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당과 지옥을 오가며 피를 말리던 제20대 대한민국 대통령 선거는 국민의힘 윤석열 후보의 승리로 끝났다. 민주당 이재명 후보와의 표수(票數) 차이는 24만 7천 77표, 득표율 차이는 0.73% 포인트로 역대 대통령 선거를 통틀어 가장 낮았다. 한 표라도 더 얻으면 이기는 선거에서 0.73% 포인트 차이는 어떻게 이해 하느냐에 따라 작지 않을 수도 있고, 간발(間髮)일 수 있다.
그래서일까? 선거가 끝나고 보름이 더 지났건만, 우리 사회는 아직 선거가 끝나지 않은 듯하다. 대통령 집무실 이전 등을 놓고 신·구권력이 맞서고, 170석이 넘는 아직 여당인 민주당은 승리자에게 ‘0.73% 포인트’라는 딱지를 씌워 사사건건 괴롭히려 들고 있다. 하지만 선거는 끝났다. 국민은 윤석열 당선인을 이 나라의 대통령으로 뽑아 준 것이 확실하고, 당선인은 오는 5월 10일 0시를 기해 우리나라의 국가원수, 국군통수권자인 대통령이 된다. 그렇다면, 그 무엇이 검사 출신의 정치 초년생을 이처럼 근소한 차이로 당선자로 만들었을까? 당선자의 운명을 바꾼 0.73% 포인트의 시대정신과 그 의미를 당선인이 정치인으로서 성장한 과정을 통해 알아보고자 한다.
대선주자 가능성 0%의 강골 검사
윤석열 대통령 당선인(이하 당선인)이 강골 검사에서 대통령으로 당선되기까지는 몇 년이 걸리지 않았다. 2017년 5월, 문재인 대통령의 파격적인 발탁인사로 서울중앙지검장이 됐을 때부터 적용한다 해도 불과 몇 년 만이다. 말인 즉, 문재인 정부의 5년이 결국은 정치적 아웃라이어인 당선자를 정치인으로서 성장시킨 과정이었다. 당선자가 서울중앙지검장이 됐을 당시, 우리가 당선인에 대해 알고 있는 거라고는 “저는 사람에 충성하지 않습니다”라는 말을 했다는 정도였다.
그 말은 2013년 국정 감사 때 나왔다. 당시 여주지청장이었던 당선자는 “국정원 대선개입 의혹 사건 수사에 윗선 압력이 있었다”고 폭로하면서 “(윗선의) 지시 자체가 위법한데 그것을 어떻게 따르겠느냐, 저는 사람에 충성하지 않기 때문에 제가 오늘도 이런 말씀을 드리는 겁니다”라고 했다. 하지만 그런 말을 했다고, 당시 당선인이 대선 후보가 되리라고 생각했다면 꿈에라도 생각한 사람이 있었다면 정말 어림없는 일이었다. 누구도 대선후보군의 한 사람으로 당선인을 언급하지도 않았고 다루지도 않았다. 서울중앙지검장을 끝낼 때 까지도 그러했고, 2019년 7월, 제43대 검찰총장으로 취임했을 때도 마찬가지였다.
그런데 그해 9월쯤 검찰총장으로서 조국 법무부 장관 내정자에 대한 수사에 착수하면서부터 여권의 집중적인 탄압이 시작됐다. 이와 동시에 여권의 조국 구하기, 이른바 조국 사태가 일어났다. 서초동에서는 조국을 수호하자는 시위, 광화문에서는 조국을 구속하라는 시위가 일어나 나라가 반쪽으로 갈렸다. 나중에 여론을 보면, 나라가 반으로 나뉜 건 아니었다. 조국 수호 세력이 소수였다. 이 과정을 거치면서 문재인 정부 진영에 속했던 김경률 참여연대집행위원장, 진중권 전 동양대 교수, 권경애, 신평 변호사 등 상당수의 친문 진영 인사들이 ‘친문은 국민의 눈높이에 맞지 않는다’고 이탈했다. 이때가 당선인이 정치인으로서 대중에게 알려지기 시작한 시점이었다.
그렇다손 쳐도 당시 당선인의 이름은 한국 갤럽조사에 등장 하지 않았다. 한국 갤럽조사는 차기 정치지도자의 이름을 대고 ‘누가 적합하다’고 생각하느냐?고 묻는 게 아니라, 여론 조사에 응한 본인이 차기 정치지도자의 이름을 대는 방식이었다. 그러니까, 갤럽 여론조사 결과에 이름이 올라오려면 적어도 1%의 사람들이 당선인의 이름을 대야 가능한 일이었는데 당선인의 이름은 대선주자로서 등장하지 않고 있었다. 물론 1% 이하 사람들이 당선인을 거명했을 수는 있지만, 그 때까지 당선자의 지명도는 적어도 1%가 되지 않았다는 이야기다.
「추·윤」 갈등이 키운 윤석열 현상의 등장
조국 수사가 끝나고 나서 2020년 1월, 추미애 신임 법무부 장관이 임명됐다. 추 장관은 곧바로 검찰 인사에 착수했다. 당시 검찰총장이었던 당선인은 이른바 살아있는 권력을 수사하고 있었다. 이를테면, 울산시장 선거공작 사건, 조국 전 법무부장관 유재수 감찰 무마 사건, 탈원전 수사, 월성1호기 경제성 조작 의혹 사건, 조국 사건 등등이었는데, 추 장관은 그런 수사팀을 전부 해체해 버렸다.
이때부터 국민은 추 장관의 인사가 “살아있는 권력에 대해서 수사하지 못하게 하려는 탄 압”이라고 이해하기 시작했다. 이때 당선인은 한국갤럽 대권 주자 조사에서 1%로 이름을 올렸다. 당시 1%의 지지율은 ‘검찰총장이라는 사람이 살아있는 권력에 대한 수사를 권력에 굴하지 않고 꼿꼿하게 하고 있다’는 평가일 뿐, 대선 주자 후보자라는 의미가 아닐 수가 있었다. 그냥 수사하도록 내버려 두었다면 그런 지지율은 나오지 않았을 것이다. 그런데 추미애 장관이 그것을 막았고, 당선인이 거기에 맞서 싸우니까 일종의 반사이익으로 1%의 지지율이 나온 것이라고 할 수 있었다.
추 장관은 거의 1년 동안 3차례에 걸쳐 수사지휘권을 발동했다. 직무 정지 청구에다 징계 청구 등 온갖 종류의 탄압을 검찰총장에게 가했다. 당선인은 당시 “이게 식물 검찰총장 아닙니까?”라고 항변했다. 검찰총장에게는 인사권은 없다. 검찰청법에 따라 법무부 장관은 검찰총장과 협의해서 검찰 인사를 하게 되어 있었다. 그러나 추 장관은 이를 무시하고 당선인을 배제했다.이런 과정을 거치는 동안 추 장관이 취임한 그해 1월 갤럽의 당선인 지지율 1%가 12월 말 13%로 무렵 13배로 껑충 뛰어올랐다. 이때부터 당선인은 야권 대선주자 1위로 떠올랐다. 이런 과정을 보면 당선인을 대선주자로 만들어 준 것은 민주당이라는 “Made by 민주당”이라는 소리가 나올 만도 했다.
당선인이 식물 검찰총장으로 버티고 있을 무렵인 3월, 민주당 사람들이 검찰을 이대로 둘 수 없다며 검수완박(검찰수 사권완전박탈)을 추진했다. 그러자 당선인이 “나 때문에 검수완박을 하겠다면 내가 사퇴하겠다”고 하면서 그것을 명분으로 3월 4일 검찰총장직을 내려놓았다. 그리고 몇 달의 정치적 모색 기간을 거쳐 6월에 정치선언을 한 것과 그 이후의 이야기는 우리가 익히 들어온 바이다. 정치에 입문한 지 8개월이란 최단기간, 그것도 거의 혼자 힘으로 당선인은 정당에 들어와 온갖 우여곡절을 거친 끝에, 검사에서 대통령으로 당선되는 전례 없는 기록을 남겼다.
’윤석열 현상‘의 본질
그렇다면 검사 출신을 대통령으로 만든 ’윤석열 현상‘의 본질은 무엇일까? 그것은 “공정과 상식, 그리고 정의를 사회의 절대적 가치 기준으로 삼고, 살아있는 권력이든 죽은 권력이든 검사로서의 직분을 다하고, 다해 왔다”고 당당하게 말할 수 있는 용기와 자신감이 아니었을까?
당선인은 국민의힘 대선후보로 지명된 날 연설에서 “이 정권은 저의 경선 승리를 매우 두려 워하고, 뼈 아파할 것”이라면서, 자신을 “조국의 위선, 추미애의 오만을 무너뜨린 공정의 상징”이라고 했다. 또한, 자신이 경선에서 승리한 것은 “정치권 눈치 안 보고, 공정한 기준으로 사회 구석구석 만연한 특권과 반칙을 바로잡으라는 명령”이라며 “대장동 게이트에서 보듯 거대한 부패 카르텔을 뿌리 뽑고, 기성 정치권을 개혁하라는 것”이라고 밝혔다. 결국, 윤석열 현상은 공정, 상식, 정의 법치주의를 되돌려 놓겠다는 검사를 대통령으로 만들어 사회를 바로잡아 보겠다는 국민의 열망이었다.
그러함에도 불구하고 최근 여권은 ‘검수완박’을 다시 추진하겠다고 했다. 검수완박은 당선인이 검찰총장직을 내려놓게 하는 명분이었고, 정치에 입문하게 만든 계기였다. ‘추·윤’ 갈등과 함께 당선인을 대선주자가 되게 만든 요인이었다. 여기에다가 법무부 장관은 수사지휘권을 유지해야 한다고 하고 있고, 문재인 대통령이 선도하는 신·구 권력의 충돌까지 불거지는 등 과거의 레퍼토리가 등장하고 있다. 이는 당선인을 대선 후보로 만든 ‘윤석열 현상’에 대한 교훈을 아직도 실감하지 못하고 있다는 반증이다.
당선인을 대통령으로 인정할 수 없다는 대선 불복 심리도 엿보인다. 만약 지금처럼 ‘윤석열 현상’이 만들어질 때까지의 과정, 사고방식, 그리고 집단 최면에서 벗어나지 못한다면 '윤석열 현상’은 앞으로 계속될 가능성이 있다. 가까이는 6월 1일 지방선거에서 윤석열 현상이 다시 표출되면, 한 표가 많아도 이기는 선거전에서 또다시 누군가는 대선에서처럼 아주 근소하게 몇 % 포인트 몇 표수 차이로 질 수도 있을 것이다.
청와대 개방과 대통령 집무실 이전은 당선인의 공약 1호
당선인이 청와대를 국민에게 돌려주고, 대통령 집무실을 용산 국방부 청사로 이전하겠다는 것은 당선인의 공약 1호이다. 대통령 집무실 이전은 하드웨어뿐 아니라, 기존의 청와대 운영방식을 실무 중심의 콘텐츠로 만드는 정치혁명이라고 할만한데, 여야의 논란거리로 이어지고 있는 건 이상한 일이다.
문재인 대통령은 최근, 오전에 용산 이전에 협조할 듯 했던 태도를 몇 시간 만에 바꿨다. 문 대통령은 국무회의에서 논의될 이전비용 상정에 제동을 걸면서 “현 정부가 임기가 얼마 남지 않았지만, 헌법이 대통령이 부여한 국가원수이자 행정 수반, 군 통수권자로서의 책무를 다하는 걸 마지막 사명으로 여기겠다. 국정에선 작은 공백도 있을 수 없고 특히 국가 안보, 국민경제, 안전은 한순간도 빈틈이 없어야 한다”고 사실상 용산 이전 불가방침을 본인의 육성으로 못을 박았다.
이에 대해 당선인 측 대변인은 “국민의 관점에서 정말 일 잘하는 유능한 정부가 되고 싶다. 난관을 이유로 꼭 해야 할 개혁을 우회하거나 미래의 국민부담으로 남겨두지 않겠다”면서 사실상 대통령과 여권의 이전 반대에 정면으로 반박하고 나섬으로써 국민은 신구 권력 갈등이 극대화하는 과정을 보게 되었다. 국회 국방위원회 소속의 하태경 의원은 “청와대는 억지 안보 공백 주장으로 국민에게 불안감을 던지지 말라. 대통령 집무실을 국방부로 이전한다 해도 군작전 시스템과 군 지휘부는 현재 그 자리를 유지하면서 임무를 수행할 것”이라고 말해, 안보 공백 우려는 일종의 선전 선동 같은 것이라고 했다.
'전직 국방부 장관, 합참의장, 참모총장 등 대장 64명을 포함해 육·해· 공·해병대 예비역 장성 1,000여 명'도 성명을 통해 “이전 과정에서 일시적인 불편함은 있을 수 있지만 안보 공백은 없다”면서, “안보를 도외시하던 이번 정부가 대통령 집무실 이전 과정에서 안보 공백이 없음에도 안보 공백을 운운하는 것은 어불성설"이라며 “국민과 군을 분열시키는 행위를 중단할 것”을 촉구했다. 이들 가운데 일부 인사들은 별도로 낸 성명문에서 “문재인 정부와 여당에서 대통령 집무실 이전을 반대로 왜곡하여 국민을 갈라치기하고 있다”고 주장했다.
청와대 개방은 정치 혁명적 발상,
질문에 따라 여론의 답은 달라질 것
그렇다면 청와대를 국민에게 돌려주고 제왕적 대통령제를 혁파하겠다는 정치혁명과 다름없는 당선자의 공약 사항을 놓고 국민의 여론이 갈리는 이유가 뭘까? 국민을 반으로 나눠 놓은 0.73% 포인트 차이의 대선 결과일까? 당선인이 취임 하기 전까지 용산 이전을 완료하기에는 시간이 촉박하다는 우려도 있을 수 있을 것이다. 이런저런 것을 다 고려해도 지금은 어떤 이슈를 던지든 여론조사 결과는 거의 1:1로 나올 가능성이 크다.
그런데 한 여론조사 기관의 결과는 전혀 달랐다. “대통령 집무실을 용산으로 이전하는 걸 어떻게 생각하느냐?”는 질문에 반대 58.1%, 찬성 33.1%였다. 대선 선거에서 갈라진 유권자 비율에 따른 1;1이 아니라, 반대와 찬성 비율이 6:3 이었다. 어째서 그랬을까? 대통령 집무실 용산 이전은 두 가지 측면이 있다. 우선, 청와대를 국민에게 개방한다는 것이 하나이고, 두 번째로 대통령 집무실이 광화문이 아니라 용산 국방부 청사라는 측면이다. 이 여론조사 기관은 두 번째 측면에 대해서만 질문을 했다. 만약 질문을 그렇게 하지 않고 이렇게 했다면 어떤 결과가 나왔을까?
“윤석열 당선인이 5월 10일 취임하는 날, 청와대 개 방하는 걸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찬성이신가요, 아니면 반대입니까? ”라고 물었다면, 여러분은 찬반 어느 쪽에 설 것인가? 나는 찬성 쪽에 설 것이다. 아마도 찬반이 적어도 1:1은 되지 않았을까. 그러니까 질문을 어떻게 하느냐에 따라 결과가 달라질 수 있다. 청와대를 개방하고, 용산 집무실로 가는 것, 즉 두 가지를 합쳐 질문해도 국민 대다수는 1:1이 될 거라고 나는 생각한다.
그런데 앞뒤 거두절미하고 무턱대고 ‘대통령 집무실의 용산 이전에 대한 찬반’을 물어보면, 찬성할 이유가 굳이 없잖은가. 만약 전혀 엉뚱하게 “윤석열 당선인이 공약을 바꿔 청와대를 국민에게 개방하지 않고 그냥 청와대에서 직무를 보게 하는 건 어떨까요?”라고 물으면 어떤 결과가 나올지 궁금하다. 여론조사는 질문을 어떻게 하느냐에 따라 결과가 크게 달라질 수가 있다.
청와대 개방은 당선인이 첫 번째 공약을 이행하는 것이다. 갑자기 결정하고, 너무 서두르는게 아니냐는 의견도 있을 수 있지만, 용산 이전이 서둘러서 불가능한 일이었다면 당선인이 기자회견을 하면서 설명하지 않았을 것이다. 당선인은 용산 이전을 결정하면서 50명 넘은 장성(將星)들을 만나 의견을 들었다고 한다. 지금 용산 이전 반대는 청와대나 민주당이 당선인의 공약에 반대하는 것으로, 마치 선거기간에 상대 후보의 공약을 비난하는 것처럼 들린다. 용산 이전 문제를 지방선거의 이슈로 삼으려고 그러는 건지 모르겠지만 선거가 끝났다는데도, 당선인의 공약 실천 사항을 -다른 의견을 제시할 수는 있지만- 막고 나설 필요는 없다고 본다.
당선인의 공약사항에 대해 선거를 통해 국민의 검증이 -처음에는 광화문 시대였긴 하지만-끝났다고 봐야 하지 않을까. 국민은 선거를 통해 ‘당선자가 알아서 해라’고 맡겼다. 국민은 청와대 개방이나 이전에 대해서만 심판한 건 아니지만, 청와대 개방(해체)도 찬성 해 줬다고 봐야 한다. 그런 시각에서 보면, 지금 대통령 집무실 이전을 놓고 청와대나 민주당이 과도하게 반대 캠페인을 벌이고 있는 듯하다.
새 대통령이 일할 수 있도록 협조하는 게 현명한 처사
“우리가 0.73% 포인트 졌으니, 이건 우리가 별로 진 게 아니야” 라고 생각할 수 있다. 하지만 선거는 한 표를 져도 진 것이다. 문재인 대통령은 5년 전, 41.09%로 대통령이 됐다. 그 당시 홍준표 후보는 24.04%, 안철수 후보는 21.42%를 얻어 두 사람의 득표율을 합치면 45.46%로 문 대통령을 앞섰다. 절대 과반수가 아니었음에도 승리한 문재인 정부지만, 지난 5년 간 내로남불을 일삼고 전권을 휘둘렀다. “Winner takes all. 승자독식” 승리한 사람이 모든 걸 가져가는 게 민주주의 선거제도다. 선거는 끝났고, 당선인은 선거에서 약속한 여러 가지 공약사항을 선거가 끝난 지금 실천하 려 하고 있다. 그런 당선인의 여러 공약을 하나하나 꼬투리를 잡아 반대한다고 해서 선거국면으로 다시 돌아가지는 않는다.
김종인 전 국민의힘 총괄선대본부 위원장은 “어차피 새 대통령이 탄생했으니, 물러나는 대통령이 새 대통령이 일할 수 있는 여건을 만들어 주는데 적극적으로 협조하는게 현명하지 않겠는가?”라고 말했다. 정권 교체와 정권 재창출을 무수히 보아 온 그가 현명하게 처신하는 게 좋을 것이라고 하는 것은 미래 권력을 이기는 현재 권력이 없기 때문일 것이다. 청와대나 여권이 당선자의 공약사항을 실천하지 못하도록 반대는 하고 있지만, 앞으로 40여 일 뒤 당선자가 취임하면, 상황은 달라져 지금의 반대가 현명하지 않았던 것이었음을 깨닫게 되는 건 아닐까.
국민과 통합은 정치적 레토릭,
이상과 현실은 다르다
당선인에게 있어서 국민은 역대 어느 대통령보다도 우선했다. 국회도서관 대강당에서 가진 당선 인사에서 당선인은 쉰 목소리임을 양해하고, 국민이란 단어를 섞은 문장을 앞부분에 집중적으로 배치했다. 국민이란 말을 쓰지 않는 정치지도자가 어디 있으랴만, 당선인에게 있어서 국민은 다른 의미로 새겨진 듯했다. “정치를 시작한 이후 여러 어려움이 있을 때마다 국민이 왜 자신을 불러냈는지 무엇이 국민을 위한 것인지를 생각했다”고 했으며 “앞으로도 자신은 오직 국민만 믿고 오직 국민의 뜻에만 따르겠다”고 다짐했다. 아울러 “공직자가 권력에 굴복하면 정의가 죽고 힘없는 국민은 더욱 위태로워진다”면서 “자유민주주의를 위협하는 어떠한 세력과 이념도 멀리하고 국민의 상식에 기반하여 국정을 운영하겠다”고 약속했다.
그래서인지 대통령직인수위원회 회의를 주재하는 당선인의 뒤에 ‘겸손하게 국민의 뜻을 받들겠습니다’라는 액자 현수막이 걸려 있다. 실제로 당선 인사 이후 당선인은 거의 모든 연설이나 기자회견에서 ‘국민’과 ‘통합’을 빼놓지 않고 있다. 일생을 공무원으로서 살다가 이번 대선을 0.73% 포인트 차이로 이기면서 ‘국민’이란 의미와 ‘통합’의 무게가 새삼 절절했을 듯하다. 하지만 어느 정치인들이나 특히 독재자들이 많이 쓰고 있는 ‘국민’이라든가 ‘통합’이란 수사는 냉혹한 현실에서 보면 적당히 말하는 편이 더 나을지도 모른다. 당선인을 찍은 국민도 국민이고 찍지 않은 국민도 국민이라고 하지만, 사실 이들 두 쪽으로 갈라진 국민을 통합하기가 어려운 게 현실이기 때문이다. 이상과 현실이 다른 것처럼, 국민과 통합은 전혀 이질적인 개념이다.
‘국민’은 매사에 일일이 심판자가 될 수 없고 매사에 가이드 라인을 제시하지 않는다. "‘어쩌다’ 대통령 된 윤석열, 잃을 게 없다”는 제목의 칼럼에서 김대중 칼럼리스트는 ”법과 제도가 허용하는 한, 소신대로 부담 없이 ‘윤석열다운 정치’를 하고 물러가면 된다”고 조언했다. 그는 “국민’은 하나가 아닐 뿐 아니라 언제나 당신의 우군도 아니다. 자꾸 국민을 들먹이고 물어보면 궁극적으로 자신감이 없음을 드러낸다는 것이다. 국민은 ‘우리가 당신을 뽑아줬으니 이제 당신이 알아서 하라. 성적표는 5년 후에 받아라고 한다” 했다.
그는 또, “민주주의 지도자의 또 다른 숙명이 시대적 사명을 터득하는 일”이라고 하면서 “나라의 에너지 정책, 부동산 정책, 기업의 자율, 대북·대중 정책과 동맹 정책을 총괄하는 외교·안보 노선 등을 재설정해야 하는데, 이것은 대한민국의 정체성과 자유·민주적 신념을 저해해온 각종 사회 권력을 정리하는데서 부터 시작해야 한다. 민노총·전교조·참여연대 등 이른바 사회 권력 이동이 수반하지 않은 정치권력만의 독자적 장악으로는 명실상부한 정권 교체가 이뤄졌다고 할 수 없다. 이런 변화가 결단력 있게 수반되지 않으면 좌파 단체들은 앞으로 5년간 윤 정부를 사사건건 괴롭히게 될 것이고, 5년 후에 정권을 다시 내주게 되는 결과를 초래할 것”이라고 경고했다.
작은 차이가 큰 변화를 만든다
지금부터 59년 전인 1963년 10월 15일 윤보선과 대결한 박정희 후보는 군정(軍政) 기간의 실적을 국민이 알아줄 것이라고 믿었다. 그러나 10월 16일 새벽 3시, 윤보선 후보는 서울, 경기, 충청, 강원도에서 크게 앞섰고, 박정희는 전라도, 경상도에서 몰표를 받았지만 뒤지기 시작했다. 표차가 23만 표로 벌어졌다. 군사혁명 주체 세력 출신인 공화당 간부들은 새파랗게 질려있었다. 16일 아침 박정희는 이후락 비서실장과 주치의와 식사를 하면서 말했다.
“공명선거란 집권자가 떨어져도 좋다는 결심이 있어야 가능해. 나는 마음의 준비가 되어 있어.”
10월 16일 오전부터 그동안 개표가 늦었던 전라도, 경상도의 투표함이 열리면서 박정희의 우세로 역전되기 시작했다. 10 월 17일 오후 3시 개표가 끝났을 때 박정희는 470만 2640표, 윤보선은 454만 6614표, 그 차는 15만 6026표였다. 천당과 지옥을 오가면서 선거의 무서움을 새겼을 것”이라고 한 언론인이 월간지에 썼다. 2022년 3월 9일 밤, 당선인도 그날 밤 처럼 천당과 지옥을 오갔을 것이다. 투표자의 절반에 가까운 48.56%인 16,394,815명이 당선인을 지지했다. 상대 후보와의 득표율 차이가 역대 최소인 0.73% 포인트라며, 두 후보가 모두 진 선거라는 말도 있었지만, 선거란 어차피 한 표를 이겨도 이기는 것, 당선인의 선거구호였던 정권 교체를 바라는 유권자가 한 사람이라도 더 많았으니 승리할 수 있었다.
당선인이 대통령이 되면 우리나라 경제가 갑자기 성장하고 일자리가 철철 넘칠 거라면서 표를 찍은 사람은 그다지 많지 않았을 것이다. “자유민주주의 시장경제란, 대한민국의 정체성을 확립하고, 우리가 알고 있는 법치, 공정, 상식을 되찾아 지난 정권의 잘못을, 통합을 이유로 눈 감지 말고, 법 절차에 따라 문책하라”는 함의를 담아 찍었을 것이다. 선거는 끝났고, 정권 교체는 성공했다. 0.73% 포인트의 작은 차이지만, 아무리 차가운 돌도 5년을 앉아 있으면 따스해지는 법. ‘끈질기게 기다리고 통합하는 뚝심’과 ‘국민과의 소통 의지’를 가진 당선인이 앞으로 5년간, 우리나라의 완성이 아닌 새로운 성장을 이끌어 역사에 남는 지도자가 되어주기를 바라는 마음 간절하다. (이 기사는 M이코노미 매거진 4월호에 실린 기사입니다.)
MeCONOMY magazine April 202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