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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제


사는 동안 시도해 볼 만한 일상의 경제학(3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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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제는 숭고한 행위다. 돈의 노예가 되지 않고 사소한 일상에서 보람을 찾으며 유쾌하고 행복하게 살아가는 사려 깊고 지혜로운 행동이다. 죽음을 앞에 둔 사람들은 자신이 했던 일의 성패가 아니라, 자신이 하고 싶었던 일을 하지 못하고 우물쭈물하였던 기억을 가장 후회 한다고 한다. 사소하지만 사는 동안 시도해 볼 만한 일상의 경제학을 소개하는 세 번째 시리즈, 이번호에서는 밥 한 끼가 주는 감동적인 이야기를 소개하고자 한다. 이 세상에 공짜 점심이 없다고 하지만 한 끼의 식사로도 얼마든지 주변 사람들을 행복하게 할 수 있으니까.

 

 

제3편 : 타인에 대한 선의와 배려, 밥 한 끼에 담긴 감동


밥을 잘 사주는 누나? 여직원이 나를 위해 사준 선지해장국


내가 여의도 식당가를 지날 때마다 해장국 입간판을 보고 옆에 있던 여직원에게 해장국 타령을 하였더니 어느 날 그녀는 나와 또 다른 직원을 사무실 인근의 해장국집으로 데려 가면서 ‘오늘은 자기가 사겠다’고 했다. 그녀가 안내한 해장국집은 깔끔하고 실내가 넓은, 해장국으로 유명한 브랜드의 한 프랜차이즈점인 듯하였다.

 

그런데 식당 벽에 붙은 메뉴가격을 보던 나는 깜짝 놀랐다. 보통 해장국 한 그릇이 1만천원이라니. “어라, 되게 비싸네.” 나도 모르게 목에서 그런 소리가 튀어 나왔다. 2년 전부터 육고기를 입에 대지 않겠다고 결심했던 나였으므로 선지해장국도 멀리하다가 여직원의 선의에 의해 2년 만에 결심을 깬 나로서는 껑충 뛰어오른 가격이 무척 낯설었던 것이다.

 

사실 우리나라 식당 대부분 음식가격을 올릴 때 상승요인을 정확하게 파악하고 있는지 궁금했다. 일종의 운영일지는 기록하고 있긴 하겠지만, 대차대조표에 의한 경영을 해서 100원 단위로 세심하게 인상하지 않고, 작게는 1천원부터 많게는 몇 천원까지 올린다.

 

혹시 이 식당도 그런 게 아닌가 싶었다. 7천원이었던 가격을 2년 만에 1만 천원으로 올렸다면 충분히 그런 개연성이 있었다. 인상률이 57%라면, 어마어마한 인플레이션이다.가격을 이러쿵 저러쿵 한다고 마뜩찮아 하실 분도 있을 것이다.

 

그렇다면 맥도날드 같은 미국식 패스트 푸드점의 가격표를 기억해 보시라. 미국의 힘을 느끼게 하는 그런 패스트푸드 점들은 “가장 싸고, 빠르게, 그리고 맛있게 365일 변함 없는 시스템”의 미국식 자본주의를 상징한다. 가격을 올릴 때 백원 단위로 올리고, 왜 올리는지를 정확히 밝히는 것으로 알고 있다.

 

요즘은 음식 가격이 올라가는 상황이라, 피부로 느끼지 못할 수도 있겠지만 대차대조표를 작성하고 있다. 그렇다면 내가 찾아온 이 해장국 식당도 그럴까? 재료비, 인건비가 얼마 올랐으니 나는 얼마를 받아야겠다는 식이 아니었을까? 그러다 보면 주인도 손님도 물가 상승폭에 대한 감각이 떨어져 가격표를 보고 무덤덤해 지는 거였다.

 

식당의 여종업원이 우리 세 사람이 주문한 보통 뚝배기 선지해장국을 식탁에 내려놓으면서 “선지를 더 드실 수 있으니 말씀하시라”고 귀띔하며 떠났다. 문득 요즘 선지는 소의 피를 쓰지 않고 대신 가격이 조금 싼 돼지 피로 만든다는 소문을 들었지만, 여직원을 무안하게 할 필요가 없다는 판단을 하고 입을 꾹 다물었다. 오히려 “선지를 먹지 않는다”는 남자 직원이 앞 접시에 골라낸 선지까지 갖다가, 피에 굶주린 사람처럼 허겁지겁 먹어줌으로써 여직원의 기분을 좋게 만들었다.

 

선지로 배가 남산만큼 부풀었지만, 천엽 등의 건더기가 들어간 해장국은 나의 적수가 되지 못했다. 바짝 말라버린 타클라마칸 사막의 호수 바닥처럼 그릇을 깨끗이 비워 주었다. 평소 즐기던 음식을 끊었다가 2년 만에, 그것도 다른 사람이 사줬을 때 느끼는 기분은 기묘해서 평생 잊혀 지지 않을 것같았다. 그러니 음식을 사게 되더라도 평소 상대가 먹고 싶어 하는 음식이 무엇인지 알아 두는 배려가 우선이었다. “밥 잘 사주는 여동생(누나), 고마웠어요.”
 

버킷(양동이)에 담아 배달한 선지해장국의 감동

 

여직원이 사 준 해장국과 반대로 나 역시 선지해장국으로 내 친구와 지인들을 감동시킨 일이 있었다. 10여 년 전 MBC 역사 드라마 촬영지인 MBC 용인드라미아 단장으로 근무할 때였다.

 

친구와 지인들 7명~8명이 구경삼아 왔다가 함께 밤 늦도록 술을 마셨다. 나는 읍내의 여관에서 그들이 잘 수 있도록 방을 잡아주고 숙소로 돌아오다가, 이들에게 아침식사로 뭘 대접해야 좋을지 걱정을 했다. 읍내에는 아침 일찍 문을 여는 식당이 없었다. 아침을 먹으려면 용인 시내까지 차를 타고 나가야 했다.

 

그때였다. 내 머릿속을 번개처럼 스쳐가는 아이디어. 내가 다니는 용인시의 소문난 24시간 선지 해장국집에서 인원 수 대로 해장국을 사서 여관에 갖다 주면 되겠다는 생각이었다. 나는 숙소의 집주인을 깨워, 흔히들 ‘빠께쓰’라 부르는 양동이를 구해 차에 실어놓고는 잠깐 잠 짓을 한 다음, 아침 7시에 그 집으로 갔다.

 

해장 손님이 두서너 명밖에 없어 한가했고, 가마솥에서 뭉근하게 끓고 있는 해장국물은 먹음직스러웠다. 저간의 사정을 들은 주인은 가지고 간 양동이에 10인분은 됨직한 분량을 떠서 담아주고, 김치 등의 밑반찬과 나중에 돌려주기로 한 뚝배기 10개, 수저와 젓가락 등도 챙
겨줬다.

 

선지해장국 일습을 차에 싣고 여관에 와 보니 일행은 속이 거북했던지 일어날 생각을 하지 않고 있었다. ‘선지해장국 먹으러 용인 가자!’고 했으면 “너나 가라”며 귀찮아했겠네 하는 생각이 들었으나, 지금 나는 개선장군이나 된 듯 당당했다. 스스로 희생함으로써 선지 해장국을 구해 왔으니 깨울 수 있다는 자신감이 생기는 거였다.

 

“모두 일어나시오. 선지해장국 대령이오,”


옛 한양 선비들이 남한선성 부근에서 해장국을 배달시켜 먹었다더니. 나는 심부름을 다녀온 하인처럼 그들을 깨워 각자의 코앞에 놓은 뚝배기에 김이 모락모락 나는 선지해장국을 퍼 담아 주었다. 그들이 눈을 동그랗게 뜨고 말했다.

 

“이게 어찌된 일인고?”

 

해외여행이건 국내여행이건 아침 먹으라는 소리를 하지 않아도 일행 중에 속이 거북해 아침을 거르는 사람을 나는 일찍이 본적이 없었다. 어느 나라 어디를 가더라도 선지해장국이 있는 건 아니지만, 각자 빠짐없이 해장 음식을 만들어서 먹는 것이었다.

 

역시 우리 일행 중에 선지해장국을 선호하지 않는 사람도 있을 수 있고, ‘못 먹겠다’고 뒤로 빼는 사람이 있을 터인데 그날은 해장국이 여관까지 오게 된 사연을 설명하는 내말은 듣는 둥 마는 둥 모두가 허발대신하고 먹는데만 열중했다. 그날 아침 해장국을 같이 먹었던 사람들은 지금도 나를 만나면 하는 말이 있다.

 

“세상에서 제일 맛있던 해장국이 그 때 해장국이었어. 다시 한 번 먹으로 가자,”

 

개장국 한 그릇의 효심


추석이면 내 형제와 사촌형제, 그리고 5촌 조카들은 1년에 한 번, 조상 묘소 벌초를 위해 약속처럼 고향의 사촌 큰형 집으로 모인다. 벌초는 동이 트기 직전, 새벽부터 사촌형 집에서 가장 멀리 떨어진 고조부모 묘부터 시작해 대개 오후 2시쯤 끝이 난다. 10기의 조상묘소를 깔끔하게 정리하고 나면, 우리는-대개 7~8명-은 고대하던 개장국을 먹으로 간다.

 

사촌형님 집에서 차를 타고 10여분, 해당 군(郡)안에서도 개장국으로 소문난 그곳은 우리처럼 벌초를 끝낸 사람들, 자전거 라이더들, 그리고 이곳을 일부러 찾은 사람 등 다양한 손님들로 늘 북적거려 예약을 받지 않고 순서를 기다린다.

 

벌초를 하고 1년에 딱 한번 들르는 이 개장국 집에 들어서면 나는 어릴 때 생각이 난다. 5일장인지 7일장인지 이곳 개장국집 근처의 읍내로 장을 보러 오시는 어머니를 따라 산을 넘고 고개 넘어 먼 거리를 걸어서 오곤 했기 때문이다. 

 

어머니는 할머니의 친척분이 운영하는 포목점에 들르셨다가 긴 이야기를 나누셨는데, 지루한 대화가 끝나길 기다리지 못한 나는 혼자 시장 구경을 하곤 했다.

 

요즘이야, 사촌 동생이 벌초 때마다 몰고 온 봉고형 트럭을 타면 단숨에 도착하지만 걸어 다니던 당시에는 하루가 걸렸다. 우리 형제 사촌들은 식당에 도착하자마자 서부의 마초처럼 트럭에서 뛰어 내린다.
 

은행을 턴 갱단처럼 집단을 형성해서 안으로 들어가 주문할 것도 없는데 -메뉴가 개장국 하나니까, 괜히 여기요~ 하며 개장국을 달라고 한다. 이 집의 개장국은 손으로 찢은 고기만 쓴다. 감칠맛이 도는 국물은 지금도 어떻게 만드는지 수수께끼다.

 

 

그렇다고 오해하지 마시라. 우리 고향 인근의 몇 개 군(郡)은 개장국이 세계적 수준(?)의 음식으로 발전했다. 어째서 그런지 나는 모른다. 우리 고향은 예로부터 상가(喪家)에서 개장국을 말아내고, 개장국을 먹지 않고는 상여를 매지 않겠다는 상여꾼들의 고집이 있었다. 나 역시 평소에는 개와 관련된 음식에는 입도 대지 않다가 이날 하루 만큼은 예외로 한다.


아버지는 동네에서 개 추렴을 해서 드셔보시라고 돌리는 (불그레한 국물의) 뚝배기 개장국을 받으면, 당신은 드시지 않고 대신 나를 불러서 먹였다. 그때부터 먹었던 개장국으로 인하여 시정(市井)의 유사음식에는 입도 대지 않는다.

 

내가 아는 한 개는 지방 현감(縣監)의 가축부(家畜簿)에 소, 돼지, 말 등과 함께 가축으로 기재하고, 가뭄이나 기근, 식량이 부족할 때 먹는 비상식량으로 다뤘다. 북극 탐험대가 먹을 것
이 떨어지자 썰매를 끌던 개를 한 마리씩 잡아먹으면서 버텼다.

 

조상들이 먹던 개장국은 사냥견이나 애완견이 아닌 식용견(食用犬)만 썼다. 다른 가축은 괜찮아도 개를 잡아먹어서는 안 된다는 논리를 펴는 사람들의 심리를 솔직히 이해할 수 없다. 도살장 앞에서 눈물을 흘린다는 소의 슬픈 이야기를 너무 많이 듣고 자라서 그런가?

 

어머니의 식성은 아버지와는 정반대셨다. 외갓집은 개장국을 거의 상식하다시피 했다. 머리가 완전히 백발이셨던 외할머니는 오래전에 100살 가까이 사시다가 돌아가셨는데, 잠을 설쳐서 머리가 무겁고 띵했던 나는 그때 아주머니가 챙겨 준 (맑은 국물의) 개장국을 먹고 나니, 몸이 가벼워지고, 머리가 씻은 듯이 말끔해지는 체험을 했다.

 

이후 우리 형제들은 개장국을 먹는 날이면 어머니에 갖다 드릴 개장국도 포장해 배달하는 일을 잊지 않았다. 어머니는 으레 “너희들이나 맛있게 먹으면 됐지 왜 사오느냐”고 하시지만, 평소에 드시지 못하는 개장국을 앞에 두고 옛날 생각이 나시나 보다.

 

어머니의 표정을 곁눈으로 보면서, 나나 형제들은 어머님이 건강하게 살아 계심에 감사하고 또 감사한다. 홍시를 드리려 해도 부모님이 안 계시는 것이 서러워 조홍시가(早紅柿歌)로 한탄한 시인의 시를 한 번쯤 읊어 보았으리라.


“소반에 놓인 붉은 감이 곱게도 보이는 구나 비록 유자가 아니라도 품어갈 마음이 있지만 품어가도 반가워해 줄 부모님이 안 계시니 그를 설워하노라”-박인로(1561~1642).

 

부모님이 돌아가시면 좋아하는 음식이 무슨 소용이 있으랴. 부모님 살아생전에 음식점에 모시고 가서 맛있는 것을 사드리는 것도 좋지만, 이번 한 번은 부모님이 예전에 좋아하셨던 음식을 옛 방식으로 만드는 식당에서 사다드려 볼 일이다. 부모님의 기쁨은 몇 배로 불어나 가족에게 되돌아오지 않겠는가.


눈물의 카스텔라

 

다음은 카스텔라가 처음 나왔을 당시, 초등학교에 다녔다는 한 남자로부터 들은 반세기 전의 실화(實話)다. 선물을 고를 때마다 왜 카스텔라를 빼놓지 않게 되었는지 자신의 사연을 이야기하면서 수양버드나무 줄기처럼 그의 두 눈가에서 눈물이 주르륵 쏟아내는지 사연이 궁금했다.


깊은 산골에서 살았던 그는 20리 길을 걸어서 초등학교에 다녔다. 학교 앞 하코(はこ, 판자)방 진열대에 놓인 카스텔라 빵을 처음 보고나서, 다음날 그는 집을 나서기 전에 부엌에 서 설거지를 하는 어머니에게 “카스텔라 사 먹게 돈을 달라”고 했다.

 

어머니는 오늘은 돈이 없으니, 그냥 가라고 몇 번이나 타일렀다. 그래도 말을 듣지 않고 계속 졸라대며 떼를 쓰자, 어머니는 참지 못하고 부엌의 부지깽이를 들고 나와 “지금 우리 집에 그런 돈이 어디 있어?” 하시면서 그를 때리기 시작했다.

 

그의 나이는 아직 어려서 돈을 줄 수 없는 어머니의 심정을 헤아리지 못했다. 엉엉 울면서 집을 나온 그는 마을을 벗어나 울음을 그치고 학교에 갔다.

 

그런데 그날 오후, 학교가 끝나서 교문을 나오는데 뜻밖에 어머니가 앞치마를 두 손으로 감싸 쥐고 서 계셨다. 아침에 매질을 해서 자식을 학교에 울려 보낸 게 마음에 걸렸던 어머니는 돈이 없지만 자식이 원하는 카스텔라를 그 원료인 달걀 4개로 맞바꿀 수 있으려니 생각하고 앞치마에 싸가지고 오셨던 거였다.

 

하코방 주인이 어머니의 이야기를 듣고 “그렇게 하면 되지 않겠느냐” 면서 진열대의 카스텔라 한 봉지를 내 놓았다. 그런데 앞치마에 있던 달걀을 꺼내려는 순간 아뿔싸, 달걀 하나가 바닥에 떨어지고 말았다. 어머니가 당황하자 가게 주인은 “괜찮다, 달걀 3개면된다”고 해서 카스텔라를 얻었다.

 

그는 어머니 뒤를 따라 집으로 가면서 카스텔라의 맛에 푹 빠졌다. 입안에서 녹아드는 달콤한 맛은 생전 처음이었다. 카스텔라를 싼 기름종이까지 혀로 핥고, 입에 넣고 종이까지 씹었다.

 

수십 년 뒤 어머님이 돌아가셨을 때였다. 갑자기 어머니의 영정 앞에서 그는 어머니가 앞치마에 자신에게 카스텔라를 사주려고 가져 왔던 달걀 생각이 났다. 그때 어머니에게 카스텔라를 드셔보시라는 말을 하지 못했던 자신을 원망했다.

 

“왜 그땐 그런 말을 못했던 것일까?” 그것이 천추의 한이 된 그는 카스텔라만 보면 어머니 생각에 눈물이 났다. 카스텔라 선물을 신조로 삼았던 거였다.

 

세상에는 우리에게 옷을 껴입으라고, 매사 조심하라고 늘 끊임없이 부탁하고, 어디 아픈데 없느냐? 건강이 최고라며 늘 걱정하는 사람이 있다. 

 

우리는 귀에 못이 박히도록 들어온 소리라, 지겨울 때도 있건만 그러면서도 따뜻함도 느낀다. 우리가 돈이 없을 때 항상 돈 버는 일이 쉽지 않다며 훈계하면서도 어떻게 해서든 돈을 마련해 우리의 손에 쥐어 주는 사람, 우리는 그들을 부모라고 부른다.

 

돌아가시면 소용없나니, 평소에 부모님들이 좋아하시는 음식을 직접 사가지고 찾아 뵙고 선물도 드려보시라. 아울러 남에게 음식을 사 줄 때가 가장 기분이 좋은 법. 무료 급식 봉사가 아니더라도 주변 사람의 마음을 꼼꼼하게 살폈다가 적절한 식당과 기회를 잡아 정성을 다해 대접해 볼 일이다.

 

MeCONOMY magazine May 20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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