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이 니콜라스 마두로 베네수엘라 전 대통령을 마약범 혐의로 기소해 뉴욕 법정에 세운 가운데, 베네수엘라 정권 교체 이후 석유산업의 향방에 다시 이목이 쏠리고 있다.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이 노골적으로 ‘정권 압박 카드’를 꺼내 든 상황에서, 미국 석유기업들이 베네수엘라 석유산업에 재진출할 수 있을지 여부가 주목된다.
베네수엘라는 3030억 배럴(2026년 1월 기준)의 매장량을 보유해 사우디아라비아(2670억 배럴)와 이란(2090억 배럴)을 웃도는 세계 최대 석유 매장국으로 꼽힌다. 그러나 하루 원유 생산량은 70만 배럴(2022년 기준)에 그치며 전 세계 원유 생산의 1% 수준에 불과하다.
1970년대 석유산업 국유화 이후 생산성이 급락했고, 1999년 반미 정치인 우고 차베스 집권 뒤 본격화된 정치 개입과 투자 위축이 산업 전반을 짓눌렀다는 평가가 지배적이다.
이런 상황에서 로이터 통신은 지난 5일(현지시간) 델시 로드리게스 베네수엘라 부통령이 임시 대통령으로 취임하며 국가 비상사태를 선포했다고 보도했다. 로드리게스 대통령은 정부군과 민병대 총동원, 석유산업을 포함한 기간산업의 군사화를 골자로 한 관보를 즉각 게재했다. 이는 트럼프 대통령이 “베네수엘라가 처신을 잘못하면 2차 타격을 가할 것”이라고 경고한 직후 나온 조치다.
베네수엘라 정부 관보는 베네수엘라 전 영토에 ‘대외적 혼란 상태(Estado de Conmoción Exterior)’를 선포하고, 공공서비스 인프라와 석유산업, 국가 기간산업 전반을 군사 통제 하에 두겠다고 명시했다. 이에 따라 국영 석유기업 PDVSA를 포함한 에너지 인프라 전반에 대한 정부 통제가 한층 강화될 것으로 보인다. 업계에서는 로드리게스 체제에서도 미국 석유기업의 진출을 쉽게 허용하지는 않을 것이라는 전망이 우세하다.
◇해외 석유기업을 몰아낸 선택...차베스 집권이 분기점
양수영 전 한국석유공사 사장이 쓴 ‘세계에너지패권’은 베네수엘라 오리노코강 유역을 따라 동서로 길게 뻗은 오리노코 벨트(5만5000㎢)에 막대한 초중질유(Extra Heavy Oil)가 매장돼 있다고 소개한다.
초중질유는 API 비중 10도 이하로 점성이 높고 무거워 개발 난이도가 크다. 1930년대에 발견됐지만 상업 개발은 1990년대 들어 비가열식 생산기술이 확산되면서 본격화됐다. 최근에는 캐나다 오일샌드처럼 증기 열을 주입하는 CSS(Cyclic Steam Stimulation) 등 열회수 기술을 활용해 생산성을 끌어올리는 시도도 이어지고 있다.
베네수엘라 석유산업의 방향이 급격히 바뀐 시점은 1999년 우고 차베스 집권이다. 차베스는 ‘석유는 국민의 것’을 내세우며 비교적 개방적이던 석유정책을 전면 수정했다. 차베스 이전 베네수엘라는 형식상 국유 체제였지만, 실질적으로는 미국·유럽 석유기업들이 생산과 개발을 주도하는 혼합 모델에 가까웠다.
차베스는 이를 ‘주권 침해 구조’로 규정했고, 유가가 고공행진하던 2007년 오리노코 벨트 사업을 둘러싼 외국계 기업들에 대해 계약 재편과 통제 강화를 밀어붙였다. 이 과정에서 국영 석유기업 PDVSA의 자율성은 축소됐고, 석유 수익은 복지·빈곤층 지원에 직접 투입되는 구조로 재편됐다.
합작 사업에서 외국 기업의 지분은 제한됐으며, 운영권은 국가가 쥐는 방향으로 무게가 실렸다. 그 결과 엑손모빌·코노코필립스 등 일부 미국 기업은 오리노코 벨트 초중질유 개발에서 사실상 밀려났고, 일방적 계약 변경과 자산 몰수를 문제 삼아 국제중재에 나섰다.
당시 미국 엑손모빌은 베네수엘라로부터 받아야 할 돈이 200억 달러(29조원)로 추산된다고 주장했다. 코노코필립스도 베네수엘라에 대해 주장하는 채권을 합하면, 120억 달러(17조원)에 이른다고 주장했다. 이들 기업들은 수십억 달러 규모의 배상 판정을 받아냈지만, 실질 회수는 제한적이었다.
한편, 석유산업 국유화 노선은 정치적으로는 강한 지지를 끌어냈다. 석유 수익이 의료·교육·보조금으로 흘러들며 빈곤율이 단기간 개선됐다는 평가도 있지만, 산업 측면에서는 다른 후유증이 쌓였다. 외국 자본과 기술, 전문 인력이 이탈하면서 설비 노후화가 가속됐고, 투자 공백이 누적됐다.
특히 2003년 PDVSA 파업 당시 정부가 2만여 명 규모의 인력 정리에 나서면서 숙련 엔지니어와 경영진이 대거 빠져나갔다. 빈자리를 정치적 충성도가 높은 인사가 메우는 구조가 굳어지며 생산 효율이 떨어졌고, 베네수엘라 석유산업은 ‘정치 우선, 기술 후순위’의 틀에 갇혔다는 비판이 이어졌다.
◇트럼프 행정부의 압박...로드리게스 임시 대통령의 정치 행보에 촉각
트럼프 대통령은 6일 자신의 SNS인 트루스소셜에 “베네수엘라 정부가 3천만~5천만 배럴에 달하는 고품질 원유를 미국에 넘길 것”이라며 “원유는 시장가로 판매될 것이고, 미합중국 대통령인 내가 그 대금을 관리해서 베네수엘라와 미국 국민에 혜택이 되도록 사용할 것”이라고 적었다. 이어 “나는 이런 계획을 크리스 라이트 에너지부 장관에 즉각 실행하라고 지시했다”고도 했다.
또한, 뉴욕타임즈(NYT)는 7일 미국이 군사력을 동원해 베네수엘라와 연계된 러시아 국적 유조선을 아이슬란드와 영국 사이 북대서양에서 나포했다고 보도했다.
미군 유럽사령부(EUCOM) 역시 이날 SNS인 엑스(옛 트위터)에 “미 법무부와 국토안보부는 국방부와 협력해 벨라 1호를 미국 제재 위반으로 나포했다고 발표했다”고 전했다. 이어 “해당 선박은 미 해안경비대 먼로함이 추적을 시작한 뒤 북대서양에서 미 연방법원이 발부한 영장에 의해 나포됐다”고 했다.
이처럼 트럼프 행정부는 베네수엘라를 압박하며 ‘에너지 카드’를 흔들고 있다. 미국 입장에서는 베네수엘라 석유를 글로벌 공급망에 복귀시키는 것이 국제 유가 안정과 자국 정유업계에 모두 유리하다. 그러나 베네수엘라 정부로서는 석유산업 개방이 곧 체제 후퇴로 비칠 수 있다.
로드리게스 임시 대통령이 취임과 동시에 석유산업의 군사화를 선언한 것은, 차베스 시대 국유화 노선을 계승하겠다는 정치적 신호에 가깝다. 미국 기업의 재진출은 기술과 자본 측면에서는 매력적이지만, 정치적 정당성을 훼손할 수 있는 선택이기도 하다.
베네수엘라 석유산업은 다시 갈림길에 서 있다. 1999년 차베스의 국유화가 ‘주권 회복’이라는 이름으로 외국 기업을 내쫓았다면, 2026년 선택은 ‘산업 회복’을 위해 어디까지 문을 열 수 있느냐의 문제다. 미국 기업의 복귀 여부는 단순한 경제 판단이 아니라, 베네수엘라 정치의 정체성을 건 선택이 될 가능성이 커지며 세계의 이목이 집중되고 있다.







