 메뉴, 주방의 구조 등을 파악하고 있지 않으면 안 된다. 30년을 했으니, 어느 식당이 경쟁력이 있는지를 한눈에 알 수 있었다.

 

실제로 그가 직접 가서 처음 본 ‘맥도날드 형제의 바비큐’ 식당은 햄버거 등 9가지 메뉴를 가장 빠르고 맛있게 표준화해서 팔고 있었다. 그러니까 앞 편에서도 말했듯이 맥도날드 형제는 식당을 어떻게 운영하면 비용이 절감되고 이익을 많이 낼 수 있는가를 잘 알고 있었다. 말하자면 훌륭한 식당 운영자들이었다.

 

맥도날드 형제는 이 식당을 하기 전에 주차장에서 드라이브인 식당을 하다가 매 출이 제자리를 맴돌자, 과감히 문을 닫고, 새로운 시스템을 연구했다. 이거다 싶었을 때, 맥도날드 비비큐 식당을 열었던 것이었다. 30년 장사의 경험으로 식당 운영 시스템에 대해 안목을 가진 「레이 크룩」이 이런 맥도널드 형제의 패스트푸드 시스템을 그냥 스칠 리 만무했다. 이 식당에서 햄버거와 프랜차이즈, 그리고 패스트푸드의 무궁한 가능성을 보자, 성공할 수 있다는 자신감이 생겼다. 그는 자신의 나이를 잊고 과감하게 승부의 주사위를 던졌다.

 

가장 싸고, 맛있는, 그리고 건강한 짜장면 ‘Korean Black Noodle’

 

「레이 크록」이 살아서 코로나-19로 벼랑 끝에 몰린 우리나라 자영업자들(다른 나라 자영업자도 마찬가지지만)을 보고 어떤 생각을 할까? 매출 감소로 영업이 어려워 휴업하거나 버티거나 하는 건 본인 사정에 따라 다르니까 차치하고라도, 심장마비로 81세에 죽을 때까지 현장을 떠나지 않았던 그는 주방부터 들어가서 뭔가 이야기를 할 듯하다. 주방 바닥에 물기가 있는지 없는지, 주방 시스템은 어떤지, 객석에 휴지가 떨어져 있는지 어떤지, 창문 유리를 닦았는지 아닌지, 환풍기의 기름때를 제거했는지 어떤지를 세심하게 살펴볼 것이다.

 

 

왜냐하면, 그가 첫 매장을 열었을 때부터 죽을 때까지 가장 중점을 뒀던 부분이었으니까. 그가 우리나라에서 가장 관심을 보일 메뉴는 짜장면일 듯 하다. 어느 나라 사람이나 거부감없이 맛있게 먹을 수 있는 음식이고, 햄버거처럼 싸고 맛있고 빠르게 365일 맛이 변함없는 음식으로 만들 수 있는 몇 안되는 메뉴라고 생각하기 때문일 것이다.

 

그가 시카고에 첫 맥도널드 프랜차이즈 매장을 열고 고민한 일은 어떻게 하면 햄버거의 패스트푸드 시스템을 확장 할 수 있을까 였는데 다음 3가지였다. ▲첫째, 매장의 프랜차이즈화 ▲둘째, 맛과 품질의 표준화 ▲셋째, 생산과 공급 시스템의 구축이었다. 그는 짜장면에 이 원칙을 적용하면 성공할 수 있다고 말했을 것이다. 웬만한 중식당은 짜장면을 만들 때 밀가루 반죽과 제면 (製麪)을 기계로 처리하지만 10여 가지 재료와 춘장을 볶는 일과 면을 삶은 일은 주방장이 직접 담당하는데 춘장을 미리 대량으로 볶아 놓고, 주문에 따라 면을 삶아내면, 짜장면은 대개 5~6분 안에 제공할 수 있다.

 

이 과정을 지켜본 「레이 크록」은 시간을 단축하기 위해 춘장 볶기나 면 삶기를 반자동화 혹은 자동화하려 할 것이다. 그래서 햄버거처럼 4분 반 안에 만들어 내는 시스템을 만들어, 프랜차이즈화를 시도하려고 했을 것이다. 이를 위해 세상에서 가장 맛있는 짜장면 레시피와 조리 시스템을 개발하고, 여기에 들어가는 최상의 밀가루, 춘장, 돼지고기 등의 재료 공급자와의 협력관계를 맺을 것이다.

 

그는 짜장면의 궁극적인 맛이 고품질 돼지비계를 튀겨 낼 때 나오는 돼지기름에 있다는 것을 알게 될 것이다. 이 기름을 가지고 춘장을 볶을 때 극강의 맛이 나오는 조리 프로세스를 자동화해서 특허를 낼 것이다. 최상의 짜장면은 다른 재료도 중요하지만 무엇보다 좋은 돼지고기와 비계에 있으므로 그런 돼지고기를 생산하는 축산농가를 찾아내지 않겠는가. 그러니 ‘장사가 어려울 때가 기회다, 자신을 돌아보며 프랜차이즈화 할 수 있는 요소가 무엇인지 찾아 보라’고 자영업자에게 말할 것이다. 위기는 곧 기회라면서.

 

사업은 혼자 하는 것이 아니라(by yourself) 본인을 위해 하는 것(for yourself)이다!

 

그는 짜장면이 지금 대만에서 유행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려줄 것이다. 대만에서 분식집을 했던 젊은이가 귀국 한 뒤, 중식당 주방에서 짜장면을 배워 다시 대만으로 돌아갔다면서 말이다. 아울러 일본에는 짜장면집이 없어서 한국에 와서 짜장면을 즐기고 있다는 사실도 알려줄 것이다.

 

“그러니 말이요, 당장 당신만의 짜장면을 “Korean Black Noodle”이라는 상표로 만들어 등록해야 되지 않겠소?”라 할 것이다. 밀가루와 콩가루를 섞어 발효한 춘장은, 중국 산동성보다 한국에서 발효된 춘장의 맛이 뛰어나다. 국내 시장의 90%를 장악한 춘장은 중국계 3세가 한국에서 만든다. 그런 걸 보면서, 그는 ‘자기 같으면 가장 한국적인 또 다른 춘장을 만들어보겠노라’고 조언도 해 줄 것이다.

 

미국의 농무성이 1929년 콩을 중심으로 농업 유전자원 수집을 위해 ‘동양 식품 원정대(1929~1931)’를 파견했다. 이 원정대의 Morse & Dorsett는 우리나라(조선) 전역에서 콩 유전자원을 수집했다. 이들이 수집한 총 4,471점 중 우리나라(조선)의 것이 3,379점(76%)이며 일본 579점(13%) 만주 513점(11%)으로 보고했다. 한국은 콩 종주국이다.

 

“지금 제 이야기가 너무 꿈같고 현실성이 떨어진다고 보십니까? 당장 힘들어 죽겠는데 무슨 뚱딴지같은 소리냐고 하실지 모르겠습니다. 저도 맥도널드 매장을 인수하기 전까지 30년 기나긴 고통의 밤을 지새웠습니다. 하늘이 무너져도 솟아날 구멍이 있다는 한국의 속담도 있지 않습니까? 절실하면 하늘도 길을 내준다고 합니다. 나만의 장사를 꼼꼼하게 정리 정돈해 보시기 바랍니다.”

 

나만의 매뉴얼에 집중한다!

 

레이 크록은 매일 자신의 맥도널드 1호 매장에 출근해서 직접 청소도 하고 음식을 관리하면서 프랜차이즈 사업에 대한 매뉴얼을 정비했다. “완벽이란 성취하기 매우 어렵다. 하지만 맥도날드에는 목표로 하는 완벽의 기준이 있어야 한다” 그러면서 그는 품질, 서비스, 청결, 가치의 명확하고도 완벽한 기준을 세웠다.

 

1955년 1호점을 연 뒤 1959년까지 4년 만에 100호점을 위스콘신주 퐁뒤라크에 문을 열었다. 매장 수는 늘어나도 영업 이익은 늘어나지 않았다. 각 프랜차이즈의 로열티가 너무 쌌기 때문이었다. 레이 크록은 방법을 바꿔 본사가 지역 매장을 매입하고 이를 점주에게 임대했다. 그러자 맥도날드 본사의 자산도 커지면서 임대 수입이 늘어났다. 1958년, 1억 번째 햄버거가 판매되었다.

 

그러자 맥도날드 지점을 내겠다는 점주들이 줄을 섰고 본점의 이익도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나기 시작했다. 그렇지만 그는 본사, 가맹점, 재료 공급자의 비전이 공유되고 협력이 이루어져야 한다고 판단했고, 지점마다 똑같은 시스템, 서비스, 메뉴의 표준화 작업이 필요하다고 생각했다.

 

 

맥도날드에서 ‘성경’이라 부르는 매뉴얼 북은 처음 70페이지에서 시작해 지금은 약 700페이지 분량으로 늘어났다. 맥도날드의 통일성, 표준화를 지탱하고 있는 힘이다. 「레이 크록」이 이처럼 맥도날드의 맛과 품질에 대한 표준화에 집착한 것은 ‘맛에 대한 이질감’을 없애기 위한 목표 때문이었다. 누구나 낯선 곳에서 먹는 음식에 대한 거부감과 부담감이 있다.

 

하지만 그곳에서 황금 아치의 맥도날드를 발견하는 순간, 대중들은 맥도날드의 보편적인 맛을 떠올리며 주저 없이 햄버거를 선택하게 한다는 거였다. 바로 프랜차이즈의 가장 기본적인 생각을 실천하자 맥도날드는 폭발적으로 성장하기 시작했다.

 

1961년 「레이 크록」은 맥도날드 형제와 새로운 계약을 맺었다. 맥도날드 형제가 그동안 브랜드 사용료로 매년 받던 매출의 0.5% 로열티를 포기하는 대신, 현금으로 270만 달러를 받는다는 조건이었다. 맥도날드 형제는 세 후 각자 100만 달러씩 받을 수 있었다. 이 액수는 맥도날드 형제가 향후 15년 정도 받을 수 있는 로열티 금액이었다. 「레이 크록」의 변호사는 “너무 비싼 금액이다,”라고 말렸지만, 그는 단박에 수락했다. 그리고 맥도날드 상표권, 황금 아치, 조리법 등을 비롯한 모든 권리를 형제로부터 인수했다. 최소한의 메뉴, 비용 절감의 시스템, 운영의 효율성에 대한 자신감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1966년 주식을 상장하자 시가 총액은 한 달 만에 2배로 뛰었다. 그리고 좌석을 갖춘 매장도 늘리기 시작했다. TV 광고를 통해 맥도날드를 ‘백인 노동자의 식당’에서 ‘가족이 함께하는 식당’으로 이미지를 바꾸기 시작했다. 1967년 맥도날드의 최초 해외 지점이 푸에르트리코에 문을 열었다. 자신의 1호 매장을 연 지 12년 만에 맥도날드는 드디어 세계로 나갔다. 1976년 창립 20주년을 맞은 맥도날드는 22개국 약 4200여 개의 매장에서 10억 달러의 매출을 달성했다.

 

1977년 그는 맥도날드의 선장 자리를 「프레드 터너」에게 물려주었다. 「프레드 터너」는 맥도날드 1호점의 종업원 출신이었다. 햄버거를 팔던 종업원이 맥도날드의 회장이 된 것이다. 이후에도 「레이 크록」은 불 편한 몸에도 불구하고 휠체어를 타고 매일 사무실에 출근했다. 새로운 가맹점이 문을 열 때마다 첫날 실적을 보고 받는 것도 거르지 않았다. 1984년 1월 83세의 나이에 심장마비로 사망할 때까지.

 

나만이 견뎌야 하는 30년의 기나긴 밤

 

1983년 미국의 잡지《에스콰이어》는 ‘20세기 미국인의 생활방식에 기여(寄與)한 50명’ 가운데 한 사람인 레이 크록을 이렇게 썼다.

 

“콜럼버스는 미국을 발견했고 제퍼슨은 미국을 건국했다. 그리고 레이 크록은 미국을 맥도날드화 했다. 미국의 이미지를 만든 것은 컴퓨터도, 핵무기도, 예술도, 과학도 아니다. 바로 햄버거이다. 레이 크록은 미국인의 입맛을 맥도날드 햄버거로 표준화했지만, 그의 진정한 공로는 ‘ 맥도날드 시스템’이라는 프랜차이즈를 창조해 낸 것이다. 그는 시대의 리더이다. 이제 우주 비행사들조차 맥도날드가 필요하게 될 것이다.“

 

전 세계 3만 5천여 개의 매장, 하루에 약 7천만 명의 손님이 찾는 맥도널드도 그 시작은 시카고 변두리의 작은 햄버거 가게였다. “맥도날드가 (그 가게로부터) 세계적인 기업으로 성공해 돈벼락을 맞았다는 건 맞는 말일지 모르지만, 그 뒤에는 (나만의) 30년에 걸친 긴긴 밤이 있었다”고 고백한 맥도널드 햄버거의 「레이 크록」, 타고난 재능, 학식보다 끈기와 인내를 더 큰 미덕으로 여겼기에 30년에 걸친 긴긴 밤을 절망하지 않고 이겨낼 수 있었는지 모른다. 그를 보면 문득 2천3백 년 전에 했던 맹자의 말이 떠 오른다.

 

“하늘이 장차 그 사람에게 큰 사명을 주려 할 때는 반드시 먼저 그의 마음과 뜻을 흔들어 고통스럽게 하고, 그 힘줄과 뼈를 굶주리게 하여 궁핍하게 만들어 그가 하고자 하는 일을 흔들고 어지럽게 하나니 그것은 타고난 작고 못난 성품을 인내로 담금질을 하여 하늘의 사명을 능히 감당할 만한 역량을 키워주기 위함이다.”(맹자 고자장구 하, 告子章句下)

 

코로나19로 힘든 시간을 보내며 폐업과 휴업의 벼랑에 선 소상공인들이여, 어쩌면, 더는 못 참겠다고 생각하는 순간부터 이미 좋아지고 있는 건지도 모른다. 그것이 하늘의 뜻이라면 더더욱 그러하다. 가시 없는 왕관이 어디 있겠는가? 강하고 담대하게 난관을 뚫고 나가보자.

 

MeCONOMY magazine September 20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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