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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현장으로 돌아온 이장호 감독

“흥행보다는 메시지 전달에 집중하는 영화 만들고 싶다”


한국영화를 얘기할 때 이장호 감독을 빼놓을 수 없다. 1970~1980년대를 풍미했던 이장호 감독이 본격적인 작품 활동을 위해 다시 영화 현장에 돌아왔다. 새 작품의 촬영을 위해 바쁘게 움직이고 있는 이장호 감독을 만나봤다.

이장호 감독이 1974년에 내놓은 <별들의 고향>은 그야말로 장안의 화제였다. 오늘날에 와서 당시 서울 관객 46만 명을 동원했다는 것이 어느 정도였는지 상상하기 어렵다. 요즘 상영되고 있는 <광해, 왕이 된 남자>가 관객 1천만 명을 돌파했다고 하지만 시중에서 이 영화를 놓고 느끼는 체감은 미미하다. 그러나 1974년 <별들의 고향>은 당해 연도뿐만 아니라 근 10년 가까이 <별들의 고향>의 포스터를 거리와 가게에서 심심찮게 볼 수 있었고 영화 속 명대사를 다방이나 술집에서 들을 수 있었다. 그 시대의 아픔을 리얼하게, 감동 있게 그렸기 때문이었다. 
영화 <부러진 화살>로 묵직한 캐릭터 연기를 보여준 안성기 씨의 출세작 <바람 불어 좋은 날>(1980년)도 이장호 감독이 만들었다. 이장호 감독은 한국 영화계의 전설 신상옥 감독으로부터 영화를 배웠다. 신 감독 아래서 8년을 있었다. 이장호 감독은 회상에서 스승인 신 감독의 모든 것을 닮고 싶었다고 말했다. 이 감독을 보면 그곳에서의 도제 생활이 그의 근성을 길러준 모태가 되지 않았나 생각된다.
이장호 감독은 중고등학교 시절에 밴드부에 있었고 대학전공은 건축미술이었다. 예술적 감성을 청소년기에 습득한 결과 그의 영화는 언제나 진한 감성적 여운을 전해준다.
동생 대학등록금으로 최인호 씨의 당대 최고의 신문연재소설 <별들의 고향> 판권을 계약했다는 건 지금 들어도 흥미진진한 얘기다. 그의 첫 ‘입봉’ 작이자 출세작이었다.
군사독재시절 부당하게 영화 활동을 정지당한 이 감독은 먹고 살기 위해 집도 팔고 낡은 시영아파트로 이사 가기도 하고 충무로에서 작은 술집을 연 적도 있었다. 당시의 심정을 모 언론과의 인터뷰에서 괴로워서 삭발하고 절에 들어갈 생각도 했다고 털어놓았다. 다른 감독들은 한두 편 정도의 히트작이 고작인데, 이 감독의 작품 대부분이 주목을 받고 수상작이 많은 것은 이와 같은 굴곡진 체험과 그런 것들을 작품 속에 담아내려는 비상한 노력의 결실이라고 여겨진다.

최일남의 소설을 영화화한 <바람 불어 좋은 날>은 한국영화의 리얼리즘 회복한 영화로 평가받는다. 그는 그 영화를 위해 자료 조사를 하면서 당시 우리 사회의 부조리를 생생하게 목격하고 그것을 영상에 옮겨 담는다. 그는 1981년 <어둠의 자식들> <바보선언> 등 일련의 리얼리즘 영화를 잇달아 선보이면서 한 차원 높은 영화세계로 나가게 된다. 
그는 당시에 우리 사회의 가장 취약한 계층 이야기를 담고 싶었지만 전두환 정권 시절 갑자기 자신과 영화를 제작하겠다고 나서는 사람들이 뚝 끊어져 버렸다고 말했다. 한 1년 간 놀다가 과거 영화를 하지 못했던 악몽이 떠올라 다시 상업영화를 찍는다. <무릎과 무릎 사이> <어우동>, 그리고 공전의 히트를 쳤던 <이장호의 외인구단>(1986년)을 제작하게 된다.  
이장호 감독을 만나러 전화를 했다. 그는 매주 토요일 오전 일찍 청계산 입구에서 색소폰을 불며 노방전도와 예배를 드리고 있다고 말했다. 이장호 감독은 고등학교 때 밴드부에 있었고 한때 음악을 하려고 했다고 들었다. 그래서 교수로 있는 동안에도 여러 행사에서 색소폰을 연주하는 모습을 보도를 통해 보았지만 실제로 보기는 처음이었다.
청계산 옛골 도로변 등산로 입구 초입에 아담한 교회가 있었다. 오전 9시쯤 손이 곱을 정도로 기온이 떨어졌는데, 이장호 감독이 연주를 하고 있었다. 등산객들은 이장호 감독을 알아보고 손을 들어주거나 고객을 끄덕이며 가볍게 인사하기도 했다. 두 시간 가까이 추위에 떨며 봉사를 마친 이 감독과 교회에서 마주 앉았다.

이 교회와는 어떤 인연이 있나요?
저는 새문안교회에 다녔어요. 이곳 길 교회의 목사님은 금강제화에서 전문경영인으로 계시던 CEO였어요. 나이가 들면서 어렸을 때부터 꿈인 목회자의 길을 가고자 저녁에는 신학대학원을 다니며 준비를 했죠. 그러다가 정년퇴직하면서 이 교회를 지었는데 제가 그 분과 함께 이 교회의 창립 멤버로 왔어요. 목사님이 저의 신앙을 다시 회복하는 데 힘이 돼 주신 분이예요. 저는 이 교회에 와서 장로가 되었어요.
토요일마다 열리는 ‘사랑의 참새방앗간’은 등산객들과 함께 하기 위해 노상전도를 하는 시간입니다. 등산객들에게 하나님의 길을 열어주실 것이라는 믿음을 갖고 3년째 매주 토요일아침에 색소폰연주를 하고 옥외예배를 드리고 있습니다. 한 겨울은 너무 추워서 오늘을 마지막으로 야외예배를 드리고 내년 3월까지는 쉽니다. 악기도 얼고 사람도 얼다보니까 제대로 연주를 할 수가 없거든요.
3년 정도 꾸준히 하니까 요즘은 알고 인사하는 등산객들도 꽤나 많아 보람을 느낍니다. 잠시 교회에 들어와 쉬어가고 기도하는 분들도 있고요. 원래 저는 크리스천이 아니었어요. 저는 돌아가신 온누리교회 하용조 목사님을 통해 하나님을 접하게 되었습니다. 하 목사님과 성경공부를 했을 때였어요. 1980년 ‘바람 불어 좋은 날’이라는 영화를 할 때만 해도 제 지갑에는 늘 두둑하게 부적이 들어 있었죠. 하 목사님을 만나서 그 부적들을 태웠어요. 명보극장 스크린 뒤에도 부적들을 몰래 붙였어요. 그때만 해도 영화가 흥행하는 게 모두 부적의 힘이라고 믿었죠. 그런데 부적을 뗐는데도 영화가 흥행을 하더라고요. 벌써 오래됐네요.(웃음)

지금 서울영상위원장으로 2년 정도 계셨죠. 그동안 위원장으로 있으면서 성과라고 한다면 어떤 걸 꼽을 수 있을까요?
서울영상위원회는 제 전임자였던 황기성 사장님(8년간 서울영상위원회 운영위원장 재임, 영화 프로듀서)이 워낙 탄탄하게 기반을 잡아놨어요. 지금의 성과는 그분이 노력한 결과라고 보시면 됩니다. 저는 그 분의 업적을 수성하는 데 노력할 뿐입니다. 올해의 성과라고 한다면 아무래도 시나리오 작가들을 위한 ‘작가 존’을 만든 것을 들 수 있는데요. 원래 영상위원회 내에는 ‘디렉터 존’, ‘피디 존’, ‘프로덕션 존’을 한 실내공간에서 사용해왔어요. 그런데 작가 존은 없었거든요. 이렇게 해서 전부 2천 평의 사무실을 사용하도록 하고 있습니다.
그간 시나리오 작가들이 지속적으로 노력해서 만든 거라 더 뿌듯하죠. PD, 감독, 프로덕션, 작가 등 우리 영화인들이 한군데서 영화발전에 노력할 수 있으니까요. 아주 중요한 공간이죠. 그래서 서로 임대하기 위해 경쟁이 아주 치열합니다. 말이 임대지 무료개방이나 마찬가지거든요. 한 달에 관리비가 작가들의 경우 3~4만원, 감독이나 프로덕션은 10~20만 원 정도에요.

감독님께서 왕성하게 활동할 당시와 지금의 조건을 비교해봤을 때 어떤가요?
지금은 뭐 천국이죠. 배급도 안정되고...물론, 경쟁이 심해 극장을 잡기도 힘들고 투자 받기도 어렵고 여전히 힘들지만 일단 투자를 받거나 배급을 받은 사람들에게는 천국이라고 생각합니다. 우리가 영화를 했을 때와는 감히 상상할 수도 없는 일이죠.
올해 가장 기억이 나는 일이 있다면 어떤 게 있을까요?
올해 의미 있는 일이라면 우리 영상위원회에서 처음으로 주관했던 ‘제1회 크리에티브 멀티마켓’이라는 것을 꼽을 수 있습니다. 10월 하순 3일간 열렸는데 뜨거운 관심을 받았습니다. ‘원 소스, 멀티 유스(one source multi use)’ 시대라고 해서 시나리오든 뭐든 개발만 하면 그것이 뮤지컬이나 영화, 애니메이션 등 여러 미디어로 확장하는 시장을 열었는데요. 상당히 많은 사람들이 응모를 했죠.
작가 그룹과 기획제작자 그룹으로 신청자를 접수하여 행사 3일 동안 의무미팅, 지정미팅, 자유미팅 등 여러 프레젠테이션 방식으로 열렸어요. 짝을 맺어주는 것이죠.
지난 10월에 응모한 분들 중에서 새로운 작품을 선정해서 지원하기로 했습니다. 그밖에 참신하고 좋은 기획과 아이디어를 선정해 시상도 했습니다.

또 북한인권영화제도 열었죠.
우리가 바라는 것은 젊은 청년들에게 북한 인권에 대한 인식을 심어주고 싶다는 생각입니다. 저는 고향이 함경남도 북청이라 일찍이 고향을 떠나서 지금의 탈북자들과 마찬가지였죠. 6.25 전쟁이 나서 부산으로 피난을 왔는데요. 그 시절 부산이 우리를 받아 주지 않았더라면 얼마나 서러웠을까를 생각을 하면 지금도 눈물이 나요. 지금 우리 청년들 시기에 만약에 통일이 온다면 제가 피난을 왔던 그때처럼 그들을 받아줄까 하는 걱정이 듭니다. 아마도 상당한 어려움을 북한 사람들이 겪지 않을까 하는 생각도 들고요. 북한동포도 우리와 같은 핏줄이라는 생각을 청년들이 하지 못하고 있는 건 아닌가 하는 아쉬움이 있어요. 우리와는 다른 또 하나의 나라라는 이질적인 생각들을 많이 갖고 있어요. 그걸 깨우쳐줘야 할 사람들이 우리 세대들이죠. 저는 가슴 아픈 게 북한에서 인권 유린을 당하고 천대를 받았다가 탈출해서, 탈북하는 과정에서도 온갖 큰 고통을 겪는데, 남한에 와서도 인권침해를 받으면 그게 얼마나 큰 죄인가 하는 생각을 갖게 됩니다. 

영상위원회가 하는 일이 영화계를 지원하는 건데요. 주로 어떤 지원을 하나요?
가장 큰 일은 한국 영화인들한테 서울에서 촬영하는 것에 도움을 주는 겁니다. 영화나 드라마를 촬영할 때 장소를 빌리기 어려운 경찰서나 군 계통에 영상위원회가 앞장서서 촬영을 할 수 있도록 도와주는 역할이죠. 자동차 추격 신이나 이런 촬영은 거리를 막아야 하기 때문에 이런 촬영 협조부터 전반적인 것을 영상위원회가 지원합니다.
두 번째로는 외국 로케이션팀이 서울에 와서 촬영을 할 수 있도록 돕는 일입니다. 외국 영화 제작사들에게 인센티브를 줍니다. 이를 테면 서울에서 촬영할 때 뿌리는 제작비의 20%를 되돌려 주기도 합니다. 또 충무로에 있는 영상센터를 시민들이 활용하도록 해주고 상암동에 있는 2000평 규모의 공간도 영화인들을 위해서 영화를 만들 수 있도록 지원하는 등 영화산업의 활성화를 위한 거라면 뭐든 최대한 지원합니다.

최근에 와서 영상위원회 이름으로 외부 기관에 영화촬영을 요청했을 때 옛날하고 비교해서 반응이 어떤가요?
아주 협조를 잘 해줍니다. 제가 서울영상위원회뿐만 아니라 한국영상위원회도 맡고 있는데요, 지방자치체들이 전문 인력을 따로 둬서 지방로케이션 촬영을 도와주고 있어요. 영화 예술인들이 상당히 좋아하죠. 그런 면에선 과거와는 상당히 좋아졌다고 생각합니다. 내년 9월에는 세계영상위원회 총회를 충북 제천에서 합니다.
세계영상위원회는 미국 중심의 기구였는데, 그동안 미국에서 쭉 열리다가 38년 만에 아시아에서 처음으로 개최하게 됩니다. 제천영상위원회 위원장이 세계영상위원회 이사로 있으면서 오래 전부터 갈고 닦아서 유치하는 데 성공한 겁니다.
중앙정부에서도 이 대회의 성공을 위해 고맙게 보조를 해주고 있습니다.

외국 영화사들에게 서울이 영화 촬영을 하기에 좋은 점을 무엇이라고 설명하나요?
서울을 자랑스럽게 생각하는 것은 산이 있는 도시라는 점입니다. 외국의 도시는 전부 평야지대에 있는데 산이 있는 도시라는 것이 외국인들 눈에는 아주 신비할 정도로 이색적인 모양이에요. 또 서울은 개발도상국에서 지금의 수준에 이르기까지 모든 특색들이 다 펼쳐져 있습니다. 발전의 역사가 압축되어 모습을 담을 수 있는 거죠.
우리가 태국만 봐도 인력거를 끌고 막 뛰어가는 모습을 보고 이색적인 상상을 하게 되잖아요. 서울도 마찬가집니다. 서울의 중심에 있는 남대문은 거대한 재래시장을 형성하고 있는 엄청난 보물창고죠. 전통 가옥들이 모여 있는 곳, 모든 제품들이 밀집되어 있는 이마트라든가 홈플러스, 최첨단 고층 빌딩 등 서울은 그 모든 게 다양하게 있는 과거, 현재, 미래가 공존하는 도시입니다. 이런 서울의 촬영장소로서의 장점을 담은 영상홍보책자들을 전 세계 영화사들에게 보내고 있습니다.
매년 LA에서는 영화산업에 대해 프레젠테이션을 하고 전시를 하는 시즌이 있는데요. 영상위원회에는 매년 홍보책자를 만들어 이곳에 참여하고 있습니다. 여기에는 각 나라의 영상위원회들이 다 같이 참여하여 부스를 만들고 홍보 경쟁을 벌입니다.

한국영화에 대해서 여쭤보고 싶은데요. 한국영화가 국제영화제에서 굵직한 상을 수상하고 국산영화의 점유율도 절반을 넘기고 있잖아요. 한국영화의 현주소를 어떻게 보시는지요?
한국영화산업이 탄탄해진 것 같아요. 너무 고맙지요. 한국영화계가 세월 따라서 정직하게 성장한 것 같습니다. 저희들이 영화를 만들 때는 한국 영화와 한국 정치가 뒤떨어졌다고 소리를 많이 들었는데요. 지금의 시점에서 보면 정치는 여전히 뒤떨어져 있지만 영화는 굉장히 앞장 서 있다는 생각이 듭니다. 너무 자랑스럽죠. 산업은 산업대로 커졌고 극장 시스템도 옛날하고 달라져서 옛날에는 커다란 극장에서 손님 없어서 맨 날 영화를 돌려야 했는데요, 지금은 작은 극장들이 여러 개가 있고, 전산망도 표준화되어 있고요. 배급소부터 제작까지 다 안정되어 있다고 봐야죠.
조금 지적한다면, 우리 때만 해도 A급영화다 그러면 예술적인 영화가 상당히 평가를 받았는데 요즘은 B급 영화나 흥행 영화들이 더 평가를 받는 다는 거죠. 김기덕 감독같이 예술적 영화들이 오히려 스크린에서 소외당하는 그런 부분은 아쉬운 부분이죠.
그래도 한국 영화계가 정말로 건강하게 자라고 있다고 생각이 드는 건 저예산 독립영화들이 굉장히 많이 만들어지고 있다는 거죠. 이런 것들이 예술적 생명력을 계속 유지해 가다보면 언젠가는 상업영화가 저조할 때 이런 것들이 꽃을 피워 숨통을 이어 줄 거라고 믿습니다. 참 고마운 일이죠. 우리 옛날에 딴따라라고 했던 것들이 지금 다 잘하고 있어요. K-팝이라든지 싸이의 강남스타일 같은 게 지금은 다 효자 노릇을 하고 있어요.
이참에 말하고 싶은 것은 대한민국에 대해서 긍지를 느끼는 그런 것들을 방송이나 언론이 보도를 통해서 캠페인으로 연결했으면 하는 바람입니다. 지난 번 올림픽만 해도 큰 대륙들이 1~2위를 하는데 작은 나라인 대한민국이 세계 5위를 했다는 건 정말로 대견스러운 일입니다. 요만한 땅덩어리가 대륙하고 어깨를 나란히 했다는 거나 마찬가지에요. 얼마나 대단해요. 그렇다고 옛날처럼 정부가 올림픽에 대해서 전폭적으로 지원하는 것도 아니지 않습니까. 상당히 자율적으로 했는데도 이 정도 성과를 얻었다는 것은 너무나 감사한 일이죠. 이런 성과들을 일시적으로 흥분하고 잊어버리지 말고 오랫동안 국민들의 의식 속에 남아서 축제로 만들어져 민족의 긍지 같은 것을 심어줬으면 해요. 우리는 그 대단한 것을 너무 아쉽게 넘어가버린 것 같아요.
방송도 이제는 오락성과 중독성이 있는 그런 프로그램으로 의식을 마취시키지 말고 우리 젊은이들한테 국가관이라는 걸 강하게 심어주도록 노력했으면 합니다. 그동안 우리가 일본의 뒤를 따라 왔다면 실패해 가는 그들의 모습을 잘 파악해서 승리의 길을 갈 수 있도록 노력해야 되지 않겠습니까.
지금 우리는 매우 중요한 시기입니다. 지금 젊은이들한테 뭔가 국가관을 심어줘야 하는데, 국가관을 일부러 심어주는 것이 아니라 올림픽 5위, 하다못해 강남스타일까지 그런 긍지를 애국심으로 바꿔서 전달했으면 좋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우리는 일본과는 좀 다른 길을 가야 하지 않을까 생각해요.

지금 일본의 실패를 말씀했는데요, 한때는 일본영화가 세계적인 주목을 받았다가 현재는 많이 침체돼 있습니다. 우리 영화는 이런 일본의 전철을 밟지 않고 계속해서 세계의 주목을 받으려면 어떻게 해야 한다고 생각합니까?
우리 사회의 제일 큰 문제는 이기주의랄까, 자기중심적인 사고가 너무 팽배해 있다는 겁니다. 젊은 사람들에게 가정교육이나 학교교육 등을 통해 민족연대의식과 사회의식 같은 것을 장기적 목표로 불어넣어 줬으면 해요. 
영화를 통해서도 젊은 사람들에게 그런 의식 변화를 이끌 수 있다고 봅니다. 그런데 요즘 영화를 대기업이 투자를 하고 선택해서 제작하고 리드 해나가다 보니, 소비자들한테 비위를 맞추는 것이 중심이거든요. 영화가 기업이익 중심이 되는 거죠. 그래서 철학이나 가치관이 없는 상태에서 영화가 성장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사회성 짙은 영화를 만들기 위해서는 독립영화가 필요하다고 봅니다. 독립영화에 대해 정부가 관심을 기울여줘야 할 것 같아요. 상업영화는 대기업들이 자신들의 이익을 위해서 그냥 내버려둬도 모든 재력을 동원해서 잘 할 겁니다. 하지만 독립영화는 맨땅에 헤딩하듯 만들어 내야 하기 때문에 지원이 없으면 만들 수 없죠. 독립영화 영화관이 생기긴 했지만 독립 영화에 대한 지원이 소극적인데다 마지못해서 한다는 생각이 듭니다.

일반적으로 감독들을 보면 생활형편이 여전히 어려운 것 같습니다. 한국영화가 계속 발전하려면 아무래도 직업적으로 감독을 비롯해 영화계 종사자들의 대우가 좋아져야 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듭니다만.
감독에서부터 조감독들까지 이 사람들은 일정기간 인내심으로 커왔거든요. 이 사람들은 가난이라는 것에 대해서 숙명적으로 받아들이고 있는 것 같아요. 인기 있는 감독인데도 작품에만 몰두합니다. 보통 작품을 만드는데 보통 2~3년 걸려요. 빨리 만들어 내지 않으면 그만큼 수익이 안 나는데도 훈련이 되어서 그런지 좋은 작품 만드는 것에 대해서만 집착하고 어렵게 사는 것에는 익숙해 있는 것 같아요.
감독이란 사람들은 명예를 먹고 살아서 그렇다 치고 주변에 촬영이나 조명하는 사람들은 진짜 힘들죠. 감독하고 달라서 스태프들이 더 고생을 해요. 서울 영상위원회에서 보면 감독들이 프레젠테이션을 하고 그러는데 생활이 힘들어서 대리 운전하는 사람들도 굉장히 많아요.
A급 감독이나 B급 감독이나 예술가 기질이 많아서 그런지 먹고 사는 데에 집착을 안 하는 것 같아요. 현재 그 부분에 대해 깊이는 모르지만 감독조합도 있고 그곳에서 최저보장 등을 위해서 상당히 노력하고 있는 것으로 알고 있어요. 그 사람들에게 힘을 실어주었으면 해요. 재벌기업들과 감독조합이 서로 대화가 가능한 그런 방안이 나타났으면 좋겠습니다.

서울 영상위원회 위원장으로 서울시나 중앙정부에 바라는 게 있다면 어떤 게 있을까요?
서울시에 참 고마움을 느끼고 있어요. 아시다시피 영화진흥위원회가 다 부산으로 갔거든요.  어떻게 보면 서울이 영화를 많이 빼앗기고 있는 셈이죠. 현재 서울시가 중앙정부가 초래한 많은 것들을 많이 커버하고 있다고 생각해요. 가장 아쉬운 거라면 영화 촬영 스튜디오가 전부다 부산으로 내려가 버려 서울을 중심으로 한 수도권의 스튜디오가 전혀 없어요.
즉, 영상진흥위원회가 전부 부산으로 내려가다 보니까 남양주에 있었던 영화촬영소까지 이동된 상태에요. 서울생활이 중심인 많은 영화인들이 부산을 오가야 한다면 상당한 불편이 초래될 거라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민간 자본이든 서울시가 좀 더 예산을 확보하든 서울을 중심으로 한 경기도 일대에 스튜디오가 절실히 필요합니다. 적어도 한 200~300평짜리 스튜디오가 서너 개는 있어야죠. 거기다 제반 시설을 갖추려면 이전 남양주 촬영소만한 게 있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영상진흥위원회 나가는 거 말고 다른 공식적으로 하는 활동이 있으신지요?
정말 제가 하는 게 너무 많아요. 제가 석좌교수로 있는 서울 예술대학만 해도 학생들이 일주일에 한 번 월요일에 가서 일곱 시간을 학생들과 생활합니다. 그리고 제 선생님이 신상옥 감독인데, 그 분의 기념관을 만들어야 합니다. 제가 신상옥기념사업회 이사장을 맡고 있습니다. 앞으로 해야 할 숙젭니다.(웃음)

신상우 감독기념사업은 언제 설립되었고 어떻게 진행하고 있는지요?
한국영화 옛날역사를 말하자면 그 당시에 충무로 군소영화사들이 약 60~70%를 생산했고 신필름은 30~40%를 만들었습니다. 신필름은 한국영화의 양대 산맥이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죠. 신필름은 당시까지 대한민국에 없었던 규모의 약 200여 명의 월급직원을 둔 영화사였어요. 그때 영화사는 보통 직원 대여섯 명 정도에 불과하던 시절이었죠. 요즘 CJ같은 회사들과는 비교가 안 되겠지만 그 당시는 엄청났죠.
거기다 안양스튜디오도 남양주 스튜디오처럼 컸어요. 미국 허리우드를 옮겨 놓은 것과 같은 시설이었고 전속 배우와 감독들을 두고 있었어요. 그랬는데 신상옥, 최은희 두 분이 이북에 납치되는 바람에 이런 것들을 다 잊어먹고 있었어요. 신상옥 선생님은 영화 역사의 한 절반은 책임져야 될 분입니다. 이 분의 기념관을 만드는 건 영화박물관만큼 큰 의미가 있습니다. 우리가 해야 할 숙제였죠. 신상옥 감독님 기념사업은 올해 5주기가 되어 가고 있는데요, 그 분에 관한 책자 등을 지속적으로 매 주기마다 만들어 왔습니다. 기념관설립이 관건입니다. 지금 충청북도가 제안을 한 관계로 깊이 있게 논의하고 있습니다.

끝으로 앞으로 새로운 작품계획이 있으십니까?
현재 저는 서울 예술대학교에서 석좌교수로 있습니다만, 개인적으로는 여태까지 학교에 있어선지 영화를 만드는 것에 대해서는 굉장히 소극적이었다고 봐야죠. 이제 영화를 다시 시작 해볼 생각입니다. 영화진흥위원회에서 해외 영화제에서 수상경력이 있는 사람한테 제작지원도 해주는 마스터 지원이 있습니다. 거기에 저의 시나리오가 최고 점수를 받았습니다. 내년 2월안에 크랭크인(영화 카메라를 작용하는 것)해야 하는 계약을 맺었습니다. 지금 그 준비로 바삐 움직이고 있습니다. 
영화 제목은 <시선>이란 타이틀인데요. 잠시 내용을 소개하자면 여름에 기독교인들이 모슬렘 지역에 해외 단기 선교를 갔다가 납치를 당해요. 이 과정에서 선교를 해야 하나, 배교를 해야 하나  갈림길에 선 기독교 영화입니다. 이 영화에 대해서 흥행은 생각하지 않고 오로지 메시지 전달에만 집중할 작정입니다. 저는 이전에 <낮은 데로 임하소서>라는 기독교 영화를 만든 적이 있습니다.
일단 촬영하면 저는 2달이면 다 끝납니다. 실제 기독교 목사님을 여러 분 오디션을 봐서 배우로 내세울 계획입니다. 제작이 끝나면 돈 안들이고 마케팅을 해야 하겠죠.(웃음) 그래서 연말쯤에 영화관에 공개할까 합니다.
다음 작품도 지금 준비 중에 있습니다. 실제 있었던 실화인데요. 베트남 난민 96명의 목숨을 구해준 한 선장의 실화를 시나리오로 만들고 있습니다. KBS다큐멘터리로도 만들어져 굉장히 감동을 주었던 전재용 선장의 이야긴데요. 현재 그분을 UN인권상 후보로 올리기 위해 노력하고 있는 중입니다. 이 영화는 내년 하반기에 촬영에 들어갈 예정입니다. 감사합니다.

그가 본고장 영화판으로 돌아오다
서울영상위원회는 작년에 ‘마스터 클래스의 산책’이라고 해서 이두용, 정지용, 이장호, 박철수, 변장호 등 5명의 60대 감독들이 옴니버스 형태로 단편영화를 제작해 발표한 바 있다. 이장호 감독은 이들 다섯 명이 한국 영화계에 새로운 작가주의 바람을 불어넣고자 하는 뜻으로 모였고 그렇게 영화도 만들었다고 밝혔다. 이장호 감독은 이때 실제 동생인 이영호 씨 실명의 아픔을 그린 작품을 제작했다. 이 마스터 클래스에 참여한 정지영 감독이 <부러진 화살>로 히트를 친 데 이어 <남영동 1985>를 개봉했다. 아직 60대라고 하면 노익장이라고 하긴 젊은 나이다. 안성기 씨는 “60대 영화감독의 출현은 한국영화계의 자양분이며 영화인의 한 사람으로서 고개 숙여 고마움을 표시하고 싶다”고 말했다. 이장호 감독이 안성기 씨의 말에 화답하듯 영화계에 본격적으로 돌아왔다. 사실, 이장호 감독은 교수로 있으면서도 오페라와 뮤지컬에 도전하는 등 꾸준히 현역 체질을 유지했다고 할 수 있다. 하지만 이번 새 영화 <시선>으로 이장호 감독은 그의 본고장 영화판으로 돌아왔다. 정지영 감독에 이어 이장호 감독이 한국 관객들에게 큰 울림을 주기를 기대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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