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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한국의 슬픈 근대사를 쓰다 ‘그녀의 이름은 마리아’ 저자 김현

【M이코노미 김소영 기자】 한국전쟁에 휩싸인 어린 소녀가 잔혹한 상황들을 버텨내며 미국 주류사회의 영향력 있는 여성으로 성공을 거두기까지의 과정을 담은 책 ‘그녀의 이름은 마리아. 저자는 전란의 포화 속에서 가족과 떨어져 오롯이 혼자 살아남아야 했었다고 어린시절을 기억했다. 고작 네 살이었던 소녀는 생존을 위해 이를 악물었고 자유와 희망을 꿈꾸며 미국으로 건너가 또 다른 가난과 차별을 경험해야 했다고 한다. 한국의 슬픈 근대사를 담은 이 책의 저자를 만나봤다.

 

 

전쟁으로 빼앗긴 행복


“제 삶을 한마디로 요약한다면 ‘생존을 위해 불굴의 의지를 불태웠다’고 말할 수 있겠죠.”


‘그녀의 이름은 마리아’ 저자 김현 씨의 첫 마디다. 어릴 적 이모엄마 집(저자를 이모를 이렇게 불렀다)에서 자랐다는 저자는 전쟁이 끝나고 세상이 바꿀 때까지 산속 깊은 데 꼼짝도 못 하고 숨어 살아야 했다고 기억했다. 위로는 여섯 살 오빠와 두 살배기 남동생이 함께 둘러 앉아 단란했던 그 짧은 순간을 평생 그리며 살았다는 저자는, 그 행복이 너무 짧았노라고 했다. 평생 아버지를 원망하면서 살아왔다고 말할 때는 목소리까지 떨리는 듯했다.


칠순을 넘겼다고 하기에는 너무 곱고, 험한 삶을 살아왔다고 하기엔 너무나 밝은 표정의 저자는 인터뷰 내내 환한 미소로 담담하게 슬픔을 펼쳐냈다.

 

“책을 통해서 아버지께 편지도 썼어요.”


‘아버지 공산당인 내 아버지’로 시작되는 책 속 저자의 편지는 자신이 일생 살아오면서 애써 모른 척 피해왔던 일을 하려 한다고 적었다. 일평생 사무치도록 그립고 그토록 미워했던 아버지를 부르면서 흐느꼈다는 저자는, 한 많은 삶을 살 수 밖에 없었던 자신의 얘기를 들어달라고 아버지께 호소한다.


“아버지께서 민족주의 감성에 젖어 공산주의 사상에 물든 건지, 아니면 일제의 탄압을 피해 중국으로 망명해서 독립운동을 하다가 공산주의 사상에 얽힌 건지는 모르죠. 하지만 제가 살아 온 삶이 아버지 운명의 부산물인 것만은 분명하잖아요.”


일평생 가슴에 안은 설움의 응어리를 털어내려 한다는 저자의 목소리는 잔잔했지만 떨렸다.


70여 년 모진 세월


이 책은 4살 소녀가 가족과 헤어진 뒤 70년을 살아오며 아버지를 미워했던 시간들을 글로서 통곡하고 낯선 미국 땅에서 힘든 과정을 이겨내고 지금에 이르기까지의 과정을 적고 있다. 몸서리치게 원망하면서도 사무치게 그리운 아버지를 부르며 자신이 살아온 일생 흘린 수많은 날의 눈물과 증오를 내려놓으려 한다는 저자는, 나이가 들고 나니 아버지를 이해할 수 있을 것 같다고도 적었다.


“참 힘들었죠. 인천상륙작전으로 서울수복이 되자 외할머니는 가족을 살피러 서울로 가고 이모엄마는 마을로 내려가고 나면 산골에 혼자 있어야 했어요. 정말 무서웠는데 혹시라도 아버지가 데리러 왔다가 저를 못 찾으며 어떻게 하나 그런 생각 때문에 꼼짝할 수가 없었어요.”

 

시도 아버지를 내려놓지 못했다는 저자는 이젠 그 미움을 벗고 아버지를 사랑하기로 했다고 말했다.


집안의 비극


“저희 집안 아주 엘리트 집안이었다고 해요. 제 어머니께서는 여자사범학교를 졸업한 신여성이었는데 보통학교 교사였고, 아버지는 배재학당을 졸업하고 경성제대에 들어간 수재였고요. 일생을 하느님과 함께 살아오신 친할머니께서는 기생이나 술집 작부만 찾아다니는 할아버지 때문에 선교사 집에서 일하면서 어렵게 아버지를 키우셨다고 하는데 일본에서 몇 안 되는 조선 학생들의 학교생활은 평탄치만은 않았겠죠. 그러던 어느 날 아버지께서 한 일본학생과 심하게 싸웠고 상대학생을 크게 다치게 해서 순사에게 끌려가 죽도록 맞고 풀려난 후에 중국으로 떠났다고 해요.”


저자는 가족의 비극이 아버지의 공산주의 사상에서 비롯됐다고 했다. 아버지께서 어떤 어려움을 겪었으며 어쩌다 독립운동을 하게 됐고, 공산주의 사상을 접하게 된 건지는 아무도 모르지만, 아버지의 공산주의 사상이 가족 전체를 파국으로 몰아넣었다는 건 분명하다고 했다.


아버지의 사상으로 어린 시절 너무나 비참했다는 저자는, 빨갱이 자식이라는 주변의 호된 눈초리가 너무나 무서웠다고 했다.


“당시 호적에 빨간 줄이 쳐지면 평생 아무것도 할 수 없었는데 그런 사람들이 아주 많았어요. 저희 가족도 마찬가지였는데 이모엄마가 빨간 줄이 그어진 우리 가족의 호적에서 제 이름을 지우고 딸로 올려준 것이죠.”


저자는 그 고마움 때문에 이모엄마를 미국으로 모셔가 아흔 다섯에 돌아가실 때까지 46년간 마음을 다해서 보살펴 드렸다고 했다.

 


꽃다운 열일곱에 쫓겨나


“한국 사회는 가족 중심 사회잖아요. 그래서 고아에게는 아주 야멸찬 사회에요. 저는 그런 사회에서 전쟁 후 온 가족이 월북하고 정말 외롭게 자랐어요.”


저자는 열일곱까지 이모엄마와 살았다고 한다.


“어느 날 이모엄마 집에서 아무 이유도 없이 쫓겨났는데 돈 한푼이 없었어요. 당시는 여성들이 취직할 곳이 없어서 술집이나 식모살이가 전부였거든요. 외롭던 시절 문학전집 읽으면서 꿈을 키웠던 저는 프랜시스 호지슨 버넷이 1888년에 발표한 소공녀를 특별히 좋아해서 자주 읽었어요. 그 책을 읽으면서 상상 속을 넘나들었죠. 주인공 소녀가 힘든 상황에서도 항상 밝고 아름다운 꿈을 꾸며 희망을 잃지 않잖아요. 그 책을 읽을 때면 아버지가 기적처럼 저를 구하러 올 거라는 상상을 할 수 있었거든요. 헌책방을 뒤지면서 읽고 싶은 책을 찾아내는 게 최고의 기쁨이었었어요.”


저자는 1963년 무학여자고등학교에 입학했다고 했다. 인터뷰 도중 과거 추억을 떠올린 저자는 금호동 시장을 나오면 왕십리로 올라가는 언덕이 있고 그 언덕을 한참 걸어가면 무학여고가 있었다며 눈을 감았다.

 

“집에서 쫓겨난 날 파출소를 찾아가 처지를 얘기하고 딱딱한 벤치에서 하룻밤을 보냈어요. 그런 다음에 무작정 무학여고로 찾아가서 담임선생님께 제 처지를 얘기했더니 후암동에 있는 YWCA(여성단체)로 보내줘서 한 달간 머물 수 있었죠.”


운명을 바꾼 여군훈련소


“당시 6·25전쟁 중에 창설된 여군이 육군본부 여군처가 되어 있었어요. 1955년에는 서울 서빙고동 여군훈련소가 재창설 됐고요. 부학여고 1학년이던 1961년 여군에 입대한 거예요. 1970년 초반까지는 여군도 사병제도로 운영돼서 만 17~24세 미만의 대한민국 신체 건강하고 중졸 이상 여성을 모집했는데 저는 서빙고동 여군훈련소에서 석 달간 기초훈련을 받았어요. 정말로 힘들었지만 머물 곳이 있어서 좋았죠.”


기초훈련이 끝난 후 시험을 거쳐 영문타자수가 된 저자는 서빙고 여군훈련소에 더 머물면서 영문타자 훈련을 받았다. 여군에 해서 훈련받으며 몸에 밴 규칙적인 생활을 지금도 지키며 산다는 저자는 그때 받았던 교육과 경험들이 자신의 삶속에서 소중한 밑바탕이 되고 있다고 했다.


“저는 고등학교를 졸업하기 위해 여군에 지원했고 군대에서 야간 고등학교를 졸업할 수 있었어요. 제대 후에는 돈과 인맥 없이는 들어갈 수 없었던 왜관 미군 부대에 취직도 했고요.”

 


미국장교와 사랑에 빠지다


저자의 전 남편이자 두 아들의 아버지인 존은 당시 미국 장교로 한국에 온 헌병 대장이었다고 한다.


“아주 조용한 성격에 젊은 소위였죠. 대부분의 미군들이 틈만 나면 술집으로 달려가는데 그는 첫 출근할 때 헤르만 헤세의 ‘수레바퀴 아래서’라는 책을 들고 왔더라고요. 너무 신기했죠. 존은 부임한 첫날 저를 대동하고 고아원을 방문했어요. 한번은 한 아이가 간질 발작을 하며 쓰러지는데 너무나 침착하게 자기 손수건을 꺼내 그 아이의 이가 부딪치지 않도록 조치하고 편하게 눕도록 하는 겁니다. 너무 감동적이었죠.”


저자는 남편과의 특별한 감정이 그렇게 생겼다고 했다. 

 

“미국 미네소타 주에서 태어난 존은 중학교 때부터 오네미아라는 수도원에 들어가 공부하면서 신부가 되기 위해 준비하며 세인트존 대학과 대학원을 졸업한 사람이었어요. 신부 서품을 코앞에 두고 수도원 생활과 신부가 되는 것에 회의를 느껴서 장교 학교에 응시했고 장교가 돼서 한국으로 왔다고 했는데 정말로 순수한 사람이었죠. 저는 그 사람의 순수한 마음과 그리스도적인 사랑에 감동했어요. 신부 서품을 받겠다는 그의 뜻을 존경했고요.”

 

평소에 책 읽는 것을 좋아했던 저자는 톨스토이, 도스토옙스키, 니체, 헤르만 헤세, 앙드레 지드, 괴테, 토마스만, 스탕달등 많은 작가들의 책을 섭렵하면서 정신적으로 많이 성숙해있었다고 했다.


가난한 미국 생활


미국에서 공부할 수 있다는 기대를 안고 국경을 넘어선 사랑에 빠진 두 사람은 한국에서 조촐한 결혼식을 올린 후 자유와 희망을 찾아 미국행을 택했다고 했다.


“그게 아니었어요. 말도 통하지 않은 나라, 인종차별이 심한 나라에서 저를 기다리는 건 혹독한 가난이었어요. 눈앞이 캄캄했죠.당시 미국은 흑인 인권운동 덕분에 유색인종을 받아들이기 시작했지만 겨우 5년밖에 지나지 않아 인종차별이 아주 심했어요. 더욱이 독일계 미국인인 시어머니께서는 남편과 시아주버님 두 아들이 신부가 되길 소원했죠.”


반대를 무릅쓰고 강행한 국경을 넘은 사랑의 결실 결혼은 차별 속 또 다른 차별의 불행이었다고 했다. 


“사랑이라는 감상에 젖을 시간조차 허용하지 않았죠. 중학교 때부터 천주교 신부 수업을 받으며 대학원까지 졸업한 존은 가장으로서 살아가는 데는 너무나 무능했어요. 맨 날 빈둥거리며 놀고 가족을 부양할 생각조차 하지 않았으니까요.”


그러는 사이 태어난 큰아들. 저자는 백방으로 일자리를 구해 뛰었고 한국에서 배워온 키펀치 오퍼레이터로 일을 시작했다고 했다.


“월급을 더 받기 위해 몇 차례 회사도 옮기고 바텐더 학교에 가서 칵테일 만드는 법을 배우기도 했죠. 정말 억척스럽게 살아온 거 같아요.(웃음)”


결혼 10년 만에 남편과 이혼


발버둥 치며 살기 위해 애썼던 저자는 결혼 10년 만에 남편과 이혼했다. 두 아들의 양육을 직접 책임지기로 하고 홀로서기를 시작할때 쯤 미국에서는 인종차별 운동과 여권신장운동의 결과가 차츰 나타나기 시작할 때였다. 저자는 그 물결을 타고 1981년 서른다섯이란 늦은 나이에 대학에 진학했다.


“당시 미국에는 저와 같이 여성 혼자서 돈 없이 아이를 키우면서 공부하는 여성들을 보호해 주고 학업을 이어갈 수 있게 도와주는 훌륭한 여성운동가들이 많았어요. 그들이 학교를 졸업할 때까지 곁에서 경제적인 해결책과 공부할 수 있는 방법을 알려주고 길을 열어줬죠. 그들이 없었더라면 그 어려운 여정을 포기했을 거예요.”


저자는 끊임없는 노력으로 1987년, 41세의 나이에 미네소타주립대학을 졸업했다. 한 마디로 인간승리였다.


“지난 시간을 돌이켜 보면 대학에 들어가 공부할 때 5년 동안 아이들을 키우면서 일과 동시에 공부하던 시절이 가장 활기차게 꿈을 펼치며 살아왔던 시기였던 것 같아요. 영어도 서툴고 시험도 어렵고 논문도 써야 했지만 무거운 책 보따리를 들고 종횡무진 넓은 대학을 뛰어다닐 때가 가장 희망찼고요.”

 


미국 주류사회에 우뚝 서다 


이후 저자는 아시아인으로는 최초로 미네소타주립대학 리젠트 이사회 평의원을 역임했다. 또 미네소타 주 태평양 아시안계 자문위원 회장, 미네소타 세계무역센터, 인력 투자, 전국여성비즈니스협회 등에서 이사로도 활동했다. 미네소타연합교회 이사회 재단이사 및 탈북민 중서부연합회의 회장 등 미국 지역사회에서 다양한 직책도 수행했다. 또한 미니애폴리스 세인트폴 비즈니스 저널(Minneapolis St. Paul BusinessJournal)의 ‘Top 25 Women to Watch’로 선정되는 등 이제는 미국 주류 사회의 영향력 있는 여성으로서 소수민족과 약자를 위해 의미 있는 행보를 보이고 있다.


내 삶의 활력소 신앙생활


“지금 내 삶의 활력소는 주님께 기도하며 열심히 신앙생활을 하는 것입니다. 조금만 일에도 감사하다 보면 모든 일에 기적처럼 힘이 나는 것 같아요.”


저자는 ‘이 책을 끝낼 때쯤이면 아주 오래전 돌아가신 내 아버지를 용서하고 사랑하게 되겠지요’ ‘아버지 사랑합니다’ ‘이젠 편히 쉬세요’ 라며 마음 속 깊은 곳의 설움을 내려놓는다. 


현재 저자는 미국에서 토목 엔지니어링 컨설턴트 MN BestInc.회사를 경영하고 있다. 이 회사는 85% 이상 유색인종 직원을 고용하고 있다. 저자의 두 아들도 여기서 일한다.  매일 아침 미네소타 주 지방 뉴스부터 시작해서 세계의 정치와 사회이슈들을 다루는 라디오를 들으면서 하루를 시작한다는 저자는, 5분 거리에 사는 아들과 손자, 며느리를 불러서 한국음식을 즐길 때가 가장 행복하다고 했다.


아무리 발버둥 쳐도 결코 놓을 수 없었던 가족에 대한 그리움과 뿌리 깊은 상처들을 이젠 그것들을 모두 내려놓으려 이책을 썼다는 저자는, 한국의 슬픈 근대사를 승리의 역사로 바꿨다. 저자는 지난 2014년부터는 탈북민에 관심을 두기 시작했다.


“그들은 세계에서 가장 악랄한 인권유린의 사각지대 북한에서 탈출한 우리 민족이자 대한민국 국민이며 우리의 형제들입니다. 내가 아는 한 여성은 탈북민이란 이름으로 15년간이나 중국에 숨어 살면서 사람대접도 못 받고 떠돌아다녔다고 해요.”


그들을 생각하면서 탈북민을 돕는 비영리단체를 만들었다는 저자는 지난 2015년과 2016년 두 번에 걸쳐 미네소타 주에서 탈북민을 위한 심포지엄을 열었다. 저자는 현재 미국사회가 탈북민들을 어떻게 도울 수 있을지를 의논하고 그들의 실정을 어떻게 알릴 것인가를 고심하고 있다고 했다. 미네소타 주에서 탈북여학생을 위한 단기간 영어연수도 준비 중이라고 했다. 일흔이 넘었지만 할 일이 너무 많아서 더 행복하다는 저자는, 할 일이 많은 것은 하나님이 주신 큰 축복이라고 했다.


무엇이 인간을 인간으로서 살아가게 하는가. 생존의 의지는, 결국 삶의 이유와 목적을 찾아낸다. ‘그녀의 이름은 마리아’ 이 책은 저자가 살아온 과정을 담은 실화다. 책을 읽는 독자누구라도 이것이 실화가 아니기를 바라면서 저자의 위대한 행보와 정신에 큰 박수와 찬사를 보낼 것이라 확신한다.

 

MeCONOMY magazine August 20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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